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책은 낱장을 나란히 이어붙이고 양끝을 나무나 상아로 된 막대기에 말아서 만든두루마리 (라틴어로 券을 뜻하는 volumen에서 프랑스어 '볼륌'이 파생됨) 형태를 띠었다.기원후 초창기부터 책의 형태가 변모되었다. 볼루멘(두루마리)은 오늘날 우리에게 친숙한외양인 낱장을 묶어 함께 꿰맨 코덱스(codex)의 형태로 변했다.
헬레니즘 시대에 대형 도서관이 존재했고, 특히 소아시아의 페르가논 도서관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르아 도서관은 50만권이 넘는 서책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도서관들이 필사작업실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게 해준다.
로마 제국 붕괴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는 장서가 풍부한 도서관들이 번창했고, 서양의 채식장식에 영향을 준 세밀화 기법이 발전되었다. 한편 라틴 문명은 유럽에서 영적 삶의 근원지요, 경제적 생산활동의 중심지이며 동시에 문명의 관리자였던 수도원으로 숨어들었다. 수도원마다 필사 전용실인 스크립토리움(***orium)을 갖추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그곳에서 종교적인 텍스트는 물론, 라틴어 문장 습득에 필요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세속적인 작품을 줄곧 베껴 쓰면서 삽화를 그려넣었다.
일찍이 구텐베르그만큼 명성과 논란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던 발명가는 없었다. 전기는 그를인류에 혜택을 준 위인들의 신전에 모셔두었지만, 사실 전기 작가의 작업이 어려울 만큼 그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구텐베르그가 전세계적인 발명을 한 대부란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다. 한층 보기 좋고 접하기 쉬워진 책은 16세기의 종교와 문화 생활의 핵심이 되었다. 새로운 사상에 봉사하는 전투도구로서, 고상함이나 사치스런 외관을 위한 수집대상으로서 책은 눈과 정신의 영구적인 축제였다.
해마다 열리는 전시장은 서적상들끼리 텍스트를 교류하는 기회가 되었다. 인쇄인, 서적상, 편집자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책거리'로 일컬어지는 뷔허가세에서서로 마주치곤 했다. 그곳에서 1564년부터 정기적으로 선보여온 책 카탈로그는 인쇄 출판물의 귀중한 자료로서 눈길을 끌었다. 17세기 초부터 프랑크푸르트 전시장은라이프치히로 옮아갔다. 17세기는 적어도 형식적 측면에서 유럽 책의 역사가 전환점을 맞는 시기였다. 문학이라는 광범위한 장르가 기반을 굳혀갔던 당시, 책은 근대적인 외형을 갖춘 일상용품이 되었다.
......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 양피지에서 종이로, 개인적인 필사작업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가 되었던 수도원의 필사전용실 스크립토리움(***orium)으로,스크립토리움에서 동업조합과 가내작업으로, 다시 목판술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으로,근대적인 책으로부터 지금의 전자책까지...
어떠한 변화가 오더라도.. 인간에게 가장 오래되고 유용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인 이 '책'의 역사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
▷ 책<도서/서적>이란...?
책의 역사를 알기전에 책에대한 정의부터 먼저 살펴 보자. 백과사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책>을 정의하고 있다. " 인간의 사상이나 감정을 글자나 그림으로 기록하여 꿰어맨 것.
"(출처: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좀 더 보태어 보자면, 도서란 인간이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자나 회화등의 감각적(주로 시각적)심볼을 이용하여 공공에 출간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 책의 역사...?
책을 구성하고 있는 종이위에 쓰여진 내용의 대부분이 문자인만큼 도서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와 같이 한다. 사실 책의 종이라함은 이 문자를 표현하기위한 서사자료에 해당된다. 그런면에서 문자의 발달과 종이, 그리고 책의 발달은 그 맥이 같다고 할 수 있다.
Ⅰ.문자의 발전
아주 옛날 문자가 없던 시절엔 음성언어가 그 전부였다. 인간이 기억과 전승과 보존의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설화와 전설, 민요등이 그 구전(口傳)된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억과 구전에 의한 전달은 불완전한 것일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다. 그래서 사회가 발달하면서 고대중국, 남미, 페루, 멕시코, 페르시아, 하와이 원주민등이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던 결승문자(結繩文字)나 그 외 색패(色貝), 각봉(刻棒)도 북미인디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사이에서 이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이와 유사한 예로서 특색있는 것은 고대 중국의 팔괘(八卦)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문자의 전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수를 기록하는 도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등장한 그림문자들의 경우는 본격적인 문자적 성격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 그림문자가 상당히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상형문자의 단계를 거쳐,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체적인 사물을 대신하는 부호를 결합시킴으로써 추상적인 관념까지도 표현이 가능한 표의문자로 발전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최초문자는 상형문자라고 할 수 있다. 또 상형문자 가운데 최초의 것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의 수메르인이 기원전 3100년경에 발명된 소위 설형문자(楔形文字=쐐기문자)였다.
이집트 최초의 문자는 기원전 3000년경에 발명된 소위 신성문자였다. 또 중국에서는 고대 은나라시대에 갑골문자가 알려져 있다. 오늘날의 한자가 이 상형문자에서 유래된 것 들이 많다. 한편 알파벳은 셈족계의 가나안인이 이집트의 신성문자를 사용하다가 그 글자체를 극히 간략화하여 만들어냈다고들 한다. 페니키아인들은 이것을 받아들여 더욱 간략한 22문자의 자음으로 이루어지는 알파벳을 만들어냈고 그리스인들에게 전혀져 이들이 불필요한 자음을 모음으로 대치하여 24문자의 그리스알파벳을 만들었고 이 문자가 다시 로마인들에게 전해져 로마문자로 발전하게 되었다.
Ⅱ.서사자료의 발달 - 종이가 나오기까지
1. 메소포타미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양대강(兩大江)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질이 좋은 점토(粘土)가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점토판(粘土板)이 서적이 되었다. 그 방법은 적당한 크기와 두께를 가진 점토판을 만들어 양면이 굳기 전에, 갈대나 나뭇조각을 뾰족하게 깎은 펜으로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적어넣는다. 이것을 햇볕에 말려 가마[窯]에 넣고 구우면 돌처럼 굳어진다. 불에 타지 않고 물에 젖지 않으며, 동물로부터의 해도 막을 수 있고, 땅 속에 묻어 두면 전화(戰禍)도 피할 수 있으며, 또 깨어진다 해도 파편(破片)을 모으면 복원(復元)도 가능하기 때문에, 이 지방에서는 수천 년에 걸쳐 점토판 서적문화가 성하였다. 고대의 유적발굴에 의하여 밝혀진 바로는 유명한 앗시라아의 니네베의 아슈르바니팔왕(王)의 도서관에만도 2만 부에 달하는 점토판 서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점토판 서적은 무겁고 운반하기 불편하며, 또 재료의 요청에 의해 생겨난 설형문자도 읽기 쉬운 아람(Aram)문자에 눌려, 결국 점토판 서적은 과거의 것이 되고 말았다. 같은 동방의 일각인 이집트에서 더 편리한 형태의 서적이 발명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이집트
5세기에 이르기까지의 약 5,000년간 지중해 연안 문화국가에서 서적의 재료가 되었던 파피루스는 높이가 2 m나 되는데, 야자나무나 대나무와 같이, 그 성장의 각 단계에서 매우 용도(用途)가 광범위했다. 그러나 역사에 남을 최대의 역할은 뭐니뭐니해도 종이에 가까운 서적재료(書籍材料)가 된 점일 것이다.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23∼79)의 《박물지(博物誌)》에는 이 식물을 가지고 서사(書寫)의 재료를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다. 파피루스의 줄기를 째면 길이 30 cm 정도의 마디와 마디 사이에 목수질(木髓質)이 나오는데, 이것을 빼내서 잘게 쪼개어 한 줄로 늘어놓은 다음 다시 그 위에 같은 것을 한 줄 직각으로 놓고 물을 뿌려 아래위 두 장을 밀착시킨다. 그리고 중량을 가하고 햇볕에 말려 망치 ·상아 ·조개껍데기 ·속돌[輕石] 등으로 닦으면 종이와 흡사한 것이 된다. 그 한 장의 나비는 38 cm 정도에 이르는 것도 있으나, 25 cm 내외의 것이 가장 좋다고 한다. 종이를 뜻하는 영어의 페이퍼, 독일어의 파피르, 프랑스어의 파피에, 러시아어의 파푸카 등은 모두 파피루스를 어원(語源)으로 하고 있으므로, 파피루스를 종이의 시조(始祖)로 보는 견해가 강하게 동서(東西)에 퍼져 있으나 ‘뜨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파피루스는 종이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갈대로 만든 펜 끝을 뾰족하게 갈아, 둘로 쪼개는 연구는 파피루스에 글자를 쓰기 위하여 탄생한 것인데, 금석(金石)에 문자를 새기는 경우와 비교하여 빨리 쓸 수 있으므로 이집트 고유의 상형문자(象形文字)는 원형(原形)을 잃기 시작하였다. 중국 고대의 간(簡)과 같이 한 장의 파피루스에는 그다지 많은 글자를 수용할 수 없고, 또 아래위 2층을 직각으로 교차시키기 때문에 겉과 속은 섬유의 방향이 반대가 되어 매끄럽게 펜을 놀릴 수 있는 데는 한쪽뿐이어서 몇십 장의 파피루스를 풀로 붙여 중국의 권자본과 흡사한 두루마리 서적이 생겼다. 현재도 유럽이나 미국 각국에서 서적의 수를 세는 데 ‘권(卷)’이라는 뜻을 가진 낱말을 사용하는 습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길이 33 m에 달하는 파피루스 권자본의 유품도 현존하는데, 일반적으로 긴 파피루스 권자본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무덤에 넣는 의식용(儀式用)의 《사자(死者)의 서(書)》를 위해 쓰였고, 실용을 위한 기록은 짧은 권자본으로 만드는 것이 상례였다. 아무튼 파피루스본(本)의 출현은 서적문화의 발달을 급속히 촉진하고, 프톨레마이오스왕조(王朝)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는 기원 전에 몇 개의 큰 도서관이 설치되었다. 전성기에는 70만 권 이상의 장서(藏書)를 자랑하는 도서관도 있었으며 로마교황청에서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중해 연안 여러 나라에서도 파피루스본은 문헌전달의 주역이었다.
3. 소아시아
근년에 발굴된 유프라테스강(江) 상류의 로마 유적에서 가죽종이로 된 문서가 출토(出土)되었는데, BC 200년경에 이미 아시아에서 가죽종이를 사용한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가죽종이를 의욕적으로 서적의 재료로 사용하고 문헌의 보존과 전달에 큰 공헌을 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은, 플리니우스의 《박물지(博物誌)》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에서였다. 헬레니즘 시대에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던 소아시아의 페르가몬왕 2세(재위 BC 197∼BC 160)는, 부왕(父王) 아탈로스 1세의 뜻을 받들어 학예(學藝)면의 진흥에 힘을 기울였는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못지않은 도서관을 만들 계획으로 당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 5세 에피파네스왕(재위 BC 203∼BC 181) 밑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을 하고 있던 대문헌학자(大文獻學者) 아리스토파네스를 페르가몬 궁전으로 초청하려 하였다. 왕은 노하여 아리스토파네스를 투옥하고, 나아가 페르가몬에 파피루스 수출을 엄금하였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파피루스를 대신할 물건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즉, 당시 소아시아가 양 ·염소 ·소 등이 많이 생산되는 사실에 주목하고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과는 달리 이들 동물, 특히 새끼양이나 송아지의 가죽을 서사(書寫)의 재료로 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파피루스처럼 째질 염려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질기고 빛깔도 흰 양질(良質)의 서적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가죽종이가 파피루스를 완전히 몰아내는 데는 다시 수백년이나 걸렸다. 왜냐하면 파피루스에 비해 고가이기 때문이었다.
4. 로마
로마에서는 옛날부터 베 헝겊에 쓴 문헌도 있었다고 하나, 카툴루스, 마르티알리스, 티불루스 등의 대작가가 건재했던 라틴 문학의 전성기에는 여전히 파피루스 권자본이 서적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미장(美裝)을 자랑하려면 권자본 끝에 축(軸)을 달고 축에는 다시 손잡이가 있어 장식의 효과도 있었다. 읽지 않을 때에는 아름답게 염색된 가죽이 권자본을 보호하고, 오늘날의 서적에서 볼 수 있는 책등의 글자는 권자본 또는 가죽으로 싼 곳에 붙인 종이가 역할을 대신해 주었다. 서점에서는 이들 권자본을 피륙처럼 선반에 뉘어놓거나 원통형(圓筒形) 용기에 몇 권씩 넣어 두고 고객을 기다렸다. 가죽종이책은 1세기에 이르자 로마에도 제법 침투하였는데, 그 용도(用途)는 주로 글의 초안을 잡는 데 또는 비망록(備忘錄)으로 이용하였으며, 품위 있는 서적은 역시 파피루스 권자본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서적의 역사상 주목할 일의 하나로 로마인이 발명한 납판서적(蠟版書籍)이 있다. 너도밤나무, 기타 강한 성질을 가진 나무의 널빤지를 책 모양으로 몇 장 포갠 것인데, 그 작은 널빤지는 겉과 안에 가운뎃부분을 직사각형으로 파고 그 부분에 노랑 또는 검정 초를 전면에 칠한다. 처음과 마지막의 납판 바깥면 팬 곳에만 초칠을 안 한다. 글자가 물건에 닿아서 지워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 납판에 스틸루스(stilus)라고 하는 끝이 뾰족한 철필(鐵筆)로 글자를 쓴다. 로마인은 납판을 서신 왕복에 사용했으나, 납판서적은 18세기 끝무렵까지 유럽 각지에서 쓰였다.
5. 인도 ·미얀마 ·스리랑카
인도·미얀마·스리랑카 등 인도양 여러 나라에서는 종려과에 속하는 다라수(樹)가 옛날부터 서적의 재료가 되었다. 길이 3m나 되는 부채 모양의 잎을 잘 말려 가로 45∼60cm, 나비 7cm 내외로 잘라 양면에 글자를 써넣어 수십 개를 겹쳐 일정한 장소에 구멍을 뚫고 실을 꿰어 같은 크기의 목제 널빤지 사이에 끼워 흩어지지 않게 간직하였다. 불전(佛典)은 이 다라수의 잎에 의해 전달되었기 때문에 티베트 등 종이를 서사(書寫)의 재료로 하는 지역에서도 같은 형태가 채용되었다.
6. 중국
중국은 갑골문자를 사용하였는데 갑골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거북껍질이나 우각에 문자를 새겨 사용하였다. 이는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공자의 고사 <위편삼절>에서 알 수 있듯이 죽간과 목간(목독)을 사용하여 이를 책으로 엮은 죽책, 목책등을 서사자료로 사용하였다.
그외에도 비단을 그 서사자료로도 사용하였으나 고가인 흠으로 널리 이용되지는 못했다. 세계 각지의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서적에 혁명을 가져왔고, 현재 서적의 통념을 정착시킨 것은 후한(後漢)의 화제시대(和帝時代:88∼105) 말 중국에서 완성을 본 종이의 발명이다. 발명자는 채륜(蔡倫)이라고 하지만, 그 발상(發想)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는 차라리 완성자라고 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종이는 즉각 서적의 재료가 되어 그 부드럽고 질긴 성질을 이용해 이제까지의 권자본 외에 여러 가지 모양의 서적이 만들어져 한국에 전하여졌다.
7.·한국 한국에서 서적의 재료가 되는 종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연대를 밝히기는 어려우나, 610년(고구려 영양왕 21)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종이와 먹 만드는 법을 일본에 전하였다는 사실이 문헌에 남아 있고, 또 285년(백제 고이왕 52)에는 백제로부터 천자문을 비롯한 서적들을 일본에 보낸 일이 있음을 보아 늦어도 삼국시대 초기인 2∼3세기경에는 중국의 한문 서적의 수입과 함께 종이를 만드는 법도 알려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 된 책으로는 삼국시대 고승들이 광술(匡述)한 불경인데,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은 원효 ·혜초 ·의상(義湘) ·경흥(憬興) ·태현(太賢) 등의 논저 40여 종이다.
8. 중세
유럽에서도 두루마리 책에서 철하는 책으로의 발전은 중세기, 전란(戰亂)을 피하여 수도원 안에서 문화를 지킨 그리스도교 수도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코덱스(codex)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 책자는 그리스도교의 문헌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는데, 4세기에 들어와서는 파피루스 권자본의 이교문학(異敎文學)을 몰아내고 서적의 형태 그 자체도 결정하였다. 재료는 양이나 송아지 가죽이었다. 제작 순서를 간단히 살펴보면, 우선 곱게 다듬은 한 장의 가죽종이를 사자탁자(寫字卓子)의 경사면(傾斜面)에 올려놓고 자를 대어 납으로 엷게 줄을 그은 다음 머리글자 부분을 남겨놓고 다른 본문을 독특한 자체(字體)로 주의하여 써 나간다.
처음에는 이집트인이 사용한 파피루스용(用)과 똑같은 갈대펜으로 썼으나, 거위 날개깃으로 만든 펜이 가죽에 알맞다고 하여 이를 대신하였다. 잉크도 파피루스용은 가죽에 배지를 않아 몰식자(沒食子)를 짜낸 물, 녹반(綠礬) ·수지(樹脂) 등을 섞은 질이 좋은 것을 발견하였다. 머리글자는 그림 솜씨가 있는 수도사의 손으로 금빛 ·은빛 ·빨강 ·파랑 등 물감으로써 예쁘게 그리고 그 둘레를 꽃 ·새 ·작은 동물 등 여러 가지 모양으로 장식하였다.
이런 순서로 필요한 매수가 완성되면 페이지 순으로 모아 도련친 면과 반대쪽에 두 군데 또는 세 군데 세로로 홈을 파고 거기에 가죽띠를 넣어 합철하여 패널을 앞뒤에 대고 그 패널을 다시 가죽으로 싸서 패널과 가죽 사이에서 가죽띠를 떼어내 그 끝에 쇠고리 또는 자물쇠를 달았다. 이것이 현재까지에 이르는 제본의 골자이며, 따라서 오늘날의 서적의 형태는 이미 중세에 이루어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표지는 무두질한 가죽 대신 비로드와 그 밖의 천이 사용되기도 했으며, 거기에 수를 놓거나, 금 ·은 ·보석을 아로새긴 호화로운 것도 있다.
9. 르네상스 이후
중국에서 발명된 제지기술은 751년 당(唐)나라가 아바스족에게 패하여 제지공(製紙工)을 포함한 많은 포로를 납치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먼저 사마르칸트와 바그다드에 전해졌고, 13세기에는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 ·에스파냐에 상륙하였다. 이윽고 활자 인쇄술이 발명됨으로써 그 때까지는 수사(手寫)에 의존해 오던 중세 책자본의 급속한 보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활자가 중세 채식본(彩飾本)의 가장 뛰어난 서체(書體)의 충실한 모방에서 출발한 것처럼 서양에서는 종이도 또한 가죽종이를 이상으로 삼고 제작하였다.
지금까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각 나라들은 그들 주변에서 쉽게 생산되어 현지조달할 수 있는 재료들로 또 그 값이 싼 것을 그 서사재료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집트의 파피루스나 인도의 다리수 잎, 그리고 중국의 죽간과 목독의 예들로서 충분히 알 수 있다.
<다니엘 벨>은 음성언어의 발명에 이어, 문자언어의 발명을 제2차 정보혁신이라 일컫는다. 문자를 통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의사전달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문자를 통해, 도서를 통해 역사는 창조되고 기록되어 왔으며 또 창조되고 기록되어 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