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에서 포항으로 이어지는 28번 국도는 경주시 안강읍을 지난다. 그 길을 지나다가 지척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이 있음을 발견하고 잠시 둘러보았다. 언젠가 옥산서원을 한 번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성리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2년 경주부윤 이제민이 세운 서원으로 1573년에 선조대왕으로부터 '옥산(玉山)'이란 사액이 내려졌다.
그곳엔 1532년에 건립된 여주 이씨 구암공파 종택으로 후일 회재 선생이 머물며 강학을 하던 독락당(獨樂堂)이 자리하고 있다. 회재 선생과 교유가 있었던 우리 선조 죽정 선생이 독락당을 찾아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관련 옛 글을 아래에 옮겨 본다.
"...... 책장 깊숙히 넣어 두었던 황상파(凰顙派) 분파조이신 죽정(竹亭) 잠(潛) 할아버지에 관한 책 <죽정집(竹亭集)>을 꺼내어 봅니다. 죽정집(竹亭集)은 조선 영조 정조 시기 자헌대부, 형조판서, 의금부춘추관, 홍문관제학, 예문관 제학,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낸 금성(錦城) 정범조(丁範祖, 1723 경종3~1801 순조1) 선생이 죽정을 기려서 역은(讚) 책입니다.
서문에 성상(聖上) 19년에 찬(讚)했다고 하고, 정범조 선생이 형조판서 의금부춘추관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의 직위를 적어 넣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정조19년인 1795년에 발간되지 않았나 짐작됩니다.
내용은 서문(序文), 세계도(世系圖), 연보(年譜), 일고(逸稿), 언행록(言行錄), 묘갈명(墓碣銘), 행장(行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연보에는 출생부터 정암 조광조에게 나아가 제자가 되고, 회재 이언적 선생과의 빈번한 교유, 퇴계 이황이 찾아왔던 일, 화담 서경덕과의 일화 등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죽정 할아버지는 연산군 3년, 즉 1497년 6월 26일 인동현에서 출생했습니다. 18세 때 한양으로 정암에게 학문을 배우러 나아갔는데 마침 백인걸과 만나 이때부터 서로 공경하며 도의로써 교류하며 학업이 날로 나아갔다고 합니다.
19세 때 모친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내려왔고, 23세 때 남곤 심정 등의 무고로 능주로 유배를 간 스승 정암 선생을 따라 가서 그가 사약을 받고 절명할 때까지 홀로 곁을 지켰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정암이 능주 유배시 제자들 10명 중 8-9명은 해를 두려워하여 배신을 했는데 오직 죽정 선생과 휴암 백인걸(1497~1579), 청송 성수침(1493~1563)만이 능주로 찾아가 뵈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일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하는데 1519년(중종 14) 11월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사류가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 재상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죠.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가서 곧 사사되고, 김정, 기준(奇遵), 한충(韓忠),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 또는 자결하였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김구(金絿), 박세희(朴世熹), 박훈(朴薰), 홍언필(洪彦弼), 이자(李耔), 유인숙(柳仁淑) 등 수십 명이 귀양가고, 이들을 두둔한 안당과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형제 등도 파직되는 등 살벌한 정국이었다고 힙니다.
죽정이 28세 되던 유월에 회재 선생이 인동현으로 죽정 선생을 찾아왔었나 봅니다. 36세 되던 가을에는 안강의 독락당으로 회재 선생을 찾아 뵈었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퇴계 이황 선생이 왜구 포로를 호송하는 길에 죽정을 찾아뵈었네요. 아마도 당시 부산 등 남쪽에 왜구들이 횡행했고 왜적 중 생포된 자를 한양으로 압송하는 일도 있었나 봅니다.
화담 서경덕 선생과 만난 내용도 보이고, 죽정 선생이 칭병 낙향한 대목은 윤원형, 윤임 등 난신들이 득세한 조정의 혼란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 증진에 몰두하신 심경을 높은 벼슬을 구름, 자신을 산으로 비유해서 "구름과 산 사이의 거리가 천리나 된다"라고 읊었습니다.
"운산천리격(雲山千里隔)"
......"
독락당 위쪽에는 정혜사라는 사찰이 있었다는데 1834년 화재로 사라지고 없고 그 터에 십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정혜사는 신라 선덕왕 원년인 780에 중국 당나라 사람이 이곳으로 망명 와서 짓고 살던 집을 후에 절로 고친 것이었다고 합니다.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국보 40호로 지정된 문화유산이자 신라 석탑으로서는 유일한 13층탑이라는 아름다운 탑을 보는 즐거움도 덤으로 얻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