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5월 개장을 앞두고 한창 공사가 진행중인 '송상현 광장'. 전문가들은 부산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살리면서 광장 본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뜻을 모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국제신문 DB
■광장이 열린다
대한민국 대표 광장은 어디일까. 광화문 광장? 서울 광장? 우리가 보아온 광장이 이런 곳뿐이니 어디를 더 꼽겠는가.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육조거리인 서울 세종로 중앙에 길이 740m, 폭 34m로 조성된 광장이다. 누가 보더라도 대표성·상징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 서울광장은 서울시청 앞에 자리한 약 4000평의 타원형 잔디 광장. 이곳에선 사계절 내내 축제나 행사가 잇따른다. 지방에서 보기에 이들 광장이 부러웠던 게 사실이다.
내년 5월쯤이면 사정이 달라진다. 부산에 송상현 광장이 열리기 때문이다. 길이 700m, 너비 45~78m, 총면적 3만4740㎡로, 광화문 광장보다 크다. 한쪽 차로를 완전 차단하고 광장으로 활용할 경우 20만 명은 거뜬히 모일 수 있다고 한다. 이 광장에 무엇을 담고 어떤 문화·사회적 비전을 실현할 수 있을까.
■송상현 정신 풀어내기
먼저, 명칭을 '송상현'이라 정한 이상, 임진왜란 때 길을 지키다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충절, 저항, 공(公)의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폭넓게 제기된다.
"송상현이란 역사 인물이 던지는 현재적 메시지는 공적 가치의 회복이다. 개인주의가 만연하면서 사적 이익, 사적 감정이 넘치고 있는 요즘 공(公)의 가치, 타자를 위한 배려는 중요한 정신적 가치가 될 수 있다. 시민의 일상적 삶속에 이런 가치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문화적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다."(남송우 부산문화재단 대표)
"시민들의 기대는 크지 않은 것 같더라. 광장을 시민사회와 소통하며 만드는 게 아니라, 대형 교통시설물 설치하듯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라도 별도 사이트 등을 통해 시민 목소리를 담는 '민의의 아고라'를 열었으면 한다. 역사성을 살리려면 동래읍성 축제 때 재현되는 임진왜란 전투상황극 같은 것을 상설화 하여 공연하는 방안이 있다. 그걸 보면서 뭔가 찡하고 와닿는 게 있었다. 이런 걸 시민이 공유하고 체화하는 게 중요하다."(김해몽 부산시민센터 센터장)
"송상현 광장 조성을 계기로 잃었던, 아니면 잃어가고 있는 부산정신을 되찾았으면 한다. 여기에 송상현은 상징적 중심인물이 될 수 있다. 다양한 논의를 거쳐 부산정신을 회복하여 미래 100년 부산발전의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내년 광장 오픈 때 왜군과 일제에 의해 무참히 숨겨간 무주고혼을 위한 지신밟기 같은 이벤트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안청자 부산시 평가담당관실 도시브랜드 사무관)
안 사무관은 시민적 관심을 유발하기 위해 다음달 26일 '부산스타일의 광장을 위하여- 송상현 광장 브랜딩 전략'을 주제로 포럼을 열 계획이라고 했다.
■역사성에 묶이는 건 곤란
이런 견해와 달리, 특정 인물 위주로 지나치게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광장의 본질을 놓칠 수 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부산의 역사인물이 송상현만 있는 게 아니다. 임진왜란의 평가도 복잡한 면이 있다. 일례로 왜란 7년간 부산에서 부역(附逆)을 가장 많이 했다는 말도 있지 않던가. 송상현은 이미 충절, 충의의 상징으로 많이 현창됐다. 시민 사회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가치, 그것을 찾아내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양맹준 부산시립박물관 관장)
"역사성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면 과거에 묶인다. 광장 이름에 송상현을 넣은 건 아직도 의아하다. 이곳은 어떤 기념공원이나 현시공간이 아니다. 광장 본래의 의미를 살려 누구나 쉽게 모이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접근성인데, 서면의 젊은이들을 유인하는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차철욱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교수)
광장 명칭에 대해 역사학자들이 더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주목할 대목이다. 부산의 역사인물이나 정신사에 대한 논란이 정리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부산 스타일 만들기
많은 전문가들은 부분적으로 지역 정체성과 역사성을 살리되, 광장의 본래 기능을 다하게 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나아가 '부산 스타일'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송상현 광장 자리는 지리적, 역사적 의미가 중첩되어 있다. 원래 백양산에서 황령산을 잇는 지점(모너머 고개)이었고, 동래부와 부산부의 접점이면서, 물자수송 철도(우암선)가 지나간 곳이었다. 그러나 도시개발로 이러한 연결성이 깨졌다. 따라서 중앙대로에 들어서는 송상현 광장은 과거 연결성을 회복하는 가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막히고 맺힌 것을 풀어내고 이어내는 공간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말이다."(김승남 일신설계종합건축사사무소 사장)
"사회적 열림과 어울림, 풀림의 공간으로 만들어갔으면 한다. 지금쯤은 슬로건도 필요하다. 가령 '광장에서 부산을 열다' 또는 '광장에서 대양으로!' 식으로. 흐름과 소통을 넘어 미래지향적 공유 가치에도 눈떠야 한다. 이곳에서 많은 시민이 참여하는 부산 스타일의 거리축제를 만들 수도 있다."(민병욱 부산대 대학원 예술문화와 영상매체 협동과정 교수)
■광장(廣場)을 찾아서
최인훈은 장편소설 '광장'에서 한 지식인의 외로운 자기 성찰을 밀실과 광장의 대비를 통해 절묘하게 묘사해냈다. 민주주의와 근대성의 정착을 '광장'이라는 이상 속에 담으려 한 것이다. 밀실이 개인의 내밀한 삶의 공간이라면, 광장은 사회적 삶의 공간을 의미한다. 광장은 이념적·정치적으로 열린 사회를 함축한다. 축제와 놀이가 펼쳐지는 한편 사회적 약자들의 합법적 집회가 열릴 수도 있다. 그야말로 민의의 분출 공간인 것이다.
광장의 사전적 의미는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여러 갈래의 길이 모일 수 있도록 넓게 만들어 놓은 마당'이다. 영어로는 'square' 'place' 'plaza' 'triangle' 등으로 표현된다. 서구 개념인만큼 서구에서 발달했다. 매력적인 도시에는 어김없이 상징적 광장이 있다.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몰 광장,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 이탈리아 로마 나보나 광장,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 등이 그런 곳이다. 이들 광장은 그 도시의 얼굴이자 관광 랜드마크다. 주변에 공공 전시관, 아트마켓, 바, 카페, 상점들이 들어서 만남·소통·나눔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한국은 지금까지 광장이 없었을뿐더러 그러한 문화도 없었다. 송상현 광장은 광장문화 실험의 장이 될 수도 있다.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은, 광장은 공원이나 거대한 정원, 테마파크와는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 MIT대학의 세계적 디자이너인 존 마에다는 말한다. "광장 디자인의 핵심은 단순함과 관계성이다."
부산 스타일의 광장 문화 창출을 위해 지역사회가 유쾌한 논의의 광장을 열 때가 왔다.
# "광장의 본질, 비우는 게 채우는 것"
■ 송상현 광장 설계자 차욱진 두인 D&C 대표
두인D&C 차욱진(50·사진) 대표는 부산 송공삼거리를 지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조마조마하다. 애 낳은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송상현 광장' 설계자로서 궁극적으로 이 광장이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관심을 쏟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광장에 누구보다 깊은 애착을 갖고 있는 차 대표를 만나 설계 그후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설계의 기본 콘셉트는 뭐 였나.
"'흐름과 소통, 그리고 미래광장'이다. 시간과 사람의 흐름을 디자인하고, 푸른 도심을 만들기 위한 상징적 오픈 스페이스를 꾸미며, 도시속 유연한 땅을 만든다는 개념이다."
-설계 원안이 어느 정도 반영돼 공사가 되나 있나?
"교통체계와 입체 디자인 부분에서 다소 변경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설계 원안의 90% 이상은 반영된 것 같다."
-설계 때 어디에 주안점을 두었나.
"송상현 동상이 놓이는 부분은 역사마당, 서면 방면 아래에는 문화마당을 뒀다. 다이내믹 마당이라 명명된 중간 부분은 되도록 비우는 방향으로 설계했다. 볼거리도 최소화 했다. 그야말로 광장을 구현하고자 했다."
-비워서 뭘 채우겠다는 건가.
"활동 공간을 넓혀놔야 상상력이 채워진다. 미래 세대들에게 공간 선택권을 주자는 뜻도 있다."
-설계는 됐는데, 적용이 안된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우암선 스테이션이 빠진 점이다. 우암선은 옛 하야리아 부대(현 부산시민공원)에서 송상현 광장을 가로질러 북항(우암동 적기)까지 이어지는 물류수송 철도였다. 지금은 폐쇄됐지만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곳을 살려 문화골목으로 만들려고 했는데 계획이 일단 보류된 것으로 안다."
-우암선 옛길을 이용하면 부산시민공원과 10분 거리라는데.
"그렇다. 최적의 보행 동선이다. 전체를 살려놓으면 앞으로 동천 물길이 열릴 경우 도심의 문화생태축이 될수 있다. 지구단위 보존 계획을 세워 반드시 지켜야 한다."
-광장의 잔디가 특별하다고 들었다.
"밟힐 수밖에 없는 잔디의 내구성 강화를 위해 '매시 얼라이먼트'라는 특허 공법을 시행한다. 국내에서 이걸 적용한 사례는 별로 없다.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앞으로 추가로 해결돼야 할 부분은.
"부전역 역세권과의 지하 연계 부분이다. 선큰 광장 지하를 -7m로 하여 예산만 있으면 연결되게끔 해 놓았다."
-전체적으로 광장 접근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
"사람이 모여야 광장이 되는데, 유인책이 좀 없다는 생각이다. 게다가 외국의 유명 광장처럼 주변 콘텐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국은 부산시민공원으로 통하는 우암선 옛길을 살리고, 동천길을 확보하면서 서면에서 많이 올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관건이다."
한편 부산시는 재정 문제를 이유로 우암선 스테이션 및 횡단육교를 장기 과제로 돌렸다고 했다. 하지만 지구단위 보존계획을 세워 부산시민공원과의 연계 보행로는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광장 개장은 당초 내년 5월로 잡았으나, 빠르면 내년 3월에도 가능할 수 있다"고 전했다.
※ 공동기획: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부산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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