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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야, 잘있나!!! 느거동네 기사가 났길래 한번 올려본다. 시간내어 추억여행으로 떠나보고 싶다... |
그 옛날 양산 땅 드나드는 뱃길 황산강변
양산시 동면과 물금읍, 원동면을 걸쳐 흐르는 낙동강변. 길을 따라 강변마을 이야기가 가득하다. 물금과 원동은 소설가 요산 김정한 선생의 중편 <수라도>와 단편 <산서동 뒷이야기>의 배경이다. 경남도와 부산시가 문화관광루트 조성을 위해 복원키로 한 낙동강뱃길의 물금과 용당(원동면) 나루터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물금나루는 김해시 대동면 고암나루와 상동면 상동나루로 이어지는 뱃길을 부산으로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김해~부산 간 도로가 개설되면서 그 옛날 뱃길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대신 지금은 이곳에 자전거길이 잘 조성돼 있다. 파란 하늘에 가을바람을 타고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고, 코스모스꽃이 살랑거리는 요즘 건강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자전거를 타고 호포에서 출발해 강변마을 이야기를 따라간다./ 글·사진 이형분 양산시 문화관광해설사
복을 부르는 증산마을…양산신도시 조성
호포마을을 지나면 증산마을이 나온다. 증산은 모습이 떡을 찌는 시루를 닮아 이름 붙여진 마을 뒷산이다. 이 산에는 임진왜란 때 축조한 왜성(倭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왜군이 내륙진출의 기점을 마련하고 물자 수송을 위해 1597년 쌓기 시작해 이듬해 완성했다. 왜군이 1598년 3월 왜성의 근거지를 부산 가덕도로 옮기면서 극히 짧은 기간에만 사용된 성이다.
증산은 거북 모습을 닮았다고도 한다. 또 풍수설에서는 학 또는 거북이 양산을 향해 천석(千石)을 물고 들어가는 형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시루산 아래에 살면 의식주 걱정이 없다'는 이야기가 유래됐다.
다른 구전도 전해온다. '낙동강에서 큰 자라 한 마리가 나와 지금의 양산시내 쪽으로 기어들어가는 것을 본 빨래하던 할마시가 빨래방망이로 누르자 자라가 산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산의 가운데가 잘록한 것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복을 상징하는 거북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증산 북쪽 넓은 들판엔 지금 양산 신도시 조성이 한창이다. 멀리 양산타워도 보인다. 경남도가 이곳에 들어선 부산대학교양산병원과 함께 양방항노화산업 중심센터를 추진하고 있다.
김정한 소설 <산서동 뒷이야기> 무대 '맹맹이마을'
신도시가 한창인 이곳을 옛날엔 '메기들'이라 불렀다. 메기가 한숨만 쉬어도 홍수가 날 정도여서 붙여진 이름이다. 낙동강 하구라 이 지역에 비가오지 않아도 윗 지방에서 비가 많이 오면 물난리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양산천에 제방을 쌓고 메기들을 개발하면서 옥토로 바뀌었다. 한때는 '동척들'과 '홍익들'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홍익식산 주식회사가 개간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는 낙동강과 경부선철도가 지나고 산기슭에 일명 '맹맹이마을'이라 부르는 남부동마을이 있다. 이곳은 요산 김정한 선생의 <산서동 뒷이야기>의 주 무대다.
1908년 부산 남산동에서 태어난 선생의 어머니 고향이 양산시 동면 금산리다. 외가가 있는 금산마을은 호포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선생은 어린 시절을 낙동강변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많이 썼다. 단편소설 <산서동 뒷이야기>는 주인공 두 명이 옛 일을 회고하면서 엮어간다. 주인공 박춘식이 일본인 친구 이리에의 아들 나미오의 방문으로 흘러간 세월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일본인 이리에는 물금역 인부로 일하다가 부상을 입은 후 일본인으로선 드물게 농사일을 하며 이 지역에 정착한다. 1934년 갑술년 대홍수로 산서동에 이주하여 농민조합까지 만든 인물로 묘사된다.
소설은 주로 그 지역의 지명을 거의 사실과 흡사하게 묘사한 게 특징이다. 'ㅁ역'은 물금역을 말한다. '모랫등'은 사지동(沙旨洞)이라 불렀던 현재의 남평(南坪)마을 앞들녘이다. '들마을'은 물금역 서쪽 앞들녘이고, '오리숲'은 남부마을 앞들녘에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 보인다. 모두 홍수 때 없어진 마을들이다. 물금지역의 근·현대사를 실감 있게 그려 내고 있다.
물금역 주변 영화 '엽기적인 그녀' 촬영
애환이 깊은 산서동을 뒤로 하면 물금역이다. 물금역은 지난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연결되면서 생겼다. 100년이 훨씬 넘은 오랜 역사를 가진 역이다.
가을에는 강변에 흔들리는 갈대가 철도 이용객들을 반긴다. 겨울철에는 낙동강 물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물안개가 장관이다. 기차여행 중 잠을 자다 눈을 떠 비몽사몽간에 보는 물안개 장면은 이곳을 천상의 낙원으로 착각할 정도다.
물금역 건너편 낙동강변 원두막과 오봉산은 청춘남녀의 코믹한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한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촬영한 곳이다. 견우와 그녀가 타임캡슐을 묻고 기차역에서 가슴 아프게 엇갈리며 헤어지는 바로 그곳이다. 남녀 주인공 배우 차태현과 전지현이 낙동강변 원두막에서 함께 비를 피하는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대형 살수장비 등이 동원되었다. 자연이 수려하고 배경이 넓은 나루터를 찾다 보니 물금역 주변을 촬영지로 선택했다고 한다.
물금은 원래 양산 주변 낙동강 하류의 옛 이름 황산강(黃山江)에서 유래돼 황산이라 불렀다. 황산장이 번창해 가물치와 뱀장어 등 민물고기가 많이 거래됐다. 지금은 물금시장으로 남아있다. 소설 <수라도>에는 주인공 '가야부인'이 화제마을로 시집을 올 때도 파도가 거칠어 이 장을 거쳐 화제로 갔으며, 제삿장도 여기서 봤다고 묘사돼 있다.
자전거길은 물금진이 있었던 구물금을 지나 경부선 철길을 따라 물문화전시관을 지난다. 물문화전시관은 물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옛 물금취수장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낙동강과 물의 역사를 담은 전시장이다. 2층의 전망대에서 낙동강 전경을 볼 수 있다.
벼랑에 선반처럼 나 있었던 '황산베랑길'
이곳을 지나면 전국의 아름다운 명소로 지정된 '국토종주 자전거 길' 양산구간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영남대로 황산잔도(黃山棧道) 구간이기도 하다. 그 이름과 *잔도라는 형식에서 중국 황산(黃山)의 낭떠러지 절벽에 나 있는 잔도를 떠올리게 한다.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던 선비, 일본으로 오가던 조선통신사, 한양과 영남내륙지방으로 장사를 다니던 보부상들이 지나던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다. 밀양과 양산을 오가는 유일한 길이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한양으로 진격하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산적도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산적을 피해 사람들은 좁은 잔도를 택해 다녔다. 이곳을 양산사람들은 '황산베랑길'이라고도 한다. 베랑은 벼랑의 경상도 발음이다. 험하기 짝이 없어 주막에서 거나하게 한 잔 걸치고 과거보러 가던 옛 선비나 상인들이 발을 헛디뎌 무수히 물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올 정도다. 이 길을 지나던 마을사람이 동래부사의 행렬과 마주쳐 좁은 길에 겨우 옆으로 비켜 서있는데 병졸이 밀치는 바람에 낭떠러지로 떨어져 강물에 빠져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요산 김정한은 <수라도>에서 "비록 서울로 빠지는 국도라고는 해도 그 당시의 '황산베리끝'하면 좁기로 이름난 벼룻길로서…"라거나, "제삿장을 보아서 머리에 이고 그놈의 베리끝을 돌아오자니, 언덕 위에 쌓였던 눈까지 휘몰아쳐 부치는 바람결에 인제 곱다시 얼어서 쓰러질 것만 같아서…"라고 황산잔도의 험한 도로 사정을 묘사하고 있다.
소설 <수라도>의 주 배경 용화사와 굴다리
이제 자전거길을 조금 벗어나 물문화전시관 아랫길로 소설 <수라도>의 승화 공간인 용화사에 들른다. 수라도는 '아수라도(阿修羅道)'와 같은 말이다. 싸움을 일삼는 귀신 아수라가 살며 늘 투쟁이 그치지 않는 세계를 지칭하는 범어(梵語)다. 생전에 교만심과 시기심이 많은 사람이 죽어서 간다는 수라도는 가야부인이 살아온 고통스런 현실을 한마디로 표현한 말이다.
용화사 가는 길은 마치 미륵의 세계로 가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는 컴컴한 굴다리를 지난다. 굴다리를 지나면 바로 용화사 앞마당과 대웅전이 마주 보인다. 대웅전에는 보물 제491호로 지정 된 석조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강 건너 김해 감로사의 불상을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이 훔쳐 가다가 너무 무거워 낙동강에 버렸던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온다. 석조여래좌상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비롯해 당당한 어깨, 풍만한 가슴, 팔다리의 양감(量感) 등으로 인해 통일신라시대 양식으로 보고 있다.
소설 <수라도>는 한 집안의 종부로 시집 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발발기까지 산 주인공 가야부인의 삶을 이야기한 작품이다. 선생의 외가는 동면 금산마을이고, 처가는 화제마을이다. 자신의 처조모를 모델로 했다고 했으니, 작품 속에 손녀로 나오는 '분이'는 요산 선생의 부인이라고 하겠다.
경파대와 임경대 낙동강 문학을 낳다
다음은 가야부인이 살았다는 화제마을로 발길을 옮긴다.
화제로 가기 위해 강바람을 다시 맞으며 강위의 데크 길을 따라가노라면 강가 벼랑길에 비석하나가 외로이 서 있다. 낙동강 제방을 개축한 동래부사 정현덕의 공덕을 기려 고종 8년(1871)에 세운 정현덕영세불망비다. 영세불망비를 지나 강가에는 뭔가 이름이 있음직한 바위가 보인다. 선비 정임교가 만년에 친구들과 시를 읊었던 장소로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의 시 <채련곡(採蓮曲)> '거울 같은 물바람 없어도 절로 물결 인다'는 구절에서 차용해 이름 붙인 경파대다.
경파대에 오르면 바위 위 여러 곳에 엄지손가락만한 홈을 발견할 수 있다. 낙동강을 따라 물건을 운반하던 조운(漕運) 흔적이다. 주변의 다른 바위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옛날 낙동강을 오르내리던 조운선(船)은 바람이 있는 날은 순조롭게 강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지만, 바람이 없는 날이나 물길이 낮은 부분은 선박 앞에 밧줄을 매달아 놓고 강변에서 사람들이 끌어 당겨 배를 움직였다. 줄을 당긴 사람들을 고디꾼이라 했는데, 바위에 밧줄의 흔적이 남을 정도면 고디꾼들의 고초를 짐작 할만하다.
부산 하단에서 경북 왜관까지 소금배를 운행할 때는 호포까지 돛을 달고 가지만, 호포부터는 고디꾼들이 배를 강둑에서 끌고 올라갔다고 한다. <수라도>의 주인공 가야부인의 친정이 명호인데, 명호는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명지의 끝 마을로 커다란 염전을 하는 큰 부자였다고 한다.
이어서 신라 말기 최고의 문장가라 불리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국 명산대천을 찾아 방황할 때 양산의 황산잔도를 지나면서 절벽위에서 바라보는 황산강의 모습이 마치 거울 같아 이름 지었다는 임경대가 나온다. 벽에는 선생의 시가 적혀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일제의 경부선 철도 부설과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없어진 것을 훗날 지역민이 황산루에 옮겨 적은 글귀만 전해온다.
낙동강변은 뱃길이든 자전거길이든 어디든 임경대 만큼 아름다운 곳이다. 황산루의 최치원 선생 글귀는 양산의 루(樓), 정(亭), 대(臺) 중 가장 오래된 것이며, '낙동강문학'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화제·토교·명언·용당 마을 각각의 이야기 담아
어르신들의 이야기로는 화제마을은 옛날에 열두 동네였다. 지금도 크고 작은 마을들이 산 깊숙이까지 자리하고 있다. 화제마을에는 고려시대부터 19세기까지의 도요지로 추정되는 곳이 10여 군데 확인된다. 마을 이름도 사기들, 사기점 등으로 모두 사기와 관계있다. 임경대 부근에는 철광석을 캐던 광산이 있어 1970년대 초반까지도 철광석이 많이 생산됐다. 광부의 평균 임금이 공무원 월급보다 훨씬 많아 사람들이 몰렸다고 한다. 마을이 많이 있었던 연유가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강위의 데크길이 끝나면 처음 만나는 곳이 토교마을이다. 화제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길목에 긴 나무를 걸치고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그래서 토교(土橋) 마을이다. 옛날 한양 가는 길목으로 주막촌을 형성한 곳이다. 소설 <수라도>에서는 무당 천금새의 집 앞을 '태고나루'라고 했는데, '토교나루'로 보인다. 원동 사람들이 징용과 징병, 정신대로 끌려갈 때 배를 탔던 곳이다.
명언마을은 예전에 먼 고지대란 뜻으로 '먼듬'이라 불렀는데 마을 이름을 통합할 때 밝고 큰 마을이란 뜻으로 명언(明彦)이라고 바꿨다. 마을 입구에는 화제천이 흐르고 수라도문학 표지석이 보인다. 이곳에 고종 임진년(1892년)에 사헌부감찰과 김천도(金泉道) *찰방을 지낸 김용태란 인물이 있었는데, 천석지기였다고 한다. 추측컨대 소설 <수라도>에 나오는 허진사의 배경인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오봉 선생은 오봉산에서 따온 듯하다.
화제마을에서 좀 떨어진 용당마을에는 *가야진사가 있다. 이곳에서 지금도 용신제를 지낸다.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국가 제사의식 중의 하나다. *사독 중 유일하게 남아 있다.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있다. 매년 음력 3월 초정일(7일)에 맞춰 용신제를 지냈으나 시대의 흐름에 맞춰 지금은 양력 5월 5일에 지낸다. 10월에 열리는 양산삽량문화제 행사에서도 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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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도(棧道) 다니기 힘든 험한 벼랑 같은 곳에 선반을 매듯이 하여 만든 길.
*찰방(察訪) 조선 시대 각 도의 역참 일을 맡아보던 종육품 외직(外職) 문관 벼슬.
*가야진사(伽倻津祠)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에 위치한 나루터신(津神)을 모시는 사당. 신라가 가야를 정벌할 때 왕래하던 나루터가 있던 자리에 세워져 있다. 제당에는 청룡, 황룡, 백룡의 3용신이 모셔져 있다. 현재의 사당은 조선 태종 6년(1406년)에 세운 것이다.
*사독(四瀆) 예전에 나라의 운명과 관련이 깊다고 여기던 네 강. 조선 시대에는 낙동강(洛東江), 대동강(大洞江), 한강(漢江), 용흥강(龍興江)으로 네 방위를 따라 정하여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