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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증인의 권세
본문: 요한계시록 11:1-13
머리말
요한계시록의 “두 증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이 본문은 이단들에 의해서 아주 오해되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자기 교주와 지도자를 두 증인이라고 하면서 교주 말을 안 듣고 함부로 대적하면 죽임을 당하고 재앙을 당한다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이 본문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교주가 행하는 저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단에서 쉽게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두 증인은 어떤 교주나 소수의 교회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전체, 우리 성도들 각 사람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두 증인입니다. 이단들에 의해 더럽혀진 우리 기독교의 소중한 진리들이 너무나도 많은데, 오늘 본문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이 두 증인에 대한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1. 마지막 때에 교회를 보호하심 (1-2절)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권세를 주십니다. 그 첫 번째 권세는 교회를 모든 마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나팔 심판 중에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8-9장에서 첫째 나팔부터 여섯째 나팔 심판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뒤에 11장 후반부에서 마지막 일곱째 나팔 심판이 임합니다.
일곱 번의 나팔은 완전수이고 역사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고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나팔 사이의 기간은 최후의 심판이 임하기 직전의 마지막 때를 뜻합니다. 오늘 본문은 마지막 때에 교회에 이루어질 일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십니다. 일종의 측량 자입니다. 이 얇고 연약한 막대기로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은 에스겔서 40장에 나오는 내용과 연결됩니다. 에스겔에게 환상을 주셔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새롭게 지어질 성전을 보여 주십니다. 에스겔 40장 3절을 보면 거기서도 빛나는 한 천사를 보내서 손에 측량 자를 주시는데 이 “갈대”라는 표현이 똑같이 쓰였습니다. 요한에게 주신 이 갈대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건설하실 성전을 측량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이 이 말씀을 받을 당시에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없어졌다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기원후 66년에 유대인 무장 독립운동 세력이 로마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가 이들을 진압하면서 70년에 예루살렘으로 들어와서 성전을 모두 부숴 버립니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습니다.
요한이 성전을 측량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측량할 성전이 물리적인 형태로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성전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과 제단은 예수님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그리고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은 교회에서 예배하는 성도들입니다.
이 교회를 측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도 토지를 거래하거나 새로 건물을 짓거나 할 때 토지 측량을 새롭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땅이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교회는 내 교회다, 이 성도는 내 성도다 하고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측량하도록 하십니다.
요한계시록 7장에서도 여섯째 봉인 심판과 일곱째 봉인 심판 사이에 십사만사천 모든 택함받은 성도들의 이마에 인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확인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것과 동일한 내용이 여기서도 반복됩니다. 최후 심판이 임하기 전에 주님의 교회와 백성들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해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성전의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않으십니다. 이방인들이 자유롭게 짓밟도록 허락해 주십니다. 교회의 일부가 공격당하고 더럽혀지고 훼손당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를 물리적으로 박해할 수도 있고, 이단적인 사상을 퍼뜨릴 수도 있고, 세속적인 문화를 교회 안으로 들여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마흔두 달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햇수로 치면 3년 6개월입니다. 상징적인 수인데, 완전한 수 7년의 절반으로 아주 짧고 제한적인 기간을 나타내는 의미입니다. 또 교회의 중심과 예배의 본질적인 부분과 성도의 안전은 절대 침입할 수 없도록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지난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인해 예배의 자유가 제한당한 것이 우리에게 큰 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전염병의 확산과 정부의 집합금지 명령으로 인해 주일 예배 모임이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리의 마음 또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위축되었습니다. 혹시 감염이 되지는 않을까,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또 사회적인 비난의 표적이 되면 어떡하나.
하지만 제한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주님께 부르짖으며 예배를 이어나갔고, 모이기에 힘썼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셔서 영원할 것만 같았던 코로나 비상조치가 종식되었습니다. 이제는 감기나 독감과 같은 계절성 전염병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교회는 또 새로운 단계로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일시적인 시련을 허락하시지만, 그 본질과 중심을 지키시고 우리 성도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시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사례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측량하고 인쳐 주시며 소유권을 확실히 주장하십니다.
우리가 한 평의 땅이라도 내 것으로 가지고 있다면 늘 마음에 품고 생각하고 들여다볼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그곳을 빼앗으려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되찾고 소송까지도 각오할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소유된 이 교회와 백성이겠습니까? 그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리를 그 손에 움켜 쥐시고 절대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며 담대히 나아갑시다.
2. 마지막 때에 교회에 말씀의 능력 주심 (3-6절)
1) 이 땅의 주인 앞에 선 베옷 입은 두 증인 (3-4절)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두 번째 권세는 말씀의 능력입니다. 두 증인을 세상의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세우십니다. 4절에 나오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구약의 스가랴서 4장에 나온 예언입니다.
스가랴서 4장에서 천사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도자 스룹바벨에게 등잔대와 두 감람나무 환상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등잔대는 온 세상을 다니는 하나님의 눈, 곧 성령님을 의미하고,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기름부은 두 직분자를 가리킨다고 설명해 줍니다.
정리해 보자면,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주의 종입니다. 그리고 두 촛대는 그 종들에게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주의 종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성령님의 모든 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이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단지 교회의 직분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바로 기름부음 받은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10절에서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피값주고 사신 우리 모든 성도들을 왕으로,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바로 기름부어서 임명하는 메시야 직분자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성령으로 기름부음 받아서 왕이며 제사장이며 선지자로 임명된 사람들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각 사람이 전부 하나님께서 세우신 증인으로 권세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증인으로 받은 임무가 무엇입니까? 바로 4절에 이 땅의 주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주인의 지배와 통치 아래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서서 세상을 마주보고 서서 이 세상의 주인을 향하여 복음을 증거합니다.
1260일은 2절에 마흔두 달과 같은 뜻입니다. 1260일을 개월로 바꾸면 42개월이고 해로 바꾸면 3년 반입니다. 영원히 계속 증언을 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기간동안 증언을 하면 되고 끝이 있다는 뜻입니다.
3절에 증인은 굵은 베옷을 입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베옷은 다가올 심판을 슬퍼하며 죄를 회개할 때 입는 옷입니다. 이 세상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자기 몸을 단장할 때, 증인은 베옷을 입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 지금 이 세상은 문제가 있다, 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 어서 빨리 회개하라는 것을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초라해 보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증인을 단 두 명만 세우셨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또 증언의 확실성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적은 숫자입니다. 한 12명이나 60명의 증인들을 세우셨으면 외롭지도 않고 아주 힘있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단 두 명의 증인만 있으니까 너무 외롭고 초라해 보입니다.
또 베옷을 입고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고지식하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게 볼품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왜 인생을 좀더 즐기지 않고 이익이 되는 일을 좀더 적극적으로 추구하지 않는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정작 회개를 해야 할 불신자들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데, 우리 교회와 성도들만 과도하게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절제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마지막 때에 교회에 주신 뜻입니다. 우리는 베옷을 입고 이 땅의 주인을 대항하여 살아가는 두 명의 증인입니다. 적은 수의 증인으로, 이 세상을 따르지 않고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주인들, 권세자들과 권력자들, 이 세상에서 큰 돈 벌고 성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맞서서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요즘 우리 교회의 현안은 공간 문제입니다. 지금 이 공간에 들어온 게 15년이 되었습니다. 인테리어도 오래 되고 공간도 많이 비좁습니다. 엘리베이터도 없고 주차 시설도 없고 주변에 아이들을 놀릴 만한 공원도 없습니다. 성도들끼리 소그룹으로 교제할 공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많은 아쉬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부족함이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베옷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장소가 여러 부족함이 있지만 그만큼 재정적인 부담이 적은 장점도 있습니다. 좋은 공간을 얻으려면 그만큼 재정적으로 매이게 되고, 교회적으로 감당해야 할 여러 전도와 선교의 사역들도 위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공간적인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교회를 사랑하고 모이기에 힘쓸 때에, 이 질그릇 같은 곳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가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화려한 외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에 충실한 교회를 이루고자 하는 지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의 이 소박한 교회당이 증거해 줄 수 있다는 관점을 갖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은혜 주시면 좋은 장소로 옮길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 있는 동안에는 감사함으로 이 베옷과도 같은 교회당을 자랑하면서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두 증인이 선포하는 말씀의 권세 (5-6절)
비록 이 마지막 때의 교회의 겉모습은 조금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전하는 말씀은 강력한 권세를 가집니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원수를 삼켜 버릴 것입니다. 두 증인에게 해를 끼치는 원수들은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입에서 불이 나온다는 것은 말씀이 불 같은 능력을 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증인들이 전하는 심판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장 8절은 예언합니다. “음녀 바벨론이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땅과 땅에 속한 모든 것들은 결국 불로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이 세상 권세가 아무리 화려하고 강력해 보여도 주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6절에서는 말씀의 권능을 보여주는 구약의 대표적인 두 사례가 나옵니다. 하나는 엘리야가 권능으로 비를 3년 간 멈추게도 하고 다시 내리게도 한 일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나옵니다. 다른 하나는 출애굽기 7장에 모세가 권능으로 애굽에 열 가지 재앙을 보낸 일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말씀의 권능을 우리 교회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엘리야와 모세의 두 심판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당시는 모두 우상을 숭배하는 왕과 권력자들이 주님의 백성을 함부로 탄압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야와 모세는 세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소수였고, 아주 힘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말씀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큰 심판을 일으켰습니다. 왕들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구출하고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이 일에 말씀의 증인 엘리야와 모세를 도구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다는 가장 중요한 증거는 이 교회 가운데 계속해서 말씀의 사역자를 일으켜 주시고 복음을 끊이지 않고 내려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 종말의 가장 결정적인 표적이 됩니다.
우리 교단 신학교인 고려신학대학원에 코로나 직후인 작년과 제작년에 지원자가 크게 줄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서 입학생이 20% 가량 크게 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립니다. 우리 교회에도 두 분의 목사후보생들이 계시는데, 주님께서 이 악한 세대에도 계속해서 복음 전파자들을 일으켜 주시는 것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목사 후보생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고 관심을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서 한 주에 공식적인 설교가 총 9번 이루어집니다. 주일 예배 설교, 오후 교리공부 설교, 또 새벽기도 설교 6번, 금요기도회 설교, 이렇게 매주마다 많은 설교들이 행해집니다. 매일매일 우리 설교자들의 건강을 지켜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말씀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신 것이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말씀에는 세상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주시고 세상의 헛된 가치관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말씀을 들을 때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고 이 세상을 경건하게 살도록 힘을 공급해 주십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세례를 받고, 입교를 했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교회를 통해 믿음에서 새로워지고 죄로부터 돌이키고, 삶이 안정되고 가정이 안정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과 인생 가운데 일어나는 크고 작은 변화들이 참으로 말씀이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있고 권세가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우리가 매 주일 예배 가운데 복음을 들을 때, 이 말씀이 참으로 능력있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 가운데 천국의 문을 열고 닫는 권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는 자에게는 그 순간 천국의 문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생명을 누리고, 장차 천국으로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도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문이 굳게 닫힐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에게 임하고 장차 큰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말씀이 넘치는 이 은혜의 때에 말씀을 들을 때마다 계속해서 죄에서 돌이키고, 계속해서 예수 믿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 때에 교회를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케 하심 (7-13절)
마지막 때에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 주시는 세 번째 권세는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영광에 동참하여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 교회와 각 사람이 작은 예수가 되어서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하십니다.
7절을 보면 아주 무서운 장면이 나옵니다. 이 증인들이 모든 증언을 다 이루고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다 감당하니까 저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짐승이 올라옵니다. 교회를 공격하는 전쟁을 일으킵니다. 결국은 승리를 거두고 증인들을 다 죽입니다.
시체를 바로 장사지내지도 못하게 하고 길에 버려 놓습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다 지켜보면서 조롱하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암시합니다. 이 성은 큰 성인데, 그 이름은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바로 이 세상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런 도시에서 죽임을 당하고 버려질 것입니다.
11절에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이 이 시체를 보면서 조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는 5장 9절에 이 구원받은 성도들, 증인들이 살았던 그 장소입니다. 비슷한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증인이 될 것이지만, 또 어떤 사람은 교회의 원수가 될 것입니다.
악인들은 이 증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서 자기들끼리 선물을 주고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아주 잔인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잘못했다는 소리가 너무나도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죄인이다. 너희는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어서 빨리 회개하고 돌이켜라.” 이런 말이 너무 듣기 싫고 괴롭게 느껴졌습니다. “왜 무조건적으로 나의 삶을 긍정하고 존중해 주지 않는가? 왜 나를 억압하고 간섭하는가?” 그러면서 증인들의 존재가 사라진 것을 기뻐합니다.
사흘 반 동안 죽은 채로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사흘보다는 조금 더 긴 기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길지는 않고 절반 정도 아주 조금 더 긴 기간입니다. 사흘 반은 7일의 절반이기도 합니다. 교회에 가해지는 죽음과도 같은 핍박이 그리 오래지는 않을 것임을 약속합니다.
이런 장면들은 매우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겠는가 싶기도 하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실 이 내용들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십자가 고난에 대한 묘사입니다. 8절에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죽임을 당할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가식적이고 현세적인 신앙에 빠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회개하라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잘못을 지적하는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대인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하셨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랑으로 섬긴 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무리들, 그리고 이들에 선동된 대다수 군중들이 예수님을 적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모습은 사탄의 강력한 영향력으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정당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고 거짓으로 증거를 조작하여서 반역죄를 저질렀다고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목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이면에 사탄의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죽음의 장면은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들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스데반과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과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한 모습이 예수님의 죽음과 매우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사 속에서도 이 예수님과 사도의 뒤를 따르는 순교자의 모습들이 계속해서 발견됩니다. 이 요한계시록이 쓰여진 후 얼마 뒤에 서머나 교회의 주교 폴리카푸스가 로마 제국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틴데일이나 얀 후스와 같은 수많은 종교개혁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교에 의해 죽임를 당했습니다. 우리 고신 교단은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선배들을 가까이에 두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기쁘게 여긴 수많은 신실한 증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덕분에 오늘날 우리들도 복음을 믿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와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들 한 분 한 분이 복음의 증인으로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갑니다. 비단 목사나 선교사가 아닐지라도 우리 모든 성도들이 복음의 증거자로서 죽음과도 같은 고난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며 살아갑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기독교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부정하는 것에 대해 비과학적이라고 낙인을 찍습니다. 사회적으로는 동성애와 낙태와 이혼을 반대하고 혼전순결을 강조하는 것을 굉장히 편협하고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분별한 물질 추구를 경계하고 투기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며 술 담배를 하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어리석게 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에서 우리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을 두고 “종교를 강요한다, 아동학대”라는 식으로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차별금지라는 명분으로 공적인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자신의 신앙적인 양심을 표현하는 것을 금지하려는 시도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악한 세상 가운데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 큰 도전입니다. 꼭 앞장서서 복음을 전하고, 목숨을 걸고 주님의 일을 감당해야만 여기서 말하는 두 증인이 아닙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삶 전체가 이 마지막 때의 증인의 모습입니다.
매 주일 예배에 성실하게 참여하고, 소득의 일부를 복음 전파와 다른 성도들을 돕기 위해 헌금으로 드리고, 매일 매일 바쁜 가운데 시간을 쪼개어 말씀 읽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가 벌써 큰 부담입니다. 주변의 친척들이나 친지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주목받으며 살면서 언행에 조심스러운 것 자체가 이미 많은 부담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며 복음을 전하고, 또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삶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십자가요 사랑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한편으로 기쁘고 보람되지만, 어떤 면에서 죽음과 같은 고통과 수치를 견뎌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의 수고를 몰라주고 오히려 부모를 무시할 때가 많습니다. 부모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직장에서 내가 섬기는 동료들과 고객들이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나의 노력을 이용하려 들 때가 많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지들이 나의 신앙의 결심을 조롱하며 나에게 해코지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섬기고 배려하는 상대방이 나에게 피해를 줄 때에도 계속해서 상대방을 용서하면서 그 상대방을 섬기는 이 과정이 자아가 죽고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섬기면서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감당할 일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지만 동시에 주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오늘 본문 11절입니다.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성령님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죽었던 것과 같은 자들이 다시 힘을 얻고 살아납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는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 않은 죽음과도 같은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영, 예수님의 부활의 영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새 희망을 주고 새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의 육아 가운데서 자녀들을 위해서 인생을 갈아넣고 끝이 보이지 않는 수고를 감당하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옵니까? 직장 생활 가운데, 또 힘든 가족관계 가운데 깨진 마음, 다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서 사랑의 수고를 지속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옵니까? 바로 성령님에게서 옵니다.
우리 이 시간 주님께서 모든 성도들을 축복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다시금 공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죽은 것과도 같이 낙심하고 무너진 마음, 인생의 여러 부담과 맡겨진 책임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다 포기하고 싶은 이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고 새 힘을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진 미래는 밝습니다. 결국 모든 고난은 지나갈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놓인 삼일 반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입니다. 우리는 부활할 것이고, 하늘로 올려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허락될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한 자는 그분의 부활에 영광에도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수고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13절에 이 땅 가운데 말씀이 이뤄지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인데,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사랑으로 수고하며 섬기는 그 사람들, 나의 자녀들과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지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 날을 소망하며 우리는 기쁨으로 사랑의 수고를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4:13) 성령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이 땅에서 기쁨으로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맺음말
오늘 우리는 요한계시록 11장 말씀을 통해서 마지막 때에 교회에 임하는 세 가지 권세에 대해 들었습니다. 첫째로 주님께서는 교회를 측량하셔서 자기 교회로 삼으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둘째로 주님께서는 교회를 두 증인으로 세우시고 말씀의 권능을 주십니다. 죄인을 심판하며 돌이키는 권능을 교회에 맡겨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에 동참하게 하십니다. 삶을 통해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성령님을 보내 주십니다.
우리 관악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의 증인으로 힘있고 능력있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기쁨으로 감당하며 십자가를 증거하고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어린이 설교
한번 예를 들어 볼게요. 학교에서 친구들이 싸웠어요. 선생님이 와서 누가 잘못했냐고 물어요. 그런데 서로가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에요. “쟤가 먼저 밀었어요.”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이에요.”
그럴 때 선생님이 **한테 물어보는 거에요.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니? 그때 **가 대답해요. “제가 옆에서 봤는데요. 아무개가 먼저 지나가다가 실수로 부딪쳤는데 미안하다고 안 했어요. 그래서 싸움이 난 거에요.” 이럴 때 **가 증인이 된 거에요.
증인이 뭐게요? 재판에서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을 증인이라고 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진도 없고 cctv도 없고 다른 증거도 없을 때는 증인이 말하는 게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증거가 돼요.
예수님께서 이제 곧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요. 예수님 다시 오시기 직전을 마지막 때라고 하거든요. 바로 지금이 마지막 때에요. 그런데 이때 예수님께서 두 명의 증인을 세워 주겠다고 하셨어요. 왜 두 명이냐면요. 혼자서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안 믿어줄 수도 있으니까, 두 명을 세우는 거에요. 두 사람이 똑같이 말하면 사람들이 더 잘 믿어주겠죠?
이 사람들은 무엇을 증거하는 증인일까요? 바로 자기가 먼저 듣고 믿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에요.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야? 정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어?” 이렇게 사람들이 물어보면 “정말이야. 내가 아빠엄마한테 들었어. 교회에서 목사님한테 들었어. 성경에 다 나와 있어.”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 증인들의 말을 싫어해요. 보통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요. 왜냐하면 “너는 죄인이다” 하는 말을 듣고싶지 않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모두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걸 잘 알죠?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고 하면 싫어해요. 그래서 막 때리고 가두고 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지 말라고 하거든요.
그런데도 이 증인들은 용감하게 예수님을 증거해요.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또 성령님께서 용기를 주시고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지켜 주세요. 또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기쁨과 보람을 주세요. 내 증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 믿고 구원 얻게 되니까요.
또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면 큰 베네핏이 하나 더 있어요. 그건 바로 예수님처럼 부활해서 영원히 사는 혜택이에요. 먼저 죽은 우리 사랑하는 가족들, 친척들, 영원히 다시 만나서 살 수 있어요.
우리 어린이들도 앞으로 모두 예수님의 증인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길 바라요. 용감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영원한 부활 생명을 누리길 바랍니다!
설교 목차
1. 마지막 때에 교회를 보호하심 (1-2절)
에스겔 40:3 (구약 1214쪽)
디모데전서 3:15 (신약 338쪽)
요한계시록 7:4 (신약 406쪽)
2. 마지막 때에 교회에 말씀의 능력 주심 (3-6절)
1) 이 땅의 주인 앞에 선 베옷 입은 두 증인 (3-4절)
스가랴 4:10,14 (구약 1315쪽)
요한계시록 5:10 (신약 403쪽)
2) 두 증인이 선포하는 말씀의 권세 (5-6절)
요한계시록 18:8 (신약 417쪽)
마태복음 24:14 (신약 41쪽)
3. 마지막 때에 교회를 십자가와 부활에 동참케 하심 (7-13절)
골로새서 1:24 (신약 324쪽)
빌립보서 3:10-11 (신약 320쪽)
베드로전서 4:13 (신약 381쪽)
생각해볼 문제
1. 하나님께서 성전을 측량하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2.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는 각각 무엇을 의미하나요? (참고 스가랴 4:10,14) 이 증인들은 왜 베옷을 입고 있을까요?
3. 구약 성경에서 말씀의 능력으로 하늘의 비를 멈춘 선지자가 누구였나요? (참고 열왕기상 18장) 또 물을 피로 변하게 한 선지자가 누구였나요? (참고 출애굽기 7장)
4. 세상 사람들에게 고난 당하고 죽임 당한 두 증인은 결국 어떻게 되나요?
1. 하나님께서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반드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실 우리 교회의 본질적인 부분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신이 직접 경험하거나 아니면 주변에서 보고 들은 말씀의 능력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3.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증인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 일을 감당하는 데 어떤 고난이 따릅니까?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실 영광이 무엇입니까? 다른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