고향에 바탕 둔 싸이트를 알고 나서 고향을 떠나기 전 이야기들을 생각 나는대로 얽어서 쓰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또 그 방면에 종사했기 때문에 아마 소중히 간직되었던 것 같습니다.학창시절이나 성장과정은 극히 사사로운 것이라서 의도적으로 피했습니다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이 글을 맺으면서 그 시절 낙수처럼 남는 이야기 몇토막 곁에 남깁니다.
(1)육씨네 예술가족:육정림씨와 육기술 남매는 많은 형제자매 중 특별난 예술감각으로 후진들에게 예술적 감각을 전수하려 했습니다. 육정림씨는 발레로 육기술씨는 피아노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갔는데 특히 육기술씨는 피아노로 째쯔를 연주한 한국초유의 피아니스트였을겁니다.라디오 방송에 "육기술의 째쯔피아노"라는 푸로그램이 있었으니까요.
(2)라쿰파르씨타 형제:라쿰파르씨타는 이름을 잊은 성악가의 별명입니다.어느 모임에서나 흥이 나면 모두가 그의 라쿰파르씨타 노래 듣기를 원했고 또 절창이었습니다.지금 생각하면 헤어스타일도 곱슬곱슬하게 되어 남미풍이었습니다.그에겐 동생 이 훤(필명)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에 남다르게 국악대본을 쓰고 있었습니다.당시에 유랑하던 많은 국악단들에서 대본청탁이 와서 여관에 쳐박혀? 대본 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가까이 하려 해도 틈을 내지 못해 있다가 서로의 길이 갈려 소식이 끊겼습니다.풍문에 나중에 서울로 올라 와 사양길에 들어 선 국악과 같이 시들어 갔다고 들었습니다.
(3)아마추어 사진작가협회:당시에 국전이 사진분야까지로 넓혀지면서 군산에도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이 많이 늘어 났습니다.군산사범학교 미술교사로 있던 홍건직선생이 비싼 미술재료를 구하지 못해 안타깝던 마음을 사진구도로 바꾸어 나가면서 사진전시회도 열고 특히 인물사진으로 군산유지들의 사진전시회가 열리게 되면서 관심을 보여 많은 이들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채원식, 김 일(피란 와 있다 상경),등이 두각을 보였고 고려제지 000 과장등 국전에 입선하는 등의 실력ㅇ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4)젊은 미술학도들의 활약:전쟁 후의 피폐된 인간성과 고뇌를 덜어 내는 것은 역시 예술의 길에 있었습니다. 군산에서 유망하던 미술계 후진으로 당시에 최예태,문복철,태건석,공준식,오응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최예태는 학생신분으로 있으면서 방학을 이용하거나 특별한 때를 골라 개인전시회를 가졌습니다.당시 물감(미술재료)이 비싸 수채화를 많이 그렸는데 독자적 경지를 이루어 가고 있다는 평을 들었으며 지금 한국화단의 원로로 존경받는 화가가 되어 있습니다.또 거듭되는 이야기가 됩니다만 미술재료를 구하기가 힘든다고 포기하지 않고 꼬라쥬 형식의 폐품이나 주위에 버려진 것들을 활용한 미술작품을 선보인 공준식,오응서등은 모두 피란 내려와 보육원에서 자란 학생들이었습니다.문복철,태건석등은 향리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5)청구목재 형제자매들: 맏형 고병조를 비롯한 고병관등 형제들은 아주 특별했습니다.어느 자리에서나 항상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당시 학생연맹등에도 관여하며 여동생은 약사가 되어 약국을 경영하면서 그림을 그렸고 형제중 한사람은 의사로 있으면서 사회활동에도 열심이었습니다.나중에 맏형인 고병조씨가 강 건너 장항에다 지사를 만들어 운영할 때 정의여고에 있던 나를 그 지방에 알려 도움이 되었던 것을 잊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