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는 등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영웅호색'이란 말이 있습니다. 남자의 마음에 누구나 영웅심리가 있고, 남자라면 누구나 영웅이 되고 싶어한다는 의미는 다
른 말로 남자라면 누구나 영웅이 되었을 때 여색을 탐하게 될 소지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속말로 '열 계집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도 합니다. 이것은 남성의 성적 욕구를 비하한 말이기보다는 남성의 본성이 그렇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영웅호색(英雄好色)'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남성이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남성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그런데 영웅이 더
욱 호색한으로 표현되는 것은 여러 가지 담고 있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영웅은 대개 자신 혼자 결정하고 남들 앞서 나가
는 지도자로서 자신의 깊은 속 이야기를 마음 놓고 털어 놓을 상대가 없이 외로운 입장입니다. 그래서 영웅은 고독합니다.
그 고독의 틈새를 메꿔 줄 수 있는 것은 정치의 권모술수에 능하고 전쟁을 잘 아는 전략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정치도 모르
고 전쟁과 아무 상관없이 자신의 두려움과 약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따뜻하고 가녀린 여인의 손길을 필요로 합니다. 이래서
뛰어난 예술가들 역시 백치미를 선호했습니다. 자신의 꽉 찬 머리 속을 털어버릴 수 있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인물'을 선택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웅은 이미 세상에 드러난 존재이기에 그의 행보는 남들보다 훨씬 눈에 잘 띄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더 크게 부풀려 소문으로 돌아다니게 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현상은 다 똑같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손꼽히는 다윗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어린 목동 시절 하
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왕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죽을 고비도 몇 번 넘기고 그야말로 숱한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쯤
숨을 돌리고 왕으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시점에 그는 자신의 충실한 부하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교한 방법으
로 차지합니다. 바로 이 엄청난 실수 때문에 다윗은 일생동안 하나님의 큰 징계 아래서 참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성공의 정점에서 도덕적 실패에 빠지는 현상을 '밧세바 신드롬'(Bathsheba syndrom)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고위 공직자
의 도덕성 결핍증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바로 그 성공의 정점에서 실수로 넘
어지는 인간의 한계를 말합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돈이 많은 사람이나 권력의 권좌에 앉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의 영향력에 자신도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그 힘의 맛에 길들여지게 되면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돈으로 모든 걸 움직이고 권력을 동원하여 하고 싶은
일을 강행해 나갑니다. 그러면서 점점 그 욕망이 상승세를 타면서 급기야 양심을 배반한 윤리도덕적 결함이 드러나고, 이 일
들에 대한 통제의 자제력을 상실한 채 깊은 나락의 늪에 빠지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윤리도덕적으로 사회의 비난
이 될 때입니다. 결코 돈이나 권력으로 할 수 없는 일임에도 착각 속에서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 나갈 때 사회의 비난 대상이
됩니다.
어떠한 의미에서든지 영웅이 되기까지는 참 험한 여정의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웅이 되어 이제 더 이상 올라갈 데
가 없을 때, 그 영웅적 본성을 충족시켜 줄 더 강한 자극제를 필요로 하고, 그 자극제가 부정적인 측면에서 그 영웅적 본성을
움직여 나가기 시작할 때 영웅은 지금까지 쌓아왔던 성공의 정점으로부터 순식간에 추락하고 맙니다. 여기에 영웅의 비극이
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목욕하는 여자'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밧세바(Bathsheba) = bath(목욕) + she(여자) + ba(바라보다?) ㅋㅋㅋ.
세상의 많은 영웅들이, 지도자들이 이렇게 사라져 간 예가 허다합니다. 밧세바 신드롬의 주인공인 다윗이 그 대표적 예입니
다. 일반인도 아니고 다윗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그러한
다윗이 스스로 밧세바 신드롬의 주인공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큰 교훈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 앞에서 천하
장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자유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죄인, 다윗이 위대한 것은 그가 기록한 시편의 참회시에서 그의 구구절절한 회개의 기도문을 읽
고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의인은 하나도 없고 모두 죄인이며, 하나님도 인간에게 의인이기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죄 앞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그 죄의 유혹을 이길만한 힘이나 자제력이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
니다. 그 욕망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탄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도록 항상 깨달음을 주셔서 연약한 자로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간구했습니다.
다윗의 실수와 상대적으로 비교되는 인물이 요셉입니다. 노예로 있던 요셉에게 주인인 보디발 장군의 아내가 유혹하여 옷
자락을 잡았을 때 옷을 벗어 던진 채로 그 자리를 피했던 요셉은 다윗과 무엇이 다르기에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
까요? 요셉은 다윗처럼 영웅도, 왕도 아니었습니다. 노예 신분인 그는 항상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고 한 번도 방심하
지 않은 채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노예 신분 주제에 믿고 기대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노예 신분인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왕으로서 다윗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이른바 밧세바 신드롬의 덫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막말로 뵈는 게 없을 때 착각에서 오는 망상입니다.
신약에서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자신 안에 두 가지 법이 싸우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
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롬 7:21 현대어성경). 자신의 뜻이나 의지와는 전혀 다
른 또 하나의 나를 이끄는 '어떤 힘(법)'이 나를 선한 길이 아닌 악한 죄의 길로 끌고가는 것을 통탄하며, 바로 그 죄가 밖에
있는 그 어떤 다른 것에 있지 않고 자신 안에 있다는 것에 더욱 경악해하며 탄식의 절규로 부르짖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
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롬 7:24 현대어성경).
나의 지나온 삶을 잘 알고 있는 어느 젊은 후배 목사님이 사석에서 내게 대해 지극한 신뢰의 눈빛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솔직히 저는 아직도 젊어 그런지 세상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많은 갈등 속에서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제 안의 더러운 탐욕
의 본성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과 같은 이러한 자기와의 싸움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런데 조목사님은 세상 많은 경험과 연륜
을 쌓아오시면서 많은 연단의 과정도 거치고 그 안에 엄청난 영성의 내공을 기르셔서 저와 같은 고민은 없으실 것 같은데요.
적어도 돈과 여색 문제로 고민하는 것은 이제 졸업하셨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갑자기 내 입가에 피식~ 하는 실웃음이 새어나갔습니다.
"졸업? 그럼 난 죽은 남자이든 아니면 남자가 아닌 거지. 중이 고기맛을 한 번 보면 더 어렵다는 말 못 들었어? 목사건 신부
건 여색을 탐하는 게 남자의 본성인 걸 어떡하겠어?! 그리고 육의 장막을 입고 이 땅에서 발딛고 살면서 먹고 사는 문제, 돈
에 초월할 사람이 있남? 돈과 여자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 말이지. 영성의 내공? 내 의지나 힘이 아닌 하나님과
의 동행에서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는 거지, 지가 무슨 뾰죽한 수가 있나?! 진정한 영성은 현실의 삶 속에서 육화(肉化)된 영
성이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귀신놀음이지 뭐."
그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럼 어떻게 이 현실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계시죠?"
"극복은 무슨?! 성공의 기준과 개념이 뭐야? 특히 신앙적인 면에서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자기가 믿음의 정
점에 서 있다고 말할 사람이 있는가 말야. 그냥 우린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이라도 달라고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며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할 뿐이지 뭐. 그러니 언제나 두 가지의 기도 밖에 없는 것 같아. 나의 연약함에 대한 자의식과, 전능자의
손에 매달려 제발 날 좀 살려달라고 내 길을 의탁하는 것. 내가 죽고 내 안의 예수가 사는 것.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 아냐?!"
-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시 16:1).
사실 우리 주위에 그 누구나 특히 남 앞에서 돋보이는 영웅적 지도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겠습니까?! 영웅은 커녕
일개 범부에 불과한 '무익한 종'과 같은 나에게도 수많은 밧세바가 눈앞을 어른거리며 지나갑니다. 밧세바가 어디 특별히 존
재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에 이미 탐심을 품으므로 내 스스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럴 때 다른 도리 있겠습니까?! 예수 그
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바짝 엎드려 나의 연약함을 고하며 주의 강한 손으로 붙들어 지켜주시기를 간구하고, 주께서 짝지어
주신 아내와의 사랑을 더욱 견고히 다지는 일이 자신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길이 됩니다.
이 고백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먼저 자신을 구원할 일입니다. 내가 인생에서
싸워야 할 최종 싸움의 대상은 바로 내 안에 있는 나 자신임을 알고, '자기와의 싸움'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건 바
로 자신의 이기적 욕망의 탐심을 죽이는 일입니다. 자신이 싸워야 할 가장 무서운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 한 구석에 나를 무너뜨릴 기회만을 노리며 음흉하게 도사리고 있는 그 무섭고 간교한 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뱀은 내 안에 있습니다. 들을 귀가 있는 자는 귀담아 들을 것입니다. 그러니 나부터 잘 할 일입니다. 나부터...
지도자는 등대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들이 등대의 불빛을 따라 안전한 항로로 인도됩니다. 사탄은 인류의
멸망을 위해 사정없이 큰 파도로 지도자들을 공격합니다. 등대가 아무리 잘 버티고 서 있다 할지라도 등대지기가 수시로 파
손된 것을 점검보수하고 간수해주지 않으면 이 역시 헛수고입니다. 등대가 등대 역할을 잘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등대지기의
손에 의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지켜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연약한 존재이므로~.
영웅이 되기를 힘쓰십시오. 참으로 이 시대는 진정 이 시대를 이끌어 줄 영웅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결말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도록 더욱 힘쓸 일입니다. 그리하여 내 연약함 속에서 강함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토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