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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의 침입
14세 수, 15세 김심, 15세 김사원, 15세 김유, 16세 김진.
고려 최씨 무신정권 시대에
몽고족은 칭기스간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제국을 건설했다.
중국을 위협하더니 고려를 침략해 왔다.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대몽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몽고군과 화의가 맺어질 때까지 40년간 끈질기게 항전하였다.
특히 농민들과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큰 전과를 거두었다.
몽고는 전쟁이 오래 지속되자
무력으로 정복하기 어려움을 알고 화의 할 것을 요구해왔다.
고려 또한 장기간에 걸친 항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컸다.
고종 45년(1258)에 항전을 고수해 오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고와 화의를 맺게되었다.
화의가 성립되자 무신정권은 몰락하고
왕정이 회복되어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개경의 환도는 몽고에 항복하는 의미라 하여
배중손과 김통정이 이끄는 삼별초는 반대한다.
조정에 반대하는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가 여 몽 연합국과 싸운다.
진도가 함락되자 제주도로 옮겨 항전하였으나 실패 하였지만,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몽고는 이후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고려를 자기네 속국인양 간섭하였다.
여 원 연합국을 편성하여 일본 까지 정벌하려다가 실패했다.
14세 감찰어사 휘 수
옥구군(沃溝郡) 대부인 고씨 할머니 수 배(配)
옥구군 대부인(大夫人) 고씨 열부전을
어느 맥에서 누가 될까 옷깃을 여미고, 족보, 영광군지,
탐라지, 광산 김씨가 기타 문헌을 참조하여 삼가 기록하나이다.
대부인 성은 고씨며 그 세계(世系)는
「조청대부 여빈경」으로 사퇴한 휘 정의 따님이요,
국자감 대사성 한림원 시강학사 지제호」조 휘 통의 외손이며,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집현전태학사 판례부사」김 휘 수(須)의 처이며
「수문관 대제학 감춘추관사 상호군 판전이사사」를 역임한
문정공(태현)의 자친이다.
출가 전 친정에서는
삼가 공손하시고 심성이 곧으시고 유순하시어
모든 언행에 있어서 조언(造言)하거나 단정하지 못한 일이 없으셨다.
출가하신 후에 시부모님을 섬길 때나
자녀와 노비를 통솔하실 때나 원근친지간에
친화(親和)하며 어제든지 온 집안을 화락(和樂)하고
근엄하신 자태를 연중 변함이 없으셨다한다.
여기에서 그 숭고하신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참지정사」이신 부군(수)이 일찍
밀칙을 받들고 서해도(황해도) 금륵장에 감사차 나가셨다.
이때 젊은 사람이
부군(수)의 명이라고 사칭하며 목탄(숯)을 여러차 가지고 왔다.
이를 본 대부인이 말씀하시기를
그 어른께서 도의에 어긋난 것이면 일찍이
타인으로부터
터럭 끝이라 할지라도 탐을 내어 거두어들인 일이 없거늘,
하물며 특파된 감찰관의 신분으로 비리를 묵인하고 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필시 잘못된 계책이라 직감하시고
대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아니하시었다.
밤이 되자 청년은 목탄을 담장밖에 두고 가버렸다.
그 당시 권신인 김인준의 아들이
사악한 증오심을 품고 부군(수)을 중상하려고
그 애비 인준에게 찬언을 구함으로
인준이 부하를 시켜서 엿보게 하였다.
목탄은 그대로 야적된 채 방치한 상태로 놓아두니
이를 경비하는 자가 없으므로
이에 감복하여 더 이상 감히 추궁하지 못했다.
「감찰어사공 휘 수 장군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을 간략히 소개하여 본전의 맥을 같이 하고자 한다.」
원종 11년 경오(1270) 9월에 어사공이 영광부사로 재임 중
당시 반란군인 삼별초의 괴수 배중손, 김통정 등이
강화도로부터 진도를 거쳐 탐라(제주도)로 옮겨갔다고 하였다.
원종이 중신을 모아 물어본 즉 모든 신하들이
김수 장군이 아니면 양 괴수를 무찌를 수 없다고 하였다.
원종은 매우 기뻐하며 안무사 권저에게 명하여
관군 200명과 어사보검을 하사하시고
탐라국에 원정하여 수호함과 동시에 양
괴수를 참 하라는 어명을 받아 김장군은 배중손과 그의 선봉장인
이열 등 적장을 무찔러 평정하였다.
왕자가 그 공훈을 찬양하고
큰 연회를 베풀어 위로하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그 후 김통정과 배중손의 막하인 이문경이 명월포로 잠입하여
군영과 토성을 구축하여 횡포가 날로 심해였다.
이를 공격하여 누차 승리하고
고여상, 김유성과 합세하여 진격하니
괴수 김통정과 이문경의 말을 거꾸러 뜨리고
거의 생포하려는 찰나였다.
적군의 화살에 맞아 김장군께서 순절하시니
하늘이 명하여 일사 보국의 충절을 다한 것이다. (고려사 및 탐라지)
감찰어사공께서 순절하신 후 고씨 대부인께서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수륙 삼천리 먼 길을 걸어서 어사공을 찾아 나섰다.
때로는 달구지를 이용하고 노숙이나 인가의 사랑채 등에서 노독을 달래며
40여일을 걸쳐 개성에 당도하니
그 노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참담하시었다.
삼별초 난 때 어사공이 영광 군수로써 군사와 더불어
탐라로 출정하신 후 겨울이 되어 의복을 보내려 하였다.
동료자가 은자(銀子)를 증상하면서
생계에 보태 쓰도록 간절히 청하였으나
대부인께서는 끝내 사절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이 숭양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께서 전력을 다하시어 싸우다가
전사하시여 과부가 된 후에 힘들고 긴 60여 년간에
가족과 더불어 친척과 화목하시고, 노복과 비첩들을 자비로
어질게 사랑하시기를 공께서 생존 시처럼 똑같이 하셨다.
슬하에 두 아드님을 두었으나
모두 어리어 교양에 각별하신 신경을 집중하시었다.
그 교목(敎目)으로 청렴정직하고 언행이 예절과 법도에 어긋남이 없고
또한 남의 원성을
들은 일도 아니하며, 친구를 함부로 사귀지 말게 했으며
항상 옳은 방향으로만 교육을 하시어 출세시키셨다.
큰아들 태일은 관직이「신호위록사참군」이었으나 일찍이 돌아가시었다.
둘째 태현은 15세에
사마시에 수석으로, 다음해 문과에 뒤이어 전시에 급제하였다 10세에
부친을 사별한 고난을 겪고 한 시대를 걸어 관직이「첨의중찬」에 이르렀다.
태현을 낳을 때 대부인 고씨께서「샛별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원종 2년 신 유(1261)에 낳으셨다.
10세에 아버지를 사별하는 슬픔을 이기고 학문에 용맹 정진하여
어린 나이로 문학에 통달하였으며
풍채와 외모가 그림같이 수려하였다 한다.
위와 같이 엄격한 교목(敎目) 밑에 대부인 고씨 모친의 절의 60여년과
일편단심 강직 하게 걸어오신, 그의 아들답게 숙부이신 문숙공(주정)이
그의 학문의 모든 면이 뛰어남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우리 형님 감찰 어사공께서 비록 돌아가시기는 하였으나
우리 집 가문을 현양하고 빛내줄 사람은 나와 조카 태현이니
형님이 죽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기뻐하시며 칭송하였다.
대부인 고씨께서 위로가 되셨으나 국가와 가문을 위해서
더욱 훌륭하게 길러야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이 더했다.
오호라! 대부인은 명가의 영애로서 절부와 인자로운 어머니가 되어
그의 부군으로 하여금 청백리 열장부가 되게 하셨다.
그의 아들로 하여금 이름 있는 학자로서 명재상이 되게 하였다.
망(亡)한 금국(金國)의 대정 3년
병술에(1226) 2월 21일에 탄생하시고
원의 4년 정유(1327)년 7월 1일에 백하고도
이세의 천수를 누리시고 돌아가신
동월 12일 무신에 송림현 죽암서초에 안장하였다.
추고하건대 대부인이 훈서 하심에 듣는 이들 모두가 감탄하였으며
인간의 욕구 중에 수명만한 것이 없고,
하늘이 사람에게 보시함에
제일 애석히 여기는 것 또한 수명만한 것이 없는데,
대부인께서 고종명 하시도록 보고 듣는 것이 총명하시고 강녕하셨으므로
오법오복 중의 삼복(三福)을 겸비하셨다고 보거늘
필시 그 소치가 원이라 하시겠다.
명(銘)하노니,
쌍명당(고영중)과 아회(雅會)하는 시우(詩友: 조통)들과
세상 사람들은 신선이라 불렀다오,
뜻이 크고 집착 없는 고씨와 조씨는 그 인품의 현철함이 견줄만하네.
옥 같은 고운 나무에 가지가 나가고 감미롭고 맑은 샘 물줄기 가려
아! 대부인께서 집안밖에 경사로운 복이 한데 모였구나.
친정에서 부모님을 효성으로 모시고
그 용모 단아하고 성품 온화하여
경과 신으로 정성 다하여 구고를 받들었네.
낭군님 여의어도 그 절개 빙설같이 굳으니
그윽한 향기 난혜같이 방분하구나.
의(義)아닌 재물은 아예 버리시니
그 아름다운 덕행이 역사의 수에 빛나리라...
용감한 낭군님 한 몸 버려 나라에 받치고
절의에 돈독하여 고운님 여의어도 일평생을 사곡(邪曲)함이 없으셨네.
아비 잃을 아들을 곱게 키워 가르쳐
세 임금 재상으로 부조(父祖)의 이름을 날리셨네.
하늘이 길상을 내려 형수백(亨壽百)이요,
또 둘이 쉬고 명군이 가상하여 국록을 하사하셨네.
아! 대부인을 누가 따르랴
명(銘)을 새겨 광속에 묻노니 길이 멀리 빛나리.
(익제 이제현 선).
종보 91. 9.
김유(金流 15세)는
문숙공 주정의 아들로 문림랑 감찰어사 문화시중
수문전 태학사(종1품)를 지냈다.
15세 충숙공(忠肅公) 휘 심(深)(문숙공파)
공(公)의 휘는 심(深)이요, 자는 연수이니 고려 원종 4년(1262)에
문숙공과 상질현 대부인 장씨 맏아드님으로 태어나니 고려 후기의 명신이다.
공은 15세 때 문음(門蔭)으로 관직으로 보임되어
충렬왕 때에 볼모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낭장(郎將)이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 만호(萬戶)를 역임하였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계실 때 오기, 석천보 등이 왕의 총애를 믿고
왕의 부자를 이간함으로
홍자번과 조력해 삼군(三軍)을 통솔하여 왕궁을 포위하여
오사를 잡아 원 나라에 압송하고 뒤에
충렬왕을 따라 충선왕을 모시고 와서 찬성사가 되었다.
공의 딸이 원나라 황후가 되어 원으로부터
고려 도원수의 벼슬을 받았고
충숙왕 때 벼슬이 수첨의 정승 판 총부사에 이르고
여절 보안공신에서「수성수의 충량공신 화평부원군」으로
개봉되고 협보공신의 호를 더했다.
섭행 동정사인 장백상의 탐관농권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장백상을 잡아 가둔 후에 만호 홍수와 함께 성서(省書)를 대행하게 하였다.
충숙왕의 약사를 살펴보면 용모와 거동이 기위(奇徫)하고
매사에 진퇴와 주선함이 법도에 맞으니
왕이 크게 쓸 인재라 하고 기뻐하여
별장과 금위(禁衛)의 수령(守領)과 사순위 등을 임명하니
각산에 출정해 군령이 엄숙하니
주위에서 아버지 문숙공의 기풍이 있다했다.
왕의 총애를 받아 우군 만호
「홍위위 대장군 우부승지. 우승지 지신사 등」여러 요직을 거치면서
임금에게 주대함이 자상하여 칭찬을 받았고,
이어 우상시 상장군을 거쳐 도순사로 나아가 관리를 잘 살피고
백성을 잘 다스리니 그 지방이 평안하였다.
한때 행궁을 받들고 원에 머문 지 오래되고
신기가 미편하여 일행 신료와 함께 글을 올려 귀국을 빌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임조부에 하옥되었는데 아들 석견이
그의 누이 영정옹주와 더불어
대궐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정성을 다해 슬피 호소하니 왕이 이에 사면하였다.
공이 문무접전의 재량으로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고
70세에 글을 올리고 물러나려 하니
임금이 거듭 그의 뜻을 어기고
「벽상삼한중대광 화평부원군」에 제수하되
중요한 직무만 해직하니 공이 사은하고 집에 거처하였다.
한적으로 낙을 삼고 요양한지 4년
무인 10월 23일에 졸하시니 향년 77세였다.
왕이 부음을 듣고 탄식하여
유사에게 명하여 제기와 부물을 후히 보내 조상하였고
봉국산 동록에 장사 지내고 시호를 충숙이라 내리시었다.
공은 아드님 5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영걸하여 세상에 위명을 떨쳤다.
종보 95. 1. 1.
충숙공 휘 심 묘갈명
공의 사람됨이 위엄 엄중하니 바라보는 사람마다
경외하며 굴복하였다.
그러나 손님을 대접함에 차별을 두지 않았고 화락하였으며
집에 있을 때에는 잔일에도 개의치 않았고
산업에도 간섭하지 않아
집에 남은 재산이 없고,
벼슬에 있을 때에는 경제로 나의 임무로 삼아
조석으로 게으르지 않아 어려움을 한결같이 절조 있게 하니
이 또한 황신이 바른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들 석견은 지금 광정대부 삼우사사 상호군이다.
배(配)는 변한국부인 왕 씨이니 4남 1녀를 두었다.
장녀는 순정대부 판통예문사 오첨에 출가하고 차녀는
원나라에 들어가 황후가 되었다.
3녀는 종실 단양부원군 비 복안옹주가 되고,
사녀는 안동으로 출가하여 아들 승사가 대호군 간판내시원사이다.
뒤에 진강군 부인 노씨를 취하여 2남을 낳으니
맏 승한은 도재고 판관이요,
둘째는 승진이니 상호군 광산부원군이다.
영가군부인 김씨를 취하여 1남 1녀를 낳으니
아들 승노는 예조판서이며 딸은 출하가지 않았다.
아! 공의 아버지(문숙공 주정)는 장원급제로써
명상(名相)으로 만호에 제수되어 두 조정에서 중망이 있었다.
공 또한 만호가 되고 또 도원수가 되었으며 세 번 정승이 되어 훈계,
공신, 부원군에 장상까지 겸하여 벼슬은 신하로서 극에 이르렀다.
가문이 성대하고 자손이 경상(卿相)에 오르고
딸은 황후‧옹주‧택주를 두었으며
수는 길어 8순에 가까웠으니
그 사람이 사는 세상에 어찌 만족스럽지 않겠는가.
장사지내기 전날에 우사가(석견)
공의 살아온 전말을 자세히 갖추어 명을 청하는데
사양타 못하여 드디어 명(銘)하노니
태악이 신을 내려 우리 명공(明公:충숙공)을 낳았도다.
직을 책임지고 바른말로 몸을 돌보지 않았네.
지위 높아 정승이요, 위엄이 중해 대장이다.
정성 다해 나라를 받드니 태산 같은 공이로다.
77세에 늙은 덕 더 높으니 동국에 분양이요,
인망이 우레 같구나.
다들 정승에 오르고 딸은 황후가 되었네.
문벌이 번창하여 해동에 빛나도다.
공중에 선유하니 아득하여 하늘 기러기 같네.
조정과 백성이 흠탄하고 삼한의 벼슬을 다 했네.
백관이 모여 장사지내니 마지막 보내는 의식도 풍성하도다.
평원이 아름답고 봉우리 총총하네
.무덤이 편안하니 자손이 무궁하리.
글을 새겨 후생들에게 보이고 무덤에 들이니
천년 뒤에도 그 아름다움 더 넓으리라.
대제학, 상호군 윤선좌술, 통직랑 기거주지제교 이훤 서
15세 정경공 휘 사원(양간공파)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요, 초명은 구(埧) 또는 원구(元具)이다.
양간공(연)과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능성 조씨(裬城曺氏)의 맏아들로
고려 고종 5년(1257)에 통랑(通郞)으로 재임 시에 언(諺)을 국문하여
그 옥사를 공평하게 잘 다루어 대언(大諺)과 영(領)을 배웠다.
충렬왕 35년에 이훈, 채균 및 승지 권준과 함께
번양왕이 제정한 관제와 비판서를 가지고 원(元)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오니 권세를 부리던 세신(世臣)과 구관들이 물러났다.
공은 왕을 독대할 수 있는 총애를 받았으며
충선왕 3년 원나라에서
팔찰(八札)을 보내어 황후(皇后)를 책봉한 일을 반포했다.
환관 이대순이 원에 들어가 총애를 받아 용사하더니
구평궁으로 더불어 노비의 분쟁이 있었다.
황제(皇帝)가 제령을 내려 형부(刑部)에서 결정하라 하였다.
전서(典書) 김사원 등이 안건을 주청하여
구평궁 위씨(韋氏)에게 조비를 돌려주니,
대순이 노하여 팔찰들과 같이 황제의 명이라 사칭하며 공을 귀양보냈다.
충숙왕 4년 상의회의(商議會議) 도감사를 거쳐
동왕 6년(1318)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왕명으로 온천에 잡은 새를
태묘(太廟)에 올렸는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이를 바로 잡았다.
왕이 이르되 “내가 깊은 궁중에 있어
경이 아니면 이런 일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냐”고 찬양하였다.
충선왕 4년(1319)에 평양 윤이 되고 이어서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경(貞景)이니 충숙왕 기미년 정월에 돌아가셨다.
향년 63세였고 배(配)는 순정군부인(順政郡夫人) 순흥 안씨로
안문성공(安文成公:유, 호는:매헌)의 따님이다.
외아들을 두었는데 휘(諱)는 진(稹)이니 광정대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을 지내시니
시호는 장영공(章榮公)이다.
충숙왕후 2년 계유(癸酉)에 호적이 전하니
슬하에 다섯 아드님과 두 따님을 두어 모두 영달하였다.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광김을 명문화벌로 승화시키니
이는 양간공(良簡公), 정경공(貞景公),
장영공(章榮公) 삼대에 터전이 잡혀 음덕이 자손에 드리워져오고 있다 .
종보 95. 3. 1.
김사형(金士亨 15세)은
양간공의 연의 아들로 중서문화성 참지정사(종2품)을 지냈다.
16세 장영공 휘 진(양간공파)
고려 후기의 문신. 호는 척재. 아버지는 정경공 사원,
어머니는 순흥 안씨로 문성공 유(裕)의 따님이시다.
충렬왕34(1307) 문과 추장제술과에 급제하여
충혜왕3(1332)에 중현대부 성균제주로 통례문 부사를 겸하고
충숙왕2(1333)「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과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었다.
충혜왕 4년에 과거의 총책임자로 인재를 가장 많이 뽑았다.
1333년의 호적이 전해오며 시호는 장영공이다.
묘는 개풍군 홍교면 조문리에 있었으나 실전되었다가
순조29(1828)에 후손 성은과 수등이 다시 찾아 수호하였다.
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지 춘추관사 상호군시 장영공 휘 진 묘갈문
공의 휘는 진이요,
묘는 충덕부 동부 망포리 제일동 응봉 아래 양마교위 자좌원에 있다고
구보에 기재되었으나 전하지 않고 있다.
정조(正祖) 신해년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그의 선대 분묘를 찾다가
망포리에서 구 묘비 갈명(碣銘)을 찾았는데 이끼는 끼었으나
그 갈문(碣文)은 식별할 수가 있었다.
갈문에 이르되 고려「광정대부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 지 춘추관사
상호군 시 장영 김공 휘 진지묘」라 기록되어 있었다.
그 사람이 우리 선대의 묘인 줄 알고
우리 종중에 와 알려줌으로
종중에서 그 비의 도형과 글자를 탑본하여 왔다.
그러나 비가 상고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요,
족보가 증거 될 수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전한지 오래 되었는지라
일이 또한 큰지라 쉽게 결정을 하지 못하였다.
미루어 온지 40년이나 되었다.
순조 무자(1829)에 종인이 깨우쳐 감동시키는 이가 있으므로
종중의 의견 또한 그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다.
다시 가서 살펴보니
그 비는 그 사이 암장한 사람들이 쪼는 바가 되었으나
묘는 여전하니 무엇을 다시 의심하리요.
이에 모든 종중이 다시 수축할 의논을 세우고 말하되
“추만보의 처가 아니었던들
공자로 오부가의 장사 지낸 일을 알지 못하였을 것이요.
선령을 봉치한 묘인 줄 알고
주자도 관에 고하고 다시 곡을 하였거늘
이제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말이 저 같이 미덥고
산 이름과 땅이름이 합치되어
비문은 비록 쪼았다 할지라도 탑본이 있는데
이대로 그만두면 자손의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1829년에 힘을 모아 봉영을 수축하고 비를 세우고
제사를 짓고 묘전(墓田)을 장만하니 묘역의 모양이 새로워졌다.
“우리가 성을 가진 후로 묘소의 실전이 많았으나 오직 공의 묘소가
여러 백년 만에 다시 석물을 설함하게 되니
어찌 무연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우리 김씨의 근본은 광산이니
신라 왕자 휘 흥광이 공에게 시조가 되고, 판예부사 휘 광존과,
증 평장사 휘 대린과 판 판도사사 시호가 양간인 휘 연과
찬성사 시호 정경인 휘 사원과
순정군 부인 순흥안씨 문성공 휘 유의 따님은 곧
공의 고조, 증조, 조, 고, 비가 된다.
이로부터 가지처럼 나눠지고,
잎처럼 퍼져서 계속하여 번성하니,
자손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석덕 대현과 영공 거경이 앞뒤로 배출되었으므로
국조에서 시례고가를
헤아릴 때 반드시 우리 광김을 일컬으니 참으로 장하도다.
삼가 고려사기를 살펴보면 공이 충렬왕19(1292)에 나시어
임신년(1332)에 벼슬이 중현대부 성균제주와 통례문 부사를 겸하였다.
1333년에 벼슬은 묘전에 새긴바와 같았고
충혜왕 4년(1342)에 공거(과거 책임자)를 맡아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고 그 뒤에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공의 덕행과 사적이 반드시 많으련만 돌아가실 때까지
아울러 전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도다.
십칠 세손 중추부사 상모 찬
*장영공 유문시(章榮公 遺文詩)
바람은 엷은 구름조차 쓴 듯 맑은데
밝은 달이 푸른 하늘에 둥실 떠있네.
수정같이 찬 기운은 눈(雪)빛을 시새우고
맑은 빛은 비단의로 싼 등불을 비추어주네.
보름밤은 오직 밝기만 한데
술동이에 달이 비취니 동이 채 비울 것 같네.
이 정경(情景)을 베개에 옮겨 접어 두었다가
임과 같이 즐기고 싶네.
(월하(月下)의 회포를 추상서에 올리는 글)
광산김씨사, 광산김씨종보, 광산김씨 약사.
2023년, 5월. 편집자.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