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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 거서간은...
고려나 조선에서 젤 처주던 신라란 나라의 개국 시조로 나오면서도 그 행적이 묘연합니다...?
다 찾아봐도..후대의 짤막한 몇 줄의 선문답식 미사여구들 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마구잡이로 추리할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박혁거세 신화들은...김부식, 일연...등의 신라계 충신들의 예의 갖춘 서술을 그대로 믿기 보다는...
실록 그대로를 직역해 해석하는게 진실에 가깝다 보입니다.
실록들을 그대로 직역하면...신라시조 박혁거세 거서간은...육시형(사지 절단형)을 당한 거로 보입니다.
하늘나라에 뜬금없이 가셨다가...6일만에 땅에 떨어지셨는데...5등분으로 떨어 지셨다.
모두 모아서 합장하려 했는데...왠 늠의 거대한 흰 뱀(白蛇)가 나타나 훼방을 놓는 바람에...합장치 못하고 따로 따로 모셨다.
그 릉소가...강소성이다...아니, 사천성 어디다...아니, 딴데다...
위 기록들을 그냥 아무 목표없이 조상에 대한 공경심 배제하고...감성 없이 직역하면 됩니다.
*거서간께서...하늘나라에 뜬금없이 가셨다.
직역: 왕이 아무데나 혼자 돌아다니는 지위가 아니니...천자에게 호출 당하거나 끌려 간 겁니다.
역모로 걸려 들어가신 걸 겁니다.
*6일만에 시신으로 나타나셨는데...하늘에서 5등분으로 땅에 떨어 지셨다...(5색 광채니 뭐니의 미화 문구는...삭제...)
직역: 조정 측근들도 따라갈 수 없는 곳...백성들도 따라갈 수 없는 곳으로... 불려(잡혀?)가신 겁니다.
당시의 하늘나라면...상국인 고구려밖엔 없을 겁니다.
6일만에 5등분 되셔서 강림하셨다.
어느 나라 어느 신화에도...왕이나 신의 신화에...몸이 다섯등분되어 강림하셨다...란 소름돋는 신화는 없는걸로 압니다.
육시형을 당해서 돌아 오신걸...
신라계 사가인 김부식이나...고려의 호족인 혁거세 거서간의 후예들이..너무도 처참하니 그대로 묘사할 수 없어...
비유법을 쓴 걸 겁니다.
*5등분 된 시신을..모두 모아 합장하려 했으나
큰 백사(白蛇)가 나타나 계속 훼방을 놓아...실패하고...따로 따로 모셨다...그래 5릉(五陵)이다.
직역: 상례대로...5등분된 시신을 잘 수습해 합장하려 했는데...
백사(독사같은 白濟애들...ㅡ. .ㅡ)이 방해해...결국 실패하고...강토 여기 저기에 분리되어 모실 수 밖엔 없었다.
강소성 어디에도 한 구...
사천성 무슨 절에도 한 구...무슨 절에도 한 구...
종합해설:
박혁거세 거서간은...
추모왕(투무천제)와 서열이 비슷한 북부여 천자국의 황족였는데...
한나라가 망한 남쪽 사천성 즈음에 봉지를 받으셨고...잘 나가고 계셨는데...
고구려(하늘) 천자에게 역모혐의로 달려 들어가셔서...유시형을 당하시고...6일만에 5등분된 시신으로 무참이 돌아 오셧던 것이고...
그 왕비께서도 자살을 하셨거나 같이 제거당하신 것이고...
유가족들이나 백성들은...상례대로...시신들을 잘 추스려 합장하려 했으나...
신라의 커짐을 원치않던 고구려 천제가 허락치 않았고...옆에 살던 백제국에 감시시켜..
5등분된 시신을 따로 모시게 주술적 조치를 취한다.
그 주술이 성공했는지...
아들이 잠깐 보위에 올랐다 제거된 이훈...박혁거세의 집안은...신라 왕위를 그 후론 전혀 잇지를 못한다.
그래도 박혁거세 거서간이 후대에 신라의 시조로 모셔짐은...
그 혈통이 신라 역대 왕들 중 부여족 황족서열이 젤 높은 서열였겠지 여서 싶고...
결정적으론...통일신라 패망시...
궁예를 몰아내고...황권을 좌지우지하던 세력이...혁거세간의 후예들이였기에 가능했다 보여지는 대목이며...
이들이 김부식이 고려조에서 역사서를 쓸 때 까지도...이후, 조선조 망할때 까지도
권력의 핵심에 있었던 밀양박씨 세력이라 가능했던 구도로 해석됩니다.
그 유해가 모셔진...릉들이...강소성에있다...사천성 어느 성이다..아니,딴 성에도 있다 함은...
현재, 경주의 5릉 같이... 모냥세 좋게 같이 다섯릉이 모셔져 있는게 아니라...
중원 남부 여기 저기에 정신사납고 불경스럽게 모셔졌단 얘기로 보이며...
궂이 후세가 이 묘소를 같이 모시지 않은 이유는...
이미, 고구려와 백제에 당한 엄청난 치욕의 역사를...오히려...
신라 강역의 사방에서 신라를 지키기 위해 호위신으로 남겠단 뜻을 기린 아름다운 신화로 잘 미화해 놨기에...
후대에 다시 합장함은...과거의 자신들의 무능했음의 시인인 이치니...망설였을 수 있으며...
어쩜 ,현재의 경주 박혁거세 5능은...
그 후손들이 중원 본토에서...양이와 묘지개념도 없던 왜놈들이 겨 올라올 때...
도굴과... 그로인한 회손을 막으려...급히 수습해 올 수도 있었지 않았나 예상해 봅니다.
우리 집안 예로 보자면...
한양서 뜬금없이 높은 벼슬을 하시다...양주감사로 좌천되어 오셨으니...무조건 믿어라...라 하시는 선조님과 가계의 선산묘지가...
옛 일산 신도시 자리의 능선에 모냥세 없이 급허게 모셔진 흔적이 역력했었던 점으로 보면...
개발로 정리되기 이전의 그 제 2구역 선산 묘지들도...아마 ,같은 시기 같은 이유와 방법으로 이장된듯 보이고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혀 중국의 박혁거세 릉이 검색이 안되네여...ㅡ. .ㅡ...밀양박씨 종친들과 김해김씨 종친회는 왜 여길 집중 답사하질 않는지...
국내의 짜가(신해혁명 때 급허게 이장한?) 묘지 사진으로 답답함에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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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모두 퍼온 글입니다.
'혁거세와 김유신의 묘는 중국 강서성 오현에 있다 (이중재: 상고사의 재발견 861P) 혁거세의 무덤은 운남사에서 남쪽 4리에 있다고 했다 이곳은 강서성 오현에 있는 호구산임을 세종 실록지리지에 명기되고 있다 . 김유신의 묘도 거서간 묘주변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1993년 한국 상고사 회원들이 세종실록 지리지에 의거 신라묘지 탐방 확인)'
*다음 블로그에서 퍼온 글인데 어찌된 말인지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http://blog.daum.net/jahami/7638604?nil_profile=blog *위의 사진들이 나온 블로그
32. 신문왕릉, 능지탑
이제 선덕여왕릉을 찾아야 한다. 더 늦기전에... 여전히 어려운 길... 지난번에도 이러다 포기했었는데... 먼저 찾은건 신문왕릉... 통일신라 기틀을 확립한 문무왕의 아들로 짧은 재위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의 기틀을 확립한 왕이다. 석축위 갑석을 두고 주변에 두른 호석이 인상적이다.
또 선덕여왕릉 위치를 지나서 능지탑을 먼저 본다. 문무왕의 화장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연화탑이라고 불릴 정도로 석축위 갑석에 정성스러운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기단부에는 잘짜여진 판석에 십이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럼 신문왕릉보다 후대로 맞춰져야 하는데? 게다가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은 더 후대에 조성되었다 해야 맞는데... 선덕여왕릉(3단 자연석 석축) - 태종무열왕릉(고분형태) - 김유신묘(판석과 십이지신상) - 능지탑(석축과 판석, 십이지신상, 연화문갑석) - 신문왕릉(5단 자연석 석축에 갑석과 호석)... 시대와 유적의 흐름이 전혀 맞지 않아 어지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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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혁거세 王陵은 中國 양주에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 1] 신라의 시조는 혁거세(赫居世) 거서간(居西干)이다. 시조의 성(姓)은 박씨며 휘(諱)는 혁거세이다. 원년 갑자(BC:57년) 4월 병진일(일설은 정월 15일)날 13세에 즉위하여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고 국호를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사로(斯盧)라 하였다. (중략)
[삼국사기 신라 본기] 20년(BC:37년)에 경성(京城)을 쌓아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26년 봄 정월에 금성에 궁실을 지었다. 혁거세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 3월 왕은 하늘로 올라 가셨는데 7일 후에 유체(遺體)가 땅에 떨어져 흩어졌다. 왕후 역시 왕을 따라 세상을 떠나시니 나라의 사람들이 합장하려고 하였으나 큰 뱀이 나타나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하여 5체(五體)를 각각 장례하여 5능(五陵)이 되었다. 역시 능의 이름을 사능(蛇陵)이라 하였다. 담엄사(曇嚴寺) 북쪽에 이 陵이 있다. 태자 南海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본문 끝.
대한민족의 반역자 친일사학자 이병도의 註(주)를 적는다.
[1]. 금성(金城) => 이병도는 註에서 금성(金城)은 여지승람(輿地勝覽) 경주고적조(慶州古蹟條)에서 재부동서리(在府東西里). 토축(土築) 周(주) 2,407척이라 하였으나 지금에는 유적이 뚜렷하지 못하다. 그리고 그 이름은 金城湯池(금성탕지)의 뜻에서 취하였다기 보다 <검城(성)> 즉 <임금성(왕성)>의 뜻이 아닌가 한다. 라고 하였다.
[2]. 담엄사(曇嚴寺) => 조국을 배신한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증서도 없이 임의대로 註에서 담엄사(曇嚴寺) ==>慶州 南川 南이라고 했다. [개가 멍멍 짖는다]
(2) 혁거세王의 墓地는 강소성 양주에 있습니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왕의 묘지는 경북 경주 탑리 5능(五陵) 남쪽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 신라 시조 혁거세왕조]를 살펴보면 담암사는 경북 경주 탐리 오능 남쪽이 아니라 楊山村(양산촌)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거서간혁거세의 무덤은 虎丘山(호구산)의 雲岩寺(운암사) 남쪽 4里(리)에 있다. 고 기록돼있습니다. 곧 신라의 시조 혁거세의 墓地(묘지)는 강소성 吳縣(오현)의 虎丘山(호구산)에 있습니다. [정부당국자는 철저히 검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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