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중 제3주일 강론 : 갈릴래아 전도 시작(마르 1,14-20) >(1.21.일)
*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잘 전하겠다고 결심하면서 오늘 미사를 봉헌합시다!
1. 어제 (1/20) 비가 왔지만, 주일학교 학생들, 교사들, 자모들과 함께 경주월드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눈썰매 5회, 매직 바이크 2회, 범퍼카 1회를 탔습니다.
오늘(1/21)은 성녀 아녜스 축일이며, 우리 교구 제2주보 성 이윤일(요한) 축일입니다. 올해는 이윤일 성인 순교 157주년, 우리 교구 제2주보로 선포된 지 38주년 되는 해입니다.
성인은 1815년 늦가을에, 충청도 홍주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당시 조선왕조는 정치 세력다툼으로 백성의 삶이 점점 궁핍해졌습니다. 당파싸움 여파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어, 1801년에 수많은 신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충청도 내포지방 사도로, 그 지역 신자들이 존경한 이존창 (루도비코)의 순교 때문에, 그 지역 교우들은 불안했습니다. 또한 1814년에는 전국에 홍수 때문에 생활도 큰 곤경에 빠져 있었고, 천주교를 박해하던 무리는 신자들을 더 괴롭혔습니다. 그래서 이윤일 성인 가족은 고향을 떠나, 경상도 상주 갈골에서 살게 되었고, 부친이 돌아가신 후, 성인의 처갓집 식구들이 살던 문경 여우목(호항리)으로 이사했습니다.
큰 키에 숱이 많고, 긴 수염으로 위풍당당한 용모와 온화한 성품, 지극한 효성으로 많은 사람에게 모범이었던 성인은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며, 외교인들을 입교시키고 신자들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었고, 11월 18일 포졸들이 여우목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박해를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체포되신 성인은 문경 관아에서 상주로 이송되는 동안, 혹독한 고문과 형벌을 받으면서도, 함께 잡혀온 다른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온갖 고초를 끊임없는 기도로 이겨냈습니다.
‘사교의 두목’이라는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성인은 기뻐하며 자녀들에게 “나는 이제 순교하러 떠난다. 너희들은 집에 돌아가, 성실하게 천주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하여라. 그리고 꼭 나를 따라 오너라.”고 당부했습니다.
1867년 1월 21일, 성인은 사형집행 전에 주는 마지막 음식을 다 먹은 후, 대구 남문 밖 관덕정으로 끌려 나갔는데, 집행관이 선고문을 낭독하자, 품속에서 돈주머니를 꺼내어 희광이에게 주며 “여보게. 이것 받아주게. 내가 죽는 마당에 이것을 품속에 넣은 채 죽겠는가? 저승에서는 이런 것이 필요 없다네. 그러니 나를 위해 수고하는 자네들에게 주는 거니 받아주게. 그 대신 내 청 한 가지만 들어주게나. 자네들이나 나나 고생하지 않기 위해서 한 칼 단번에 내 목을 잘라 주게.”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말은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내려가는 계단에 적혀 있는 글귀입니다.
성인은 경건하게 십자성호를 긋고, 목을 숙여서 칼을 받았는데, 돈을 준 덕분에 성인의 목이 한칼에 떨어졌습니다. 형장 근처에 임시보관되었던 유해는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모셨다가, 경기도 용인군 묵리,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을 거쳐, 1987년 1월 21일 대구 성모당에 안치되었는데, 당시 우리 교구 교구장님이셨던 이문희(바오로) 대주교님은 그날, 성인을 우리 교구 제2주보로 모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 후 1991년 1월 20일, 관덕정에서 이 대주교님의 주례로 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되었습니다.
이윤일 성인은 1968년 10월 6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천주교회 200주년을 기념하던 1984년 5월 6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서울 여의도에서 동료 순교자 102위와 함께 시성되었습니다. 우리 교구의 중요한 성지이기 때문에, 관덕정에 가서 이윤일 성인의 신심과 순교정신을 배워야겠습니다.
2. 어떤 교구에 동창신부 둘이 있었는데, 한 분은 산골짜기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가톨릭 농민회 전국 지도신부로, 무너져가는 농촌을 보며 마음이 아파 70세까지 18년 동안 농사일을 했습니다. 다른 분은 전문대학의 학장이었습니다. 전국 전문대학 학장연합회 회장도 하며 10여 년간 근무하다가 정년퇴직했습니다.
두 신부님은 학생시절부터 40년간 친한 친구로 지냈습니다. 유신독재 시절엔 사회운동을 하다가 짧았지만 감옥에도 함께 다녀왔습니다. 50대 중반에 학장이 된 신부님은 산골에서 농사짓는 친구 신부를 자주 찾았습니다. 함께 식사하고, 여러 얘기를 나누며 우정을 쌓았습니다. 학장이란 자리 때문에 보수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위험을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명은 우리나라 상류층 사람들과 오랫동안 살았고, 다른 한 명은 가난한 농민들과 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점점 달라졌습니다. 사회 정치의식에 대해 이견이 없었지만, 의견충돌이 조금씩 일어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두 사람 간에 말다툼이 일어난 후, 안타깝게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두 분 다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누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간의 우정도 그들의 마음을 일치시키지 못했고, 돌아가실 때까지 화해하지 못하다가, 두 분 다 72세에 심장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처럼 누구를 만나고, 또 삶의 자리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의식과 생활이 결정됩니다.
어떤 주교님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소임을 옮기신 후에, 그전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아지셨습니다. 그 원인을 묻자, “만나는 사람과 식사하는 사람들이 달라지니 삶의 의식도 달라졌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을 많이 듣고, 교육을 많이 받아도 머리에 담아두지 말고, 실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퇴직해서 사회복지시설봉사자로 활동하셨는데, 친구들이 이미 거기에서 봉사하시기 때문에 함께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좋은 교육을 받거나 노력하지 않았지만, 좋은 일을 하고 있던 친구들 덕분에 보다 더 가치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위 사람을 하느님께 잘 인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