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 5 - 제갈팔괘촌에서 택시를 타고 란시(兰溪 난계) 에 도착해 옛 성을 찾다!
2023년 10월 31일 저장성 진화 金华(금화) 역 광장에서 808 路 란시(兰溪) 행 버스를
타고 중국 여인의 도움을 받아 란시(兰溪) 시내 진자오상사(今朝商廈) 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주거바과촌 诸葛八卦村 (諸葛八卦村 제갈팔괘촌) 에 도착합니다.
10여분을 시골길을 걸어서 마을로 들어가 음양으로 나뉜 태극(太極) 을 묘사한 연못을 보는데
옛날 태극 모형이니.... 마을이 태극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상징인데, 마을 안
으로 들어가 제갈씨족(诸葛氏族) 들이 제갈공명을 모신 청샹츠 丞相祠(승상사) 를 구경합니다.
제갈량의 15대 '제갈청' 이 북송 천회 2년(1018년)에 란시(兰溪 난계) 에 정착했한 이후
27세손 '제갈대사' 가 남송 말기인 1280년 온 가족을 이끌고 高隆(현재 제갈팔괘촌)
으로 이사해 제갈량의 구궁팔괘진 (九宫八卦陣) 과 같은 형태로 마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중츠 钟池(충지) 를 핵심으로 외부로 뻗어 있는 8갈래의 작은 통로가 내팔괘 (內八卦)
를 형성하고, 마을 바깥쪽은 8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외팔괘(外八卦)
를 형성하니 주거촌 诸葛村(제갈천) 을 바과촌 八卦村(팔괘촌)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경사진 골목길을 올라 대회당에서 마을을 조망하고는 내려와서 제갈 팔괘촌
을 뒤로 하고 걸어나와 유객 복무중심 건물을 통과해 광장의
주차장에서 대기하던 택시를 타고 40분을 달려서 다시 란시 (兰溪 난계) 로 돌아옵니다.
택시비는 왕복 + 대기료 합쳐 미터기 요금으로 130위안 인데, 문득 유원모 기자가 동아일보에 쓴
“모두를 웃음짓게 한 푸바오, 모두가 널 기억할 거야 ‘리리! 리리!‘ ” 라는 기사가 떠오릅니다.
2016년 1월 중국 쓰촨(四川)성 ‘자이언트 판다 번육 연구기지’. 18년 만에 만난 판다 리리에게
강철원 사육사가 소리쳤다. 앞서 1994∼1998년 강 사육사의 손에 컸던 리리는 여전히
‘아빠’ 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리리는 고개를 들더니 강 사육사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주변의 중국 관계자들은 강 사육사에게 “당신이 진정한 ‘슝마오 바바(판다 아빠)’!”라고 외쳤다.
리리가 한국 땅을 떠난 지 18년 만인 2016년, 아이바오와 러바오 판다 커플이 한국에 왔다. 그로부터 4년
뒤 이들은 ‘푸바오’ 를 낳았다. 그렇게 ‘판다 할부지’ 강 사육사와 푸바오의 좌충우돌 일상이 시작됐다.
‘용인 푸씨’ ‘푸 공주’ 등 다양한 애칭으로 불리며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은 푸바오를 4년간 돌본
강 사육사가 그동안의 잊지 못할 추억과 미공개 사진을 담아 에세이 ‘나는 행복한
푸바오 할부지 입니다’ 를 펴냈다. 푸바오에 대한 높은 인기를 반영하듯 이 책은 교보문고
가 8일 발표한 3월 첫째 주 베스트셀러 종합 1위에 올랐다. 구매자의 89.2% 는 여성으로 집계됐다.
책에는 에버랜드에서 37년간 일해 온 베테랑 사육사의 동물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푸바오는 한국에서 자연 번식으로 태어난 첫 판다다. 판다는 통상 생후 40일
전후로 눈을 뜬다. 그런데 푸바오는 왼쪽 눈은 생후 15일 만에, 오른쪽 눈은 18일 만에 각각 떴다.
자칫 시력에 문제가 생길수 있을 만큼 시기가 빨랐다. 이에 강 사육사는 두달여간 분만실의 불을 끈 채 푸바오
의 시력을 보호했고, 건강한 시력을 가질 수 있었다. 푸바오뿐만 아니라 출산 후유증으로 입맛을 잃고
힘들어하던 엄마 아이바오를 위해 영양가 많은 대나무잎에 부드러운 죽순을 싼 특식(죽순쌈)까지 만들어 줬다.
푸바오의 성장 기록은 마치 육아 일기 처럼 느껴진다. 생후 120일 째 처음으로
네 발로 걸음을 떼자 눈물을 흘리며 축하하는 모습이나, 저녁시간 실외
놀이터에서 계속 놀려고 투정을 부리는 모습은 여느 가정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강사육사는 푸바오가 나무타기에 능숙해지는등 어엿한 판다로 성장하는데 아이바오 역할이 컸다고
말한다. 푸바오가 높은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놀라면 언제나 자식 곁으로 달려갔지만
푸바오를 나무 위에 무작정 올려주지 않았다. 푸바오 스스로 터득하고 배우도록 길러주는
아이바오의 모습을 ‘지지와 신뢰의 육아법’ 이라고 명명하며,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 크다고 강조한다.
푸바오의 ‘작은 할부지’로 불리는 송영관 사육사도 ‘전지적 푸바오 시점’을 지난해 11월 출간했다. 책 한쪽
에는 푸바오의 사진이, 다른 쪽에는 푸바오의 시점으로 쓴 일상의 기록이 위트 있는 문체로 적혀 있다.
“저는 맹수의 신체 구조와 장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고기 대신 식물인 대나무를 먹고 살아
가요. 그래서 소화력이 좋지 않아요. 남들은 저를 게으르다고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먹고 자기를 최선을 다해서 반복해야 해요. 삶에 있어서 치열하지 않은 야생동물
은 없어요” 등..... 푸바오의 시점으로 야생동물 판다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푸바오는 3일이면 중국으로 떠난다. “푸바오, 정말 고맙고 사랑한다. 그리고 어릴 적 함께했던 할부지를 아주
조금만 생각해 주겠니?” 라는 강 사육사의 진심 어린 고백은 푸바오를 사랑했던 모두에게 큰 울림을 준다.
란시 兰溪 (Lanxi 난계) 는 진화시 金華市(금화시) 서북부에 있는 도시로 첸탄강과 지류인 취강 및
진화강의 합류점에 위치하며 꿀에 절인 대추와 소금에 절인 돼지뒷다리
훈제가 유명한데 수로는 상류로는 진화, 하류로 항저우 杭州 로 연결되니 배가 통행 한다고 합니다.
진자오상사(今朝商廈) 정류소에는 바로 옆에 작은 버스터미널이 있고 그 뒤쪽에는 란시 (兰溪 난계)
기차역이 있는데.... 어느 여행기에 보니 원래는 여기 란시커운쭝신 兰溪 客運中心 (난계
객운중심 : 汽車西站 기차서참) 에서 제갈팔괘촌(주거바과촌)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버스 터미널에 가서 둘러 봐도 상주하는 직원은 없고 촌로 몇 명이 보여 물어 보니.... 자꾸 저
앞쪽 정류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코로나 사태 때 제갈팔괘촌행 버스가 없어졌나 봅니다?
누구 여행기를 보니, 란시 兰溪(난계) 와 쭝저우 中州(중주) 공원을 이어주는
浮橋(부교)를 지나면 란시구청 兰溪古城(난계고성) 이 볼만하다고 했는데....
그래서 저 란시구청 兰溪古城(난계고성)을 구경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물어서 반대편 으로
도로를 건너가 골목길을 지나 게속 걸어서 큰 길로 나옵니다. 여기서 다시 사람들
에게 물어서 도로를 건너 우회전을 해서 10여분을 더 걸어가니 거기에 큰 성루가 보입니다.
옛날에 중국은 마을이나 도시가 평지에 있는 관게로 거의 모든 도시들은 성곽을 쌓아 도시를
둘렀으니 이렇게 둘러쌓인 도시를 國(국)이라고 불렀으니.... 원래 國(국)은 작은
단위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의미했는데 이게 변해서 훗날 나라를 뜻하는 말로 바뀝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북해도를 제외한 나라를 66개국으로 나누었으니 주라고도 하고 국( 國)
이라고도 하는지라..... 지금도 일본인들은 교토나 도쿄에서 지방에 고향에
내려가면 한국인들처럼 歸鄕(귀향) 한다고 하지 않고 歸國(귀국) 한다는 용어를 씁니다.
여기 란시 兰溪(난계)도 당연히 도시를 성벽으로 둘러 쌌으니 한 면은 강에 면해 쌓았는데
오늘날 그 부분만 남아서 이렇게 란시구청 兰溪古城(난계고성) 이라고 부르나 봅니다.
성에는 최소한 4개 이상의 성문을 짓게 되는데 여기 표지판을 보니 西门城楼 (서문성루) 라.... 그럼 도시
의 서쪽 성문이란 뜻이니 광장을 둘러보는데 사자상에다가 청동 조각상들이 보여 구경할만합니다.
그러고는 성문을 지나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도시를 감싸고 흐르는 큰 강인데
선착장이 있으니.... 관광객들이 배를 타고 도시 바깥을 한바퀴 도나 봅니다.
문을 나와 쳐다보니 높고 튼튾ㄴ 성벽이 길게 이어지는데..... 지금은 매립을 했는지 성
밖에 포장도로 가 깔려 있지만 옛날에는 그냥 강에서 배를 타고 성문으로 들어
왔을 것이니 문을 잠그면 침공굼이 성벽을 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러고는 성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와 공원을 둘러보는데.... 작은 나룻배를 한척 육지에 올려놓은게
보이고 또 청동으로 도시의 모형을 만들어 두었으니 도시 규모와 구조를 이해하는데 편리합니다.
그러고는 쭉 이어지는 건물들을 보는데 여기 중국의 기와집은 한국과는 달리 치마가
하늘을 향해 비정상적으로 급하게 치켜 올라가도록 지은게 특징인가 합니다.
그러고는 강으 따라 내려가니 어느 건물에 붉은 관복을 입은 벼슬아치의 초상화를
보는데.... 중국에 온 선교사 마테오리치는 선비들의 평생의 꿈이 과거급제
라는 것을 알고는 서양의 암기법 책을 한자로 번역해 출판하기도 했던게 떠오릅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한 저 기와집 안에는 가게들이 많이 보이는데 코로나 사태때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는지 아직도 활기를 되찾지 못했구나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