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그러움'
내 어머니가 늘 하신 말씀,
"아이들을 억울하게 하지 마라!"
"너무 억울하니까 아이가 죽더라!"
내가 상담하면서
깊이 깨달은 건
바로 그거였다.
풀지 못하고,
가슴 깊이 맺혀있는 일이 있는 니들,
거기 멈춰 있어,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
뜨개질하며,
책 읽으며,
틀어 놓은 tv에
수많은 연속 방송극.
그런데 어쩌면
거기 모두 같은 이야기들,
너그러운 사람들과
앙심먹은 사람들의 대결 구도.
작가들도 모두
앙심먹은 사람들에 깊이 덴 사람들인가?
열심히 보는 시청자들도 그런가?
그런데 예외없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들은
자기도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상처주는 방식밖에 모른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 상처만 아프단다.
"그런데 너는 왜 멀쩡하니?"
"너도 나 만큼 아파봐라."
"아니 나보다 더 아파야 한다."
바이러스를 펼치듯 아픔을 퍼뜨린다.
자기 자신도 괴롭다.
뜨개질 하며,
책읽으며,
켜놓은 tv에
정치인들이 서로를 향해 험한 말을 내뱉는다.
언론은 그런 장면을 골라서 내보낸다.
어린이 집 교사는 아이를 함부로 다룬다.
영아실 간호사 간난 아기를 내동댕이질 한다.
마스크 하라는 택시 기사분,
마스크 하라는 버스 기사분을 마구 때린다.
'너그러움'을 찾으려면
대낮에 등불들고 다녀야 할까?
모람네 집 이야기다.
맏이로 태어난 초등생 어린 딸이 있다.
동생이 둘이다.
언니 누나 역할을 해야한다.
동생들이 있어 좋다.
동생들이 언니 누나를 좋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언니 누나가 원하는 방식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다.
언니 누나를 괴롭게도 한다.
그러면 당연히 짜증이 난다.
"이러지 말라니깐!"
예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빠가 달려온다.
"누나가 동생을 사랑해야지!"
더 큰 목소리로 야단친다.
"억울해!"
"너무 억울해!!"
"아빠는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아!"
학교가는 길에 공연히 걸린 돌을 찬다.
아이 가슴이 답답하다.
아이들 사이의 우애를 기르고 싶은
아빠의 마음 알지요.
어느 아이도 억울하지 않아야
제대로 우애도 자란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요.
큰 아이 마음도 볼 수 있고,
작은 아이 마음도 볼 수 있어야
두 아이 사이의 우애도 자랄 수 있지요.
옛날 다른 나라에서
억울한 일이 있는 여자는
남편이 대신 법에 소송을 해주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오랜전 이씨조선 시대에
벌써
여자 노비가,
한문만이 인정된 글이었던 그 시절에
한글로 소송을 한 기록이 있다 한다.
'사무친 원한'은 풀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한여름에도 서리내린다" 했다.
품을 한이 우리네 여성들에게 많았나 보다.
남들 마냥
부부 사이에 대신해 줄 것이 되지 못했나 보다.
아프거나,
좋거나,
쓰거나,
달거나
표현해 버릇할 것을!
또
아프거나 좋거나,
쓰거나 달거나
들어줘 버릇 할 것을!
"그까짓 걸 가지고!"
넘겨버리지 말 것을!
너그러움의 첫 발인 것을!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간단한 것을 하지 못했을까?
그 간단한 것을!
듣고,
말하기라는 것을.
내 아이를 내가 귀히 여기지 않았나?
그러면서
내 아이가 누구에게 존중받기를 기대하나?
나도 나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나?
그러니 앙심먹고 비틀지.
내 이웃을 존중하지 않았나?
잔뜩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게 되지.
국민이 뽑은 동료 대변자를 무시했나?
그건 나라의 주인이라는 국민을 무시한 것일지니!
자격 상실인 것을!
너그러히 제대로 서로 존중하며,
너그러히 제대로 존중받으며
함께 살면 좋을 텐데...
너그러히 박쥐도 존중받았더라면
'왕관표 바이러스 19'도 없이
평화스러운 성탄과 새해 맞이를 했을 것인데...
ㅁㅇㅎ
첫댓글 계간지 방으로 글을 옮겨왔습니다!
"너무 억울하니까 아이가 죽더라"하신 김신묵 선생님 말씀에 벌써 앙금이 풀어집니다. 온갖 무게에 눌려 엄마 눈치보느라 동생들에게 화풀이 했으니 동생들은 또 누구에게 풀었을지. 그래서 내리사랑이 아니라 폭력 천지를 만든 이유를 알겠어요. 화병이 끓는 이유도 연결지어 생각해봐요. 한번 어렴풋이라도 표현못했다가 이제 어른되니 제 얘기만 중요한걸요. 표현해야하고 들어야하고.. 균형 찾고 싶어요.
듣기가 만들어내는 너그러움. 제대로 듣기가 이런 건가 싶을 만큼 그걸 모르고 놓쳤구나 많이 실감합니다. 듣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하거나 너그러울 수도 없는데도 말이죠.
아! 내가 제대로 산다는 증거가 너그러워져야한다는 거에서 더 넓게 생각되요.
내가 남을 듣지못해서, 괴롭히면서, 알트루사에서 들어주는 이들 땜에, 너그럽다는 말을 알게 되었는데, 나만 아는구나 여전히! 싶습니다. 기획회의에서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