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폭군인가
조선왕조에서 폭군이라 하여 쫓겨난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후에도 ‘실록’이란 이름을 얻지 못하고, ‘일기’라는 이름으로 조선왕조실록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역사란 원래 산 자와 이긴 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무필(誣筆)이 많아 그 기록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다. 특히 광해군에게는 이 점이 더욱 두드러져 있는 것 같다. 인조 1년(1623)에 이수광 등이 광해군 당시의 시정기(時政記)에 이런 점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수정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시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반정으로 쫓겨났다고 하여, 연산군과 광해군을 같은 값으로 치부하여, 폭군으로 한데 묶는 것은 다시 한 번 되돌아 봐야 할 문제라 생각된다. 기록의 이면은 그만두더라도 ‘일기’에 나타난 사실만이라도 바르게 보고 평형성에 맞게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연산군과 광해군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다.
연산군은 천성부터가 포악하였다. 성종에게는 뒷날 중종이 된 정실 소생의 아들이 있었으나, 태어나기 전이라 연산군의 무도함을 알고도 어쩔 수 없이 그냥 세자로 삼았다. 연산군일기에는 ‘그는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라,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그의 됨됨이를 총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 연산군일기의 첫머리에 이렇게 나온다.
“만년에는 더욱 황음하고 패악한 나머지 학살을 마음대로 하고, 대신들도 많이 죽여서 대간과 시종 가운데 살아난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포락(炮烙:불에 찌짐), 착흉(斮胸:가슴 빠개기), 촌참(寸斬:시체를 토막냄), 쇄골표풍(碎骨飄風: 뼈를 가루 내어 바람에 날림) 등의 형벌까지 벌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맏이인 임해군의 성질이 패악하였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었지만 세자로 책봉되었고, 세자 시절부터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맡은 일을 처리했던 인물이다. 그의 성품이 광폭하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또 연산군은 모후인 윤씨 폐비 사건을 빌미로 삼아, 오직 사감으로 무자비한 살육행위를 저질렀고, 이를 충고하는 할머니인 인수대비까지도 구타해서 죽게 한 패륜아였다. 그가 일으킨 두 번의 큰 사화도, 사실은 그의 모진 성품과 관련이 있다. 무오사화는 훈구파들이 선비를 싫어하는 연산군의 성품을 교묘히 이용한 데서 발생한 것이고, 갑자사화도 그의 사치와 향락을 위한 재정적 확보를 위함이 그 뿌리가 된 것이다. 그러니 그가 저지른 모든 사건 뒤에는 항상 패악한 그의 성질이 밑바닥에 숨어 있다.
광해군도 사람을 죽이긴 하였으나, 대부분 소북과 대북, 대북과 서인 간의 정치적 세력 다툼이 그 배경에 크게 깔려 있다. 지나친 바가 있긴 하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한 가닥 수긍이 가는 점도 있다.
선조가 병이 위독하자 그에게 선위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러나 소북파인 유영경이 이를 공표하지 않고 몰래 감추었다. 정비 소생인 어린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술책이었다. 뒤에 이 음모가 밝혀져 유영경을 사사하고 임해군을 유배하였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기 오래 전에, 그것도 임진왜란이라는 초미의 혼란 속에 있는 국정의 긴박성 때문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게다가 선조의 선위 교서까지 받은 정통성을 갖고 있는 사람을 제치고, 대군이라는 명분 하나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것은 일종의 역모 행위라 할 수 있다.
대비인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유배시킨 것도 대북파의 꾀임에 빠져 일어난 사건이다. 서출이라 하여 벼슬길이 막힌 데 불만을 품고 있던 명문가의 서자들이 강변칠우라는 단체를 만들고, 이들이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습격, 살해하고 은 수백 냥을 약탈한 사건이 있었다. 일당과 함께 잡힌 박응서가 대북파의 이이첨, 정인홍 등에게 속아, 영창대군의 장인인 김제남과 함께 역모를 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한 것이라고 거짓으로 고변하였다. 이러한 거짓 진술에 따라,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하여 강화도에 위리안치한 것이다.
또 인목대비를 폐비시킨 것도 이이첨 등의 폐모론에 따른 조치였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실정은 모두가 대북파의 책동에 의한 것이었다.
광해군의 실정을 전부 당쟁의 탓으로 돌릴 수는 물론 없다. 명민함을 잃고 대북파의 책동에 눈이 어두웠던 점은 분명히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산군의 광패한 짓거리와는 분명히 거리가 있다. 어쩌면 그가 처한 시대상황을 감안한다면 수긍이 가는 바가 없지도 않다.
정치적인 업적에서도 두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광해군은 내치나 외교정책에 있어서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연산군은 이러한 요소가 거의 없다. 연산군은 비융사(備戎司)를 두어 병기를 정비하고, 국조보감(國朝寶鑑)과 여지승람(輿地勝覽) 등의 수정을 치적으로 든다면 들 수가 있겠으나 보잘 것이 없다.
그는 직간을 귀찮게 여겨 사간원, 홍문관 등을 없애버리고, 성균관, 원각사 등을 주색장으로 만들고, 선종의 본산인 흥천사를 마구간으로 만들었다. 또 한글투서사건을 기화로 한글 사용도 금지시켰다.
그런 반면, 광해군의 치적은 특기할 만한 것이 많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분조[分朝: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것에 대비하여 임금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라는 왕명에서 나온 소조정(小朝廷)]로 조정의 일부 권한을 위임받아 의병 모집에 힘을 쏟았고, 임란 후 전화 복구에도 적극 힘을 기울였다.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을 시행한 것도 그 일환이다.
후금이 명을 침범하자,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해 원병을 요구하므로, 임란 때의 원군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그에 응하면서도, 강홍립에게 군사 1만을 내주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정하도록 조치하였다. 그 결과, 명군이 패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항복하여 명분상의 출병임을 후금에 알려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였다. 명나라에게는 처지를 살리고 금에게는 항복함으로써, 양쪽에 다 미움을 사지 않은 현명한 외교를 구사하였던 것이다.
일본과도 조약을 맺어 임란 후 중단되었던 외교를 회복하고, 소실된 서적의 간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허균의 홍길동전과 허준의 동의보감도 이때 나온 저술이다.
또 당쟁을 없애려고 노력도 했으나, 오히려 대북파의 꾀임에 빠져 편중된 인사를 단행함으로써, 반대파들의 시기를 사서 김류, 김자점 등의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그처럼 가혹한 병자호란의 환란을 우리는 겪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이라는, 임금의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청나라 왕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고개를 숙이는 예)를 행하는 이른바 삼전도의 수치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정으로 뒤를 이은 인조는, 솟아오르는 금나라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지려는 명나라에 대해 사대라는 철 지난 골동품을 한쪽으로 안으면서, 한쪽으로는 정통성이 없는 정권의 입지 때문에 항상 역모를 겁내어, 변방의 장수들에 대한 기찰을 강화한 나머지 수비력을 스스로 약화시켜, 마침내 병자호란을 가져오게 하였다. 아마도 광해가 그 자리를 지켰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광해군은 인조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혼군으로 규정되었지만, 연산군과 광해군은 염연히 다르다. 연산군은 포악한 성품에서 나온, 고의적인 학정을 휘둘렀지만, 광해군은 왕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정황을 빚었다고 볼 수 있다. 정치적인 목적에서 행해진 처형이라면, 광해군은 태종이나 세조, 영조, 그리고 반정으로 그의 뒤를 이은 인조에 비하여 그 정황이 너무나 미약하다.
인륜이라는 면에서 볼 때, 자신의 피붙이를 죽이는 것보다 더 참혹한 일은 없을 것이다. 태종은 친형제와 장인 및 처남들을 죽였고, 세조는 친형제와 어린 조카를 죽였다.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였으며, 영조는 아들을 직접 참살하였다. 이것은 다 그들의 왕권 확보와 유지를 위해 취한 조치들이었다. 광해에게 영창대군과 김제남을 죽인 사건에 갈음하여 폭군이란 이름을 씌운다면, 저들부터 먼저 그런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이다.
요약컨대, 연산군은 살육과 패륜을 함께 저지르고, 황음과 향락에 빠져 국고를 텅 비게 한 장본인이지만, 광해군은 세자 시절부터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맡은 일을 잘 처리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고, 백성들의 삶을 걱정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광해군을 연산군과 같은 반열에 놓고 혼음한 폭군으로 치부하는 것은, 모름지기 재고해야 할 하나의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