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정숙 시인은 경북 의성에서 출생하여 군위와 대구에서 성장했고, 《죽순竹筍》(신동집 시인의 추천, 1984년)으로 등단했다. 동아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을 받았고, 국제펜클럽한국본부, 한국문인협회제도개선위원, 한국시인협회,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협회 회원, 부산여류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문예시대작가상 본상수상, 전국성호문학상 대상 등을 수상했고, 시집으로는『초행길』, 『햇살이 바람에게』, 『풀씨』, 『산이 울었다』, 『물방울 목걸이』, 『어느 날 문득』,『허공에 발 벗고 사는 새처럼』 등이 있다.
복사꽃 그늘 깊던 갓 스물,
연탄재 부서진 길을 따라오며
교복과 군복 사이, 휴가 나온 여드름이
시간을 빌려 달라고 추근거렸지
버스를 타고 보았다
가방이 날카로운 칼날에 죽 그어져
책이 떨어지고
지갑이 없어진 것을
세상이라는 벽을 처음 만나
연탄광처럼 어둠 깊은 자취방에 돌아와
금 간 연탄불을 갈다가 놓쳐
산산이 부숴졌다
아궁이 바닥이 보일 때까지 연탄재를 퍼내며
생은 바닥까지 가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난의 바닥까지
고통의 바닥까지
슬픔의 바닥까지
그리하여 마음이 마음을 울려
복사꽃을 불러내는 것이 봄이라고
----[연탄재] 전문
복사꽃 그늘 깊던 갓 스무 살,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시간을 빌려달라고 추근대던 군인이 있었지만, 그 군인은 매우 불량한 소매치기 전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군인-치한을 피해 버스를 탔을 때에는 “가방이 날카로운 칼날에 죽 그어져/ 책이 떨어지고/ 지갑이 없어”졌던 것이다. 일진이 좋지 않거나 운이 사나울 때는 나쁜 일들이 겹쳐 일어난다. 왜냐하면 나쁜 놈, 즉, “세상이라는 벽을 처음 만나/ 연탄광처럼 어둠 깊은 자취방에 돌아와/ 금 간 연탄불을 갈다가 놓쳐” 그만 연탄이 산산이 부서져 버렸기 때문이다. 정든 고향과 부모형제 곁을 떠나와 어렵고 힘든 자취방에서 향학열을 불태웠던 여고생의 꿈과 희망을 유린했던 치한, 갓 스무 살의 가슴 설레임과 순결한 사랑마저도 유린했던 치한, 오직 조국을 위한 충정심으로 국방의무를 다하고 있었던 것 같았던 치한----. 이 치한의 가짜 사랑과 가짜 조국애는 세상이라는 벽이 되었고, 이 세상이라는 벽 앞에서 시적 화자인 여고생은 그 모든 멘탈이 붕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음도 부서졌고, 몸도 부서졌다. 사랑도 부서졌고, 꿈과 희망도 부서졌다. 가난의 바닥, 고통의 바닥, 슬픔의 바닥----,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벽이 아니라 바닥이라고 할 수가 있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바닥, 갈 데까지 간 바닥,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바닥----, 하지만, 그러나 이 바닥에서 홍정숙 시인의 ‘사랑의 시선’이 탄생하게 된다. 위기는 기회가 되고,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바닥은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라는 ‘혁명가의 정신’의 토대가 된다. 예컨대,
아궁이 바닥이 보일 때까지 연탄재를 퍼내며
생은 바닥까지 가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난의 바닥까지
고통의 바닥까지
슬픔의 바닥까지
라는 시구는, 혁명가의 임전무퇴의 정신이 되고,
그리하여 마음이 마음을 울려
복사꽃을 불러내는 것이 봄이라고
라는 시구는, 인간 이하의 한계상황을 극복해낼 이 세상의 삶의 찬가가 된다. 더없이 어리석고 비천한 인간은 자그만 위기 앞에서도 곧잘 좌절하고, 좀 더 강력하고 사악한 인간은 자그만 위기 앞에서도 이 세상을 헐뜯고 비방하며 불량배의 길로 걸어가지만, 그러나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은 크나큰 위기 앞에서도 ‘대도大道’를 생각하고 자기 자신과 그 모든 인간들을 고급문화인으로 끌어올린다. 뜻을 얻으면 백성과 함께 실천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나 혼자 그것을 실천한다. 부유함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가난도 뜻을 전향하게 할 수가 없고, 어떤 권력도 나를 굴복시키지 못한다. 이 맹자의 말씀은 천세불변의 진리이고, 가난의 바닥, 고통의 바닥, 슬픔의 바닥에서도 만인들의 연탄불--그 복사꽃을 피워올린 홍정숙 시인의 ‘시인 정신’은 천세불변의 진리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다. 혁명가는 영웅이 되고, 영웅은 사상가가 되고, 사상가는 시인이 된다. 연탄은 불꽃이 되고, 불꽃은 복사꽃이 되고, 복사꽃은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꽃이 된다.
홍정숙 시인의 ‘사랑의 시선’은 ‘인식의 힘’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고, 이 사랑의 시선은 [압력밥솥]의 혁명가의 시선, [연탄재]의 혁명가를 꿈꾸는 시선, “입춘 무렵, 지리산 피아골 고로쇠나무는/ 가슴마다 수인囚人처럼 번호를 달았더라”의 [피아골 고로쇠나무], “모래톱에/ 물새 발자국/ 흔적없이 가버리고/ 악취는 구절양장 낙동강과 몸을 섞는다”의 [잠들 수 없는 노래], “폐기된 핵미사일로 만든/ 펜을 사용하여/ 전략무기감축협정 조인식을 끝내고/ 환하게 손 마주잡은/ 미‧ 소의 두 정상// 그대들 미소 뒤로/ 지구의 신음소리/ 플래시처럼 터지고/ 피 흘리는 아비규환 늘 따라 다닌다”의 [칼을 녹여서 만든 쟁기] 등의 풍자와 해학의 시선이 겹쳐져 있지만, 그러나 홍정숙 시인은 바닥을 딛고, 바닥을 기어오르며, 바닥을 넘어서, 온몸으로, 온몸으로 사랑의 축제를 펼쳐보인다. 풍자는 사회적인 죄악상을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게 비판하는 것을 말하고, 해학은 고귀하고 위대한 탈을 벗기고, 그 이중인격자들을 바보와 어릿광대로 희화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압력밥솥]과 [연탄재] 등은 생득적인 혁명가의 토대가 되고, [피아골 고로쇠나무]와 [잠들 수 없는 노래]와 [칼을 녹여서 만든 쟁기] 등은 문명비판의 차원에서, 정치 경제적인 안정기의 후천적인 혁명가의 토대가 된다.
박물관 전시실에
연잎이 꼬부라진 찻잔이 있다
세상에서 얻은 갈증 풀지 못할 때
연줄기를 열고
영혼의 창문마다 불을 밝히는
연잎차를 우리러 간다
찻잔 실금이 낸 길을 따라
찻물 끓는 소리로
생애를 걸어간
입술들의 수런거림
연꽃 봉오리 넘어오는
물빛처럼 쌉쌀하다
꼬부라진 연잎이
연미색 고요를 우려내는 동안
종소리도 깨우지 못한
찻잔의 천년 잠을
가장 못난
연잎 한 장이 깨우고 있다
----[연잎 찻잔] 전문
홍정숙 시인의 깊이 있는 성찰과 깨달음이 그의 인식의 힘이라고 할 때, [연잎 찻잔]은 그 수일한 예가 된다. 박물관 전시실의 연잎이 꼬부라진 찻잔을 생각하면서, “세상에서 얻은 갈증 풀지 못할 때/ 연 줄기를 열고/ 영혼의 창문마다 불을 밝히는/ 연잎차를 우리러” 가게 된다. 찻잔 실금이 낸 길, 그 고통의 생애를 떠올리며, “입술들의 수런거림”도 듣고, “연꽃 봉오리 넘어오는/ 물빛처럼 쌉쌀”한 맛도 음미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나 그 고통의 생애와 그 소리와 그 쌉쌀한 맛이 다가 아니고, “꼬부라진 연잎이/ 연미색 고요를 우려내는 동안/ 종소리도 깨우지 못한/ 찻잔의 천년 잠을” 깨우게 된다. “가장 못난/ 연잎 한 장” 주체는 연잎 한 장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비유일 뿐, 그 바라봄, 이 인식의 주체는 시적 화자인 것이다.
홍정숙 시인의 시선집 {연잎 찻잔}을 살펴보면, 이 시선집에는 그의 탄생과 성장, 모험과 싸움, 고귀하고 위대한 시적 성취가 가장 정교하고 세련되게, 또는 가장 친절하고 일목요연하게 집약되어 있다. 제1시집 {초행길}, 제2시집 {햇살이 바람에게}, 제3시집 {풀씨}, 제4시집 {산이 울었다}, 제5시집 {물방울 목걸이}, 제6시집 {어느 날 문득}, 제7시집 {허공에 발 벗고 사는 새처럼}, 그리고 최근작의 시편들이 {연잎 찻잔}이라는 중심별의 행성이 되고 있는 것이다. {연잎 찻잔}에는 사랑의 시선과 인식의 힘이 그 빛을 뿜어대고, 혁명가의 고독과 혁명가의 고뇌와 혁명가의 좌절과 혁명가의 ‘천년의 잠’을 깨우는 사상의 힘이 그 빛을 발한다. 사랑의 시선과 인식의 힘이 마주쳐 빚어낸 연잎 찻잔, 가장 못난 연잎 한 장 같은 시인의 꿈이,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 모두의 ‘천년의 잠’을 깨우고 있는 것이다.
아는 것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다. 실천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요컨대 연잎 찻잔의 고통을 알고, 연잎 찻잔의 고통을 살며, 연잎 찻잔의 실금 간 사랑으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연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실금이 간 연잎 찻잔, 우리들의 영혼의 불을 밝히는 연잎 찻잔, 가장 못난 연잎 찻잔의 기적이 홍정숙 시인의 시적 혁명이기도 한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시인을 가르친다. 시인은 고통을 사랑하고, 시인은 고통을 즐기며, 시인은 이 고통의 힘으로 우리들의 지상낙원을 창출해내는 혁명가이다.
{연잎 찻잔}의 혁명, 이 연잎 찻잔의 혁명은 사랑의 축제이다. 최악의 상황을 하늘을 찌를 듯한 환희에의 기쁨으로 변모시키는 시의 축제, 만인평등과 부의 공정한 분배는 물론, 사랑과 평화와 행복의 상징인 시의 축제, 요컨대 홍정숙 시인의 {연잎 찻잔}을 읽는다는 것은 이 ‘시의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연잎 찻잔}의 혁명, 시력詩歷 34년, 아니, 시력詩歷 34년으로 ‘천년의 잠’을 일깨우는 {연잎 찻잔}의 혁명----. 이제 홍정숙 시인은 시력詩歷 34년의 무명의 늪으로부터 대한민국 제일급의 시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정숙 시선집 {연잎 찻잔}, 국판변형,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