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시편 79편 1-9절
설교제목 : 놓을 수 없는 끈
자기의 길을 꿋꿋하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 주간 건강하셨습니까? 지난 8일 러시아는 크름대교 폭발에 대한 보복으로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와 8개 지역의 주요기반 시설을 향하여 대규모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우크라이나 내 주요 에너지 인프라가 30% 집중 공격을 받았다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이 전쟁이 언제 종식될지 가슴 한편에 답답함이 밀려옵니다. 참혹하게 벼랑끝으로 내몰인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서길 소원합니다. 또한 계속되는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경제적 불확실성이 더욱 가중되고 있고, 세계경기침체는 가속되는 힘겨운 시간 속에 있습니다. 장자 외편, 재유在宥에는 장자가 살던 전국시대의 참혹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어떠한가? 처형된 사람은 서로 포개어 나란히 누워 있고, 형구를 짊어진 사람은 비좁아 서로 밀치고 있으며, 매를 맞아 죽은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광란의 역사 속에서 무수한 생명이 사라져갔습니다. 장자는 그런 고통스런 삶의 현실속에서 진정한 나의 삶을 다지기 위해서 어떤 삶을 구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를 질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은왕조의 어진 신하였던 지자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는 위대한 정치인이었지만 위대한 자유인은 아니었다고 언급합니다.
“예컨대 호불해, 무광, 백이, 숙제, 기자, 서여, 기타, 신도적은 타인에게 부림을 당했고, 타인이 즐기는 것을 좇았을 뿐이며, 스스로 즐기는 것을 행하지 못했다”[장자, 대종사에서]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자기의 괴로움으로 삼고, 타인이 가는 길을 자신이 가는 길로 삼아, 진정한 자신의 만의 길을 가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비극과 고통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사는 것은 고통이고 슬픔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자기의 길을 자신의 발로 걸어서 꿋꿋하게 살아가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길을 다른 무엇의 수단을 삼지 않고 자신의 길을 즐기며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거칠고 불온한 세상이지만 나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황폐한 영혼의 풍경
오늘 시편 79편의 노래는 이방나라의 침공으로 초토화된 예루살렘 위에 긍휼을 베풀어주시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방 나라의 침입으로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주님의 성전은 더럽혀졌습니다. 성전에 있는 있는 모든 성물은 모두 빼앗기고, 제사장들은 무참히 학살을 당했고, 백성들은 무참히 짓밟혀 새들과 들짐승으로 먹이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사람들의 피가 물같이 흘러 온통 피바다가 되었고, 죽임을 당한 이들을 장사지낼 사람도 없이 내버려졌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하고 잔인한지 드러납니다. 애써 외면하며, 상상하기 싫은 시구절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과 내전, 테러가 불러오는 아비귀환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과 이웃 나라를 적으로 규정하고 전쟁이 벌어질 때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 시는 외부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전쟁의 상처를 드러내고 있지만, 이를 상징적 측면에서 보면 뜻밖에 낯선 것들이 폭력적으로 침입하여 안전하게 보호해줄 성이 무너지고, 내면의 중심에 있는 성소가 황폐화된 상황입니다. 이때 인간은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에 몸을 떨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지켜줄 안전한 정신적 자원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또한 새와 짐승들의 먹이가 되는 상황은 본능상의 먹잇감이 되어 인격을 상실하고 조절되지 않는 충동성과 공격성으로 해체됩니다. 피가 물같이 흘러 넘치는 상황은 폭력적인 자들이 심판을 받는 신곡의 지옥편에 플레게톤 강과 유사합니다. 타인과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소진시키는 피의 강이 사방으로 흘러가는 형국은 오늘 우리시대의 풍경이자 영혼의 풍경일 것입니다.
심판의 이유
이런 참혹한 상황의 원인을 시인은 “하나님의 진노(5)”라고 부릅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다른 신을 섬기고, 자기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 불화하면, 그에 따른 엄중한 책임이 뒤따릅니다. 이런 진노는 심리학적으로 집단적 무의식의 의미있는 경향을 따르지 않고, 자아 중심적으로 산 결과입니다. 이를 가리켜 시인은 7절과 9절에서 ‘조상의 죄악’, ‘우리의 죄’라고 명시합니다. 자신의 본성과 조화롭지 못한 자아는 본성의 길에서 곁길로, 반대의 길로 가기 때문에 그 본성은 자아에게 무서운 얼굴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세계가 경험한 코로나 판데믹은 자연이 문명을 향한 일격이었습니다. 개인의 삶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죄의 길로 가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노의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은 나를 보호하던 든든한 성벽은 돌무더기가 되고, 우리는 피를 흐리며 불안과 강박으로 쫓기며 허우적 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을 선민으로 생각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난공불락의 성스런 요새로 신봉하였습니다. 그러나 선민의식은 타인과 이웃나라를 정죄하는 교만의식이 되었고, 성전신앙은 하나님을 섬기는 내면의 성소가 아니라 자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형식적 건물과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여, 주여 부르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형식적인 세례를 받고 매주 예배한다고 해서 현세와 내세를 보장받는 구원의 보증수표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만이 우리를 안전하고 든든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방나라들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여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하나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심판의 도구로 이방나라, 바벨론을 사용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방인들이 심판의 도구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그림자, 유대인의 그림자가 이방나라이자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신의 법칙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무가치하고, 악하다고 취급하는 열등하고 악한 측면을 무시하고 억압하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자아에게 위협적이고, 의식을 침범하여 의식을 사로잡게 됩니다. 이는 자아의식의 일방성이 갖는 위험입니다. 우리가 극단적인 일방성으로 경도되면 그 반대의 측면은 우리에게 더욱 짙은 그림자를 형성하여 더욱 더 커져서 우리의 의식을 집어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이방나라의 심판은 하나님의 어둠일 수 있습니다. 이 어둠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어둠은 의식이 명료하게 볼 수 없고, 베일에 가려져 그 의미를 온전히 수용하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놓을 수 없는 끈
그래서일까요! 시인은 그저 묻고 간청할 뿐입니다.
“우리 조상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어서 빨리 우리를 영접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아주 비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 주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명성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를 건져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8-9)”
시인은 참혹한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 앞에서, 하나님의 무서운 그림자 앞에서 자신이 잡고 있는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을 다 헤아릴 수 없었지만, 결코 놓지 않은 끈이 있습니다. 절대 놓을 수 없는 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모든 것이 파괴되고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주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주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은 고통의 한복판에서도 삶을 지속할 수 있고,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융은 어둠의 그림자를 동화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언급합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빛, 더 많은 선함, 도덕적 강인함이 필요하며, 가능한 한 몹시 불쾌한 검음을 씻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또한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어둠의 신을 동화시킬 수 없을 것이며, 동시에 소멸함 없이 그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위해 [그 그림자를 통합하기 위해서는] 모든 기독교 덕목이 필요하고, 그 밖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문제는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도...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C.G.Jung, “욥에의 회답”, CW 11, para.742]
기독교의 덕목은 믿음, 소망, 사랑이며, 거기에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태도를 가지고 사는 자는 그 끝에 대한 든든함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붙잡아야 할 끈은 하나님을 향한 충직한 마음의 태도입니다. 주님께 희망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신뢰와 기도를 높지 않고, 불확실하고 불안한 세상의 한복판에서도 든든함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