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공자는 각국을 순방하는 동안 많은 은자(隱者)를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은자는 현세를 피하여 숨어 사는 현자를 말하는것이며, 이 은자들은 공자에게 난세를 구하려고 쓸데없이 애쓰는 사람이라 하여 조소를 하였으며, 은자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공자를 일컫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하려고 애쓰는 사람' 이라고 혹평하였다. 이러한 비난에 대하여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벼슬하지 않는것은 옳지 않다. 어른과 어린이, 그 예절도 폐지할 수 없는데 하물며, 군신간의 의무를 어찌 폐지하겠는가? 자기 일신의 결백을 위하여, 어찌 대인륜(大人倫)을 문란케 한단 말인가!"
실로 군자의 기백이 넘치는 말이다.
은자들은 자기 일신만 결백하게 하려는 개인주의자들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비관적 패배주의자였다. 은자 가운데 어떤 인물은 이렇게 말하였다.
"지금 세상은 도도히 흐르는 흙탕물과 같은데, 어느 누가 고치겠는가?"
이런 따위의 인물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동떨어져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풍우란(馮友蘭)은 도가의 탄생이 아마도 이런 인물들에게서 유래가 된 듯 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은둔하는 모양새는 비슷하다고 쳐도, 일신만을 결백하게 하려고 세상을 피하는 통념적인 은자들과 도가들과는 달랐다. 도가는 일단 은둔하면 자기 행위를 변호하려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은둔했기 때문에 자기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사상 체계를 수립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들 가운데 가장 탁월한 최초의 대표자는 다름아닌 양주였다.
양주의 생존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묵자(BC 479~381)와 맹자(BC 371 ~289)가 활동하였던 시기에 생존하였음은 틀림없다. 묵자는 양주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맹자가 말한, "세상이 양주와 묵적으로 가득차 있다." 는 말은 알고 있다. 정황을 보면 맹자와 비슷하면서 약간 한 세대 정도 앞에서 활동을 했다고 보면 맞지 않을까.
열자(列子) <양주> 편에 나오는 그러한 사상이 양주 개인의 철학이라고 하는것은, 풍우란이 중국 철학사를 저술하던 시점(1950년대 이전)에도 이미 낡은 관점이었다. 열자의 출처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했는데, 일단 열자 내의 묘사를 보면 양주는 극단적인 쾌락주의자의 모습이다. 그런데 진한 시대 이후의 자료에서는 양주를 쾌락주의로 낙인을 찍은 사례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양주의 참된 모습은 어느곳에서도 보기가 힘들다.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양주에 대해서는 몇가지 언급이 있다.
맹자는 양주는 위아(爲我)주의를 취하여, 털 한올을 뽑아 온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여씨춘추에서는, '양생은 자기를 귀하게 여긴다' 고 말하였다.
한비자에서는, "……위험한 성에는 들어가지 않고, 군대도 머무르지 않고, 천하의 큰 이익을 위해 자기 정강이의 털 한 올도 바꾸지 않는다. 그는 물(物)을 가벼이 여기고 삶을 중하게 여기는 선비다." 라고 하였다.
회남자에서는, "생명을 온전케 하여 그 진수를 보전하며, 물질 때문에 신체에 누를 끼치게 하지 않는데, 이것이 양자가 수립한 학설이다." 라고 하였다.
'천하의 큰 이익 때문에 정강이의 털 한 올을 소홀히 하지는 않겠다' 라는 한비의 진술은 맹자의 언급과는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근본적인 모습은 비슷한데, 이 양주의 위아주의와 격물중생輕物重生이라는것은 소위 묵자의 겸애와는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요 임금과 은자 허유(許由)의 이야기가 있다. 요가 천자의 직위를 선양하려는데, 허유가 사양하며,
"그대가 천하를 다스려 천하가 이미 평안해졌다. 내가 그대를 대신해 천자가 된다면 명예 때문에 천자 노릇을 할까? 그 명예란 내실의 손님인데 내가 손님 노릇을 할까? 뱁새가 깊은 숲 속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데 필요한것은 나무 한 가지에 불과하고, 두더지가 강물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배를 채우는 데 불과하다. 그대는 돌아가 편히 쉬시요. 나에게는 천하가 소용없소."
여기 천하를 거져 준다고 해도 받지 않을 은자가 있다. 분명히 그 은자는 정강이 털 한올로도 천하와 바꾸지 않을 것이다.
열자의 양주 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금자(禽子)가 양주에게 말하길,
"당신은 털 한 올을 뽑아 온 세계를 구제 할 수 있다면 하였는가?"
하고 물으니 양주가 대답하길,
"천하는 본래 털 하나로 구제될 수 없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금자는 다시 말하길,
"만일 구제할 수 있다면 하겠는가?"
라고 캐묻는 것이다. 양주는 응답하지 않았다. 금자는 나서서 맹손양(孟孫陽)에게 말하니 맹손양은,
"당신은 선생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였소. 그 이유를 당신에게 말하고 싶소."
라고 대답하고는,
"당신은 살갗을 할퀴우고 천만금을 얻는다면 그 짓을 하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금자는 "나는 하겠다." 라고 대답했다. 맹손양은 다시 말하기를,
"당신은 사지 하나를 끊기어 나라를 얻는다면 그 짓을 하겠는가?"
라고 물으니 금자는 가만히 있었다. 그때 맹손양은 다시 말하기를,
"털 한 올은 피부보다 미소하고, 피부는 사지 하나보다 미소하다. 그러나 많은 털을 모으면 피부만큼 중요하고, 많은 피부를 합하면 사지만큼 중요하다. 털 한올은 본래 몸의 만분의 일 중 하나인데 어찌 가벼히 여길 것인가?"
라고 말하였다. 이는 양주 이론의 한 단면이다. 열자 양주편에 기록된 양주 본인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옛날 사람은 털 한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결코 하지 않았고, 온 천하를 맡긴다 해도 반지 아니했다. 모든 사람이 털 한 올을 뽑지 않고 또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안정 되리라."
이런 말을 실제로 양주가 했을까? 아마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의 두 가지 근본 사상과 원시 도가의 정치 철학은 여기에 요약되어 있다.
양주의 근본 사상은 노자, 장자, 여씨춘추에 반영되어 있다. 여씨춘추의 중기(重己)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나의 생명은 오직 나를 위해 있다. 그러므로 나를 이롭게 함도 역시 중요한 일이다. 그 귀천, 논하자면 천자의 벼슬로도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고, 그 경중, 논하자면 천하의 부를 다 차지해도 그것과는 바꿀 수 없고, 그 안위, 논하자면 하루 아침에 그것을 잃어 버리면 끝내 다시는 얻을 수 없으리라. 도를 체득한 자는 이 세가지를 삼가해야 할 것이다."
이는 경물중생의 이유를 뚜렷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천자의 자리는 한번 잃었다가 되찾을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 죽으면 다시 일어날 수는 없다.
노자에도 동일한 사상의 모습은 보인다. 예를 들면,
"제 몸을 천하같이 귀중이 여기는 사람에게는 천하를 줄 수 있고, 제 몸을 천하같이 아끼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 길 수 있다."
라던가, 혹은 또
"명예와 자신은 어느것이 더 사랑스러우냐? 자신과 재산은 어느것이 더 중하냐?"
하였다. 모두 경물중생의 사상이 나타나 있다. 장자의 제3편은 그 제목부터가 양생주(養生主)라고 되어있다.
착한 일을 할 때는 명예를 경계하고, 악한 일을 할때에는 형벌을 경계하라. 중도를 따라가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라. 그러면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생명을 건질 수 있고, 부모님을 공양 할 수 있고, 목숨이 다 할때까지 살 수 있다.
이 또한 양주의 사상노선을 따른 것인데, 초기 도가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인간세상의 각종 해독에 대비하여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최선책이라고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의 행실이 흉악하여 형벌을 받는다면, 그것은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바가 못 된다. 또 어떤 사람이 너무나 착한 일을 하여 명성을 얻었다면, 이 역시 목숨을 보존하는 방법은 못 된다. 그래서 장주는 장자의 인간세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산림은 베어지기 쉽고, 기름은 타버리기 쉽고, 계피는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벌목 당하고, 옻나무는 사용 될 수 있기에 상처를 받는다."
유용하고 능력이 있다는 명성을 듣는 사람은 계피나무와 옻나무와 같은 운명처럼 해를 당할 것이다.
장자는 소위 무용의 쓰임을 찬미한 대목이 있다. 상수리나무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도끼날을 피하여, 꿈에 나타나 말하였다.
"나는 무용하기를 오랫동안 원했다. 거의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오늘날까지 그 소원을 이루어 크게 쓰이게 되었다. 만일 내가 유용했더라면 내가 이렇게 크게 될 수 있었을까……세상 사람들은 유용의 쓰임을 알고 있으나 무용의 쓰임은 알지 못하고 있다."
무용하게 되는것은 생명을 보존하는 길이다. 생명을 보존할 줄 아는 사람은 너무 악한 일도, 너무 선한 일도 하지 않고 중도를 지키며 살아간다. 무용해지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결국 크게 쓰이게 되는 길이다.
풍우란은 원시 도가철학의 발달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가장 첫번째가 양주의 사상이고, 대략 두번째는 노자에 관련되었으며, 대략 세번째는 장자에 표현되어 있다. 대략이라고 말한것은, 노자나 장자에도 1단계나 2단계의 사상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이 두 저서는 사실 다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기 때문에 개인의 통일된 저서는 되지 못한다.
도가철학의 출발점은 생명을 보존하고 상해를 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주는 은둔의 방법을 썻다. 이것이 바로 사회를 떠나 산림에 숨어사는 은자들의 통상적인 방법이다. 그들은 은둔생활을 함으로서 세상의 악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너무나 복잡함으로 아무리 잘 숨어 산다 하더라도 피할 수 없는 위험이란 있다. 그러므로 은둔방법이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
노자에 나타난 대부분의 사상은 우주 내 사물의 근원이 되는 도를 밝히려는 것이다. 사물은 변화한다. 하지만 그 변화의 근원이 되는 도는 불변한다. 이 도를 이해하고, 도에 따라 행동하면 모든것이 순조롭게 된다. 이것이 도가 발전의 제2단계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절대적인 보장은 요원한데, 사물의 변화에서 자연계와 인간계와는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다. 그렇게 사사건건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데도 윟험을 당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노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큰 환난이 있는 까닭은 내 몸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 몸이 없다면 내게 무슨 환난이 있겠는가?"
장주는 특히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관점, 사물과 나를 서로 잊어버리는 관점등을 말하여 보다 고차적 견지에서 삶과 죽음, 그리고 사물과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사물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통찰함으로서, 현재의 세계를 초탈 할 수 있다. 이것도 일종의 은둔이지만 현실사회에서 산림으로 떠나는 그런 은둔이 아니라, 현세에서 고차원적인 세계로의 은둔이다. 이것이 바로 원시 도가 사상 발전의 최종단계이다.
장자 산림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장주가 산에서 가지와 잎이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꾼은 그 나무를 벌목하지 않았다. 장주가 그 이유를 묻자,
"쓸모가 없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나무는 쓸모 없기 때문에 타고난 수명을 누릴 수 있다."
라고 장주는 말했다. 장주가 하산하여 친구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친구는 기뻐서 동자에게 거위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동자가 말하기를,
"한 놈은 울 수있고, 한 놈은 울지 못하는데 어느 것을 잡을까요?"
하니 주인은,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야지."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제자가 장주에게 말하기를,
"어제 산중의 나무는 쓸모없기 때문에 타고난 수명을 마쳤는데, 이제 주인의 거위는 쑬모 없기 때문에 죽으니 선생께서는 어떤 입장을 택하시오리까?"
라고 묻자 장주는 웃으면서 말하길,
"나는 쓸모 있음, 쓸모 없음의 중간에 처하겠다.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사이는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그 누를 벗어날 수 없다. 만일 도와 덕의 힘을 입어 움직인다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도와 덕의 힘을 입어)만물의 근원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사물을 사물로 사용하되, 사물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그러니 어찌 누가 생기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의 전반부는 양주가 실천한 삶을 소중히 여기는 주의를 설명한데 비하여, 후반부는 장주 개인의 사상을 설파하였다.
장자 양생주에서 인용한 문구로 위에서 말한 설명을 재검토하여 보면, 유용은 좋은 일에 해당하고 무용은 나쁜 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의 처한 입장은 중도에 해당한다. 그런데 보다 고차적 관점에서 사물을 통찰하지 못하면 이 세가지 방법 가운데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위험을 피할 수 있게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보다 고차적인 관점에서 사물을 통찰한다는것은, 이기적인 자신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도가들(1단계)들은 이기적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뒤에 발전한 도가(2,3단계)에서 이 이기심 자체를 소멸시켜 버렸다.
풍우란의 중국 철학사(정인재 역) 중에서
아주 살짝 조금 사족을 넣은 정도입니다.
첫댓글 하앍 잘봤습니다 ㅋㅋ 신불해님은 법가이신데 어찌 도가의 인물을 ㅋㅋ
드라마 대진제국에선 신불해가 자살하죠.ㅋㅋ
앜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