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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 허준(許浚) 第41話>
- 이은성 지음/ 소설 동의보감
野人 第三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문간의 기생들 뒤로 집안에 술상 심부름하는 중노미놈하며 부엌데기들과 이웃간에서도 몰려온 여러 얼굴들이 방문 밖에 가득히 웅성거리며 살기 어린 방안의 광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례를 바꾸올지?"
양예수의 이마의 진땀을 건너보며 유의태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어렸다.
"호침까지의 경지의 의원이라면 나으리의 말대로 조선팔도 안에 삼태기로 건질 만큼 많을 거외다. 하나 나라 안 첫째 솜씨라면 마저 둘을 찔러야겠지요. 찔러도 닭이 아파하지 않는 곳, 이걸 몸안에 찔린 채로 닭이 멀쩡히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어디서 어디로 찔러야 하오니까? "
양예수의 핏기가 가셨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모르시오? 바로 여기외다."
유의태의 장침이 닭의 꼬리 쪽에서 깊숙이 몸통 속으로 박혀갔다.
순간 양예수가 "건방진!" 하며 신음 같은 원한을 뱉더니 자기의 남은 장침과 대침을 닭의 몸통에 꽃았다.
그 양예수의 닭이 퍼덕거릴 뿐 방안은 숨소리도 나지 않았다.
유의태가 마지막 아홉번째 자기의 대침을 집어 닭의 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 유의태의 닭도 마구 화닥닥거렸다.
이어 유의태가 양예수의 얼굴을 향한 채 기생들에게 소리쳤다.
"비키거라, 모두!"
마루와 마당에서 얼굴과 고개를 들이밀고 숨을 삼키고 있던 구경꾼들이 화닥닥 비켜나고 물러났다.
그 허리와 다리 사이로 마당에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는 이가 없는 속에서 양예수는 꼼짝도 않았고 서슬에 겁먹은 기생이 화당탕 방문을 열었다.
유의태가 자기의 닭을 집어 묶은 새끼를 풀어내고 방문 밖으로 내던졌다.
그 닭이 마루 위에 떨어졌다가 날개를 활짝 펴 퍼덕이며 마당으로 날았다가 요란히 구구거리며 도망쳐갔다.
사람들이 탄성을 내는 소리가 일제히 났다.
유의태가 양예수를 바라보았다.
"나으리도 던져보시지요."
양예수는 움직이지 않았고 그 양예수를 수행해 있던 김민세가 대신 양예수의 닭을 마당으로 던졌다.
그러나 철썩 던져진 양예수의 닭은 눈 내리는 마당에서 두어 번 마지막 날개를 퍼덕이고는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로 어디로 사라졌던 유의태의 닭이 구구거리며 오가는 것이 보였다.
침묵을 깨고 양예수가,
"의원이 아니라 닭 백정을 하던 놈이로고." 했고,
"가시지요."
하고 수행자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자 튕겨일어난 유의태가 그 방문을 가로막고 소리쳤다.
"약속 이행하오!"
"비켜라!"
두엇 수행자가 가로막고 나섰고 유의태도 마주 소리쳤다.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 그 말뜻쯤은 아는 차림들이오만."
"무에 어째!"
그중 성급해 보이는 관원이 눈을 치떴을 때였다.
순간 양예수가 지금까지의 이 일은 모두 잠시의 장난이었던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약조를 했지, 핫핫. 자네 이름을 불러달라고 했던가?"
"그렇소. 유의태란 이름을,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노라고."
"하지 백 번이고 해주지, 헛헛.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네, 됐는가?"
"두 번 더!"
"비키거라!"
"두 번 더 하시오."
순간 농담으로 자존심을 버티려던 양예수의 얼굴이
유의태의 눈빛 앞에서 참담하게 바뀌어갔다.
"두 번 더."
유의태가 다시 가차없이 요구했고
수행자가 삿대질로 가로막고 나섰다.
"중갓도 간신히 쓴 주제에 언감 큰갓 쓴 종5품 관원을 욕보일 셈이냐."
"장부의 약속인데 갓의 크고 작은 것이 무슨 상관이오. 두 번 더 하시오. 어서!"
이윽고 양예수의 입이 독약을 삼키듯이 유의태의
요구를 입밖으로 밀어냈다.
"영남 산청 사는 유의태는 조선 제일의 명의외다."
"마저 한 번."
살기 어린 양예수의 눈이 유의태에게 박히더니
돌연 유의태를 밀어붙이며 방밖으로 나섰다.
유의태가 그 뒤통수에 웃었다.
"술상 내시오. 그것도 약속이었은즉슨 ! 핫핫핫."
수행원이 기생의 발치에 한 뼘이나 될 돈꿰미를 던졌다.
"차려내거라."
이어 그 말과 함께 누군가의 주먹이
웃고 있는 유의태의 얼굴을 쳤다.
유의태가 기생들의 발치에 나뒹굴었고 몇 사람이 그 유의태를 밟고 걷어찼다. 그러나 유의태의 입에서 터져나온 건 비명이 아니고 가가대소였다. 김민세가 동패들의 폭력을 떼어놓고 씩씩거리는 그들을 데리고 사라진 후에도 유의태의 웃음소리는 계속됐다.
교만한 웃음이었다.
젊은 날 자신의 재주를 과신하고 물불을 모르는 좀은 패기도 있는.
"그래서?"
하고 안광익의 묻는 소리가 났다.
유의태의 20년 전 과거 얘기는 끝난 듯했다.
"그 길로 고향에 돌아와 한양 쪽엔 발길도 않았어. 그리고 그걸 오히려 지금은 다행이다 여기네."
"출세의 꿈이 꺾였는데도 다행이다?"
"그날 밤중에 민세가 찾아와 우린 친구가 됐지. 민세와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어."
"친구 한 명과 출세와 바꿨단 얘긴가, 핫핫."
"암튼."
"그래 암튼?"
"그 사건은 내게도 여러 가지 큰 교훈을 주었지. 내 행동이 지나쳤다는 스스로의 반성도 있었고 왜 굳이 조선 제일이어야 했는지 그런 허세에 매달린 내가 자다가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좌우간 그런 여러가지 느낌과 깨달음이 오히려 내가 그뒤로도 의업에 더 정진한 계기가 됐지."
" ..."
"만일 그때 내의원에 붙어 제법 궁내에서 알려지는 재주로 풀렸다면 난 그걸로 더 소원이 없는 한 교만한 내의원 의원으로 끝났을 테니까."
이때 병사 쪽에서 황급히 들어오는 도지의 모습이 보였고
그가 허준을 보자 의아해서 소리쳤다.
"아니 병사에선 그토록 찾았는데 예서 뭘하고 있었던가."
"안 그래도 막 건너가려던 차오만."
"병사의 바쁜 일은 끝났네. 그보다 집에서 아이가 달려와 그댈 찾는 눈치던걸."
"아이라, 내 자식이 말씀이오?"
"그렇네. 보아하니 눈물 콧물 흘린 모습이던데 나가 보게."
허준이 중문을 나서는 등뒤에서 도지가 사랑 앞에 서서
"아버님, 회진 시간올시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겸이 녀석은 달려오며 몇 번이나 넘어졌는지
무릎팍이 깨지고 앞섶도 흙투성이였다.
영문을 물으니 할머니가 떡목판 이고 나가고 한참 지났을 때 방죽골 우진사댁 사람들이 몰려와 어머니를 잡아갔다는 얘기였다.
"잡아가다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울음 그치고 찬찬히 말을 해."
녀석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우진사집에서 엊그제 바느질품거리를 어머니가 받아왔는데 그 집에서 내준 옷감만 들고 온 아내에게 오늘 그 집 하인놈과 여자들이 몰려와 그 옷감 속에 함께 싸두었던 비단 한 감의 행방을 대라는 것이었고 아내가 그런 걸 가져온 적이 없다 하니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집도 비었고 우리들 밥을 차려주고 뒤따라간다카이까 막 어머니한테 도둑년이라고 욕을 퍼부으면서 데려갔습니다."
"도둑년?"
"내 귀로 들었습니다. 그래 지가 어머니하고 같이 갔더니 그 집 안방 할무이 방 앞으로 끌려가선 몸종애가 어머니 머리카락을 잡고 ..."
허준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집으로 돌아가 있어."
그 말을 내뱉고 허준은 머리끄덩이를 꺼들려 있다는 방죽골 우진사집을 향해 달렸다.
그 입에서 참기 어려운 짐승 같은 신음이 자꾸만 터져나왔다.
달려온 허준이 우진사의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높다란 담안에서 여자의 자지러지는 비명이 들렸다.
그 닦달질이 이미 한참 동안 계속된 듯 골목 안에는
마을 아낙들이 여기저기 몰려서서 숙덕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허준은 주먹이 깨어져라 거푸 대문을 쳐댔다. 곧이어 대문 안에서 인기척이 달려와 대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난 건 기골이 장대한 젊은 하인과 키가 큰 늙은 하인이었다.
"이 댁이 감히 뉘 댁인 줄 알고 이토록 방자하게 소란을 떠는 게냐!"
"나 유의원댁에 있는 허준이란 사람이오!"
"한데!"
집안에서 또 한번 여자의 까무라치는 듯한 비명소리가 터졌다. 허준의 말씨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내 집사람이 대체 무슨 일로 여기에 불려와 있는지 영문을 알고자 왔소."
"영문?"
젊은 하인이 우진사의 권세를 업고 눈을 치떴고 오히려 늙은 쪽이 더 나섰다.
"누군지 알겠다. 안 그래도 우리가 너를 데리러 달려가려던 길이다. 썩 들어와, 이자야!"
허준 정도는 마음놓고 해라를 해도 된다는 듯이 늙은 하인이 대뜸 허준의 어깻죽지를 잡아채어 대문 안으로 끌어들였고 젊은 녀석이 허준의 퇴로를 차단할 듯이 대문을 닫아걸었다.
그때 무릎팍이 깨지면서 달려온 겸이가 아버지를
거푸 불러대며 닫힌 대문을 향해 울음을 터뜨렸다.
집안은 내외도 없었다.
상대가 미천한 출신이라고 보아서인지 큰사랑 앞 수석이 배치된 마당의 광경은 대물림을 한 낡은 형틀에 나이깨나 든 여종이 두 팔을 잡아묶인 채 엎드려져 난장을 맞으며 연신 비명을 내지르는 중이었고 아내 또한 머리끄덩이를 휘둘리고 저고리 앞섶도 터져나간 참담한 몰골인 채 댓돌 아래 내꿇려 늙은 진사의 고함소리를 듣고 있었다.
허준은 눈이 뒤집혔다. 대뜸 우진사의 앞으로 뛰쳐나가 "영문을 대오!" 소리친 순간 형틀 주위에 늘어섰던 남은 하인들이 그 허준의 덜미를 잡아나꿔 꿇렸고 반항하는 허준에게 쏟아진 것 뭇매였다. 아내가 비명을 질렀고
그 소란은 우진사의 호통소리에야 그쳤다.
허준 일가에게 씌워진 혐의는
늙은 마누라의 저고리 한 감짜리 비단의 행방이었다.
특히 그 동안 허준 일가가 살림이 쪼들릴 적마다 아끼던 옷가지를 하나씩 내다 판 것이 소문으로 나 있어 천한 것들의 집안에서 그런 상질의 옷가지가 나왔다는 것까지 의심받아 아내가 삯바느질 일감을 받으러 올 때 사람 빈 틈을 타 싸들고 갔다고 눈으로 본 듯이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의 당시의 상황 설명따위는 귀담아 듣기는 커녕 기어이 아내를 앞장세우고 하인들을 딸려 집안뒤짐을 보내는 것이 아예 아랫것들은 모두 도둑놈으로 치부하는 말투가 역연했다.
어쩌면 그건 또 소과 초장(진사의 자격)으로 끝나 벼슬길이 막힌 포한을 이럴 때 신분상 무저항일 수밖에 없는 아랫것들에게 마치 동헌 교의 위에 높다라니 앉아 진짜 죄인을 다스리는 양 권세의 쾌감을 즐기는 그런 모습이기도 했다.
허준은 아내의 말에 맞추어 집안에서 나온 옷가지는 그 동안 더러 병을 보아준 이들로부터 사례받은 것이노라 애써 강변하고 신분을 바꾸고자 이 산청땅에까지 흘러온 과거사는 감추었으나 분하고 억울한 감정까지는 감추지 못하여 눈빛이 양반에게 무엄하다는 고함과 함께 코피가 터지고 입술도 터지고 말았다.
집뒤짐을 하러 간 하인들이 허탕을 치고 다시 아내를 끌고 돌아온 뒤 결국 이 사건은 매질을 견디다 못한 몸종이 훔친 비단자락을 찬광 천장에 숨겼노라 자백함으로써 일단락되었으나 한껏 매질과 수모를 당하고 중문을 나서는 허준 부부에게 우진사도 그 늙은 아내도 한마디의 사과의 말이 없었다.
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며 밤 깊은 우진사집 대문간을 나서자 골목 어귀에 숙영이를 데리고 서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 며느리를 쓸어안았고 오히려 겸이 녀석이 피칠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옷자락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고 집으로 오는 동안에도 녀석은 혼자 내내 울먹였다.
그리고 비록 흑백은 가려졌으나 집뒤짐을 당한 도둑 누명이었음에서 이후 마을 사람들은 허준 일가를 경원했다.
자기의 아들딸이 허준의 자식들과 얼려 노는 걸 보면 큰일이나 날 듯이 자기 아이들을 부르고 또 그 손을 잡아 끌고 가곤 했다.
'잊고 있었어 ...'
허준은 그 마을 인심을 원망하기보다는 자기의 미천한 신분에 대한 한을 새삼 어금니로 지그시 되씹었다.
허준 일가에게 씌워진 그 누명은 의원에도 퍼졌고 옳다구나 하고 소문을 더 찧고 까분 건 영달, 꺽새였고, 임오근 또한 허준에게 닥친 이 억울한 사건에 관해 위로의 말이 없었다.
허준은 한 가지 깨달은 느낌이었다.
자기를 둘러싼 벽은 잘난 양반네 만이 아니고 같이 미천한 신세로 희노애락을 함께 해야 할 인간들도 기회만 있으면 서로 물고 뜯는 각박한 인심임을 ...
그런 밖에서의 분위기를 그녀 또한 마음에서 겪고 있는지 아내는 남편이 있는 날이면 애써 웃음을 만들고 집안 분위기를 추스르려 했으나 아내의 그런 눈물겨운 노력을 알면서도 허준은 점차 더 과묵한 인간으로 바뀌어갔다.
가슴속에 끓는 건 세상에 대한 적의뿐이었다.
아니 허준보다 더 말수가 적어진 건 아들 겸이었다.
그리고 그 겸이가 어느날 아침
아비가 애써 써준 천자문을 아궁이 속에 태워버린 걸 알았다.
그 어린것의 어린것답지 않은 결심에 허준의 피가 또 한번 부글거렸으나 허준은 그 얘기를 전하는 아내의 젖은 눈을 향해 살기 어린 눈을 치뜨다가 그만두었다.
울어서 해결날 일이 아니잖은가.
미천한 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한 양반이 주는 수모 따위 아들 겸이도 조만간 겪어야 했던 사건이요 아내 또한 자기 같은 상것과 혼인한 이상 각오하고 있던 일이 아니던가.
"내버려두오!"
사건 후 엿새 만에 허준이 아내에게 내뱉은 유일한 한마디였다.
겸이에게는 행동의 변화도 왔다.
마을에서 따돌림을 당한 녀석은 걸핏하면 의원에 나타났다.
그 의원 역시 제 말동무가 없는데도 때도 없이 병사 마당에 슬며시 나타나서는 더러 아버지의 눈길과 마주치면 맥없는 웃음을 씩 웃고 비척거렸다.
그러나 허준은 아들의 그런 변화에 애써 아는 체하거나 말을 걸어주지 않았다. 더러 점심상을 받을 때 좀전에 병사 문간에 서성이던 아들이 저 밖 어디에서 혼자 자치기라도 하며 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으나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녀석도 배고픈 걸 참는 것쯤 이력이 나 있었고 의원에 와서 밥이나 얻어먹는 따위 재미를 붙여주고 싶진 않아서였다.
녀석의 외로움이나 나름대로의 마음고생 속에서 스스로 무엇을 찾아낼지 지켜보는 일뿐 잠시 입에 발린 위로 따위가 무슨 소용이랴 싶은 것이다.
하나 더러는 밤늦도록 병사 귀퉁이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아버지의 귀가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아들의 조그만 모습을 발견하고 함께 집에 돌아올 때면 갑자기 말이 많아져서 종일 보고 들은 것들을 밑도 끝도 없이 떠드는 아들을 향해 허준은 혼자 코끝이 울 때가 있었다.
허준은 아비로서 아들에게 자신있게 보여줄 그 무엇도 자기에게 없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그 겸이에게 또 하나의 변화가 생겨났다.
늘 할머니와 함께 자는 것으로 알고 있던 녀석이 어느날부턴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는 날이면 재빨리 제 베개를 집어들고 뒤꼍 아버지의 방으로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건 지난날 양반댁에 끌려가 매맞고 돌아온 아버지가 아직도 동정이 가는지 근래 한껏 말이 없어진 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어린 제 고민의 어떤 일체감을 느껴서 하는 행동인지는 알 수 없되, 그 방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방이노라고 할머니가 꾸짖어도 녀석은 건너가지 않는 날이 많았다.
그런 밤 허준은 그 잠든 아들을 가슴에 품고 이 아들에게만은 신분에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줄 수 없을까 뜬눈으로 밤을 지새곤 했다.
하나 그건 아무리 간절한 염원이요 자신의 목숨하고라도 서슴없이 바꿔줄 소망이되 날이 밝으면 한가닥 희망도 남지 않는 덧없는 꿈임을 허준 자신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위덩이 같은 절망이었다.
'혼인만 하지 않았다면 ... 이 아비밖에 쳐다볼 줄 모르는 저 자식들만 없다면 ... 그리고 어머님만 아니 계셨던들 ...'
속에 끓는 이 한을 굳이 삭이려 애쓸 것 없이 이 시답잖은 세상 팽개치고 변돌석이가 가 있는 섬으로라도 건너가서 한세월 고기나 잡으며 보내고 싶다는 밑도 끝도 없는 탄식이 새벽 집을 떠나 의원으로 향하는 허준의 가슴속에 자꾸만 쌓이고 있었다.
그 어느날이었다.
유의태의 방으로 불려간 허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방안에는 병사 쪽에서 상화의 안내를 받아 건너온 큰갓 쓴 중년의 양반 두 사람이 유의태와 수인사를 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창녕 성대감댁이라니요?"
"그댁 마님이 중병이라 하시니 가서 용태를 살피고 오너라."
"소인이 말씀이오니까?"
"병세를 들으니 중풍이다. 거기에 상응하는 약재를 갖추어 이분들과 함께 떠나."
"아니 유의원."
하고 두 사람 중 연장자인 사십대의 큰갓이 안색을 바꾸며 유의태의 말을 제지했다.
"아버님께선 꼭 그대를 데려오도록 특별히 당부하시어 우리가 달려왔는데 대체 이잔 뉘란 말이오!"
"믿어볼 만한 아이외다."
계속 ~~
[著者: 放送作家 故 李恩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