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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2014 신학기 청도 문화답사기
어제는 비가 오다 그쳐 공기가 맑은 봄나들이가 되었다. 청도박물관, 탁영 김일손선생 자계서원, 청도읍성, 석빙고, 향교, 木訥공방, 도주관, 범곡리 지석묘, 하평 은행나무, 딸기농장, 매전 처진소나무, 삼족대, 선암서원, 솔숲과 소요대, 운남고택, 만화정을 거쳐 왔다.
비가 내리는 날씨에 동양고전연구소 앞에서 소형버스를 타고 21명이 출발하여 가창 팔조령터널을 지나 청도의 곡창지대 이서에 도착하였다.
청도박물관은 이곳 출신인 이의근 지사가 작년 12월에 개관하여 새로운 청도의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70대 초반의 나이로 별세를 했지만 이 세상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약간 비가 내리는 속을 박물관으로 들어가 청도 문화 해설사 김동기씨가 안내를 하였다. 특별하게 이곳에만 있는 박물은 없는 것 같았으나 신석기 청동기문화 그리고 고러자기와 조선시대의 분청사기들이 모여 있고 청도의 양반의 서원들이 모형과 사진으로 전시가 되어있다. 여러 가지로 잘 안배를 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청도 박물관>
<임금에서 하사 받은 김일손벼루>
다음은 이서면 서원리에 있는 濯纓 金馹孫 선생을 배향하기위해 중종 13년(1518년) 창건하여 雲溪書院이라 하였다가 선조 11년 중건하여 현종 2년(1661) 紫溪書院으로 사액 되었다. 고종 8년(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 되어 동. 서편제만 남아 있다가 1924년 참봉 김용희가 중건하였다. 탁영 김일손선생은 성종 17년(1486년)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된 후 청환직을 거쳐 이조 정랑이 되었다. 연산군 4년(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 할때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 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화근이 되어 무오사화때 참화를 당하였다. 중종반정이후 연산군(12년, 1506년) 도승지와 이조판서 양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이 서원 12동 건물 중에 입구 영귀루(1699년 중건)와 탁영선생이 서재로 사용했다는 동재가 지방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동재 바로 옆에 일중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두그루의 은행나무가 도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두 나무다 암나무로 매우 많은 양의 은행을 딴다고 했다.
<자계서원 단체 19명>
<탁영선생 후손 현장 설명>
<영귀루>
<동재>
<탁영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중간 줄기 위에 외과수술>
<외과수술부분>
단체사진도 찍고 탁영 선생 후손이 직접 나와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임고 정몽주 임고 사당은 지금까지 160여 억원의 국고지원을 받아 크고 화려하게 잘 꾸미고 있으나 탁영 선생 서원은 그렇지 못해 안탑깝다고 했다. 또 은행나무 앞에 모산 신재완 선생의 시비가 있었는데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을 남기고 자계서원을 떠나왔다.
은행나무와 같이 가이즈카 향나무가 울타리에 서있고 그 나무의 잎이 바늘잎과 비늘잎이 있다고 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두 가지 잎이 나올 수 있는가 질문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릴 때는 바늘잎이 많으나 나이가 들어가면 비늘잎이 많아진다고 했다.
<황금향나무>
<비파>
청도읍성에 당도하여 바로 군수들이 세워놓은 공덕비의 비석을 둘러보고 개인 식물원을 한바뀌 돌아 나왔다. 앵도꽃도, 산수유나무의 노랗꽃도 그리고 비파나무의 열매도 앙증맞은 낮은 반송와 황금향나무도 보았다. 봄이 되어 한참 바빠진 농장관리를 주인 아저씨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봄비는 풍년을 몰고 온다고 들었는데 농부들의 일손도 바빠진 것같았다.
성벽앞쪽에 설치되어 있는 석빙고를 둘러보았다. 아치형의 지붕모양과 안쪽으로 들어가 수있도록 만들어져있다. 옛날에는 돈많은 사라들이 만든 사빙고가 있었으나 대부분이 관빙고라고 하였다.
<청도 남산 운무>
<식물원 단풍나무 가지에 매달린 빗방울>
곧바로 남산가는 길 쪽으로 올라가다가 성벽 복원공사를 하는 곳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향교에 들렸다. 이곳의 벚꽃들이 휘늘어지게 만개가 되었고 백목련의 꽃은 거의 다져가고 있는데 자목련이 이제 꽃잎을 피기 시작하고 있다. 이곳에도 벚나무와 아주 오래된 것같은 느티나무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향교 뒤쪽에 문묘가 있는데 이곳은 터 모양 때문인가 동쪽에 문묘가 설치되어 있었다.
<향교 느티나무>
<자두나무 꽃>
<자목련>
<백목련>
<벗나무>
<높이가 낮은 향교 정문>
향교를 돌아 나와 초등학교 동쪽 언덕에 새로 만들어 놓은 동헌을 둘러보고 초등학교 옆에 붙어있는 (주)한옥문화진흥원 창업보육센터에 들렸다. 작은 소목을 배우는 학생들이 서너명 있는 작업장에서 최고익교수가 설명을 해주었다. 토,일 일주일에 2번 두번을 수업한다고 하는데 한 달에 60만원의 수강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나무들이 수입품인 미송(더그러서 퍼)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목공소의 이름이 목눌공방(木訥工房)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영환선생이 논어에 나오는 목늘이라는 말을 따온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목늘공방을 빠져나오자 청도 객사인 청도도주 건물이 보수하느라고 한 참 바쁘다. 道州(청도의 옛이름)라 붙은 현판이 있고 꽤 많은 방을 갖춘 건 건물이다. 그 건물 지붕에는 보기 드물게 막기화가 사람의 얼굴 모습을 그려 놓았다. 한쪽 측면에는 동물들을 그려 놓기도 했다. 이건물 입구에는 양이척화비가 서있다. 대원군 때 만든 척화비는 전국 곳곳에 많이도 세워 놓은 모양이다. 성벽을 돌아 북쪽문인 북공문으로 나왔다. 北拱이란 북쪽을 잘 지킨다는 뜻이라고 전일주 박사 알려 주었다. 북공문 아래에는 수련을 심어놓은 두 개로 나누어진 연못이있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나 조금 있으면 수련이 그 아름다운 자태로 두 연못을 가득 덮게 된다고 하였다.
<사람얼굴 모양이 그려진 막기와>
<무참하게 잘라진 가지에서 새봄을 알리는 수양버들>
<척화비>
다시 버스를 타고 청도 군청 옆에 있는 식당에 갔다. 기사, 가이드 양까지 23명이 점심을 맛있게 먹고 막걸리도 한잔 씩하였다. 갈치찌게를 먹었다. 갈치토막이 한사람에게 한토막씩 돌아갔다. 식사 후에 막걸리 한 사발을 비우고 얼굴이 붉어졌다.
식당 앞 서울특별시문서보관소가 설치되어 있다. 옛날 4대 문고처럼 벽지에 출판된 다른 한부를 보관하는 곳이라고 했다.
<청도 성곽 북문 拱北樓>
<서울특별시출판물 보관소>
차를 타고 오후 일정이 시작되었다. 범곡리 지석묘 군에 들어갔다. 받침돌로 고여놓은 고인돌과 달리 큰 돌덩이 들이 그냥 놓여져 있다. 그 돌덩이 아래쪽에 고인을 안장시키고 그위에 큰 바위돌을 언저 놓는 묘지양식으로 이런 고인돌양식을 남방양식이라고 하며 아래발을 바치고 큰 돌을 얻어놓은 것을 북방고인돌양식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남방식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이동민박사 남방고인돌과 북방고인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이곳을 나와 하평리 은행나무를 보러 갔다. 가는 길에 매전면 수무동 마을 앞을 지나면서 오늘의 순례길을 안내하고 있는 전일주 선생의 설명이 있었다.
<범곡리 고인돌>
<하평리 은행나무>
스무동에서 조금 간 큰 하천 넘어 산등성이에 우람차게 큰 하평리 은행나무가 있었다. 새로 큰 다리공사가 진행되고 있고 그 다리위에는 금줄을 쳐놓아서 나무아래까지 기지는 못했다. 이 나무는 김해사람 낙안당 김세중(1484-1553)이 조선중종 4년(1509년)이 지역의 지세가 명지이고 인심이 순후하다고 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심었다고 전해온다. 수령은 약 450년 수고 27m, 두레가 7.6m이다. 이나무는 청도읍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다고 했다. 나무를 보고 있는 동안 전일주선생은 아래쪽 비닐하우스 딸기밭에 가서 딸기를 박스채로 사가지고 차가 다시 출발하였다. 이 은행나무도 가을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을 적에 와서 보면 장관일 것 같았다.
<동산리 처진 소나무 천연기념물 295호>
다시 출발하여 길가에 있는 처진 소나무를 만났다. 이소나무는 국가보호수인 천연기념물로 진정되어 있다. 새로 도라가 놓이고 그 도로 아래쪽 약간 비탈이 진 언덕에 싱싱하게 잘 자태를 지탱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진 모양이 아름다운 것이 이곳 동산리 처진 소나무라고 한다. 수령은 약 200년 나무높이 14m, 흉고둘래가 1.9m이며 나뭇가지가 처진다고 하여 柳松이라고도 부른다. 원래는 10여주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한주만 남아있어 보기가 더욱 아름답다. 우리나라 소나무속에는 5가지가 수종이 있다. 소나무, 해송, 잣나무, 눈잣나무, 섬잣나무이다. 이중 소나무가 가장 많은 면적에 퍼져있으며 변종이 많다. 각지역 중심으로 나누어 놓은 지역생태형은 금강형, 동북형, 중부남부평지형, 위봉형, 안강형으로 나눈다. 그러나 형태적으로 보다 많은 변이들이 나타나고 있어 잎이 노란색을 띈 금송이나 솔잎에 하얀줄이 들어가 있거나 잎 모양이 꼬불꼬불 뒤틀린 것등 조경용이나 관상용으로 개발된 것들도 많이 있다. 산에 가거나 등산을 하면서 소나무를 만나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가 있다.
<삼족대>
<선암서당>
유송을 구경하고 우리나라의 소나무 종류에 대해 언급하였다. 조금 차를 달려 다리를 건너 강물넘어에있는 삼족대 를 구경하였다. 매전면 금곡리에 있는 삼족대는 조선 중종14년(1519년) 三足堂 金大有 (1479-1552)선생이 후진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하였고 그 호를 따서 삼족대라 불렀다. 김대유는 正言 조광조의 문인으로 중종2년 정시에 장원급제하여 철원현감등을 지낸 인물이다. 1519년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에 은거하였다. 동창천의 암벽위에 놓여있는 삼족대는 여러번 증보수를 하였으나 아름다운 한국의 정자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삼족대를 보수하느라고 삼족대 아래 석축을 새롭게 쌓아 놓아 윗 건물과 조화를 이루지 못해 보는이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그기에 한술 더 떠 삼족대 바로윗쪽에 군청에서 새로 세운 제실같은 건물이 놓여 있어 전체적인 조화가 완전히 깨어져 버린 것같은 느낌을 받았다. 문화재 보존 관리에 안목이 있는 인재들이 등용 되어 적절한 관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茶詩>
<배롱나무, 목백일홍>
다시 출발하여 선암서원에 도착하였다. 도로 주변에 빈터가 다시 정비되고 있다. 이곳이 벽돌공장이었는데 이제는 군에서 선암서원 주변 정비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벽돌공자의 모든 건축물은 철거되어있으나 높은 굴뚝이 마음에 걸려 물어보니 이 굴뚝을 선암서원 선전탑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겨 놓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조금전에 사온 딸기를 씻어 대청마루에 앉아 맛있게 먹었다. 대청마루의 석가래가 절간의 내부를 닮아 특이해 보였다. 벽에도 많은 시판이 걸려 있고 벽면에는 다시가 붙어 있다. 이 다시는 칠언절구로는 운이 맞지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사진을 찍어 보았다. 마당앞에 놓여있는 돌로 만든 돌대가 무언가 했더니 이동민선생 말로는 횟불을 올려 놓아 밤에도 대청마루에서 회의를 할수있도록 만들어 놓은 횟불대라고 하였다. 들어오는 입구 양쪽 마당에 수백년은 능히 되어봄직한 목백일홍나무가 서있다. 여름에 와서 싱싱하게 피어 있는 목백일홍 나무의 위용을 상상해본다.
<선암서당앞 횟불걸읻>
<소요대>
대문을 나서자 마자 깊은 낭떨어지가 있고 그곳은 청천강물이 휘몰아쳐 돌아들어와 연못처럼 보였다. 약간 강물쪽으로 나아가니 작은 자주색꽃을 피운 현호색 풀들이 촘촘히 나있고 그 뒤로 소나무와 벚나무들이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어 강과 나무와 언덕이 어울려 보기에 장관이였다. 서원에서 공부하다가 이곳의 자연속에서 잠시 마음을 추스릴 수있는 좋은 공간이였다.
이서원은 동창천이 흐르는 仙巖에 자리잡고 있다. 삼족당 김대유와 소요당 朴河淡(1506-1543) 두분을 배향한 곳이다. 초창은 선조 1년(1568년) 매전면 운수정에 두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봉안하고 鄕賢祠라고 하였다. 이후 선조10년(1577년)에 청도군수 황옹규의 주선으로 현재의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 개칭하였다. 선암서원 뒤쪽에는 장판각이 있고 보물로 지정된 배자예부운략판목과 지방문화재 해동속소학판목, 14의사록판목 등이 보관되어 있어 한국학의 보고라 불렀으나 현재 유물들은 안동 한국학 진흥원에 보관중이라고 한다. 돌아나오는 앞마당 쪽에 소요대라는 비가 서있다. 이비석역시 받침대만을 새 돌로 올려 놓아 모양새가 우수꽝스러웠다. 문화재 복원사업이 무언가 여러 가지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큰 도로에서 이곳 선암서원까지 들어오는 길도 새로 내었는데 옛모습은 간곳없고 곧바로 직선으로 거어져 있다,
<선암서당 아름다운 소나무>
<숲. 물. 그리고 사람>
<느티나무에 난 유두(혹)>
<소요당>
곧바로 5분여 그곳이 운남고택이라고 한다. 이 고택은 조선 말기에 운강 박시묵의 셋째 아들인 박재충(1850-1869)분가 하면서 건립한 가옥으로 운강고택 서편에 건립되어 있다. 사랑채 대청끝 보고임에 태극문양을 그려 넣어 멋을 더하였다. 큰집과 격을 맞추기 위해 지붕에 망와를 놓지 않았다. 마당이 매우 넓고 창고로 쓰인 공간이 많아 매우 큰 농사를 관리했던 것같다. 같이 답사한 사람들이 양반가옥 구조와는 모양이 매우 다르다고 하였다.
<운강고택>
<일반양반가와 다르게 마당이 매우넓다>
이곳을 나와 운강고택의 부속건물인 만화정으로 향했다. 1856년 박시묵이 건립한 정자이다. 울창한 숲 언덕 위에 동창천이 내려다 보이고 멀리 강아래쪽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마련한 정자이다. 이곳이 한국전쟁당시 피난길에 오른 이승만 대통령이 한루밤을 유한 곳이라고 한다. 큰길에서 들어가는 빈터에는 아름드리 왕버들이 서있고 만화정 정문을 들어가면 겹홍매가 한창 향기를 내뿜고 있다. 계단위 정자에는 많은 시판들이 걸려 있어 답사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만화정 뒤편에는 노간주나무가 상당한 높이로 자라고 있는데 그 열매를 소주에 넣으면 드라이진이 된다고 했드니 그곳에 열린 열매를 몇 개씩 따가지고 가는 사람들도 있다. 작지만 아담한 만화정 구경을 끝으로 오늘의 답사가 마무리되었다.
<만화정 간판>
<만화정 시판 전박사님 설명>
<만화정 답사팀>
<산수유나무 꽃>
<만화정앞 화곡암선생 >
<겹홍매 꽃>
오늘 하루도 즐겁고 재미있는 답사를 끝내고 자인을 거쳐 상대를 지나 경산을 통과하여 동양고전 연구소 앞에 도착하니 6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아침에는 비가 약간 내렸으나 점심후부터 서는 화창한 봄 날씨에 다들 즐거운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 오늘 답사일정을 맞아주신 전일주 박사님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감사합니다.
오늘 답지지 설명에 인용한 책은 이번 답사하기 전에 전일주박사가 나에게 준 “청도의 지정문화제“라는 청도군에서 발간한 책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더욱 더 건승하시기 바랍니다.
지산 박용구
첫댓글 사진이 크게 들어가서 보기에 참 좋습니다. 답사가 참 알차다는 느낌입니다.
바쁘신 일정에 도와주시어 감사합니다. 사진이 너무크서 균형이 잘 맞지 않은 것같기도합니다.
폰으로 보는 사진이 환상적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