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개통 40주년
오늘로 경부고속도로 개통 40년을 맞이했다고 각종 보도매체에서는 특집 기사로 40년 전 도로 개통당시와 오늘 현제 교통상태를 비교하면서 경부고속도로가 이루어 낸 경제, 사회 발전의 진면목을 보도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방송 매체는 상당한 시간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을 위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집념과 현장진두지휘를 위시한 열정에 대한 이야기와, 그 후 4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날의 한국의 지역발전과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바로 경부고속도로의 역할이라는 논거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약관 20대의 사회 초년병으로, 더구나 토목 전공의 건설공사 첨병으로, 경부고속도로에 참여 했던 필자 역시 이 보도를 들으면서 감회가 새삼스러움은 말 할 나위없다. 보도 매체에서 못 다한, 그리고 말 못할 사연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닌 것임을 알고 필자의 뇌리에 남아 있는 몇 가지 사실도 털어놓고 싶어 이 글을 쓴다.
먼저 경부고속도로는 많은 정치, 경제계의 반대의사를 물리치고 박 대통령이 집념으로 밀어붙인 선각자적 결단의 소산으로 잉태한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필자도 수긍하는 이유를 열거 하고 싶다. 당시 많은 건설 전문 선배, 학자, 공무원의 상당수가 군사 정부의 지나게 과대한 국가사업을 빈약한 국가 예산으로 너무나 조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크게 잘못이라고 혹평했던 것을 기억한다. 심지어 건설 관련 국가 여러 기관에 총체적 예산을 산출 시켜놓고, 종당에는 건설 시공사 사주와 밀실에서 공무원들이 구상한 예산보다 훨씬 적은 금액으로, 주먹구구식 Km당 도로 건설비를 책정하고 강압적으로 시행토록 산하 기관에 방침을 하달하고 있다고, 알만한 건설 관련 기술자나 공무원들의 빈정거림이 대단했다. 종내 군사정부는 부족한 고속도로 건설감독 인력부족을 보충한다는 명분으로 보다 청렴하고 국가관이 투철한 ROTC 출신을 비롯한 군대 인력을 대거 현장에 투입 시켰다. 이는 선임 건설관련 공무원들을 믿지 못 하고, 군대식 상명하복 식으로 사업을 추진하겠다. 는 의지로 비쳤고, 여기 군 장성 출신의 건설부 장관의 위명이 떨치게 된 것을 비롯하여, 나이어린 현역 소위, 중위 출신의 현장 감독들이 연상의 보조감독이나 시공사 현장 간부들과 불협화음을 내면서 공사현장을 주야가 없는 전쟁터로 만들어 나갔다.
고속도로가 상당히 진첩이 있고나서 일본서 신형 건설 장비가 도입 되었지만 초기에는 참으로 빈약한 장비로, 그야 말로 노무자의 인해전술로 교량을 건설하고, 터널을 뚫고, 도로를 다지어 나가면서, 공기에 ?기고 예산에 부대낀 현장은 부실하기 십상이었다. 공사 일정을 얼마나 몰아 붙였으면 당시 시공 업체 직원들은 공사원가문제는 뒷전이고, 사채라도 돈을 마련하여 제 시간에 일을 마치는 것이 지상 과업 이였다. 당시는 지금 같이 노사문제가 정립되어 있지도 않았고, 모든 근로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던 것도 간과 하지 말아야 한다.
1968년 2월 경부고속도로기공( 3년 내 준공목표) 1968년 9월 경부고속도로 대구- 부산 간 기공 1968년 12월 서울- 수원 간, 서울- 인천 간 고속도로 개통 1969년 9월 오산- 천안 간(39Km) 고속도로 개통 1969년 12월 10일 천안-대전 간(66.8Km) 고속도로 개통 1969년 12월 29일 대구-부산 간 (123.1km) 고속도로 개통.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 거행
실제로 경부고속도로는 정상적으로는 15년 이상의 공기가 필요한 규모인데, 실제로 2년 반 이라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한 짧은 시간에, 값싼 금액으로 준공하여 세인을 놀라게 했지만, 이 기적 같은 고속도로는 개통과 동시에 하자보수 작업을 해야 할 만큼 부실하였던 것도 사실이다. 국가 대형 공사의 부실 문제는 법적, 경제적 책임 문제가 만만치 않다. 많은 정치, 언론계에서 이 문제를 쟁점화 했으며, 또한 가뜩이나 재력을 탕진한 경부고속도로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대형 건설회사는 경부고속도로의 부실책임을 떠맡을 경우 회사 도산 문제 뿐 아니라 큰 사회문제로 확산될 공산이 크다. 공사에 참여한 건설인 들은 물론 많은 국민들이 이 문제에 대한 추이를 걱정하고 있을 때, 박 정희 대통령의 대 국민 담화문 발표는 아마 많은 우리 연배의 건설인 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 이였다. 발표문을 수집, 기록하지 못 했으나 대강의 요지는 아래와 같다.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이나, 시급한 경제개발의 요구에 따라, 이번 경부 고속도로 건설은 온전한 공사를 위하여 장기간을 허비 할 수도 없었고, 완벽한 품질을 위한 더 많은 예산을 쓸 수 없었다. 이 고속도로를 유용하게 사용하여 경제개발을 이루어 나가면서 일부는 보수, 수리하고 개선해 나가는 것이 우리 현실에 맞는 일이다. 도로의 부실과 하자 처리문제에 대하여 전적으로 정부가 책임지고 적의 조치해 나갈 것이니 국민들은 지나친 걱정에 사로 집히지 말기 바란다.”
이로써 논쟁의 불씨를 끈 것은 물론 빚더미에 앉은 건설 회사들은 연속되는 개발 사업에 참여하면서 한시름 놓게 되었고, 무리하게 밀어붙인 만큼이나 미련 없이 결과의 상처를 쓰다듬어주던 박 대통령의 용단과 배포에 건설인 들은 감복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경부고속 통행인들은 한동안 끊이지 않는 고속도로의 보수공사를 지켜보면서도 마음속으로 이해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 경부고속도로 공사에서 심하게 타격 받은 여러 회사가 일정 시간이 지나 끝내 쓰러지고 마는 현상도 생겼다. 이런 회사들은 처음부터 부족한 금액의 경부고속도로의 공사비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공사에 필요한 대형장비의 도입 부담과, 처음으로 덤벼든 대형 돌관공사의 경험 부족으로 말미암아 건설회사의 자체 경영 능력이 약체가 되면서 재기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때의 값진 경험이 훗날 중동건설의 특수시기까지 지탱 할 수 있었던 회사들은 해외공사의 호황과 맛 물려 크게 사세를 확장하는 계기도 되었다고 생각된다.
68년 당시 전국 1만대 정도의 자동차 보유가 현제 백만 대도 훨씬 넘었고, 경부고속도로는 4차선에서 대부분 6차선, 8차선으로 확대되고 그 후, 호남, 영동, 중앙, 서해안 고속도로를 비롯하여 전국이 크고 작은 고속도로의 넥트 웍으로 국토의 교통체계가 개선된 오늘, 종심의 나이에 20대 약관을 회상하듯, 경부 고속도로 40주년을 되돌아보는 감회는 무척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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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필귀정 원문보기 글쓴이: 박용규
첫댓글 월주형, 공사를 시작하던 1968년 버스도 다니지 않는 경산의 어느 오지학교에서 버스를 타려면 십리길을 걸어야했습니다. 연연생으로 태어난 두 아들을 유모차에 함께 태우고 그 공사현장 옆을 아내와 걷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던 일을 가능케 만든 지도자의 힘을 실감케 합니다. 2년 5개월에 480여 km의 고속도로를 만든 건 기적중의 기적이라 생각됩니다. 좋은 영상과 글 감사합니다.
그분의 넋을 기려야 합니다. 젊은 층이 떠든다고 바른 일을 하지 못하면 우리는 조국을 근대화 시킨 한사람중의 하나라고 할수 없습니다. 몇번이고 말했지만 박대통령이 한국을 근대화 시켜서 '그분의 넋을 받으려고 한국에 왔더니 그분의 무덤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라' 는 한 화교의 말은 귀를 맴돕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를 근대화 시킨 그분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을 세워 전세계에 자랑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조국근대화의 일원이었던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하고 힘을 모아 뜻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월주형! 내 바로 옆에 조국근대화의 현장 일꾼이 있었구려 자랑스럽소, 그분의 의지와 나라위한 붉은 마음 날이 갈수록 빛이나는데 그 후손은 본받으려 하지 않는구려! 아 참 딱하고도 딱하도다. 이제 우리마저 가고 없으면 누가 그분의 나라사랑 마음 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