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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역사인물 스크랩 세조의 킹 메이커 신숙주(1417~1475년)
天風道人 추천 0 조회 104 14.04.27 21: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KBS에서 방영하는 <한국사 전 신숙주 편>의 내용을 옮깁니다. 저작권은 이곳에 있습니다. 상업적 용도는 금합니다.

 

[한국사 전]

세조의 킹 메이커 신숙주(1417~1475년)

 

 

1392년 조선이 개국한다. 새 왕조는 4대 임금 세종에 이르러 전성기를 누린다. 그러나 역사의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년)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1455년)에 오른 것이다. 이에 반발한 사육신들의 단종복위 운동(1456년)과 세조의 철저한 응징이 있었다. 조선 초기 최대의 피바람이었다. 이 정치적 한가운데에 수양대군 세조가 선택했던 한 인물 신숙주가 있었다.

 

1453년 계유정난(癸酉靖難)

1455년 세조(世祖) 즉위

1456년 단종(端宗) 복위 운동

1457년 단종의 죽음

 

 

한국사 전. 오늘은 조선 500백년사에서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켜왔던 한 인물 보한재 신숙주를 만나보겠습니다. 사육신이었던 성삼문, 이개, 하위지 같은 인물들은 왕을 찬탈한 세조에 맞서서 결국 죽임을 당하는데 반해서 신숙주라는 인물은 세조에게 협력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신숙주는 훗날 변절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됩니다. (진행자 한상권)

 

한편 신숙주는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천재 관료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실제로 세종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모시고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국조오례의, 동국정운(東國正韻), 병장록 같은 수많은 저작을 남겼고, 특히 한글반포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진행자 이상호)

 

그래서 더욱 큰 논란이 되어왔던 것입니다. 과연 신숙주라는 인물은 노회한 정치 권력자에다 변절자였던가 아니면 실용주의 노선을 견지한 천재관료인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왕위에 오른 세조를 선택했던 신숙주. 그를 둘러싼 숱한 논란과 평가의 실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456년 세조 2년. 조선 조정에는 경사가 있었다.

 

세조실록은 세조 2년(1456년 2월 21일 )에 편찬되었다.

 

“전하, 신 사은사 신숙주 진심으로 경하 드리옵니다.”

 

조선 제 7대 임금 세조가 명나라 황제로부터 공식인정을 받은 것이다.

 

“드디어 명나라 황제께서 과인과 이 나라 조선을 공인했소.”

“경하 드리옵니다.”

“이 나라 조선과 만백성의 흥복이옵니다.”

“참으로 큰일을 하시었소.”

“전하, 전하”

“지난 날 그대와 내가 만리 먼 길을 함께 갔었고, 또 함께 맹세한 일이 있었거늘 이제야 그 큰 뜻을 성취했으니 이 기쁨을 어찌 다 헤아리겠소. 참으로 기쁘오.”

“이 모두가 전하의 용기와 결단으로 말미암은 것이 옵니다. 경하 드리옵니다. 전하”

“여봐라. 주안상을 대령하라. 내 오늘 대소(大小) 신료들과 오늘은 마음껏 즐기리라.”

(세조와 신숙주와의 대화)

 

이들이 함께 한 맹세는 무엇이며, 성취한 큰일은 또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본격적인 인연은 4년 전. 세조가 왕이 되기 전인 수양대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 이보게. 신수찬, 어허 이런 우연한 일이 있나. 어찌 지나가면서 내 집을 들어다보지도 않고 가는가.”

“대군, 황송하옵니다. 하오나, 어찌 대군의 사가에 함부로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우린 옛 친구의 집인데 어떻겠나. 자 들어가서 한잔 하세.”

(수양대군과 신숙주의 대화)

 

자, 평범해 보이는 이 만남을 과연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당시는 분경금지법(조선시대 하급관리가 상급관리의 집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법)이라고 해서 왕실 인사들이 함부로 대신들을 만날 수 없는 법이 존재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세조가 우연을 가장해서 신숙주를 집안으로 불러들여 만난 것은 아닐까요. 어째든 당시 분경금지법이라는 상황 아래서 이들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진행자 이상호)

 

“내 오래전부터 신수찬과 더불어 이런 자리를 하고 싶었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만 주변의 시선도 있고 해서”

“친구끼리데 어떠한가. 헌데 지금의 조정은 어떠한가. 나이 어린 임금에 김종서 황보인 등 나이 많은 신하들이 설쳐대는 조정 말일세.”

“대군”

“장부가 벼슬길에 나설 수 없으면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르신 말씀입니다. 장부가 편안하게 아녀자의 품에서 죽는다면 어찌 살아도 살았다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가겠는가.”

“중국이라 하셨습니까?” (수양대군과 신숙주와의 대화)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의 즉위를 중국황제에게 알리기 위한 중국행을 바로 원했다. 이때 신숙주를 함께 가자고 한 것이다. 이에 신숙주는 사은사 수양대군의 서장관 즉 비서관이 되어 명나라에 동행(1452년)한다. 사은사란 새 왕이 등극했을 때 명나라 황제의 공인을 받기 위한 사신이었다. 이들이 중국에 함께 머문 기간은 약 5개월. 훗날 세조는 이때부터 신숙주와 뜻이 통했고, 그를 신뢰하였다고 회상한다(○神志氣之同 - 정신과 뜻과 기운을 같이하여 믿으니 : 세조실록 세조 4년(1458) 6월 29일). 중국에서 돌아오고 얼마 후 수양대군은 이른바 계유정난(1453년 10월 10일 단종 1년)을 일으킨다.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 인 등 원로대신을 제거하고 그 자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남지대 교수(서원대 역사교육과)의 말을 들어보자.

 

“계유정난은 그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유정난이 정당한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세조의 왕위 찬탈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라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꾸로 세조의 왕위 찬탈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라고 한다면 계유정난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친위군 쿠데타 같은 것이다.”

 

신숙주는 계유정난에 직접 가담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 신숙주는 승정원 우부승지 겸 지병조사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매우 중요한 직책이었다. 오종록 교수(성신여대 사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승정원의 우부승지가 되어 있었다. 승지 가운데서는 조금 아래쪽에 서열이지만 지병조사로서 병조 관련 일을 관할하고 있었는데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수양대군의 일종의 눈과 귀가 되어서 궁궐을 호위하는 군사들을 일종의 최종적으로 중간에서 지휘 감독하는 그런 역할을 맡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그 역할은 세조에게서나 또 신숙주에게서나 매우 중요했다.”

 

 

계유정난 이후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강제로 왕위를 넘겨받는다. 드디어 수양대군이 세조가 된 것이다.(세조실록 세조 1년(1455년) 8월 13일 : 계양군 이증, 영천 위 윤사로, 신숙주, 권남, 한명회 등이 서로 보좌하여 나에게 흉당의 제거를 권고하고.......) 세조는 신숙주를 일등공신에 책봉한다. 그리고 다른 공신들과 더불어 신숙주를 동료라 칭하며 그에 공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세조로서는 넘어야 할 큰 고비가 있었다. 그것은 명나라의 인정이었다(신숙주 명나라로 1455년 10월에 명나라로 사행). 이때 신숙주가 사은사로 가서 명나라 황제의 인정 즉 고명을 받아 온 것이다. 남지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세조 같은 경우는 지금 단종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양위를 받았기 때문에 명에서 그 자체를 문제 삼으면 설명하거나 빠져나가기 어려운 일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그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숙주가 조문사로 가서 그러한 상황을 잘 설명을 해서 무리 없이 인정을 받아왔다. 고명을 받아온 것, 그것은 계유정난에서부터 시작해서 양위 과정 전체를 정당화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즉위한 전체의 과정을 중국 왕으로부터 인정받아서 국제적인 정당성을 획득하는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계유정난 이전부터 뜻을 함께 했던 신숙주와 세조. 세조가 말한 함께 맹세한 일은 바로 그의 즉위였고, 여기에 신숙주가 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세조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신숙주. 그런데 신숙주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폄하되어 있습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을 보면, 단종복위 운동을 하던 사육신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는데 바로 그날 신숙주가 돌아오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대감, 이게 어찐 된 일이오?”

“어찌하여 당신이 살아온단 말이오?”

“지난날 성승지(성상문)와 대감이 얼마나 친하게 지내셨소?”

“어찌하여 당신이 살아온단 말이오. 부끄럽고, 부끄럽소.”

“당신이 살아온 것이 나는 부끄럽소!”

소리 : 김지숙, 대금 : 김병성

 

내, 이 장면은 신숙주의 부인 윤씨가 사육신이 죽임을 당하던 날에 살아서 돌아오자, 그 남편의 변절을 부끄러워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는 윤씨 부인이 목을 매서 죽었다고 써져 있습니다. 하지만 실록에 의하면, 윤씨 부인은 이미 사육신 옥사가 발생하기 6개월 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모든 내용들은 후대에 윤색되거나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렇듯 신숙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이게 된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진행자 한상권)

 

신숙주와 관련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사육신의 대표적인 인물 매죽헌 성삼문이다. 성삼문은 신숙주보다 한 살 적었으나 둘은 친구였다. 성삼문은 1447년 30세 때 문과 중시에 장원을 하였고, 신숙주와 더불어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였다. 세종 때는 신숙주와 함께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찾는 등 한글반포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정계진출 초기부터 이들은 학문적 동지였던 것이다. 계유정난 당시 신숙주는 2등 공신, 성삼문은 3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신숙주와 성삼문이 완전히 갈라서는 사건이 발생했다. 숙부 수양대군의 위세를 견디지 못한 단종이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게 된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성삼문은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전하, 이제 옥쇄를 수양대군에게 넘기면 어찌 문종 아바마마와 세종 할바마마를 뵙겠습니까? 아니 되옵니다. 전하.” - 성삼문에 눈물어린 독백

“전하, 이 부덕한 숙부, 어찌 감히 대통을 물려받을 수 있겠나이까?” : 수양대군의 말.

그날 수양대군은 몇 차례에 걸쳐 왕위를 사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단종은 자신이 어리고 나라 일을 잘 몰라 수양대군에게 대임을 맡긴다며 옥쇄를 넘겼다. 성상문은 한동안 옥쇄를 꼭 잡고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전하. 전하.” → 수양대군과 여러 신하들이 내는 소리.

 

옥쇄를 넘긴 성삼문이 통곡을 하자, 수양대군이 그를 빤히 쳐다봤다고 기록은 전한다.

 

“이보게 근보, 그렇게 내 진심을 모르겠나.”

“진심이라고. 세종대왕과 문종대왕의 간절한 당부를 버리고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긴 다는 게 자네에 진심이란 말인가.”

“대의를 쫓아야하네.”

“대의라고. 대의는 단종 임금을 잘 보필하는 것일세. 시류를 좇아 일신의 안위를 꽤하는 것이 대의는 아니란 말이네.”

“진정한 대의란 이 나라 조선을 든든한 반석위에 올려놓는 것일세. 해서 강한 군주가 필요한 게야. 어리고 문약에 왕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나? 이 나라 조선과 백성을 위하는 것, 그것이 대의이며, 세종대왕과 문종대왕께서 진심으로 바라던 바일세.”

“감히, 그 더러운 입으로 선왕들을 들먹이는가. 가게나. 이제 자네와 나의 길을 달라.”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말게. 무엇이 이 나라 종묘사직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지 깊이 성찰하시게.”

“그래서 나더러 자네처럼 그 더러운 변절의 길을 걸으라는 것인가.”

“변절, 변절하지 말게. 나 역시 깊이 고민한 선택일세. 알겠는가.” (신숙주와 성상문의 대화)

 

이처럼 수양대군의 등극에 대해 입장 차이를 보이던 두 사람.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단종복위 운동이었다.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상왕 단종의 복위를 계획한 것이다. 이들 입장에서 수양대군의 직위는 명분도 원칙도 없는 정변이었다. 따라서 세조를 폐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는 것은 정통성의 회복이었다. 김경수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계유정난까지만 하더라도 그때까지 여전히 왕은 단종이었기 때문에 계유정난 당시 그들은 다른 일을 도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결국 단종을 내리고 수양대군이 세조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서는 정통에서도 어긋나는 올바른 명분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명분이 없는 정권이 탄생했을 때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명분은 다시 세우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그들이 들어냈던 것은 단종복위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계획은 세조 암살이었다. 명나라 사신을 환송하는 연회에서 세조를 호위하기로 한 성승과 유응부가 세조를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차질을 빚는다. 한명회의 제안을 받아들인 병조판서 신숙주가 세조에게 호위무사인 운검을 세우지 말자고 한 것이다. 세조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밀고자가 생겼다. 세조 암살 계획이 실패하자 성삼문 등은 거사를 뒤로 미루었다. 이때 단종복위를 함께 꾀했던 김질과 그의 장인 정창손이 세조에게 이 계획을 고변한 것이다. 단종복위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가담자와 연루자는 모두 체포되었다. 단종복위 운동 가담자들에 대한 세조의 응징은 가혹했다. 성삼문 등 주모자는 능지처참(陵遲處斬) 형에 처해졌고 연루자 70여명이 처형당했다. 가담자와 연루자의 부녀자들은 세조의 공신들이 사노비로 나누어 가졌다. 성삼문의 아내와 딸을 비롯한 160여명의 부녀자들이 세조의 공신들에게 분배 되었다. 신숙주는 이때 3명의 부녀자를 사노비로 받았다. 이덕일 씨의 말을 들어보면,

 

“역모를 꾀하면 삼족이 다 멸함을 당하다 말하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개 당사자와 아주 핵심 직계 정도가 처벌을 받는데 단종복위 사건 관련자들은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성인들은 다 죽이고 심지어 부인들이나 살아남은 부인이나 딸들까지 공신들이 다 나누어 갖는데 이것은 사적 복수의 차원인 것이다.”

 

이듬해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 청영포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 이후 신숙주는 더 강경한 주장을 한다.

 

“금성대군이 노산군을 내세워 반역을 도모하려 했으니 이유는 물론 노산군 역시 편히 살게 편히 살게 할 수 없사옵니다. 전하.”

“편히 살게 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노산군이 반역을 주도한 것이나 다름없사옵니다. 편히 살게 할 수 없사옵니다.”

“그 일은 나중에 다시 의논할 것이요.”

“이와 같은 대역죄는 다시 의논할 일이 못되옵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신숙주와 세조와의 대화)

 

이런 주장은 나중에 신숙주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신숙주는 단종의 아버지 문종과 할아버지 세종이 아끼던 신하였다(世宗嘗言 申叔舟可任大事者 = 세종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신숙주는 큰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라 - 문종 1년(1451년) 8월 5일(음)). 그런 그가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죽이자고 주장한 것이다. 후대에 이르러 신숙주에 대한 폄하가 나타난다. 바로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와 관련된 야사에 기록이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가자 평민으로 강등된 송씨는 날마다 단종을 기다렸다. 야사에는 신숙주가 송씨를 공신노비로 달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송씨(宋氏)가 관비가 되니 숙주가 공신비(功臣婢)로 삼아 자기가 받으려 했다. <월정만필(月汀漫筆)>, 신숙주가 공신으로서 노산군의 왕비를 받아 여종을 삼았다. 파수편]. 심지어 신숙주가 송씨를 노비로 삼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그러나 실제 송씨는 양인으로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했다. 신숙주에 대한 이런 폄하는 세조에 의해 선택되고 그의 협력한 탓이었다.

세조는 정통성 없는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서 어린 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버립니다. 왜 그는 이 같은 정변을 감행했던 것일까요? 당시 조선 조정에 세력 분포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들여다보겠습니다. (진행자 한상권)

 

계유정난(癸酉靖難) 직전 가장 정통성 있는 세력은 당연히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대신들이 모시고 있던 단종의 왕권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양대군의 동생 안평대군. 그는 많은 문인 친구들이 있었고, 정가의 평판도 좋았습니다. 이 안평대군 역시 왕권에 협조적이었습니다. 반면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같은 당시에는 영향력이 미미했던 인사들과 가까웠습니다. 이렇게 볼 때 수양대군은 당시 넘버 쓰리였던 샘이다. (진행자 이상호)

 

이때 넘버 쓰리 수양대군의 선택은 명확해집니다. 현실을 수긍하고 넘버 쓰리로 사느냐, 아니면 정변을 통한 집권이냐 과감하게도 수양대군은 후자를 선택하게 되고 그때 그의 곁에는 신숙주가 있었던 것이었다. (진행자 한상호)

 

 

신숙주는 세종 21년인 1439년 23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훈민정음 반포 때에는 자료수집에 참가하고 성삼문과 함께 명나라 학자 황찬을 여러 번 찾아가 음운 지식을 가져오는 등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집현전 8학사에 한 사람으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 시기 수양대군 역시 세종에 명에 따라 집현전에 참여했다. 젊은 지식인 신숙주와 교류했다. 젊은 관료 신숙주에 정치적 성향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세종실록 편찬 도중 신숙주가 좌의정 김종서와 의견 충돌을 보인 것이다.

 

“대감, 이미 세종대왕의 손때가 묻은 오례를 세종실록에 싣지 않겠다는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닐 것입니다. 대감께서는 그러고도 세종대왕의 신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爲臣下, 安可以此事君乎)”

“뭐, 뭐이”

“대감께서는 벼슬을 앞세워 옳은 주장을 묵살하려 하십니까? 오례는 세종실록에 싣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김종서에 대한 신숙주에 질책)

 

단종 당시 원로대신으로 권력에 중심이던 김종서에 맞서 그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신숙주. 신숙주의 이런 면모는 김종서 등 원로대신과 대립하던 수양대군에 정치노선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는 것이었다. 수양대군 입장에서 신숙주는 포섭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신숙주에 대한 수양대군의 관심을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권자공은 외척으로 승지가 되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그 사람됨을 보면 크게 착하거나 악한 것은 없는데 다만 침착하고 신중하지 못한 자이니 그 연고를 다 말하지 말고 넌지시 빗대어 말하여 스스로 알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수양대군은 신숙주에게 인사에 대한 조언까지 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신숙주는 수양대군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가 남긴 문집 보한제집(신숙주의 시문집)을 보면, 그 역시 수양대군을 신뢰하고 인간적의 호의를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숙주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의기투합했고 수양대군으로부터 나라의 선비로 대접받았다고 말한다(國士便蒙知 - 광릉만사). 급기야 세조는 신숙주는 자신에게 있어서 중국 당나라 태종의 명제상 위징과 같은 인물이라고 공헌한다. 공주대학교 신용호 교수(공주대 한문학과)의 말을 들어보자.

 

‘지장’이니 신숙주는 곧 나의 ‘위징’이다. 乃智將也, 叔舟乃吾 ‘魏徵’也

(세조실록 세조 3년(1457년) 3월 15일)

 

“위징이 그 당나라 초기에 다른 왕자를 모시다가 당태종이 임금이 될 때에 당태종을 모셨다. 그리고 당태종이 조금만 잘못된 길로 가면 국민이 보기에 위배된 일을 할 때에는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그것을 막아서 당태종을 바른 길로 인도했던 명제상이 위징입니다.”

 

탁월한 젊은 관료로서 원로대신 김종서 등과는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졌던 신숙주. 수양대군 세조는 이런 신숙주를 선택했다. 그리고 명제상 위징에 비유할 만큼 자신에게 비중 있는 인물로 삼았던 것이다.

젊고 패기 넘치는 천재관료 신숙주. 그 신숙주를 선택했던 세조의 판단은 정확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숙주도 결국 세조를 선택하게 됩니다. 이 선택 때문에 훗날 신숙주는 역사적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게 되는데 과연 처세에 능한 변절자였는가? 아니면 나라의 기틀을 새로 짜기 위해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려야 했던 천재관료였던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치 않아 보입니다. 우린 여기서 신숙주에 인간적인 면모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먼저 신숙주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관료로서의 진면목입니다. (진행자 한상호)

 

종묘는 조선의 왕과 왕비에 신주를 봉안하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왕과 왕비에 신주를 모신 정전. 이곳에는 모두 49위 신주가 모셔져 있다. 종묘 정전의 제4실 세조와 왕비의 신주도 있다. 정전 맞은편에 있는 공신당. 정전에 모셔진 왕들에 공신으로 배향된 인물들에 위패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공신당에는 모두 83위의 공신들이 모셔져 있다. 황희 정승, 율곡 이이 등 기라성 같은 조선 인물들의 위패. 그들과 나란히 신숙주의 위패가 있다. 그는 이곳에 조선 제9대 임금 성종대왕의 공신으로 배향되어 있다. 처음 집현전 학사가 되었을 때 신숙주는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어 기뻐했다고 한다. 집현전에서 밤늦게 책을 읽다가 잠든 신숙주에게 세종이 어의를 내렸다. 이처럼 신숙주는 학문에 몰두하는 성실한 학자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한 연구원. 이곳 전시장에는 조선 초기에 그려진 지도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신숙주의 또 다른 면모를 만날 수 있었다. 신숙주가 그린 해동제국총도와 그 지도가 담긴 해동제국기가 바로 그것이다. 신병주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신숙주는 일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면 바로 ‘일본에 대한 어떤 지도가 정확해야 된다’ 이런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신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일에 틈틈이 일본 지도에 대한 정보를 광범위하게 입수를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일본 본국과 함께 또 주변 부속 도서를 포함하는 이런 매우 정밀한 지도를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신숙주의 일본 지도는 당시로서는 매우 세밀하고 정확하다. 외교관 신숙주의 치밀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보다 약간 앞선 시기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일본은 지금의 오키나와 정도에 위치한 나라로 그려져 있다. 신숙주는 군사 분야에서도 특출한 인물이었다. 세조때 조선군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장면을 그린 야전부시도. 전투가 한창인데 지휘관은 독특한 자세로 누워있다. 여진 정벌에 나선 도체찰사 즉 총사령관 신숙주다. 밤중에 여진족에 야습이 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총사령관 신숙주의 반응은 의외였다.

 

“오랑캐 땅에 서리 치니 변방이 차가운데

기마병이 백리에 뻗쳐 있구나.

밤 싸움은 쉬지 않고 동이 이미 트려하는데

누워서 보니 북두성이 빗기네.”

 

적의 야습에도 태연하게 시를 읊은 신숙주. 그의 이 대담함에 조선군의 사기는 높아졌고 여진족은 야습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에 있는 오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조선으로 보면, 거의 마지막 단계로 독자적으로 여진에 대해서 일종의 군사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신숙주가 총괄 지휘해서 함경도 북부지역에 여진족을 공격했던 전투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뒤로는 조선이 두만강 너머에 있는 여진족 세력에 대해서 실질적인 영향력이 꽤 약화되는 변화가 오게 되는데 일종의 분수령적인 그런 시점에서 마지막으로 조선의 위엄을 군사적으로 과시했던 그런 인물이 신숙주라고 할 수 있겠다.”

 

군사전략가 신숙주의 면모는 저술에까지 이어진다. 신숙주는 세조가 하사한 군사서적에 주석을 단 병장설을 간행했다. 이외에도 국가의 의례절차를 담은 오례의 등 수많은 책을 편찬했다. 그의 저술들은 조선의 문화부흥을 견인했다. 그는 특히 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책임을 맡았다. 이처럼 신숙주는 여러 분야에서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던 전문 관료였던 것이다. 규장각 신병주 박사의 말을 들어보자.

 

“세종에서 성종 때 걸친 시기, 조선 전기의 문물편찬이 완성되던 바로 그 시기에 경국대전과 같은 법전이라든가 동국통감과 같은 이런 역사서 편찬을 주도하는 인물이 바로 신숙주였다. 그래서 보면, 조선전기 어떤 문물제도에 총 완성의 지시자라고도 볼만큼 뛰어난 학자 관료로서의 능력을 보인다.”

 

이후 신숙주는 그가 지지했던 세조의 손자 성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세종에서 문종, 단종, 세조를 거쳐 예종, 성종에 이르기까지 여섯 임금을 보필하며 정치를 관할한 신숙주. 그는 두 번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공신에 네 번이나 책봉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성종의 공신으로 종묘에 배향되었던 것이다.

 

창백한 지식인이 아니라 실천력을 겸비한 전문 관료. 조선 초기 숱한 업적을 이룬 신숙주. 그런데 이런 인물을 민중들은 왜 싫어했을까요? 비록 세조를 도왔고, 그로 인해 세조에 공신이 됐지만, 신숙주는 한명회나 권람 등 다른 공신들에 비해 훨씬 청렴하고 탁월한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도 그의 업적 대신 이렇게 폄하된 평가만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진행자 이상호의 말)

 

신숙주가 부정적인 인물로 각인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성삼문 등 사육신의 옥사였다.

 

“지금이라도 과인에게 협조하면 살려주겠노라.” (세조의 말)

“(쓴 웃음) 이보시오 나리 그 무슨 망발이시오. 과인이라니” (성삼문)

“뭣이라” (세조)

“아무리 임금 옷을 입고 임금 자리에 올랐다 하나 당신은 수양대군일 뿐이요. 아시겠소이까. 나리.” (성삼문)

“네, 이놈. 해마다 주는 녹봉을 꼬박꼬박 받지 않았더냐?” (세조의 말)

“나리가 준 곡식은 한 톨도 먹지 않고 내 집 창고에 쌓아놓았소이다. 가져가시오” (성삼문)

“니가 정령, 죽기로 하였구나.” (세조의 말)

“네, 이놈 숙주야 너는 어찌 거기에 서 있느냐” (성삼문)

“병조판서는 뒤로 물러나 계시요” (세조의 말)

 

야사에 의하면, 국문장에서 성삼문이 신숙주를 혼을 내자, 부끄러워하며 세조의 뒤로 물러났다고 한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이때 세조는 성삼문의 충절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성삼문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온 몸이 찢겨지는 능지처참으로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후에 사육신으로 불리며 충절의 대명사가 되었다. 신숙주는 세조에 협력하며 관료로서 많은 업적을 이룬다. 이처럼 당대에 신숙주와 성삼문의 길은 분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평가가 달라지지 시작했다. 조선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면서 단종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숙종 24년. 이들에 대한 복권이 완료된다. 단종복위운동 이후 240여년 만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성삼문 등 사육신에 완전한 복권은 신숙주에 대한 평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김경수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16C로 넘어가면서 사림의 등장은 자신들에 이데올로기를 정착시켜야 과정에서 성삼문 선생의 의리나 명분, 절의를 중시했던 그런 정신을 강조하다보니 상대적으로 집현전 학사 출신 중에 대명사로 이야기되어지는 신숙주 선생의 평가가 절하되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후기에는 임금도 신숙주에 대한 폄하된 평가를 내린다. 조선 24대 임금 헌종은 신숙주가 사육신이 되지 못한 것을 지적하면서 성삼문 등 사육신을 칭송한다. 신숙주에 대한 문중에 폄하도 시작된다. 바로 숙주나물이란 유머에 등장이다. 녹두나물을 신숙주에 변절을 미워하여 민간에서 숙주나물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음식관련 문헌에는 녹두나물이 녹두장음 혹은 장음녹두라고만 표기되었다. 김승일 교수의 말을 들어보면,

 

“녹두나물 혹은 숙주나물 이렇게 순수하게 한국어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문서상에는 볼 수가 없다. 1930년대 소설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는 그런 차원에서 봤을 때 녹두나물 혹은 숙주나물은 그 이전서부터 충분히 사용되었다는 것은 알 수가 있겠지만, 기록상으로선 1930년대 소설 속에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차원에서 봤을 때 정확하게 시기를 우리가 논할 수 없다는 말”

 

조선후기 지식인들에 의한 신숙주의 폄하도 나타난다. 신숙주의 말을 들어보자.

 

“인생이 여기서 그치는구나. 참으로 어려운 길을 왔도다.”

 

조선후기 이건찬은 고령탄이란 시에서 만년에 신숙주가 인생을 회한하고 반성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신숙주에 대한 세간에 폄하는 끈질겼다. 이덕일의 말을 들어보자.

 

“계유정난과 그 다음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소용돌이란 사건이 없었더라면, 보다 많은 업적을 남길 수 있는 순탄한 관료 생활을 했을 가능성과 역량이 있는 분인데 이런 소용돌이 속에 뛰어 들어서 한쪽의 편을 역사적으로 잘못된 편에 가담하므로 그분이 만들었던 업적기록들까지도 후대에 폄하되게 하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난다.”

 

각자의 선택에 따라 다른 길을 걸었던 신숙주와 성삼문. 성삼문은 충문, 신숙주는 문충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성삼문은 충이 앞서고, 신숙주는 문이 앞선다는 역사의 평가인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정통성 없는 정변까지 일으켰던 수양대군 세조. 이런 세조를 선택했던 신숙주는 이 판단 하나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변절자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진행자 한상권)

 

하지만, 우리가 살펴본 신숙주는 정치권력가의 모습도 보이지만 실천하는 전문 관료로서의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래서 최근 일부학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일방적인 평가에서 벗어나서 신숙주의 능력을 재평가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진행자 이상호)

 

여기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 있다. 만약 우리 앞에 역사적 선택에 길이 놓여 진다면 ‘우린 신숙주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성삼문의 길을 걸을 것인가?’로 끝맺음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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