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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푸른이리의 전설
잇단 변고 끝에 일행은 정신이 바늘 끝처럼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뒤로 행로를 바꾸어서인지 더 이상의 변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쉬는 것을 제외하곤 줄곧 말을 달려 낙타도 말도 사람까지 지쳐갈 무렵, 황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 멀었소?』
『조금 더 가야 할 것 같소』
정규의 물음에 소진이 말했다.
『이리 가면 혹시 청랑애(靑狼崖)가 있지 않습니까?』
말에 박차를 가해 소진의 곁으로 가면서 이겸이 물었다.
『지리를 잘 아는군. 맞소』
이겸의 안색이 굳어졌다.
『그리로 가는 중이란 말입니까?』
『보시오』
소진이 이겸에게 왕승고가 준 지도를 건네주었다.
『…』
그가 굳어져 있는 것을 보고 정규가 곁으로 가서 물었다.
『청랑곡이 어딘가? 이리가 사는 곳이라도 되나?』
『맞습니다. 푸른 이리떼가 사는 곳입니다』
『이리떼?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이 정규가 되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니, 이리떼가 있기로소니 그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사람을 잡아먹는 이리를 보신 적 없지요? 그것도 덩치가 송아지만한 놈들이 수백
수천마리가 몰려나오는 광경…』
『몇마리?』
정규가 되물었다.
『아무도 그 놈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곳은 대상들에게는 공포의
지역이니까요. 일단 걸리면 누구도 살아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철칙이었습니다』
『겁주네…』
정규가 중얼거렸다.
그런가보다 하긴 했지만 실감이 날리 없었다.
『이리떼의 숫자가 많소?』
그 말을 들은 왕승고가 소진의 곁으로 가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지도를 본 다음부터 소진의 안색은 굳어져 펴지지를 않았다.
『청랑애는 초원의 금지입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누구도 가지 않는 곳이지요.
여름철이면 또 좀 덜하지만 지금처럼 겨울이 되면…』
그가 왕승고를 보았다.
『놈들은 푸른 악마가 됩니다』
『굶주린 이리떼가 된다는 소리요?』
『맞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닥치는 대로 잡아먹습니다. 심하면 동료도
잡아먹는다더군요』
말을 하던 소진은 눈을 들어 천색(天色)을 살펴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조금 더 급히 말을 몰아 청랑애 근처에 가서 밤을 지낸 다음, 날이 밝으면 그곳으로
들어가도록 하는게 좋겠습니다』
굶주린 이리떼가 수백마리 이상 몰려 나온다면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은
분명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밤중에 그런 짓거리를 하고픈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일행중
누구도 그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잠시 쉰 다음, 다시 길을 재촉한 일행은 칼날 같은 밤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에 비로소
목적지 부근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늘의 달은 이미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꾸벅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그들의 앞으로 삐죽삐죽 칼날처럼 곤두선 바위들이
솟아있는데 그 높이는 낮은 것이 십여 장이고 높은 것은 수십 장 이상이나 되어 보였다.
『영 기분 나쁜 곳이로군. 여기가 청랑애인가?』
정규가 중얼거렸다.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겸이 대답했다.
거의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그 계곡은 대단히 깊고 넓어 보였다. 그럼에도 워낙
지형이 험하여 사람이 드나들기에는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다.
우우우….
어디선가 문득 이리가 길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보름달로 보이는 하늘의 달은 바로 그 바위들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주위를
푸르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런 곳에다가 묘를 썼단 말인가? 개자식들 답군…』
정규가 냉소했다.
소진이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야영 준비를 하는게 좋을게요. 이리가 덤벼들지 않게 하려면 불로 방비해야 할
것이고…』
말을 끝내고 앞으로 걸어가는 그를 보면서 정규는 문득 미간을 찡그렸다. 조금은
왜소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암중에 냉소했다.
영호중은 털털한 것이 호방한 면이 있어서 사내다웠고 정규와도 안면이 있었다.
하지만 소진은 전혀 달랐다. 차갑고 필요한 말 외에는 하루 종일이 가도 옆에서 숨쉬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이미 겨울이다.
고지대인데다가 사막이다.
밤이 깊어가면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야말로 날이 선 칼날과 같았고 추위는 살을
에이는 듯했다.
『뭐야? 눈발까지 날리네?』
말과 낙타를 둥글게 자리하도록 배치한 정규는 그 외곽에다 모닥불을 피우다가 혀를
찼다.
정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북방(北方)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이백(李白)의 왕소군(王昭君)이란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북방의 황량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왕승고는 갑자기 절해(絶海)의 고도와 같이 돌변해버린 주위를 보면서 지난날 책벌레
때의 기질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지난날이라면 부지중에 시 한 수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런 때가 아니었다.
복국(復國)!
잃어버린 그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어쩌면 가장 큰 고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하기
위해 그는 지금 여기에 와 있는 것이다.
우우우….
이리떼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이건 정말 한 두 마리 소리가 아니군』
그 소리에 몇 사람이 기분 나쁜 듯이 중얼거렸다.
컹컹컹! 우우우우….
뒤이어 화답이라도 하듯이 이리떼의 소리는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정말 장난이 아니군!』
그 소리에 정규가 머리를 흔들었다.
저렇게 울어대는데야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잠도 잘 수가 없을 터이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왕승고는 모닥불 바깥에 서서 청랑애쪽을 바라보는 소진의 곁으로 다가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늘 서늘한 얼굴이었지만 쿠빌라이의 능묘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달빛
아래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상기되어 있는 듯했다.
단아한 얼굴이었다.
옆에서 보니까 달빛에 비친 그 얼굴은 더욱 수려하였다.
『소선생은 이번 일을 마치고 나면 무엇을 할 작정이오?』
『이번 일…』
그 말을 되뇌이던 소진은 문득 얼굴을 굳혔다.
『가문을 일으켜야겠지요. 무너진 가문을…』
그는 다짐하듯 입술을 물었다.
『그런가. 그러고 보니 우리 두 사람은 같은 운명을 타고 난 모양이오』
왕승고의 말에 소진이 흠칫, 그를 보았다.
『유복한 가문… 아니십니까? 영호형께서는 공자께서 중원제일의 거부라고…』
『…』
왕승고는 대답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바로 그때였다.
컹!
한 소리와 함께 검은빛 하나가 눈발이 날리는 속을 뚫고서 소진에게로 날아들었다.
『위험!』
왕승고가 손을 쳐들었다.
웅장한 경기가 손에서 일어나면서 소진을 공격했던 이리가 비명과 함께 피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크르르으……
음산한 푸른빛의 눈동자를 번뜩이며 서너마리의 이리가 좌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많이 굶주린 모양이군.』
이리의 모습을 본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그의 일장은 바위도 으스러뜨리고 남을 위력을 가지고 있는지라 비쩍 말라 거친
털을 가진 이리는 피투성이가 되어 사오 장이나 날아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광경에 뭔가 위협을 느낀 것인지 험악한 표정이던 이리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대단한 공력이구나!』
그것을 보고 소진이 놀란 빛을 드러냈다.
왕승고의 나이에 일거수에 저러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타고난 신력(神力)이 아닌 내공의 힘이라면……
그것을 알아볼 안목을 소진은 가지고 있었다.
『날이 밝는 데로 곡 안으로 진입해야 할테니 쉬는게 좋겠소.』
『먼저 들어가십시오. 저는 주변을 좀 살펴본 다음에 들어가도록 하지요.』
왕승고의 권유에 소진이 말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리 없다.
『입구를 찾을 수가 있겠소?』
『들어가봐야겠지요. 쉽지야 않겠지만 입구조차 못찾는다면 어떻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그가 이미 어느 정도 방향을 잡고 있음을
의미했다.
그들의 앞에는 청랑애가 거대한 이리의 모습과도 같이 달빛아래 갈기를
곤두세우고 있었다.
컹컹! 우우우우……
어디선가 길게 이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하듯 여기저기에서 합창하듯이 이리의 울음소리가 꼬리를
물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밤.
그것도 사막과 황야가 어우러진 이곳에서 먹구름이 달빛마저 가리는 상황에 목을
놓아 우는 이리의 울음소리는 결코 기분 좋은 것일리 없다.
『물러나는 것이 좋겠소.』
왕승고가 말했다.
그의 음성이 어딘지 묘한 것을 느낀 소진은 주위를 돌아보다가 갑자기 안색이
달라져 주춤 뒤로 물러났다.
등잔.
푸른 등잔이 수없이 생겨나고 있었다.
푸른 빛이 이글거리는 그 등잔빛은 하나둘에서 열, 스물. 금세 백, 이백,
삼백……
삽시간에 일대가 온통 그 푸른빛으로 가득차버렸다. 이리의 눈빛이었다.
조금전까지와는 상황이 달랐다.
기세를 얻었음인지 처음에 나타난 놈들이 목털을 갈기처럼 세우고서 천천히
다가왔다. 마치 푸른 등잔의 물결이 일렁이면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많군……』
어지간한 왕승고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뭐, 뭐야?』
주변을 경계하던 정규가 달려왔다.
『엄청나게 많군요……』
주위를 살피겠노라고 호언하던 소진이 질린 기색으로 천천히 뒷걸음 쳤다.
『안으로 물러나시지요. 빨리, 빨리 모닥불을 지펴! 더 크게 지펴라!』
정규가 뒤를 돌아보면서 소리쳤다.
이히잉!
말과 낙타가 푸르륵거리며 몸을 뒤틀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는 것이다.
탁! 타타닥…… 모닥불이 더 크게 타올랐다. 모닥불은 둥그렇게 일행을 감싸고
있었지만 태울 나무가 별로 많지 않았다. 일대는 황량하여 나무를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나무가 있다면 청랑애 안쪽뿐……
『오늘도 편안하게 자긴 그른 것 같습니다.』
정규가 대도를 움켜잡으며 말했다.
굳은 얼굴이었다.
무언의 대치.
푸른 등잔과 같은 이리의 눈빛은 음산한 느낌으로 천천히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 이리의 무리를 왕승고 일행은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모닥불이 꺼질는지 알 수 없는데다가, 모닥불이 꺼지는 순간에 이리의 공격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쿠오오오……
문득 괴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느닷없이 들려온 그 소리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히 이리의 울음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사납게 주위를 맴돌거나 모닥불 안쪽을 바라보고
있던 이리의 무리 가운데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커엉!
갑자기 덩치가 큰 이리 한마리가 모닥불을 타넘어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이놈이!』
그쪽에 있던 정규의 수하가 칼을 휘둘렀다.
나무토막을 한칼에 잘라내는 검력(劒力)이니 그 이리가 치명상을 입고 나뒹구는
것은 당연했다. 허연 뼈가 드러나는 가운데 피가 흩뿌려졌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주춤거리던 이리떼는 허연 이를 드러내고서 점액과 같은 침을 흩날리면서
모닥불을 넘어 달려들기 시작했다. 거친 털을 날리며 달려드는 이리떼는 말
그대로 악마의 사도와 같았다.
처절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리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던 왕승고의 얼굴도 굳어졌다. 그리고 그도
검을 잡아야 했다. 장세를 펼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까닭이다.
일이백 마리라면 고수 열두명이 그것을 처리하는 것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얼마나 되는 것인지 이리떼는 끝도 없었다.
컹! 컹커엉……. 악마의 부르짖음이 세상을 온통 뒤덮는 것만 같았다.
이리떼의 피가 바닥을 적시고 그 주검이 거치적거려 제대로 움직이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참혹한 피비린내가 장내를 진동했다.
마침내 여기저기에서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리떼는
끝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처절한 혈투였다.
『이런 감히…!』
소진이 앞으로 달려드는 이리에게 일장을 가해 날려보내다가 나직이 신음했다.
옆에서 달려드는 늑대에게 옆구리를 물린 것이다.
신음과 함께 일권을 내리찍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늑대의 머리가 부서져
허물어졌다.
하지만 그 빈틈을 보고 달려든 이리에게 다시금 가슴팍 옷자락이 길게 찢겨져
나가야 했다. 번지는 핏줄기!
소진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젠 장난이 아니었다.
비로소 생명의 위기를 느낀 것이다.
그는 입술을 물었다. 여자의 것처럼 붉은빛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손을 쳐들었다.
푸른빛이 그 소매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갔다.
캥! 캐캐캐앵……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면서 앞에서 그를 향해 달려들던 십여 마리의 이리떼가
펄쩍 뛰면서 나가떨어졌다. 나가떨어진 이리들은 괴로운 비명을 지르며
꿈틀거렸다.
하지만 그 순간, 좌우에서 대여섯 마리의 늑대가 달려들었다. 한놈의 크기가
송아지만한 놈들이 바람처럼 달려드니 막 앞에서 달려들던 놈들을 처리한 소진의
안색은 창백해질 수밖에.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달무리와 같은 검기가 그를 둘러싸면서 날아들었다.
캐애앵……
처절한 비명.
소진을 향해 달려들던 늑대와 그녀를 물고 늘어지던 이리까지가 일거에 피보라를
뿌리며 낫에 베어진 볏단과 같이 두 동강이 나서 날아갔다.
『괜찮소?』
소진은 자신의 앞에 검을 들고 서 있는 왕승고를 발견했다.
『괘, 괜찮아……』
그는 당황해서 대꾸하다가 그의 눈빛이 자신의 가슴에 머물고 있음을 보고는
안색이 달라졌다.
늑대가 물고 늘어져 찢겨져나간 가슴팍 옷자락…… 그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흰
비단천이 친친 동여매어져 있음이 드러나 있었다.
가슴을 동여매다니?
당황한 소진은 황급히 가슴팍을 여몄다.
『조심하시오』
왕승고가 침착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돌아서서 달려드는 늑대 한마리를 처리했다.
그의 등은 거대한 산이 버티고 서 있음을 보는 것 같았다.
『……』
소진은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그의 얼굴에 살기가 돌았다.
캐앵!
그의 주먹에 달려들던 이리의 머리통이 완전히 산산조각으로 으스러졌다. 피가
튀고 뇌수(腦髓)가 허옇게 뿌려졌다.
그것도 모자랐던지 그는 앞으로 서너걸음 달려가면서 옆을 지나가던 늑대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캥!
단말마의 비명.
뱃가죽이 터져나가면서 그 늑대는 훌훌 피보라를 뿌리며 날아갔다.
그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찮았던 것인지 그처럼 흉흉하게 모닥불을 뛰어넘어
달려들던 이리떼의 공세가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컹! 커어엉……
어디선가 얼마전에 들렸던 그 괴기한 이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컹! 컹컹! 커엉……
이리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었다.
그러더니 이리들이 다시 덮쳐오기 시작했다.
이리와 늑대가 한데 뒤섞인 일대 대군이었다.
이번에는 덮쳐오는 형태가 전과 달랐다. 몸을 낮추고 달려오는 놈과 펄쩍펄쩍
뛰면서 달려드는 놈까지 있어서 방비하기 정말 쉽지 않았다.
이미 말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말을 돌보지 못할 정도로 급박한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컹! 커어엉……
예의 괴기한 울음소리가 음조(音調)를 띠고서 다시 들려왔다.
소진의 앞에서 늑대를 막고 있던 왕승고가 미간을 굳혔다.
『아무래도 저 소리가 이상한 것 같소』
『……』
소진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왕승고의 태도가 전과 다름없음을 보자 생각을 달리한
듯 입을 열었다.
『어쩌면 저 소리는 청랑애의 이리떼를 지배하고 있다는 청랑왕(靑狼王)의
것인지도 모릅니다』
『청랑왕? 사람이 있단 말이오?』
『그게 아니라, 이리떼의 왕을 일컫는다고 하는데, 오래전부터 이리떼를
통솔하고 있다고 알려진 이 일대의 전설적인 존재입니다』
『그럼 저것이?』
왕승고의 말투가 이상함을 느낀 소진은 시선을 그에 따라 돌리다가 안색이
달라졌다.
청랑애 가장 높은 곳.
거기에 이리인지, 늑대인지 모를 거대한 검은 그림자 하나가 구름 사이로 삐죽이
머리를 내민 달빛을 등지고서 우뚝 서 있음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 이리라는 동물은 늑대와 비슷하지만 늑대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크다. 하지만
저것은 황소만해 보였다. 도무지 이리라는 느낌이 아니었다.
컹! 커어엉……
그것이 다시 길게 울자 이리떼들의 움직임이 또 달라졌다. 그것은 마치 군사의
행동을 방불케 했다.
『정말 청랑왕인가 보군요!』
소진도 정말 그런 존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부지중에 탄성을 올렸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한가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일행들의 힘은 점점 빠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게도 거의 전적으로 청랑애 정상에서 이리떼를 지휘하는
저 청랑왕의 울음소리의 변화에 기인하는 듯 보였다.
『정대장! 모두 나를 따라오도록 하시오!』
굳은 얼굴이던 왕승고가 소리쳤다.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이대로 힘을 허비할 수는 없는 일이오. 내가 가서 이리떼의 왕을 처리할테니,
지세가 좋은 곳으로 가서 이리떼의 공격을 막도록 하는 게 좋겠소』
『이리떼의 왕이오?』
영문을 모르는 정규가 되물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캥! 캐애액!
캐앵!
처절한 비명이 꼬리를 물면서 이리떼의 외곽에서 일대 혼란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리떼를 마치 가위로 비단폭을 가르듯 쳐죽이면서 왕승고의 일행을
향해서 다가오는 한무리의 사람들이 보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왕승고 일행이 의아한 빛을 띠고 그들을 보고 있는 순간, 그들은 일직선으로
이리떼를 뚫고서 그들의 앞으로 당도하고 있었다.
그들의 숫자는 서른 명도 넘어 보였다.
날렵한 회색빛 옷을 입고서 사막의 바람을 막기 위함인 듯 두꺼운 피풍(披風)을
둘렀다. 손에는 제각기 검도를 비롯한 병기를 들고 있는데 그 움직임은
일사불란하여 마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들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모두가
회색빛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드러난 것은 눈과 이마뿐이었다.
괴이한 느낌이 일행을 향해 엄습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긴장감이었다.
마침내 그들이 왕승고 일행의 앞에 당도했다.
『멈춰라!』
정규가 질풍처럼 다가오고 있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도를 비껴들었다.
『제남의 구대공자이십니까?』
하지만 그들의 앞으로 당도한 회의인 중 앞선 중년인은 정규는 쳐다보지도 않고
왕승고를 바라보면서 빠른 어조로 물었다. 말과 함께 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벗었다. 정광(精光)이 번뜩이는 눈빛을 가진 매서운 인상이었다.
손에 든 한자루 보검에서는 이리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당신은?』
『노야께서 보내셨습니다』
그의 말에 왕승고의 얼굴이 굳어졌다.
거기에는 실로 간단치 않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저들이 나타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동안 단
한순간도 노야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누가 뒤를 따르고 있음을 눈치조차 채지 못했었단 말인가.
『멀지 않은 곳에 몽고의 기병(騎兵)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 싸움소리를 듣게
되면 골치아픈 일이 발생하게 될는지도 모릅니다. 일단 이 자리를
벗어나시지요』
왕승고를 확인한 중년인은 힐끗, 뒤를 돌아보면서 나직이 소리쳤다.
『길을 열어라!』
그러자 그의 뒤를 따라 왔던 무사들이 일제히 신형을 돌려 이리떼들을
시살(弑殺)해 나가기 시작했다.
캥! 캐애앵……
비명이 꼬리를 물면서 피가 튀었다.
검과 도, 그리고 창이 조화된 그들의 움직임에는 놀라운 위력이 있었다.
이리떼들은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고 피를 뿌리며 죽어 넘어졌다. 정말로 잘
조화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개개인이 고수가 아니라면 가능치 않은 연수합격(聯手合擊)이었다.
흉험한 기세에 이리떼의 공격이 주춤해졌다.
『가시지요』
중년인이 말했다.
『어디로 말이오?』
왕승고가 그 자리에 선채로 물었다.
『일단 이 자리를 피하신 후, 날이 밝으면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몽고의 기병은 홀가적 휘하의 병력인지라……』
중년인이 말끝을 흐렸다.
왕승고의 미간도 조금 굳어졌다.
『홀가적? 그가 여기에 있단 말이오?』
『그가 직접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휘하 정예기병인
다사특비룡기(多斯特飛龍旗)가 온 건 분명합니다』
『……』
왕승고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망설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기 전에 이리떼가 철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우우우우……
긴 울음소리 한마디에 악마와 같이 설치던 이리떼가 마치 썰물처럼 그렇게
빠져나갔다.
청랑애의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길게 울음을 터뜨려 무리를 지휘하는
거대한 이리의 모습은 당당하고도 신비롭기까지 해보였다.
『뭐야? 이 악마떼를 저 놈이 지휘라도 하는 건가?』
기가막힌 듯 정규가 중얼거렸다.
어둠이 짙게 깔렸다.
청랑애의 그림자가 음침하게 일대를 덮었다.
남아 있는 것은 피비린내. 그리고 끔찍하기조차 한 이리떼의 주검들.
『몇백 마리를 죽인 건지 모르겠군』
정규가 중얼거렸다.
그의 수하중 절반은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었다. 실로 간단치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도움에 감사하오. 다행히도 위험한 순간은 넘어간 듯하니 감사하다고 노야께
전해주시오』
주변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됨을 보고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이 뜻밖인 듯 중년인은 왕승고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이만 돌아가지요』
그는 질문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수하들을 인솔하여 미련없이 등을
돌렸다.
『……』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길은 조금씩 달랐다.
『이 어둠에 저들에게 그냥 떠나라고 하는 것은……』
정규가 어딘지 꺼림칙한 듯 중얼거렸다.
『경우가 아닌 것 같소?』
대답 대신 정규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도 피가 튀어 있고
몇군데 긁힌 곳이 있었다.
희미한 웃음이 왕승고의 얼굴에 스쳐갔다.
『경우가 아닌지 그런지는 시간이 알려줄 거요. 우리 후대와의 연락은 어떻게
되었소?』
『내일 아침쯤이면 만날 수 있을 듯 합니다. 예정대로면……』
『알겠소』
고개를 끄덕인 왕승고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 움직일 수 있겠소?』
『지금…… 어디로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그렇소』
간단히 대답한 왕승고는 소진을 바라보았다.
『괜찮겠소?』
『일행이 움직인다면 따라가야지요』
소진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좀 전과는 다른 어색한 태도.
『혹시 다시특비룡기에 대해서 들은 바 있소?』
왕승고는 소진을 향해 다시 물었다.
『다사특비룡기는…… 기병중의 정예로서 좌우 양기가 있는데, 각기(各旗)마다
천오백 정도의 병력이라고 들었는데 더 이상은 잘 모르겠습니다』
소진이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그럼 몽고기병이 최소한 천오백 이상이 부근에 있단 말입니까? 여기에 뭐 먹을
게 있다고?』
풀풀 날리는 눈발을 보면서 정규가 얼굴을 찡그렸다. 거의 최악이라고 해도 좋을
듯했다.
검은 구름이 하늘을 두껍게 덮었다.
눈발은 점점 거세져 바닥에 깔린 이리떼의 주검을 덮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날씨를 이리떼는 알고 물러간 것일까?
세찬 바람이 살갗을 칼날처럼 저며내는 듯했다.
『저…… 안으로 말입니까? 지금?』
어이가 없는 듯 정규가 입을 벌렸다.
왕승고는 말없이 청랑애의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눈발 치는 소리만 아니라면 아마도 숨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을 터였다.
모두가 멍청하게 서서 천천히 걷고 있는 왕승고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죽하면 소진과 정규가 멀뚱멀뚱 눈을 마주쳤으랴.
「이해할 수 없군. 언제나 가장 상식적인 분이었는데 이 행동은……」
정규가 머리를 흔들더니 소리쳤다.
『뭘해! 빨리 따라가지 않고!』
왕승고 일행은 금세 청랑애 안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발자국 또한 흩날리는 눈발에 묻혀져 갔다. 아마 조금 시간이 지나면 그
흔적조차 사라져버릴 터였다.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로군.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시야에서
사라지겠다는 건가?』
문득 중얼거림이 일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일행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묵묵히 팔짱을 꼈다.
완강한 눈빛. 하지만 그 깊은 곳은 냉정하고도 차갑다. 머리에는 몽고인들이
쓰는 모자를 쓴 데다 코 아래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함인지 수건을 둘렀다.
그러니 드러난 것은 두 눈뿐.
별로 크지 않은 키이지만 회의(灰衣)에 털옷을 걸치고서 팔짱을 낀 그에게는
태산과 같은 무게가 자리했다.
청랑애는 사막 가운데 올연(兀然)하다.
그 일대는 황량하면서도 군데군데 기암괴석이 늘어서 있고 말라죽은 나무들의
잔해가 앙상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곳 중 하나로서 왕승고 일행이 야영을 하던 자리를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그의 뒤에는 회의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들이야 말로 바로 좀 전에 왕승고에게서 떠나간 중년인 일행이었다.
『어떻게 합니까? 따라갈까요?』
중년인이 물었다.
그때, 미풍이 일면서 회의인 하나가 그들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역시 같은
차림이었다.
『몽고기병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쪽으로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 날씨에?』
회의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냄새를 맡았다는 뜻인가?』
그때였다.
다시 회의인 하나가 날아들었다.
『반대쪽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한 무리? 몇이나? 또 몽고기병이냐?』
『몽고기병이 아니라…』
회의인의 음성에 의혹이 깃들였다.
『라마승의 무리라고 합니다』
『라마?』
회의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 무슨 라마가 있단 말인가?
몽고에서 라마는 신성한 존재인지라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밤에
움직이는 일도 없다. 그들이 굳이 움직일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둘이 아닌 무리란 말인가.
『좋지 않군…』
복면속 회의인의 눈빛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청랑애는 밖에서 보던 것과 달랐다.
이리떼가 득실거리는 좁은 협곡이라는 선입견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안으로 들어선 순간에 탁 트인 시야, 넓은 평야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전후좌우를 온통 가린 기암괴석들이 이리저리 몰리다 못해 한데 머리를
처박으면서 하늘로 솟아 단애를 형성하는데, 그 형상이 심히 기올(奇兀)하여
이런 분위기만 아니라면 가히 절경이라 할 만했다.
안개가 서리처럼 서린 가운데, 눈발이 점점 세차게 흩날리자 일대는 순식간에
천험의 절지가 되어가는 듯했다.
『안으로 더 전진하는 것은 날이 밝은 다음이라야겠습니다』
정규가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군데군데 동굴처럼 생성된 곳에서 푸른 빛이 음산히 그들을 노려보고 있음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이 이리떼의 눈빛임은 불문가지.
왜 이런 상황에서 굳이 청랑애 안으로 들어온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다른
사람이 아닌 왕승고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왕승고는 뒤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시오』
그의 눈빛으로도 청랑애 바깥의 일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사람은 더더욱 허실을 알기 힘들 것이 당연했다.
『이곳에서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고 누가 나타나면 맞서 싸우기보다는 그를
저지하도록 하고 즉시 나에게 알리시오』
왕승고는 전음지성으로 정규에게 말하고는 소진에게 다가갔다.
『움직일 수 있겠소?』
소진은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암벽 틈에 몸을 기대자 같이 주저앉던 참이었던지라
의아한 빛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지금 말입니까?』
소진은 입을 벌렸다.
『지금』
왕승고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군』
정규는 얼떨떨한 빛으로 소진과 함께 바위틈으로 사라지고 있는 왕승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왕승고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곳에 과연 능이 있을는지 모르겠군』
왕승고가 주위를 돌아보면서 중얼거렸다. 두 사람의 앞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젖과 꿀이 흐르고 사시사철 훈훈한 온기가 도는 그런 초원이 펼쳐진 것이
아니라,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이었다.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자리한 계곡
여기저기에서는 이리떼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음이 보였다.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여기가 분명합니다』
소진이 주위를 돌아보다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어디가 입구일 것 같소?』
『조금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지도의 뒷부분이 필요하지 않겠소?』
왕승고의 물음에 소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어차피 지도의 뒷부분은 기관매설이니 문을 찾는 데에는 그리 큰 필요가
없겠지요. 있다면 나쁠 거야 없겠지만…』
『지도의 뒷부분이오』
왕승고가 품에서 접힌 천을 꺼내 소진에게 내밀었다.
그가 이처럼 순순히 지도를 내놓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소진은 의아한
얼굴로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좀전에… 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뭔가 말하려다가 말끝을 흐린 소진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사람마다 사정이 있는 법이니, 소선생이 설사 정말 여자라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지 않겠소?』
왕승고의 말에 소진의 안색이 찰나간에 굳어졌다.
『사람이 만나는 것은 늘 인(因)과 연(緣)의 결합이오. 상대가 남자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서로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라고 나는
믿소. 그리고 지금은 서로를 믿을 때라고 생각하오』
왕승고는 지도를 소진의 손에다 놓았다.
그의 손은 섬세했다. 아주 작은 손은 아니었지만 마디가 가늘고 예뻐 남자의 손
같지 않았다.
소진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컹!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갑자기 날아들었다.
캥!!
하지만 그것은 달려들 때보다 더 빠르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시간이 별로 많지 않소』
커다란 이리 한 마리를 쉬게 만들어준 왕승고가 앞으로 나서면서 말했다.
『…』
그의 그런 모습을 소진은 미묘한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감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사방에서 짐승의 노린내가 진동한다.
이곳이 이리의 터전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그 많던 이리의 무리는 군데군데 어슬렁거리고 있음이 보일 뿐, 별로 볼
수가 없었다.
『이 부근일 거 같군요!』
소진이 한 곳에 멈춰선 것은 그로부터 한시진 가량이나 지나서였다.
『…』
왕승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청랑애의 중심부였다.
그리고 상당한 높이였다.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간다면 좌우의 시야가 틔어서 얼마전까지 자신들이 야영하던
곳이 내려다 보일 것 같았다. 하지만 황량한 바위로 이루어진 험악한 지형.
어디를 봐도 몽고의 영광을 세상에 드높였던 위대한 제왕 쿠빌라이의 능묘가
있을만한 곳으로 보이지 않았다.
『대강 지도상의 위치와는 비슷한 것 같아 보이는군…』
왕승고도 고개를 끄떡였다.
『저기!』
문득 소진이 소리쳤다.
거대한 바위 하나가 그들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높이는 십여장에 이르고
너비는 대여섯장은 되어 보인다. 그 좌우로는 날개가 벌어지듯이 하늘로 솟은
절벽.
그런데 그 바위에 뭔가 희미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왕승고는 그 바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서 일진 경기(勁氣)가 일어나면서 그 바위에 오랜 세월 두껍게
내려앉은 세월을 날려보냈다. 이끼 등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그 바위에 새겨져
있는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뚜렷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리의 형상이었다. 드러난 이빨에서
목갈기를 곤두세운 모습 등이 사납고도 당당해보였다.
『푸른 이리는 초원(草原)의 영광(榮光)을 위해 달리고자 한다』
그것을 보고 있던 왕승고의 중얼거림에 소진이 멈칫, 왕승고를 돌아보았다.
『지도에 새겨진 말이로군요?』
『문과 관계가 있기에 써놓은 글일 것 같지 않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진의 말투가 조금 바뀌었다.
하지만 두사람의 들뜬 기분은 별로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거대한 바위는 말
그대로 바위이고 암벽일 뿐, 어디에서도 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푸른 이리는 초원의 영광을 위해서…』
왕승고가 다시 중얼거렸다.
문을 열려면 이리를 달리게라도 해야 한다는 뜻일까?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몽고족을 푸른 이리의 후예라고 한다고 하지만 이리를 달리게 하라니,
그런다고 저 거대한 바위가 열린단 말인가.
그때였다.
흩날리는 눈발로 인해서 컴컴했던 주위가 희미하게 밝아졌다. 하늘을 가렸던
구름 가운데에서 달이 머리를 내밀면서 달빛이 흘러내린 까닭이다.
우워어어어….
그리고 고막을 흔드는 야수의 울음.
『천랑왕!』
두 사람이 동시에 나직이 소리쳤다.
달빛이 바위를 비치자 드러난 이리의 모습은 그들이 보았던 천랑왕의 모습을
그대로 새겨놓은 것만 같았다. 과연 우연이기만 한 것일까.
컹! 커어엉….
다시 소리가 들렸다.
『…』
말이 필요없었다.
두사람은 일제히 그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칼날 같은 암석이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경공능력이라면 평지와
다름이 없었다.
절벽을 올라간 두사람은 흠칫, 주위를 돌아보았다. 깎아지른 단애는 아마도
백여장 높이는 될 터이다. 그 높이를 말하듯 바람과 눈발이 세찼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절벽의 위에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잘못 듣기라도 한 것일까?
『저건?』
왕승고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렸다.
천랑왕, 그 거대한 이리가 방금전까지 그들이 서 있던 곳에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놈이 우릴 놀리는군…』
기가 막힌 표정인 소진을 보고 왕승고가 쓴웃음을 지었다.
찰나.
왕승고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맙소사!』
소진이 입을 딱 벌렸다.
그가 절벽에서 그대로 몸을 날려 천랑왕에게로 덮쳐내려가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절벽에서 그들이 있던 자리까지는 줄잡아도 삼십장, 어쩌면 오십장이나 되는
높이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거리를 그냥 몸을 날리다니….
「은인자중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로구나. 과연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일까?」
소진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았다.
왕승고의 신형은 쏜살과 같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는 교묘하게 몸을 틀고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를 발끝으로 찍어 신형을
조종하면서 아래로 쏘아져내렸다.
천랑왕의 모습이 눈앞으로 급격히 쫓아왔다.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이리.
청랑왕으로서야 왕승고가 하늘을 날아 떨어져 내려올 줄이야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속된 말 그대로 멀리 떨어져서 약을 올리다가 허를 찔린 꼴이었다.
놀라 흠칫 뒤로 물러서던 청랑왕은 이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땅에 내려선 왕승고는 청랑왕이 뒤로 물러섬과 동시에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자신을 향해 덮쳐듦을 볼 수 있었다. 이리들이었다.
왕승고는 나직한 기합과 함께 손을 쳐들었다.
웅장한 경기가 일면서 일제히 비명이 일었다.
깽! 캐갱….
서너 마리의 이리가 그의 장세에 휩쓸려 비명과 함께 훌쩍 널부러졌다.
그 순간, 왕승고는 사나운 기세가 자신을 습격함을 느낄 수 있었다.
청랑왕이었다.
거의 황소만한 놈이었다.
그런 몸체가 움직임은 가히 바람과 같았다.
호랑이는 상대에게 덮칠 때, 먼저 앞발로 상대를 쳐서 쓰러뜨린다. 그것을
호박(虎撲)이라고 하는데 청랑왕의 공격 또한 그와 같았다.
노리는 것은 왕승고의 목.
왕승고는 놈이 머리 위로 다가왔을 때 슬쩍 몸을 낮추면서 일장을 내밀었다.
그가 노리는 곳은 청랑왕의 배였다.
그러나 정말 뜻밖에도 청랑왕은 자신의 일격이 빗나가자 허공에서 몸을 비틀면서
앞발로 왕승고를 헤집었다.
『윽?』
왕승고는 허탕을 쳤을 뿐 아니라, 청랑왕의 일격에 어깨를 할퀴었다. 대번에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아마 뼈가 드러나는 중상을
입었을 터였다.
일격이 성공하자 청랑왕은 크게 고함치면서 왕승고에게 재차 덮쳐왔다.
문득 한가닥 웃음이 왕승고의 얼굴에 떠올랐다.
『넌 똑똑지 못하구나?』
동시에 왕승고의 일장이 청랑왕을 휩쓸었다.
제 아무리 용맹하고 날렵하다 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세가 날아 손도 닿지
않는 상황에서 타격을 입히니 어찌 견딜 수 있겠는가.
컹!
외마디 비명과 함께 청랑왕도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은 일순간이었다.
청랑왕은 나가떨어진 순간에 벌떡, 다시 일어났다. 그리곤 다시 왕승고를 향해
지난번보다 더욱 빠르게 덮쳐왔다. 흉흉한 기세였다.
『상대를 잘못 골랐다』
침착한 음성과 함께 왕승고는 몸을 비틀면서 청랑왕의 어깨를 쳤다.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쿠빌라이의 능묘를 열 열쇠가 이 놈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
놈을 죽이는 모험을 할 수는 없는 일인 까닭이다.
놈이 다시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놈은 다시 일어났다.
여전히 큰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았다.
비로소 왕승고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일었다.
그가 놈에게 가한 타격은 바위라도 부서질 정도의 힘이었었다. 그런데 놈은 몸을
움츠려서 그 타격을 상쇄하고는 다시 일어난 것이다.
캬아아…!
섬뜩한 고함과 함께 청랑왕이 바람처럼 다시 덮쳐들었다.
『고집쟁이로구나!』
왕승고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말과 함께 그는 다시 일격을 가했다. 소림의 대력금강장이었다. 그는 이 일격에
칠성에 달하는 공력을 주입했으므로 청랑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 일격을
맞게 되면 아마 일어나기 힘들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그는 청랑왕이 다른 수를 쓸 수 없도록 신법까지 전개하였으므로 그
움직임은 바람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허탕을 치고 말았다.
청랑왕은 그를 공격하는 것처럼 하고는 몸을 날려 옆으로 도주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막아선 것은 다른 이리들.
청랑왕의 고함, 포효는 공격신호이긴 하였으되 자신이 공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던 모양이다.
그 교활함에 왕승고는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소진이 내려와 물었다.
달려드는 이리떼들을 물리치고 있는 왕승고를 향한 물음이었다.
왕승고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쳤군요?」
소진은 자신의 말투가 변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미처 지혈을 하지 못한 그의 어깨가 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놈이 모습을 감추기 전에 쫓아갑시다』
소진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왕승고는 손으로 어깨의 혈도를 짚어 지혈을
하고는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날리자 이리떼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천랑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길은 하나뿐이니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였다. 다만 그
어둠의 길 좌우로 무섭게 번뜩이는 눈빛이 정말 많다는 것이 가슴 서늘하달까.
『너무 많아요!』
소진이 신음처럼 비명을 질렀다.
『내 뒤만 따라오시오』
왕승고는 짧게 말하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소진은 참으로 놀라운 춤사위를 보게 되었다.
검이 춤을 추고 있었다.
뿌우연 검기가 인다.
그 검기는 강렬해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태양처럼 강한 빛을 뿜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앞을 막아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이리떼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이리떼들이 모두 목이 베어 즉사했다는 점이었다.
뼈를 베인 것도 아니었다.
모두 목줄기를 베었다.
「어찌 저럴 수가?」
소진은 왕승고가 지금껏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리떼들이 사방에서 달려들면서 목을 쳐들고 있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목을
치켜들고서 검에다 갖다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자연스러움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이리떼들이 떼죽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왕승고가 무섭도록 빠르게 전진하면서 앞을 막는 이리떼들만을 처리하면서 달린
까닭이다.
소진은 왕승고의 뒤를 쫓기 바빴다.
허탕을 친 이리떼가 뒤에서 쫓아오고 앞에서 쓰러지는 이리떼가 피를 뿜어내면서
발버둥을 치기 때문이다.
그 싸움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들의 앞에 천랑왕이 우뚝 버티고 서 있었다.
천랑왕의 뒤, 조금 떨어진 곳에는 동굴 하나가 보였다. 제법 컸다. 지금껏
이곳에 들어와 본 이리들의 동굴중에서 제일 큰 듯했다.
높이만도 일장은 되는 듯하니….
천랑왕의 거처라도 되는 것일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천랑왕은 흉악한 기세를 얼굴 가득 드러내면서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뭔가를 지킬 것이 있는 것 같군요』
소진이 말했다.
그 어조에는 흥분의 빛이 드러났다.
『너를 해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끝까지 나와 싸우겠다면 너를 쓰러뜨릴
수밖에 없다』
왕승고가 말했다.
크워어….
들려온 대답이었다.
그리고 천랑왕은 땅을 박차고 왕승고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뒤에서는 이리떼들이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 쫓아왔고 주춤하는 사이에
그들에게 다가와 달려들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왕승고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천랑왕에게서 피가 솟았다.
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역시 살과 뼈로 이루어진 동물인 이상, 검을 이길 수는
없는 모양. 더더구나 왕승고의 검은 상승의 검기를 담고 있어 목검으로 바위를
쪼개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커엉!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마침내 천랑왕이 쓰러졌다.
천랑왕이 쓰러짐을 보자 이리떼들도 주춤거리며 더 이상 달려들지 못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지요.”
소진이 빠른 어조로 말했다.
청랑왕이 쓰러졌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뒤에 버티고 선 이리떼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서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청랑애 깊은계곡.
달빛조차 제대로 스며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야수의 푸른눈빛이
반딧불처럼, 밤 하늘의 별들처럼 수를 셀 수 없이 버티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소진이 서두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왕승고가 내딪던 걸음을 멈칫, 하는 것을 보고 앞을 보다가 안색이
달라졌다.
“저건?”
껑! 껑껑…
그들을 향해 짖어대는 작은 그림자들이 있었다. 새끼 이리였다. 세 마리.
제법 갈기를 곤두세우고 사나운 기세로 짖어대고 있는 그것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듯이 그렇게 거기에 서서 왕승고를 향해서 짖어대고 있었다. 제깐에는
위협을 하는 것이었지만 이제 사오개월 가량 되어 보이는 새끼가 무서울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귀엽기 그지없어 보일 따름이었다.
“뭐야? 그럼 청랑왕이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이 동굴을…”
소진의 음성에서 맥이 빠졌다.
그때였다.
크와아-!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나운 기세가 소진을 덮쳤다.
“앗!”
날카로운 비명이 소진에게서 터졌다.
“비키시오!”
그림자가 엇갈렸다.
커엉…
검은 그림자가 괴로운 소리를 흘리며 나뒹굴었다.
소진이 가슴을 움켜잡고 있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피가 비쳤다.
그의 앞에는 왕승고가 우뚝 서 있었고 그의 앞으로는 청랑왕이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소진을 공격한 것은 쓰러졌던 청랑왕인 것이다.
이미 중상을 입었을 것임에도 그 움직임은 바람과 같아서 등을 돌렸던 소진은
미처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왕승고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면 가슴이 완전히
갈라졌을런지도 모를 일이었다.
컹컹컹!
새끼들이 사납게 왕승고의 바지를 물고 매달렸다.
“크르르으으…”
그것을 보자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청랑왕이 이를 드러내고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야말로 사력을 다하고 있음이 눈에 역력했다.
컹컹!
사납게 짖는 소리가 몰려든 이리떼에게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진군나팔을 부는듯한 소리.
전체가 하나가 되어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전의(戰意)마져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것들이…”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심상치 않은 상황에 처하게 되자 소진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그것은 그가 암중에 힘을 감추고 있었음을 의미하였다.
그때였다.
“따라오시오!”
왕승고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동시에 그는 발을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신발과 바지를 물고 매달렸던 새끼들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날았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간일뿐, 새깨들은 누가 안아서 굴리듯이 청랑왕의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청랑왕의 앞에 이르러 발딱 몸을 일으킨 새끼들이 사납게
왕승고를 향해 짖어대었다.
하지만 그때, 왕승고와 소진의 모습은 이미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짙은 어둠이 철저히 시야를 차단했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불을 켜야겠어요!”
소진이 말했다.
“일단은 그냥 갑시다!”
왕승고가 소진을 손목을 잡은 채로 달리면서 말했다. 그들은 이미 동굴로 들어온
상태였다.
동굴 안은 정말 어두웠다.
자신의 손 조차 볼 수 없도록.
“아니, 이래가지고 뭐가 보여요?”
소진은 공력을 돋구고 눈이 튀어나오도록 눈을 부릅떠 보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볼수 없는데 왕승고가 조금도 거리낌없이 전진하고 있음을 보고 놀라 물었다.
“조금 볼 수 있소”
왕승고가 침착하게 말했다.
`도대체가?'
소진은 자신의 손을 잡은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자신을 끌고가고 있는 남자. 처음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보면 볼수록 정말
태산과도 같은 거대함이 느껴지는 특별난 존재. 이러한 사람은 세상을 아무리
뒤져도 보기 힘들었다. 어둠 속에서 소진의 얼굴이 깊은 생각으로 굳어졌다.
동굴 내부는 생각보다 더 컸고 또 길었다.
십여 장 정도는 들어온 것 같았다.
그제서야 왕승고가 소진의 손을 놓았다.
“불을 켜보시오.”
왕승고의 말소리가 들렸다.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왕승고에게 매달려왔던 소진은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렸다.
문득 가슴팍이 쑤셔왔다.
청랑왕에게 당한 일격은 간단치 않았다. 제법 깊은 상처였다. 왕승고가 조금만
늦게 손을 썼다면 아마 이렇게 움직일수 없었을런지도 몰랐다.
그따위 짐승에게 이런 상처를 입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나를 이렇게 욕보이다니… 멍청한 이리같으니…'
소진은 암중으로 이를 악물면서 품을 더듬어 부싯돌을 꺼내 천리화통에 불을
밝히려 했다.
탁탁…
불을 잘 켜지지 않았다.
피에 젖은 탓이었다.
그때.
팍!
천리화통에서 불이 살아났다.
놀란 소진이 얼굴을 들었다.
소진의 앞에서 왕승고가 몸을 돌리고 있었다.
`설마 내공으로 도인화성(導引火成)을 할 수 있을 지경이란 말인가?'
소진이 놀란 빛으로 왕승고의 등을 보았다.
천천히 밝아지고 있는 천리화통의 불빛에 비친 왕승고의 등은 그 어느때보다
넓고 커보였다.
“이 글, 읽을 수 있겠소?”
왕승고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소리에 끌려서 소진은 왕승고가 선 앞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했다.
늘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명령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은 그가 움직이는데로 따라가야 하였다. 반감이나 강요를 느낄
틈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저 흐름이 그런 것이니 어떻게 반감을 느낄 틈이
있으랴.
“몽고어로군요?”
소진이 부지중에 소리쳤다.
그가 든 천리화통에서 일렁이는 불빛에 드러난 암벽. 누가 보아도 인공이 역력한
암벽은 울퉁불퉁한 가운데 그들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대략 오 장가량이나 되는 너비.
거기에는 세로로 글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서장어(西藏語;티벳어)를 연상케 하는 그 글자야말로 라마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의 명을 받아서 만들어낸 몽고글자였다.
후일 몽고신자(蒙古新字)라고 알려진 이 파스파어는 정방형으로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로 기록해나간다. 당연히 빨리 쓸 수가 없어서 율령이나 법령의
작성등 공식적인 목적에서만 사용되었다.
여기에 새겨진 문자가 파스파어라는 것은 이 글이 공식적인 기록일 수도 있다는
의미라면 상상의 비약일까.
간략의 내용의 글의 옆에는 몽고인들이 사냥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을 끈 것은 그 사냥을 하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그 옆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커다란 이리의 모습이었다.
“청랑왕?”
두 사람이 그 이리를 보고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러하였다.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말위에 앉은 사람의 곁을 따르고 있는 것은 청랑왕,
동굴 위에 새겨진 그 이리의 모습과 한치도 다르지 않았다.
과연 두 이리 사이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곁을 따르던 종자(從子)를 두어 사후를 지키고자 하니 초원의 영광이
푸른이리의 도약으로 시작됨을 영혼으로 굽어 보고자 하노라……"
소진이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그 말이야말로 동굴벽화의 해제(解題)처럼 새겨진 글의 해석이었다.
“무슨 뜻일 것 같소?”
왕승고가 물었다.
“듣기로 원의 세조……에게는 곁을 따르는 애견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말로는
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푸른빛 털을 가진 이리였다고 하는데, 그는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을 그 이리에게 지키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소진의 얼굴이 묘한 흥분과 감흥으로 차올랐다.
“이 그림에 새겨진 사람이 세조라면, 그 이리가 지켜온 곳이 바로 이
청랑애라면 이곳이 우리가 찾던 쿠빌라이의 무덤은 분명한 것 같군요!”
문득 소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여기서도 명백한 답은 얻을 수가 없군요. 그림 속의 이리를 무슨 수로
달리게 할 수 있을는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림은 사람이 그려둔 것이 아니오?”
“?”
느닷없는 왕승고의 말에 소진이 얼떨떨한 빛으로 그를 보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거요. 이렇게.”
말과 함께 왕승고는 암벽에 새겨진 이리의 그림부분에서 다리가 그려져 있던
부분의 조금 튀어나온 부분에다 손바닥을 대고 힘있게 옆으로 밀었다.
“무슨 짓을?!”
소리치던 소진이 입을 딱 벌렸다.
끄르르……
돌이 마찰되는 소리와 함께 그 다리가 그려진 부분이 밀리면서 조금 앞으로
이동함을 보았던 까닭이다. 그러자 그림이 완전히 달라졌다.
엉거주춤 쿠빌라이의 옆에 서 있던 이리가 질주하는 형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림 전체가 달라보였다.
……초원의 영광이 푸른이리의 도약으로 시작됨을 영혼으로 굽어 보고자
하노라……
해제처럼 붙은 글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떻게 이걸 발견했지요?”
굳은 얼굴로 암벽을 바라보고 있는 왕승고를 향해 소진이 물었다.
“우연히.”
왕승고의 대답은 간단했다. 간단한 대답이지만 실제로 그 일은 간단하지 않았다.
막막한 가운데 그가 착안한 것은 쿠빌라이와 같은 엄청난 권력자가 능을
건설하면서 남긴 벽화가 편평하지 않은 암벽에 남겨져 있음이었다.
그리고 이리의 다리부분이 묘하게 튀어나온 암벽에 그려져 있음도 눈길을
끌었었다.
다른 해결방법이 없는 마당에 굳이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군요, 아무런 반응이 없……”
기대에 가슴이 설레이던 소진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림이 바뀐 다음,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별 다른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쿠쿠쿠쿠르르르……
지축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이 그들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있는 그
암벽이 천천히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아……!”
소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너비 이 장.
높이가 일 장이 넘는 커다란 석문이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대한지릉(大汗之陵)>
그 위에 새겨진 글은 정말 가슴 설레게 하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내……”
소진은 그 앞에서 굳어졌다.
“갑시다.”
왕승고가 말했다.
“무, 물론 가야죠!”
화들짝 놀라 안으로 들어가려는 소진을 제지한 것은 왕승고였다.
“그쪽이 아니오.”
쏟아지던 눈발이 뜸해졌다.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새벽이 저 멀리에서 힘차게 날아들었다.
참혹했던 상처는 어젯밤의 그 눈발이 대강 덮어서 치유한 듯 보였다. 비록
미봉(彌縫)이나마.
어둠이 물러가면서 청랑애 주변에서 그처럼 음산하고도 괴이하게 느껴지던 어떤
음모의 냄새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피이이이…
어느 순간인가?
멀리서 바람을 가르는 묘한 음향이 긴 꼬리를 달고서 들렸다.
그리고 잠시후.
피이이…
이번에는 청랑애 안에서 무엇인가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예의 바람을
가르는 음향을 길게 끌면서.
신호용으로 쓰이는 향전(響箭)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면서 한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인원은 열명이 조금 넘어 보이지만 그들은 여분의 말과 낙타까지 몰고
있어 제법 위세가 당당했다.
그들이 나타나자 정규가 달려와 그들을 맞았다.
모래가 물을 흡수하듯이 그들은 순식간에 청랑애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채 차 한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갑자기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청랑애 안에서 일대의 인마(人馬)가 달려나왔다. 앞장 선 것은 왕승고. 그리고
얼굴을 가린 소진과 정규 등이 그 뒤에서 다급하게 말을 달린다. 마치
생사대적이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
보급대와 합류한 그들은 삽시간에 청랑애를 뒤로 하고 그 자리에서 멀어져갔다.
아직은 새벽.
희끄무레한 어둠을 뚫고서 그들이 사라질 무렵, 묘한 움직임이 일었다.
일대를 덮은 안개 속에서 일어난 은밀한 움직임은 이내 사라졌다.
그리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밤에 있었던 그 털옷의 회의인이었다.
묵묵히 팔짱을 낀 그의 눈빛은 침잠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곳이 아니란 뜻인가?」
생각에 잠긴 그의 앞에 회의인 하나가 나타났다.
『라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
회의인은 묵묵히 머리만 끄덕여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기병들의 척후가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 일대에 놈들이 적지 않게 퍼져
있는데,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다시 다른 회의인 하나가 바람처럼 나타나 보고했다.
『…』
회의인은 가타부타 대꾸 없이 침잠한 눈으로 청랑애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일. 이번 일은 극비로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해서 라마들과
몽고기병들이 냄새를 맡은 것일까? 설마…」
그는 시선을 돌렸다.
저만치 어젯밤 왕승고 일행을 도왔던 중년인 일행이 말을 달리는 모습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간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라졌다기보다는 꺼졌다는 표현이 옳을 터였다. 어깨가 미미한 흔들림을 보이는
순간에 이미 그는 청랑애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신법은 놀라울
정도라서 거의 땅을 딛는 것이 아니라, 바위나 풀잎을 스치는 것에 불과했다.
일컬어 초상비(草上飛)!
풀잎을 차고 날아가니 경신공부(輕身功夫) 중에서 가장 높은 경지중 하나다.
육지비행(陸地飛行)이나 답설무흔(踏雪無痕), 능공허도(凌空虛渡) 등의 경공은
이미 진기(眞氣)로서 몸을 뽑아올려 허공을 날아가는 것이라서 몸을 가볍게 하여
달리는 것에 주력하는 경신공부와는 구분이 된다.
그가 움직이자 갑자기 십여명의 회의인들이 나타나 그를 호위하듯이 따랐다.
회의인은 순식간에 청랑애 안으로 들어섰다.
수많은 이리떼의 시신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를 맞이한 것은 사나운 이리떼의 공습(攻襲)이었다.
회의인은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를 따르고 있는 회의검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검을 수레바퀴와 같이 휘두르면서 안으로 전진했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졌다.
참혹한 비명이 꼬리를 물고 이리떼의 신음이 온통 청랑애를 뒤흔드는 듯했다.
캬오오!
삼엄한 포효소리가 일었다.
한가닥 피비린내와 함께 바람같은 기세가 앞선 회의인을 습격했다.
슬쩍 머리를 트는 사이에 그 습격을 피한 회의인은 그것이 엄청나게 큰 이리의
공격임을 알아보고는 싸늘히 냉소했다.
일차공격에 실패한 청랑왕은 사납게 으르릉거리면서 잡아먹을 듯 회의인을
노려보았다.
평소라면 공격에 실패한 직후, 바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회의인을 다시 덮쳤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부상을 당해서 전과 같이 민활하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컹! 커엉!
앙팡지게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청랑왕의 새끼들이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에 회의인은 상황을 대강 짐작하고는 싸늘한 웃음을 흘렸다.
그가 새끼들을 향해서 움직이는 것을 본 청랑왕이 다급한 고함과 함께 몸을
날렸다.
그것이야말로 회의인이 의도하던 바였다.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캬아아…!
일성 비명.
붉은 피가 허공을 길게 수놓는 가운데 청랑왕의 목이 날아갔다.
낭신(狼神)이라고까지 불리던 청랑왕의 최후였다.
컹컹!
끙끙끄응…
새끼들이 달려와 목없이 푸들거리는 청랑왕의 시신에 매달렸다.
회의인은 싸늘한 눈빛으로 미련없이 그곳에서 눈을 돌려 앞으로 전진했다.
캐앵!
그의 뒤에서 짤막한 비명이 일었다.
그의 부하들에 의해 청랑왕의 새끼들이 생을 마감하는 소리였다.
그렇게 회의인은 왕승고 등이 처음 찾았던 거대한 바위 앞에 도달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청랑왕을 그린듯 한 암벽화(岩壁畵) 뿐이었다. 거기에는
왕승고가 알고 있었던 푸른 이리나 초원의 영광따위의 글은 당연히 없었다.
회의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왕승고가 바위를 움직여보기 위하여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리를 그린 암벽화도 그렇게해서 드러난 것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더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암벽 주위에서 일장 도살이 있었던 것을 알아낸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밤새 이곳을 살펴보다가 떠나간 것에 불과한 것인가?」
회의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사방이 피비린내였다.
그렇게 죽였음에도 이리떼들은 미친 듯이 달려들고 있었다. 그의 능력으로서
그것이 위협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성가신 것은 사실이었다.
그로인해서 그는 더 이상의 수색을 포기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왕승고가 이미 이 자리를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돌아간다』
회의인이 소리쳤다.
썰물처럼 그들이 청랑애를 빠져 나갔다.
남은 이리떼들이 발악하 듯 그들을 따라가며 짖어댔다. 그 수효는 이제 이리 백
마리에 불과했다.
청랑애는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남은 것은 도처에 널린 이리의 주검뿐…
『그들이 속아 넘어갈까요?』
소진이 입을 열었다.
『최소한 시간은 벌 수 있을거요』
왕승고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대한지릉의 내부. 마차가 달릴 수 있도록 넓게 만들어진
석조복도였다.
그는 처음부터 청랑애를 떠나지 않았다.
보급대가 오기를 기다린 그는 그들 중 그와 닮은 사람을 분장시켜 자신으로
보이게 하고 소진과 비슷한 체격의 사람은 얼굴을 가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아침이 채 밝기 전에 안개가 서린 어둠 속에서 청랑애를 빠져나가자
가까이서도 아닌 상태에서 감시하던 자들은 누구도 그 허실(虛實)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정규는 거품을 물고 반대했지만 실제로 그것이 시간을 벌 수 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또한 그것으로 인해서 양쪽 다 안전할 수가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정규 일행을 따르던 자들이 속은 것을 안 다음,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가 문제일 터였다.
위험한 것은 오히려 정규 일행일 수도 있었다.
상황을 숙지하자 정규는 미련없이 동의하고 청랑애를 떠났다.
돌로 깎아 만든 복도는 너비가 이장 가량이나 되었다. 높이도 일장이 넘었다.
그 길이가 얼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들어온 길은 칠, 팔장 가량.
청석(靑石)을 깎아 만든 이 석조 연도(羨道)만 하더라도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음을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런 건축물을 청랑애와 같은 곳에다 만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원세조 밀기에 따르면 이 대한지릉을 건축하기 위해서 동원된 인원은
모두 칠만에 이른다고 하였다.
연인원이 아니라 여기에 투입된 인원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기에 이 무덤에 대한 소문이 전혀 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인지, 그 이유를 왕승고와 소진은 오래지 않아
목도(目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어둠을 밝히는 새파란
섬광이었다.
그것은 마치 푸른 등불과 같이 어둠 속에 둥둥 떠 두사람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청랑……왕?』
천리화통을 들고 있던 소진이 나직이 신음했다.
그러했다.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것은 청랑왕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생김이 청랑왕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석상(石像)이었다. 그들이 물리치고 온 것과 다름없는 그 청랑왕보다
더 큰 그 석상은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던 불빛은 바로 그 청랑왕의 눈이었다.
『야안석(夜眼石)이로군!』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야안석. 고양이 눈을 닮았다 하여 묘안석(猫眼石)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보다 상품(上品)은 야명주(夜明珠)라고 불린다. 밤에도 스스로 빛난다는 뜻이다.
당연히 귀한 물건이고 청랑왕의 두 눈에 박힌 정도의 크기라면 그 하나로써
일개 성과 맞먹을 가치가 있을 터였다.
청랑왕의 석상 좌우에는 사각형의 기둥이 우뚝 했다.
거기에 적힌 글은 가슴 섬뜩한 의미.
<대한(大汗)의 후손 아닌 자로서 망령되이 대한지릉에 들었다면 걸음을 멈추라>
<대한(大汗)의 영면(永眠)을 방해하는 자에게 푸른이리의 저주 있으리라>
두사람이 그 글을 읽은 순간이었다.
그그그으…….
믿기지 않게도 청랑왕의 눈에서 빛이 쏟아지고 입에서 기묘한 으르렁거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연도 전체가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 처하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을 사람은 없다.
소진이 당황해 뒤로 물러났다.
금방이라도 연도가 무너지는 것 같았던 것이다.
와르르…….
동시에 돌더미와 같은 흰 무더기가 그들의 앞으로 쏟아져 나와 연도를 메웠다.
연기와 같은 먼지가 일어나 숨을 막히게 했고 푸른빛 인광(燐光)이 연도를 가득채웠다.
『이, 이게 뭐야?』
천리화통을 들어 그것을 확인한 소진이 비명을 지르며 왈칵,
왕승고의 품으로 뛰쳐들었다.
남자의 태도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백골(白骨)의 무더기였다.
숨을 막히게 하는 것은 뼛가루였고 연도를 가득 채우고 시야를 가로막으며
공포스럽게 둥둥 떠오른 것은 백골에서 떠오른 인광이었던 것이다.
수도 없이 많았다.
『맙소사……』
어지간한 왕승고도 소진을 가슴에 안은 채로 신음을 흘렸다. 정말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누구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가 없을 터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시신이 백골이 되었으면 이렇게 많을 수가 있을까.
백골이 산더미와 같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청랑왕이 마치 백골의 군단(軍團)을 이끌고 달려오는 듯한 모양이다.
『밀기에 기록된 것이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참으로 잔악(殘惡)한 일이다』
왕승고가 신음했다.
원세조 밀기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 동원된 인부들을 모조리 완성된 능에다 몰아넣고
봉해버렸다는….
이십년에 이르는 대공사.
그것도 하나가 아닌 가묘까지 포함하여 네개라고 밀기는 적고 있다.
그렇게 진행된 공사에서 죽어나간 인부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그 고초를 겪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인부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마저 접어야 했다.
반항하던 인부들은 창칼에 죽임을 당해 던져졌고 나머지 인부들은 산채로
무덤에 순장(殉葬)되었다. 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원치 않는
일에 반항할 힘이 없었다. 이긴 자의 오만이고 횡포요, 진 자의 비애(悲哀)였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되겠소?』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던 왕승고가 입을 열어 물었다.
「이런……!」
소진은 비로소 아직도 자신이 왕승고의 품에 안겨있음을 깨닫고 놀라 멈칫,
몸을 바로 세웠다.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그나마 어둠 속이 아니었다면 어찌 하였을까.
연도의 끝은 거대한 원형석실.
백골무더기는 바로 그곳을 온통 메우다시피 하고 있어서 어디로 가야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왕승고는 한걸음 앞으로 나서서 어둠에 묻힌 그 백골무더기의 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진에게 등을 보인 채였다.
『이 백골총(白骨塚)은 침입자를 위협하는 일차관문이니,
도면대로라면 좌측에 기관이 있을 겁니다』
암암리에 숨을 몰아쉰 소진은 그의 등 뒤에서 말을 하면서 은연중에 손을 들었다.
그 손에서 푸른 빛이 번뜩였다.
호신강기마저 파괴시킬 수 있는 이혼망(離魂芒)이 그 손에 감춰져 있는 것이다.
피를 보면 숨 몇번 몰아쉬는 순간에 숨이 끊어지는 악독한 암기다.
어둠 속에 자리한 그 눈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소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손에 공력을 가했다.
***
북원의 이름은 역사상 별다른 가치가 없다.
이유는 원의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가 죽은 다음,
그의 아들 아이유시리타라(愛猶識理達臘)가 막북(漠北)으로 도주하여 북원을
세운 이후부터는 지는 해의 전철(前轍)을 그대로 답습하여 끊임없는
권력쟁탈전으로 인하여 죽고 죽이는 일이 반복되어 자멸하다시피 하였던 까닭이다.
차라리 북원보다 더 서쪽으로 치우친 티무르[帖木兒]가 세운
티무르 제국(帝國)이 더욱 강성하였다.
찰합대한국(察哈臺汗國)의 신하였던 티무르는 일세의 영걸로서
찰합대한국을 멸망시키고, 주원장의 말년에는 이아한국(伊兒汗國)을 병합하여
티무르제국을 세우니 흠찰한국(欽察汗國)도 티무르에게 칭신하였었다.
후일, 그 티무르가 영락제 초에 죽으면서 제국의 분열이 일어나 거기에서
러시아의 제후(諸侯)들이 독립하여 모스코(莫斯科) 대공인 이반3세
(러시아에서는 이반대제라 부른다. 러시아를 통일한 인물)가 독립한 것은
이 제국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잘 말해준다 할 수 있었다.
그렇듯 좌우에서 신흥강국이 득세하는 마당이니 신하가 군주를 살해하는
상황에서의 북원은 자연히 권력다툼이 끊일 사이가 없었고 힘을 펼 수가
없음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불식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칭기즈칸과 같은 영웅이 나타나는 길이었다.
홀가적은 스스로가 그러한 존재가 되고자 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남은 대한의 혈통인 야숙진은 그를 믿지 않았다.
스스로 참람(僭濫)되이 달단가한이라 자호(自號)하는 귀력적(鬼力赤)조차
처리하지 못하는 홀가적인 까닭이다.
그러나 별다른 대안(代案)을 찾지 못한다면 그를 선택할 수밖에 없음도
야숙진은 잘 알고 있었다. 안정된 나라가 아닌 상태에서,
아무리 뛰어났다 하더라도 여자가 말을 달리면서 제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상 초유의 여황제가 되었던 무측천(武測天)이 아무리 뛰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조정내에서의 자리 다툼을 잘 이용한 것에 불과했다.
막북, 사막의 북쪽 그 황량한 벌판에 내몰고서 말을 몰고 군사를 조련하여
세상을 정복하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임을 야숙진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홀가적에게 그렇게 자신을 내맡기고 나라의 장래를 그에게
걸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가 이룩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는 중원으로 갔었다.
하지만 중원은, 세상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더구나 홀가적이 중원 무림의 맹주가 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손에 넣었던
백련교마저 등을 돌려 오히려 그들에게 쫓기는 바 됨을 보면서 그녀는 그것을
느껴야 했다.
그 와중에 그녀는 우연히 왕승고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전혀 별 볼일 없던 존재.
하지만 우연찮게 한번 보고 또다시 만나게 되자 그가 평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전설로 전해지던 선조 쿠빌라이 할아버지의 무덤, 대한지릉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지도를 그가 가지고 있음을 안 다음, 그녀는 정말 가슴이 뛰었었다.
불가능했던 일이 현실로서 그녀의 눈앞에 펼쳐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유산(遺産)을 손에 넣는다면 불가능하리라던, 불가능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하여 만사휴의(萬事休矣)가 되자,
그녀는 안타까움으로 땅을 쳐야 했었다.
사람을 풀어 왕승고를 찾았지만 그 넓은 땅덩이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쉬울
까닭이 없었다.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너무도 없었던 것이다.
수개월을 헤맸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그녀는 생각을 달리했다.
하루 이틀, 한달 두달이 아니라 길게 보기로 한 것이다.
『언젠가는 장보(藏寶)를 찾으러 오리라』
그녀는 막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인마를 동원하여 중원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하였다.
언뜻 방대하고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미련한 일이었지만 행운의 여신은 그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왕승고 일행을 발견했던 것이다.
뛸 듯이 기뻐 왕승고 일행을 습격하려던 그녀는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죽을지언정, 결코 꺾이지 않는 그의 성품을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호중의 불행은 시작되었다.
그는 야숙진에게 잡혀서 상상할 수도 없도록 지독한 고통을 받으면서 왕승고에
대한 모든 것을 토해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야숙진은 전혀 다른 한 존재로 변신하게 되었다.
소진이라는 이름으로.
소진, 아니 야숙진은 수중에 든 이혼망에 공력을 주입시킨 채로 망설였다.
이혼망을 쳐내기만 한다면 왕승고의 공력이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일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것을 쳐내지 못했다.
왕승고가 그녀를 돌아본 까닭이다.
순간의 엇갈림이었다.
그가 돌아보는 순간에 손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고 기회는 일탈(逸脫)되어 버렸다.
『앞서는 것이 좋겠소. 기관은 아무래도 소선생이 나보다 전문가이니까』
왕승고의 말은 당연한지라 야숙진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움켜쥔 채였다.
바보라고 수십번 더 되뇌면서…….
홀가적은 계집이란 다 같다고 생각했다.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어차피 벗겨놓으면 다 같다.
공주건 노예건 가랭이를 벌려놓아서 틀린 게 뭐가 있나.
중원에서의 일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그는 부쩍 술과 계집을 탐했다.
그런 그를 야숙진은 경멸의 눈으로 보았다.
어쨌든 좋았다.
그래 봐야 야숙진이 그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은 어차피 정해진
수순에 불과한 일이니까.
『학!』
계집의 입에서 억눌린 비음(鼻音)이 흘러나왔다.
안먹겠다는 술을 퍼먹여두었더니 입에서 묘하게 비린 술냄새가 났다.
여명에 떠오른 계집의 몸은 또다른 흥취가 있었다.
풍성하다 못해서 터질듯한 몸매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그의 손길을 맞고 있다.
계집을 쓰러뜨린 그는 이미 그녀의 몸속으로 진입해 있었다.
그때였다.
『전하!』
파오 밖에서 나직한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홀가적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계속해 허리를 움직였다.
밑에서 계집이 꿈틀거리며 그의 몸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미끈한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았다.
『조금 이상합니다. 청랑애를 떠난 놈들을 쫓는 라마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아직 그 부근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홀가적의 움직임이 멎었다.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은 싸늘히 굳어 있었다.
여자의 몸속에 들어가 있는 남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호랍파(呼拉婆)는 어떻게 되었느냐?』
『당도해 있습니다』
『데려오너라』
말과 함께 홀가적은 몸을 일으켰다.
지난 밤새 시달린 계집이 아쉬운 듯 그의 허리를 감은 채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싸늘한 웃음이 홀가적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는 땀으로 젖은 계집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계집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좋으냐?』
계집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문득, 그녀의 눈에 경악의 빛이 폭죽처럼 튀어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입가로 붉은 피가 한줄기 흘렀다.
『계집은 도구일 뿐이다』
홀가적은 몸을 일으켰다.
나신을 드러낸 채로 죽어있는 계집을 뒤로 한 그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파오 안으로 노인 한사람이 들어섰다.
호호백발에 이마저 몇개 남지 않은 노인은 주름살 투성이의
얼굴로 홀가적을 보더니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를 뵙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능이 어디 있는지 말해라』
멈칫, 노인이 홀가적을 바라보았다.
『그 능의 소재는 이미 전설 속으로 사라져……』
『너는 우리 대원의 궁중기밀 출납을 맡았던 자다.
너는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직까지도 그 기록들을 기억하고
있다고 들었다. 부인할 테냐?』
『……』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노인은 주름살로 짓무른 눈을 들어
홀가적을 바라보았다.
『왜 그것을 찾으려 하십니까?』
『네가 알고 있는 대로다. 무너져버린 우리 몽고족의 위대함을
다시금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다』
『……』
노인은 묵묵히 홀가적을 바라보았다.
당당한 체구. 강한 눈빛.
홀가적은 젊은 늑대였다.
어쩌면 교활한 여우인 귀력적보다야 나을는지 모른다.
어차피,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홀가적이 능묘의 위치를 알게 됨으로써 몽고의 운명이 바뀔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대안이 없음이 또한 사실인
것 같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답하지 않으면 그가 자신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 뻔함을 그도 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싱그러운 아침공기가 느껴진다.
문이 열려있던 파오였지만 파오를 나서자 아침공기가 차갑게 전신을
휘감아왔다. 어젯밤에 내린 잔설(殘雪)이 일대를 온통 희게 덮었다.
홀가적은 저 멀리 아침안개 사이로 보이는 청랑애의 웅자를 바라보았다.
『얕은 수를 쓴 것인가, 아니면 정말 찾지 못한 것인가……』
그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야숙진의 거동을 감시해왔다. 그리고 그녀가
행동을 개시하면서 그 일거일동을 보고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여기 있을 리가 없을 터이다. 그가 나서자,
그의 뒤로 그가 자랑하는 철기(鐵騎)가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확인이 필요할 때였다.
그가 말을 달리기 시작하자 천여필에 이르는 말들이 일제히 네굽을
놓아 눈덮인 들판을 질주했다. 지축을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이곳은 그의 땅이었다.
소진, 아니 야숙진은 수중에 든 이혼망에 공력을 주입시킨 채로 망설였다.
이혼망을 쳐내기만 한다면 왕승고의 공력이 아무리 높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일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것을 쳐내지 못했다.
왕승고가 그녀를 돌아본 까닭이다.
순간의 엇갈림이었다.
그가 돌아보는 순간에 손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못했고 기회는 일탈(逸脫)되어 버렸다.
『앞서는 것이 좋겠소. 기관은 아무래도 소선생이 나보다 전문가이니까』
왕승고의 말은 당연한지라 야숙진은 앞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주먹을 움켜쥔 채였다.
바보라고 수십번을 더 되뇌면서…….
그 순간의 미묘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망설였을까?
답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대한지릉의 입구는 연도가 거의 십장가량을 뻗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연도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푸른 이리의 석상과
사람을 질리게 하는 백골의 무덤인 백골총이다.
소진은 몸을 날려 너비가 십여장에 이르는 그 석실을 둘러보았다.
백골로 가득찬 석실은 석실이라기보다 광장이었고 방금의 진동 때문인지
아니면 백골을 쏟아내기 위함인지 빙 둘러가면서 다섯 군데의 입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하나하나의 입구에서 백골이 쏟아져 나왔음은 일견하는 순간에
알 수가 있었지만 과연 어디가 대한지릉으로 들어가는 통로일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입구에 씌인 경고의 글을 보건대 잘못 들어가서 무사할 리는 아마도 없을
것이었다.
왕승고가 본 도면의 매복(埋伏) 또한 그러했다.
그것은 가히 기관중중(機關重重)이라 불러야 하였다.
그러한 철옹성을 구축하기 위해서 쿠빌라이는 당세를 풍미하던
기관매복의 전문가들을 잡아다가 수십년간 공사를 시켰을 터였다.
『이쪽이오』
야숙진은 자신의 실태를 감추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어 입을 열었다.
다섯 방위중 가장 왼쪽에 있는 통로였다.
왕승고는 아무 말없이 그녀의 말대로 그 통로로 들어섰다.
그는 이미 손실된 도면을 기억에 의지하여 그려낼 수 있는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도면에는 안전한 통로와 기관배치도가 아주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그것이
전문분야라서 약간의 지식을 가진 그로서는 자칫 실수를 할 수 있는 까닭이다.
한번의 실수를 만회할 수 없을 정도로 대한지릉의 기관은 흉험(凶險)했다.
통로는 조금 아래로 경사져 있었다.
문이 열리면 백골을 쏟아내기 위함이었던 것 같았다.
왕승고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르막길인 셈이다.
높이는 한 사람이 겨우 몸을 세울 정도에 불과했다.
그 통로를 서너걸음 지나지 않아 왕승고는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발밑의 석판이 꺼져버린 것이다.
오르막이라면 걷는 것이 조금 달라진다.
앞으로 내딛는 걸음이 가쁜하다기보다는 조금 힘을 주어 걷게 된다는 뜻이다.
앞으로 내딛는 발에 힘을 주면서 뒷발을 들게 되는 그 순간에 함정은 생겨났다.
『앗!』
앞서 가던 야숙진도 비명을 질렀다.
창졸간의 일이라 어떻게 손을 쓸 여가가 없었다.
도면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은 일이었다.
야숙진의 비명과 함께 천리화통의 불빛도 꺼져버렸다.
아무리 왕승고의 안력이 비상하다 할지라도 어둠에 익숙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방금까지 있던 불빛이 사라져버리면 순간적으로 아무 것도 볼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온몸이 허공에 떴다 싶은 순간에 지척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괴물이 잡아당기듯이 그렇게 왕승고의 몸은 밑으로 쑥 꺼져
내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둔한 충격이 등에서부터 엉덩이로, 전신으로
부딪히면서 느껴졌다.
그리고는 격한 미끄럼.
거의 수직으로 세워진 통로로 자신이 미끄러지고 있음을 깨달은 왕승고는
공력을 돋워 벽을 쳤다. 그의 손가락이 석벽을 마치 두부처럼 뚫고
들어갔다. 추락이 멎었다.
그는 손가락을 석벽에다 박고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형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안력을 돋우자 서서히 주변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의 짐작대로 그가 매달린 곳은 거의 수직으로 아래를 향해 비스듬히
뚫린 통로였다. 아래는 얼마나 깊은지 어둠에 묻혀서 전혀 사정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머리 위도 어둠에 묻혔다.
그가 떨어짐과 동시에 통로가 닫힌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아래에서 나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여기에 다른 산 사람이 있을 리는 만무하니 그 신음이 누구의 것인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어, 어디 계십니까? 와, 왕공자!』
이어 통로를 울리며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야숙진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뜻밖에도 음성은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야숙진은 초조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듯 쑤시긴 했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굴러 떨어지면서 천리화통을 놓치는 바람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발밑이 허전해지는가 싶은 순간에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는 사이 이미
바닥에 처박혔다. 통로는 둥근 가운데 미끄러워 정신을 차릴 사이가 없었다.
재수없게도 바닥에 처박히면서 박은 것이 머리였으니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보나마나 혹이 났을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된 거야? 입구 통로에 기관이라니…… 설마하니 이 자식이
날 속인 걸까? 그렇기만 해봐라!」
대번에 혹이 튀어나온 머리를 움켜잡고서 야숙진은 내심 빠드득 이를
갈아붙였지만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왕공자! 내말 안들립니까?』
야숙진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왕승고를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뭐야? 이 나쁜 자식! 날 함정에 빠뜨리고 저 혼자 가버린 거야?
정말 그렇기만 해봐라! 그냥……』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고 신경을 기울인
머리의 혹이 욱신거림을 느끼자 그녀는 참지 못하고 욕을 해댔다.
그때였다.
팍!
미약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시야가 환해졌다.
이 지독한 어둠 속에서 그 빛은 태양의 빛과도 같았다.
그녀의 앞에는 방금 그녀가 욕했던 왕승고가 천리화통을 들고
우뚝 서 있었다. 여전히 침착한 표정, 자신에게 욕을 한 것을 분명히
들었을 것임에도 그의 얼굴은 문자 그대로 명경지수(明鏡止水)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나이가 몇이야?」
불현 듯 왕승고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지만 지금 급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와, 왕공자……』
그녀의 입에서 어색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도면은 내가 기억에 의지하여 그렸기 때문에 혹시 잘못되었을
수도 있소. 하지만 거기에 있는 것 이상으로 내가 아는 것은 없소』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그건……』
야숙진은 말이 막혔다.
그녀가 욕을 했던 이유는 그녀가 받은 도면에 이러한 함정이 그려져
있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뭐라고 할 말이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결코 거짓말은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야숙진이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묘하게도 그를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라고.
『그럼 어떻게 된거죠? 우린 분명히 제대로 들어왔는데 이런 함정에
빠졌으니……』
『함정이 아닌 것 같소』
왕승고가 말했다.
『그게 무슨……?』
그의 말을 되뇌던 야숙진은 천리화통에 드러난 주변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석실 광장.
이곳은 또 하나의 통로였다.
그들이 미끄러져 내려온 통로의 앞에는 너비가 오장에 이르는 커다란
석실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형인 그 석실은 사방으로 다시 다섯개의
통로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이 떨어져 내린 곳을 포함하면 모두 여섯개의 통로가 있는 셈이었다.
『맙소사! 여기가 오행미로(五行迷路)이군요?』
야숙진이 신음을 흘렸다.
입구를 무사히 지나면 대한지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오행미로에
도달하게 된다.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의 다섯 통로.
오행의 법칙에 의거하여 건축된 이 지하미로는 대한지릉을 지키기
위한 첫번째 관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내용을 모르는 자라면 죽을
때까지 헤매도 이 오행미로를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도면에 따르면 입구를 지나 처음 만나는 곳이 바로 이 오행미로라
하였으니 그들은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닌 셈이었다.
그럼 그 함정은 함정이 아니라 제대로 왔다는 환영인사였던 것일까.
머리가 욱신거렸다.
『이런 무식한……』
야숙진이 부지중에 신음을 흘렸다.
『어디로 가면 되겠소?』
왕승고가 물었다.
『도면대로라면, 중앙인 토(土)의 위치로 가야겠군요』
『그럼 갑시다』
왕승고는 주저없이 몸을 날렸다.
그가 그 통로로 들어가자 별안간 주위가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불을 쥐고 있는 사람이 통로로 사라지는데 어둡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저런 멍청한 놈! 저 혼자만 가다니?」
야숙진은 머리를 움켜쥐고서 뒤를 따랐다.
생각대로면 저 넓은 등짝에다 손에 감추고 있는 이혼망을 쳐내고
싶었으나 생각뿐이었다. 그녀의 손은 펼쳐지지 않았다.
정규는 계속해서 말을 달렸다.
황진이 그들의 뒤에서 죽어라고 쫓아왔다.
점점 머리 위의 태양이 뜨겁게 느껴졌다.
벌써 반나절을 달렸다.
이젠 해가 중천에 뜬 다음이었다.
더 이상 달리는 것은 무리였다.
말도 사람도 지쳤다.
이미 말이 달리는 모양은 질주가 아니라 억지로 굽을 놓는
형상에 다름이 아니었다.
『멀었나?』
정규가 소리쳤다.
『다 왔습니다. 저기 보이지 않습니까?』
길잡이인 이겸이 마주 외쳤다.
그들의 앞으로 제법 큰 마을이 보였다. 이미 오아시스의
범주를 벗어난 곳이었다.
『좋아, 가자!』
정규가 박차를 가했다.
아직까지는 길이 멀었다. 어떻게 하든지 시간을 끌어야 했다.
『몇놈이나 쫓아오고 있나?』
『명확하지 않습니다. 말을 탄 놈이 몇 되는 것 같고 우리를
도와주었던 자들도 포함된 것 같기도 한데, 가까이 접근하질
않아서…』
정규의 물음에 이겸이 대답했다.
『확인해볼 수가 없을까? 놈들이 얼마나 따라오고 있는지…
잘못하면 공연히 공자만 사지에 남겨놓고 우리만 도망가는 꼴이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이 앞쪽에서 우회하는 길이 있습니다. 거기 고소장(高小長)이
보급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에게 뒤를 살피도록 하면
될거 같습니다』
『연락은?』
『이미 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중앙에 있는 것은 왕승고.
그를 둘러싼 정규와 일행.
한해에서는 제법 큰 유목지인 오소(烏蘇)에 도달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외곽에서 머물고 있는 그들은 상처를 치료하는
일방, 야숙진과 함께 앞으로의 행로를 의논하는 듯 보였다.
물론 당연히 그것은 겉보기 일 따름, 가짜 왕승고는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 실제로는 단 한마디도 하고 있지 않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떠나도록 합시다』
한낮의 태양을 피한 가짜 왕승고는 정규가 시킨대로 일행을 독촉하여
석양이 기울기 시작하자 다시 그 자리를 떠났다.
여전히 급하기 이를 데 없는 행보.
그간의 휴식으로 말도 사람도 일단 힘을 얻은 다음이었다.
『……』
그들이 떠나는 모양을 묵묵히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저들의 행로대로라면 어디로 가게 되나?』
그가 입을 열었다.
태양이 스러지기 시작하자 다시 날씨가 칼날처럼 매서워졌다.
하지만 그의 뒤에 선 사람들은 석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소산(火燒山)입니다』
『화소산?』
『그렇습니다. 붉은 빛을 띤 바위로 이루어진 산인데, 낮이면
태양열로 인해 바위가 달아 올라서 불이 난 것 같아 보여 사람이
접근하기 어렵다는 곳입니다. 따로 화염산(火焰山)이라고도 합니다』
「거기가 대한지릉?」
회의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간단한 일이라면 결코 이곳까지 그가 몸소 나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쿠빌라이의 무덤은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미진했다.
어딘지 모르게 뭔가 잘못된 느낌.
『종유(鍾游)』
회의인이 입을 열었다.
『예』
그의 뒤에서 왕승고 일행을 도왔던 중년인이 나섰다.
『유성검대(流星劒隊)를 시켜 그를 암격해라』
『그를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알겠습니다!』
중년인은 두말없이 머리를 숙여보이고 휘하검수 몇과 함께 그
자리를 떴다.
결코 질문이 허용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회의인이었다.
그가 속한 이 집단은 오직 상명하복(上命下服).
명령에 관한 복종만이 존재했다.
두두두……
황진을 일으키면서 정규는 말을 몰았다.
밤을 도와 달리면 새벽녘이나 내일 점심 때쯤 화소산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몇바퀴를 돌면서 시간을
끌면 아마도 상당한 시간을 벌 수가 있을 것으로 그는 계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그의 계산은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기병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을 발견한 순간, 좌우에서 기병들이 일제히
달려왔다. 그 숫자는 백여기에 이르렀다.
놀자고 오는게 아님은 분명했다.
정규 등의 얼굴에 긴장이 흘러갔다.
『피할 수 없을까?』
정규가 소리쳤다.
『이런 사막에서 몽고기병을 어떻게 피합니까?』
이겸이 머리를 저었다.
정규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의 성미라면 피하고 싶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와 싸우기보다는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그런데 상대의 돌진해오는 모양새를 보건대 대화를 하기는
애초에 틀려먹은 게 뻔했다.
기병이 달려옴을 보고 그것이 전투대형인지 아닌지도 몰라볼
그가 아닌 까닭이다.
『빌어먹을! 활을 가져오지 못했어!』
달려오는 몽고의 기병들을 보고는 정규가 이를 갈았다.
그들이 자랑하는 백보철궁(百步鐵弓)은 이런 경우 상대는 미처
이쪽에다 검 한번 휘둘러 보지 못하고 몰살을 시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철궁은 휴대하지 않았으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두두두……
기병은 칼과 창을 휘둘러대면서 무섭게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들이 그들과 마주친 곳은 초원지대.
저쪽으로 어둠에 눌린 산악지대가 보였다.
아마도 화소산 줄기이리라.
『이대로 부딪힙니까?』
이겸이 소리쳤다.
『진천뢰(震天雷)를 쓰자!』
정규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알겠습니다!』
이겸이 외침과 동시에 정규가 대도를 빼들면서 크게 외쳤다.
『돌격!』
두두두두……
일대 장관(壯觀)이었다.
백여기의 기마(騎馬)가 질주해오는 것을 향해서 정규 등의
이십여기가 마주 돌진해가는 것은.
이런 쥐새끼 같은 것들이……
그런 심산일까?
몽고기병들은 단숨에 정규등을 깔아뭉갤 듯한 기세로 돌진해왔다.
그들의 거리가 불과 십여장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였다.
정규의 뒤에서 모습을 감추다시피 하고 뒤따르고 있던 한사람이
곡예를 하듯이 말위로 벌떡 일어섰다.
의혹이 치고 일어나는 순간.
그는 쥐고 있던 것을 힘껏 던졌다.
무림고수가 공력을 모아 던진 것이니 십장 정도의 거리는 우습게
날아간다.
앞선 기병의 얼굴에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스쳐갔다.
꽝!
그 순간 터져나온 굉음.
비명과 말이 내지르는 단말마의 구슬픈 소리가 어울어지면서 시뻘건
화염이 몽고기병들의 중앙에서 하늘로 치솟았다.
피가 튀고 사람과 말이 날았다.
대혼란이 일었다.
달려오던 기세를 이기지 못한 기병들이 미처 말을 세우지 못하고
앞에 쓰러진 말과 기병들을 짓밟으면서 거꾸러졌다.
거기에 정규 등이 들이닥쳤다.
검광이 빛을 번뜩였다.
다시 피가 튀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창날이 종이로 된 창문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일거에 그처럼 기세등등했던 몽고기병은 궤멸의 형상으로
흩어지고 그 가운데를 정규 등은 질풍과도 같이 피보라를
일으키면서 질주해갔다.
몽고기병을 정면으로 돌파한 그들은 질풍과 같이 저 앞쪽으로
보이는 화소산 자락을 향해서 달렸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생각지 못한 일은 그들이 화소산 자락에
당도하여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쉴 때에 일어났다.
이미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상황.
그들이 산자락으로 들어설 때에 난데없이 검은 그림자가 유성과
같이 그들을 덮쳐왔던 것이다.
바위와 산꼭대기. 그리고 바닥에서까지 일어난 그 그림자들의
공격은 가히 전광석화와 같은 빠름을 가지고 선두에 서 있던
왕승고를 덮쳤다.
『공자를 보호해!』
정규가 대경실색해 외쳤다.
상황은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기습을 가한 자들의 능력은 바람과
같이 빠르고도 매서웠다.
앞서 있던 왕승고는 채 검을 빼기도 전에 가슴과 어깨에 일검씩을
맞고는 말에서 떨어졌다.
그를 덮치는 검은 그림자들을 향해서 정규와 그 수하들이 덤벼들었다.
왕승고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한 광경을 바라보는 차가운 눈.
회의인이었다.
그의 눈빛은 일그러져 있었다.
「역시 가짜…」
그는 몸을 날리며 나지막히 소리쳤다.
『후퇴시켜라. 돌아간다!』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괜찮은가?』
정규는 피를 흘리고 있는 가짜 왕승고에게 물었다.
『겨, 견딜만은 합니다…』
가짜 왕승고가 헐떡거리며 답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할 중상을 입은 것은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당해서 서너명이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놈들은 분명히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는데
왜 그냥 돌아간 것일까?」
그들이 갑자기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정규 일행은 조금 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을 터였다.
문득 정규는 그들이 돌아가기 직전에 들려온 나직한 새소리를
상기해냈다.
「이 자리에서 새소리라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모종의 신호? 퇴각신호?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가 그들을 불러들였다는 말인가?」
습격을 했다면 목적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 의미는 그들이 이미 목적한 바를 달성했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었다.
「설마?」
정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자신의 앞에 주저앉아 있는
가유수(賈柳秀)를 보았다.
틀렸다.
물처럼 고요한, 얼핏보면 드러나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 산악과 같이
당당한 왕승고와는 그 기세가 같지 않았다. 그라면 저렇게 쉽게
상처를 입지 않았을 터이고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있기는 하지만 그 모습 또한 고요해 보일 터였다.
설명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러한 기도(氣度)는 하고자 해서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달리고 있을 때에는 알아볼 수 없지만 이러한 상황이 되자
표가 났다.
「탄로가 났단 말인가?」
그외에는 다른 말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느닷없이 몽고기병이 습격해온 것도 석연치 않았다.
『정말 우리 뒤를 따르는 자들이 있었단 말인가?』
그처럼 비밀리에 움직였음에도?
정규는 신음했다.
어둠이 급격히 밀려왔다.
삭막한 바람이 이것이 북풍(北風)이라는 듯이 살을 엘 듯이 불었다.
차가웠다.
『돌아가자!』
정규는 신음하듯이 소리쳤다.
거대한 어둠으로 함몰하고 있는 드넓은 초원을 바라보던 정규가
결단을 내렸다.
그들이 다시 청랑애로 돌아왔을 때는 그들이 청랑애를 떠나던 때와
비슷한 아침 동이 틀무렵이었다.
희뿌연 아침 기운이 피비린내를 몰고 청랑애를 휘감고 있다.
피비린내의 의미를 깨닫자 정규는 당황하여 청랑애의 안으로
내달렸다. 그는 대한지릉의 입구가 어디에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의 앞에 시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리와 늑대의 시체가 아니었다.
사람의 시신들, 거기에는 라마의 모습도 있었고 몽고인도 보였다.
그리고 전혀 다른 복색의 회의인들의 시신까지 거기에 섞여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에 정규의 얼굴은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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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잘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독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재미있게 즐독하구 갑니다.
즐독 허고 갑니다
감사
고맙습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