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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시와표현> 작품상_심사평
인간학적 이법理法과 수성水性의 상상력
한국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선사하고 있는 <시와표현> 작품상이 올해로 여섯 번째 수상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동안 <시와표현> 작품상은 정실에 얽매이지 않은 채, 한국문학의 위의를 제고할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하여 가장 공정한 문학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제6회 수상작으로 결정된 박해람 시인의 「물의 학회」 역시 이러한 <시와표현> 작품상의 위상을 담보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수많은 경쟁 작품들 속에서 돋보인 「물의 학회」를 수상작으로 정하는 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하였다.
「물의 학회」는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저변에 심어놓은 채 변화무상한 인간 삶의 질곡을 진솔하게 통찰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인간 개별적 삶의 원리 혹은 인간 보편적 삶의 원리는 모두 수성의 진리와 이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수성의 진리는 곧 인간학적 이법과 통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물에서 와서 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이것은 곧 자연과 우주의 진리이다. 그렇다면 ‘물의 학회’는 인생의 학회, 자연의 학회, 나아가 우주의 학회인 것이다. 이러한 큰 주제의식을 매끄러운 시적 언어의 동력 속에 물처럼 녹여 넣은 것은 이 작품의 주요한 장점일 것이다.
박해람 시인은 1998년 등단한 중견 시인으로 그의 작품은 이미 한국시단이 배출한 중요한 개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과도한 실험정신에 몰두하는 모더니즘과 적절한 거리를 두는 동시에 낯익은 서정성으로의 함몰을 지양하는 과정 속에서 그의 시는 독특한 사유의 깊이를 지니게 되었다. 그가 이러한 문학적 성과를 이루게 된 근간에는 동서고금의 고전에 대한 폭넓은 섭렵과 인간 삶에 대한 열렬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수상작 역시 그의 문학적 장점을 잘 보유하고 있다. 진심으로 축하하며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 큰 시인으로 발전해 주길 기원한다.
2016년 11월28일
심사위원 김종태(記) 이성혁 권현형
제 6회 <시와표현> 작품상
박해람
1998년 <문학사상>등단.
시집『낡은 침대의 배후가 되어가는 사내』『백 리를 기다리는 말』외
제6회 <시와표현> 작품상 _수상작
물의 학회學會
박 해 람
한 켤레의 물을 신고 걷는다.
자꾸 흘러내리는 물의 기장機長
물광내는 남자를 알고 있다. 수 천 겹의 물을 덧바른 남자의 손엔 까만 물때가 끼어 있었다. 적란운積亂雲인듯 하지만 흑연黑鉛이 낀 손톱이 열 개. 아침마다 짐승 하나가 송곳니로 빠져나가면 입속을 헹궈내던 물. 남자가 물로 닦아온 것들은 다름 아닌 짐승들의 발, 한 켤레의 구두가 번식시키던 질긴 노동.
물을 덩어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학회學會의 간사를 지낸 남자를 알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물의 뼈는 쉬지 않고 졸졸 소리를 낸다고 했다. 돌 속에서 성호를 그은 물의 종류 중에는 나무빨래판이 있다고도 했다. 또 물을 세공해 파는 남자도 알고 있었는데 물은 와장창 소리가 없어 절대 깨지지 않는다고 했다. 바닥에 흘려도 쓸어 담을 빗자루가 개발되지 않았음으로 파편이 되지 못한다고도 했다. 또 어릴 때 물을 동생으로 둔 친구는 틈나는 대로 물을 업어주었는데 가끔 따뜻한 물이 등을 적셨다고 했다. 물이 울고 물을 달래다 짜증을 내면 친구의 엄마는 물 흐르는 대로 살아라,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하류에 모여 살던 신발들을 찾으러간 친구는 발목을 삼킨 물에게서 평생 허우적거리는 법을 배워왔다고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은 안하나? 누구에게도 허락받지 않는 물은 물물교환 하듯 지구의 곳곳을 섞어놓고 한 모금으로도 사막과 대항할 수 있고 모래들의 주인이며 지구의 제곱미터들의 합산이기도하며 모든 돛들의 정박지이기도 한 물은 미시시피와 황하의 그 길고 긴 거리로 지구를 둘둘 감고 있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물을 세공하는 남자와 물광내는 남자와 아가미가 달린 구두를 신고 뻐끔뻐끔 걸어가는 남자는 같은 이름을 하고 선미船尾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내 친구인데 훌쩍훌쩍 울고 있는 물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물엔 매운맛과 뜨거운 온도가 들어있고 단맛과 신맛이 들어있지만 맵고 뜨겁고 또 달고 신맛은 그날그날의 표정일 뿐이라고, 꼼지락거리고 비늘이 돋는 열 개의 발가락을 신겨주고 가는 것이다.
밀물을 접안시키는 도선사導船士공부를 해야겠다.
제 6회 <시와표현> 작품상_자선 근작시
마당이라는, 개의 이름 외 3편
마당은 녹슨 철조망에 갇혀 있고
철조망은 냄새도 없이 썩는다.
마당은 가장 낮은 곳의 넓이이고
천적의 식성으로 정원은 아름다웠다.
허송세월이라면 마당만한 곳이 없겠으나 개의 등에는 이제야 꽃이 피었다. 작약 꽃과 엉겅퀴, 개나리는 형량刑量이 정해진 꽃. 개는 여러 명의 주인이 있겠지만 끈, 끈은 봄엔 초록으로 철조망을 넘다가 가을엔 누렇게 마른다.
막론하고 개는 줄기식물과에 가깝다.
저녁을 먹고 난 개의 배같이 둥그런 마당, 대문 하나가 오래 열리지 않았을 뿐인데 천적들과 훼방들이 무성하다. 개가 몸을 털어댈 때마다 개나리와 살구꽃이 떨어졌다.
겨울, 누렇게 털이 말라죽은 개를 본적 있다. 밥을 먹지 못한 개는 틈으로 번져나간다. 세상의 풀씨들이란 개의 털에서 쏟아졌을 것이다.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당은 천적사이였을까 여럿이 죽고 태어나는 동안 이름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랐다. 사람의 발자국은 잡초들의 천적, 마당은 사람의 말투를 잊으려 우거졌다. 살이 부러진 소나기가 어정쩡하게 버려졌으며 투명을 비워낸 술병들은 파랗게 물들었다.
오랫동안 짖지 않은 대문은 귀가 퇴화되었다.
왜 마당들은 이름이 없을까.
가끔 관리인이 오면 마루 밑 신발 속에선
열쇠가 생긴다.
그때 마당은 우거진 털로 사람 주위를 반갑게 뛰어오른다.
- 계간 <시산맥> 2016 가을호
악몽
악몽에선 식빵들이 부풀고
타이머는 벚나무그늘을 새까맣게 태웠다.
숀 필립스 씨는 열 두 줄 기타 줄을 끊었고 의상실견습 소녀가 잘못 박은 재봉 선엔 실 통 대신 머리카락이 들어있었다. 나는 눈, 눈알에 작은 구멍을 뚫고 스무 살이 넘은 여자를 내다보고 있었다. 옆방과 안쪽 방중 하나는 늘 비어있었는데 두 방향을 섞으며 산다는 뱀이 문고리를 걸고 조악한 침대의 스프링들을 조율하곤 했다.
야경증夜驚症은 맥박이 도망가려는 증상이고
벚꽃의 허언虛言 믿지 못하는 봄밤의 의심이라고 한다.
여자는 자신의 눈알을 감추고, 마당의 벚나무 밑엔 참 아름다운 음모(陰毛)가 돋아나는 것이다. 잠을 깨야 하는데 투명한 반달을 뚫고 자꾸 신청곡이 들어오고 작은 벤치의 양 끝은 절벽이라고, 다른 냄새가 옆에 앉으면 막다른 봄이라고 소녀들이 흘기는 눈으로 다그쳤다.
아름다워서, 황송惶悚해서 악몽이라지만
물고기의 꼬리는 상류여서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물(生物)시간인지 생몰(生沒) 시간인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숭어들을 데리고 학교에 가는 날은 여지없이 상류는 결석을 했다.
짐승의 말로 낸 수수께끼를
여전히, 사람의 꿈으로 풀고 있다.
- 웹진 <공정한시인의사회> 2016. 11월호
칼집
전전긍긍하는
틈,
저 좁은 날도 집이 있다.
고독하다는 것
자신의 몸에서 나는 피 냄새를 주식主食으로 견디는 것이다.
우리는 무뎌진 칼날로 뼈를 삼고 있나
그 칼날로 혈연을 베고 단호斷乎한 이름이 되려는 것처럼
칼 한 자루씩 들어있는,
사월의 목련나무들은 칼춤을 춘다.
예리한 날도 가끔은
딱 맞는 집에 들어 보호받을 때가 있는 것이다.
초록을 베지 못한 칼은
훗날 휘청거리고
좁은 날을 따라 간혹 꽃이 핀다고 한다.
허공의 원한을 한바탕 섞은 후
칼이 귀가한다.
파릇한 물기슭이 제 집을 찾아들어가듯
노을이 저녁 속으로
편안해 지듯.
몸은 온갖 원한의 집인가
쓸쓸하게 쓰린 내상內傷을 다스리며
칼집과 목련나무들의 동병상련이
절그럭, 절그럭거린다.
- 계간 <문학청춘>2016 겨울호
만추
창문들이 휘날렸다.
나무들이 밀랍처럼 굳어갔다.
우리는 애인을 불 피우는 일로 모였었다.
장발들은 오후의 파도처럼 아름다웠으나 두고 온 방들은 부스스 했다. 이제 가을은 누구의 애인이 될 것인가를 놓고 손가락들은 다이얼을 돌렸다.
도립병원은 자정마다 침대 하나씩을 비우고 못된 질문들이 손끝에서 자랐다. 술병을 옮겨가며 목이 뜨거워지는 검은 정장의 연대.
급하게 매고나온 욕설들이
씨팔씨팔 화가 나 있었다.
진홍眞紅의 회오리를 목에 두르고 날아가려 했니
짧은 간극間隙을 달렸니
애인들은 어디쯤에 있다는 장지葬地가 부럽고 창문은 검은 그림자를 태우고 왜 살아서 날아가지 않았을까.
주머니는 따뜻한 추도사, 용기가 없었던 만추.
고백으로 맞은 뺨이 지금껏 애인이다.
- 계간 <시와반시> 겨울호
제 6회<시와표현> 작품상_수상소감
상을 받는 일은 스스로의 황폐에 물들지 않는 일
박 해 람
賞이란 무엇일까요.
말년이 불우했던 모친께서 늘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던 서천의 구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상을 받고 보니 그것은 꽃피고 싶은 벚나무에게 4월을 넣어주는 일 같다는 생각을 또 합니다.
가끔 준비가 변변치 못한 손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있겠습니다만, 서둘러 손을 씻고 두 손으로 받습니다. 그건 호호 불든, 찬물에 담그든 그 손으로 열심히 쓰라는 뜻으로 받들겠습니다.
항간巷間을 멀리했던 몇 년 동안 근처로 바빴습니다. 두 아이의 근처로 맹목盲目의 근처로 내리사랑을 하는 동안 시 같은 건 안 써도 좋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청탁을 피하고 대신 담 쌓는 일을 배우려 했습니다. 잘 쌓은 담은 안과 밖이 모두 아름다웠습니다. 모난 돌과 잘생긴 돌이 주고받은 틈들을 배우려 했습니다. 꼭 맞는 돌 하나를 찾지 못해 하루 동안 쌓지 못한 담도 있었던 일을 보면, 그 불시에 나타나는 조적組積의 난처함은 절묘하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돌을 갖다 넣어도 맞지 않던 틈. 시 쓰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맞는 돌이 없던 그 틈을 애석해하는 일이 아니라 그 틈을 아직 찾지 못해 아직도 모난 돌이라고 이리저리 채일 돌 하나가 애석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담 쌓는 일 중 가장 아름다웠던 일화는 담의 지루함 쯤에 배롱나무 한 그루를 넣었던 일이었습니다. 돌과 배롱나무가 서로를 바꾸는 것을 보았던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승으로 모셨던 담 쌓는 장인匠人이 저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난처를 메꾸는 절묘는 다름 아닌 그 절묘를 찾아 반나절을 뒤지고 하루를, 온통 뒤지라! 이었습니다.
오래전에 시 쓰는 선배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상을 받는 일은 스스로의 황폐에 물들지 않는 일이라는 말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
등등한 기세를 올리는 전회수상자들과 <시와표현>에 누가 되지 않는 수상자가 되겠습니다.
제 6회<시와표현> 작품상_작품론
물의 시학詩學론
-특별한 해석의 우주를 펼쳐 보이는 시 세계
이 병 철
좋은 시는 한 번에 그 전모를 다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이 세계가 직선과 평면의 구조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구면 입체의 공간이며, 시간 역시 중력의 영향으로 굴절되어 있다. 세계를 이루는 모든 대상과 현상들은 결코 겉이 속을 담보하지 않는다. 시인은 남들이 보는 것을 똑같이 봐서는 안 되는 병 걸린 자다. 범인들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보는 건 축복인 동시에 저주가 아닐까. 시인은 눈에 보이는 외부에서 출발해 보이지 않는 내부로 걸어가는 여행자다. 환희와 절망 사이를 길항하며 대상의 외피 뒤에 숨겨진, 현상 이면의 비가시적이고 미시적인 세계를 끝없이 탐색하는 모험가다.
박해람의 시는 대번에 파악되지 않는다. 현란한 수사와 중층적 은유,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학습된 의미 세계가 아닌 낯설고 특별한 해석의 우주를 펼쳐 보이기 때문이다. 읽기가 쉽지 않지만, 읽을수록 매료된다. 그가 펼치는 문장들은 출구 없는 미로 같아도 결국 한 길로 향해 독자의 사유를 차원이 다른 풍경으로 이동시킨다. 그는 대상에 대한 독창적 해석의 긴장을 집요하리만치 늦추지 않는다. 이 지독한 사유의 천착은 ‘물’이라고 하는 평범한 소재, 무수히 시로 다뤄져 공공재나 다름없는 대상마저 새로운 의미들로 우글거리는 태초의 에너지로 전환시킨다.
‘물’이 그렇다. 무색무취無色無臭 같아도 흐르는 속도에 따라, 담긴 깊이에 따라 색도 냄새도 맛도 천양지차다. 미생물이나 염분, 규소 등의 미네랄 함량을 따지자면 물이라고 다 같은 물이 절대 아니다. 물은 고여 있어도 흐르고, 한 방향으로 기우는 것 같아도 제자리에서 소용돌이친다. 약하지만 단단하고, 살리면서 죽인다. 박해람이 물에 대한 시를 쓴 것도 그의 세계 인식이 물의 특성을 닮아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시는 쉽게 예측할 수 없으며, 빛과 온도, 맛, 냄새가 다양하다. 뜨거운 술이 되었다가 살얼음 낀 냉수가 되었다가 감염을 피할 수 없는 독이 되기도 한다.
「물의 학회」는 물에 대한 매혹적인 시다. 이 시는 물을 입체적으로 투시하며 낯선 해석을 하고 있는 한편, 상징 언어로서 물이 지닌 보편 의미들을 개인 체험에 바탕을 둔 상상력을 통해 새롭게 확장시키고 있다.
“한 켤레의 물을 신고 걷는다”는 첫 문장부터 호기심을 자아낸다. 물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 <물의 가족>은 “물기척이 심상치 않다”로 시작하는데, 그에 못지않은 은유적 잠언이다. 우리를 어디론가 이동시킨다는 점에서 구두와 물은 공통점을 지닌다. 구두와 물은 유속의 성질을 공유하면서 인간의 한계적 실존을 나란히 환기시킨다. 이렇듯 박해람의 시적 전략은 하나의 대상에서 둘 이상의 의미를 끄집어내거나 서로 이질적인 대상들을 하나의 사유 개념 안에 둠으로써 이미지와 메시지 모두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론이다.
이 시에서 물은 다양한 이미지로 나타나며 여러 겹의 중층적 의미를 지닌다. ‘물광내는’ 구두닦이에게 물은 ‘짐승’으로 상징된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 또는 식후의 포만감을 헹궈내는 세제이자 자본의 정글 안에서 동물화하는 현대인의 탐욕을 더 환하게 밝히는 광택제다. 발자크가 근대 도시 파리의 외판원을 검투사에 비유, 낙후한 지방에 신문물을 팔러 가는 세일즈 행위를 전근대와의 싸움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현대인들에게 구두는 업무의 전장을 헤치는 칼이나 마찬가지다. 물은 그것을 벼리는 ‘질긴 노동’의 재료로서 물질 영역에 포함된다.
3연에서 물은 물질인 동시에 그 물질성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개념으로 확장된다. 여기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책 <액체 근대>가 떠오른다. “고체와 달리 액체는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다. 유체는 이른바 공간을 붙들거나 시간을 묶어두지 않는다. 고체는 분명한 공간적 차원을 지니면서도 그 충격을 중화시킴으로써 시간의 의미를 약화시키는 반면, 유체는 일정한 형태를 오래 유지하는 일이 없이 지속적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결국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 채운 것일 뿐이다.”라는 바우만의 진술은 “물을 덩어리라고 인정하지 않는 학회의 간사를 지낸 남자”가 주장했을 논리와 아마도 일치할 것이다. ‘물의 학회 간사’와 바우만의 주장이 한 목소리로 겹쳐질 때, 물은 세계의 현재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현상 개념이 된다.
물은 늘 같은 모습인 것 같지만 실은 쉼 없이 형태를 바꾼다.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이면서도 영속하며 흐른다. 변화에 유연하고, 이질적인 것들과 융합한다. 가볍고 증발하지만 그 분산된 에너지가 모이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다. 물은 만물을 흩어버리고 또 한 데 모은다. 산업화 근대의 견고하고 무거운 ‘형태주의’ 대신 실용과 편리를 추구하는 포스트모던의 변화 양상이 곧 물의 속성이다. 디지털 기술 발달로 경계와 구획이 없어진 비경계․비구분의 커뮤니케이션 역시 물을 모방한 것이다. 한 곳에 정착해 고정불변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곳으로 흘러 이전에 없던 것을 창조한다. “쉬지 않고 졸졸 소리를 낸다”는 것이 물의 핵심 성질인데, 이는 곧 포스트모던의 중요한 특징이다.
확정적 사고와 획일화된 상투성을 거부하는 반골 기질, 창조적 사고야말로 혼돈과 우연으로 가득 찬 구면입체의 세계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덕목이며, 시인의 필수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돌 속에서 성호를 그은 물”은 바위 속으로 흘러들어 결코 부서질 것 같지 않던 견고함에 균열을 낸다. 변형이나 분열, 증식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돌의 단단함은 결국 파괴되지만, 부드럽고 유연한 물은 오히려 “절대 깨지지 않”으며 “파편이 되지 못한”다. 고정된 것은 오래 존재할 수 없는 반면 흐르는 물은 영속한다. “물 흐르는 대로 살아라”라는 당부는 변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유동적 세계에 적응할 것을 요구하는 현명한 조언이다.
“물은 물물교환 하듯 지구의 곳곳을 섞어놓고 한 모금으로도 사막과 대항할 수 있고 모래들의 주인이며 지구의 제곱미터들의 합산이기도 하며 모든 돛들의 정박지이기도 한 물은 미시시피와 황하와 그 길고 긴 거리로 지구를 둘둘 감고 있다”는 통쾌한 잠언은 단 몇 문장만으로 상징 언어로서의 물의 보편 기의를 확장시키고 있다. 박해람의 통찰이 번뜩이는 대목이다. 그는 물리학과 자연과학, 예술의 명제를 포괄하면서 철학적, 낭만적 고찰의 대상으로 물을 재해석한다. 물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하나의 정신이자 태도이며, 오늘날 세계의 현상성임을 깨달은 사유의 힘 덕분이다.
구두에서 출발해 지구까지, 하나의 물질에서 시작해 포스트모던 세계상으로까지 웅대한 스케일의 이미지 변주와 사유 이동을 거친 ‘물의 시학’은, 다시 “선미船尾라는 이름의 한 여자를 사랑했던 내 친구”와 “그날그날의 표정”과 “비늘이 돋는 열 개의 발가락”이 있는 구체적 삶의 체험으로 회귀한다. 여자 이름 선미가 ‘배의 꼬리’인 점이 재미있다. 물과 배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물은 배를 띄워 움직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버리기도 하고, 제 힘으로 육지에 닿게 해 다시 만날 수 없게도 한다. 남녀의 연정을 물과 배로 비유한 것은 탁월한 에스프리다. 박해람은 물을 “그날그날의 표정”으로 호명하며 한 순간도 물과 무관하게 살아온 적 없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 존재의 보편 양식을 다시금 되새긴다.
“밀물을 접안시키는 도선사 공부를 해야겠다”는 선언이야말로 ‘물의 시학’의 출사표라 할 만하다. 물의 유연함, 부드러움, 비경계성, 비구분성, 유속성, 영속성, 유동성, 파괴성, 창조적 에너지를 내면에 접안接岸시켜 시의 패러다임으로 삼겠다는 전향적 자각! 박해람의 시는 이미 이루었으나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세계 곳곳을 물처럼 흘러 새로운 변화를 끝없이 모색하려 한다. 그 시력詩歷의 변곡점에서, 소용돌이치는 차고 맑은 물빛에 흠뻑 젖을 수 있었던 점 큰 기쁨이다.
이병철
2014년 <시인수첩> 시, 2014년 <작가세계> 평론 등단.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 재학 중,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