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9일 목요일
[(백)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바로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4,19―5,4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19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20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21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2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3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4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4-22ㄱ
그때에 14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15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16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17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18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19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20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2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22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밝히신 당신 공생활의 출사표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이어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의 눈길이 당신께 향하고 있을 때 짧은 한마디를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설명하시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 당신 사랑의 행보와 더불어 ‘지금 여기에서’ 그것이 실현되고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은 저마다 사정은 다를지라도 모두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가 만만하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체념과 포기 한편에 또 그만큼의 간절함을 품고 살아왔겠지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감격과 위안을 느꼈을지 짐작이 갑니다. 한 달에 한 번 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에 미사를 갑니다. 그때마다 열 분 조금 넘게 미사에 오십니다. 귀가 어두운 분들이 많아 제가 목소리를 높여 경문을 읽으면 그분들도 큰 소리로 우렁차게 화답해 주십니다. 치매 어르신들이 많은데도 기도문은 참 잘 외우십니다.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또 힘을 내어 서로 사랑합니다.(김동희 모세 신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합시다. 혹독한 시련 가운데서도 꾸준히 희망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바야흐로 2025년, 정기 희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희년을 공식 선포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올 한해 우리 모두가 ‘희망의 순례자들’로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는 오늘 우리이기에 ‘희망의 순례자들’이라는 표현이 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올 한 해 희망이 없어 보여도 희망하며,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부단히 희망하는 ‘희망의 순례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희년의 주체이자 주관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당신과 함께 하는 매일 매순간이 희년임을 장엄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희년을 시작하는 우리를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초대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순례자는 단지 걷는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지닌 사람, 그중에서도 확실한 목적지를 지닌 사람이어야 하고, 성스러운 목적지를 지니고 있을 때라야 순례에 힘이 붙고 피곤한 여정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희년이 시작되면 몇 가지 관련 행사가 뒤따릅니다. 전대사의 은혜 부여, 그에 따른 성지나 성당 순례...그중에 첫 번째 이루어지는 행사는 성전 문을 여는 것입니다. 작년 성탄 전야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성문을 활짝 여시면서 희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에 대한 광주대교구 김정용 베드로 신부님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희년이 시작될 때 성문을 여는 상징 행위는 교회가 우리의 소유나 배타적인 장소가 아니라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교회는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있는 아버지의 집,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누구나 흔쾌히 환대하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소요 표지여야 한다. 그러니 그 누구도 교회의 소유자인 양 행세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하느님의 집에 더부살이하는 손님, 잠시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교회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는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마음을 부비고 살며,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사람들의 연대 공동체인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계속해서 오랜만에 맞이한 너무나 은혜로운 이 희년을 영원한 순례자인 우리가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명쾌하게 소개하고 계십니다.
“희망의 순례는 그저 자기만족이나 유희만을 위한 휴가나 수박 곁핥기식의 여행과 같은 것이 아니다. 또한 단순히 성지나 성당을 방문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희망의 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나서는 여정이다. 교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다. 인간이 둘러쳐 놓은 모든 장벽, 모든 경계, 곧 모든 형태의 차별과 혐오의 문화, 배타성과 불평등의 장벽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다.
순례는 그저 고행이 아니다. 마치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설레고 신나는 여정이다.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을 만나는 행복한 여정이다. 예수님의 순례가 그러하였다.”(김정용, 희망의 순례자들, 바오로딸)
가치나 의미, 뚜렷한 목표의식이 부여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이라는 것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희망하는 것, 이 세상 것만을 희망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희망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혹독한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결국 만사를 선으로 이끄시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심을 굳게 믿으며, 또다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는 기쁨 충만한 희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합니다.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난다.’라고 말합니다. 이는 윤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 세속오계, 삼강오륜은 인과응보의 원칙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를 토대로 법칙을 만들고, 법칙을 찾아냅니다. 과거로부터 현재 상황을 유추하고, 현재로부터 미래를 예측합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곳이 있습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기존 과학의 법칙과 방법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상대성 이론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용서에 대해서 일곱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사건은 인과응보의 ‘틀’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 중인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드러나신 사건은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현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며 살아갈 때,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공현은, 동방박사들이 별빛을 따라 예수님께 경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의미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매일 실현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빛을 받은 사람들로서, 이 빛을 세상 속에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작은 마을에 살던 노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매년 겨울이면 마을의 빈곤층과 고아를 위해 따뜻한 음식을 나누고, 옷을 준비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소년이 눈 속에서 헤매다 노부부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추위로 몸을 떨고 있었고, 노부부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들였습니다. 소년은 그들의 보살핌으로 건강을 회복하고 마을을 떠났습니다.
세월이 흘러, 그 마을의 작은 교회가 화재로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놀랍게도 그 소년이 훌륭한 사업가로 변모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는 노부부에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교회와 마을을 돕기 위해 큰 기부를 했습니다. 노부부의 작은 사랑의 실천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를 통해 더 큰 빛이 세상에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비출 때, 그것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계기가 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의 공현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할 때 매일 일어납니다.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때, 직장에서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일할 때, 이웃에게 친절과 나눔을 베풀 때, 우리는 그분의 빛을 세상에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현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웃과 세상에 비추기 위해 주어진 선물입니다. 오늘 하루, 작은 행동으로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전할 기회를 찾아보십시오. 가정에서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이해로, 직장에서는 정직한 태도와 배려로, 이웃에게는 나눔과 친절로 주님의 공현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작은 빛이 모여 세상을 밝히듯, 우리의 작은 실천이 모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아파하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아파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나으리니
슬퍼하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슬퍼합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기뻐하리니
울부짖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울부짖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환호하리니
굶주리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굶주립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배부르리니
쓰러지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쓰러집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일어나리니
짓밟히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짓밟힙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떨치리니
갇히는 벗에게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곁에서 함께 갇힙니다
주님께서 내게 그러하시듯이
그리하여 마침내 함께 헤치리니
오늘의 성인
성 율리아노 (Julian)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경
같은이름 : 율리아누스, 줄리안, 줄리언
성 바실리사 (Basiliss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경
같은이름 : 바실리싸
성 마르치오닐라 (Marcionilla)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경
성 아나스타시오 (Anastasius)
신분 :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경
성 안토니오 (Anthony)
신분 : 신부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경
성 첼소 (Celsus)
신분 : 소년 순교자
활동연도 : +304년경
고대의 순교록에 의하면 성 율리아누스(Julianus, 또는 율리아노)와 성녀 바실리사(Basilissa)는 비록 결혼하여 부부생활을 하였으나 서로 동의하에 합의하여 평생 동안 정결을 지켰다고 한다.
그들은 엄격한 생활로써 자신들을 성화시켰으며, 그들의 수입을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하여 늘 사용하여 항상 가난하게 살았다.
이런 목적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개조하여 일종의 병원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때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용하여 늘 성시를 이루었다.
바실리사는 여성들을, 율리아누스는 남성들을 지도하였다.
이런 소문이 점차 퍼져나가자 박해의 손길이 이들에게 미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부부가 영광스럽게도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되었다.
이 부부가 순교할 때 성 안토니우스(Antonius) 신부,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수련 수사, 소년 성 켈수스(Celsus)와 그의 어머니 성녀 마르키오닐라(Marcionilla) 그리고 성녀의 형제 몇 명이 함께 순교하였다.
성 율리아누스와 성녀 바실리사의 존재에 대해 일부 성인전 작가들은 의문을 갖기도 한다.
성 하드리아노(Hadrian)
신분 : 수도원장
활동지역 : 캔터베리(Canterbury)
활동연도 : +710년
같은이름 : 아드리아노, 아드리아누스, 아드리안,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
아프리카 태생인 성 하드리아누스(Hadrianus, 또는 하드리아노)는 이탈리아의 나폴리(Napoli) 근처 네리다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캔터베리 대주교 임명을 거절하였다.
대신에 그는 그리스 수도자인 테오도루스(Theodorus)를 적당한 후보자로 추천했고 교황 비탈리아누스(Vitalianus)가 이를 승인하였다.
이 후 성 테오도루스는 하드리아누스를 캔터베리의 성 베드로(Petrus)와 바오로(Paulus) 수도원장으로 임명하였다.
39년 동안 수도원 장상직을 수행하면서 그는 수도원 쇄신에 정력을 기울였다. 성서에 해박한 지식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관리자였으며, 그리스와 라틴 학문에도 조예가 깊어서 캔터베리 수도원 학교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수도원이 배움의 전당으로서 자리를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영국 교회는 위의 두 성인이 살아있을 때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는 710년 1월 9일 캔터베리에서 사망하여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은 곧 기적을 낳는 곳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