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과 금강경의 공(空)의 진리
불교에서는 왜 공(空, Emptiness)을 강조할까?
공수래(空手來) 공수거(空手去)라고 하지 않는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란 뜻이다.
이 말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살이가 그렇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은 단순히 이 세상살이가 텅 빈 것, 허무한 것이란 비유로 말한 것만은 아니다.
사실, 실제로 진리의 견지에서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텅 빈 것, 환영(幻影), 허상(虛相),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란 말이다.
불교 경전에서도 그렇게 말을 하고 실제 수행에서도 이와 같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공(空)이란 말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유명한 대승불교 경전인 반야심경 (般若心經)은 이렇게 시작한다.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개고(觀自在菩薩 行深 般若波羅蜜多時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즉 "관세음보살이 깊은 수행을 하고 있을 때 오온(五蘊)이 공(空, 텅빔, 없음)한 것임을 아시고 모든 고통을 건너셨다" 라는 말이다.
그러면 "오온(五蘊)"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섯 가지 쌓임, 다섯 가지 무더기란 뜻이다.
즉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중 "색(色)"은 물질, 몸을 말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마음을 가리킨다.
또한 "색(色)"은 물질을 가르키기 때문에 이 우주를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몸과 마음", 즉 내가 "공(空)" 하고 또한 물질계인 이 우주가 "공(空)"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나와 우주의 모든 것이 "공", 즉 텅 빈 것, 없는 것, 환영이라는 것이다.
이를 "아공(我空), 법공(法空)"이라 한다.
나를 포함한 이 현상계의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환영(幻影), 허상(虛相)이라는 말이다.
이런 견지에서 "조견 오온 개공(照見 五蘊 皆空)"이라는 말씀은 관세음보살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이 텅 빈 것, 환영, 허상이라는 것을 비추어 보시고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서 "도 일체고액(度 一切苦厄)", 즉 모든 고통을 건너셨다, 지나가셨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환영이고 허상(虛相)인데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을 것이냐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앞에 인용한 말씀을 반복해서 부연 설명한 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空) 사상은 역시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인 "금강경(金剛經)"에서도 잘 드러난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즉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 (虛妄) 한 것이다라고 깨달아 아는 사람이 바로 부처다 라고 하는 뜻이다.
또한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에서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다.
이 말은 모든 형상이 있는 것, 즉 이 우주의 모든 것은 꿈이요, 환영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또한 번개와 같다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공(空) 사상을 강조한다.
그러면 이러한 공(空) 사상이 실제 수행,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간략히 살펴보자.
궁극의 진리라는 것이 무엇일까?
우주의 근원, 우주의 절대적 존재가 바로 나의 진짜 모습, 즉 참나, 진아(眞我)라는 말씀일 것이다.
즉, 이 말은 우주의 근원을 깨닫는 것이 참 나를 아는 것이요, 참 나를 아는 것이 우주의 절대자를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수행(修行)을 해서 이것을 깨닫는 것이 궁극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이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왜 "공(空)"이 필요할까?
공(空)에도 얕은 공(淺空)이 있고 깊은 공(深空)이 있다.
얕은 공은 나와 이 우주가 본질적으로 텅 빈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 것이고, 깊은 공은 이러한 공(空)을 점점 더 깊이 닦아서 공과 일체화가 되어가는 정도를 말한다.
이러한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공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론과 실제 깨달음을 위해서도 불교의 "공(空)"사상을 고찰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