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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묵상글 들 ( 연중 제15주일-말씀 수용의 단계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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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연중 제15주일-말씀 수용의 단계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오늘 제1독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음을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헛되이 돌아가는 일이 없고
뜻하는 바를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은 아무리 하느님께서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 밭이 어떠냐에 따라 아무 결실이 없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말씀에 모순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순矛盾이란 창이란 뜻의 모와 방패라는 뜻의 순이 합쳐진 말로서
장사꾼이 창과 방패를 팔면서 자기가 파는 창은 모든 것을 뚫는다고 하고,
동시에 자기의 방패는 모든 것을 막는다고 한 데서 유래된 거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이렇게 모순된 하느님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모순될 리가 없겠지요.
이런 믿음으로 두 말씀을 묵상해보니 제게는 이런 뜻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물론 하느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그래서 말씀대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서 생기라는 말씀대로
다 생겨났고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보시고 좋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뜻에서 하느님 말씀대로 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고,
우리 인간도 다 그렇게 되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태어나고 난 뒤에는 얘기가 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것을 주셔서
당신 말씀을 받아들일 건지 거부할 건지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비유에서 이 땅 저 땅 가리지 않고 씨를 뿌리셨지만
어떤 땅이냐에 따라 결실을 달리 맺는다는 것의 뜻입니다.
하느님은 폭군이나 조폭 두목처럼 말을 안 들으면 절단 내는 분이 아니시고,
당신이 사랑으로 하신 말씀을 우리 인간이 사랑으로 받아들이길 바라시고
그래서 선택의 자유도 주시고 시간을 갖고 선택할 수 있는 여유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길바닥과 같을 때는 하느님께서 벽에 대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치 않아 그 말씀에 전혀 관심이 없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수없이 그리고 간절히 말씀하셔도 와닿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깨닫지 못해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깨닫지 못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사랑치 않아서입니다.
이보다 나아진 단계로서 우리가 돌밭과 같을 때도 있습니다.
돌밭이란 돌과 흙이 같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흙이 있기에 일단
씨를 받아들이지만 돌들로 인해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오늘 비유 풀이에서 말씀을 처음에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말씀 때문에 환난이 닥치면 걸려 넘어지는 단계라고 하는데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주님 말씀은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은 싫어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하는 말씀만 들으려는 단계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세 번째 단계는 씨가 뿌리는 잘 내렸는데 가시덤불에 덮인 단계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그래서 열매를 변변히 맺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한동안 많은 교회가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합니까?'라는 글귀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걸었던 것처럼 믿음이 부족하여
하느님 말씀을 듣고도 걱정에 싸이거나 유혹에 흔들리는 단계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하느님 말씀의 열매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느님 말씀 때문에 인생이 바뀌고 행복하며, 생기와 활기가 넘치고,
그래서 남도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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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고도미니코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2020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일
오늘 우리가 듣는 마태오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비유들로 이루어진 설교 말씀으로 이루어진 마태오 복음 13장에 들어 있는 내용 중의 한 부분입니다. 이 말씀은 농부,어부,상인들이 일상생활에서 만나고 겪게 되는 소박한 소재들로 이루어진 비유들로서 하늘나라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하늘나라는 씨 뿌리는 사람이 넉넉하게 뿌리는 씨와 비슷하지만,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육십 배,삼십 배 열매를 맺는 것, 조그만 씨앗이 큰 나무로 자라나는 것이고,좋은 곡식과 잡초가 어울려 자라면서도 때가 될 때까지는 잡초를 뽑아내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누룩과도 같아서 반죽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안에서 부풀어 올라 빵이 되게 하고,귀한 진주와도 어떤 값으로든 그것을 사는 것이며,좋은 것들을 모두 담는 그물과도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는 나라가 바로 하늘나라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구조적으로 복음서의 중심부에 위치한 이 비유들은,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11-12장에 대하여 다양 한 설명을 제공하는 구실을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해석(13,1-23)은 하늘 나라의 선포와 그 다양한 결과를 설명합니다.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 문이다”(13,13)는 구절은 “저 바깥 사람들이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르 4,11-12)는 마르코 복음의 역설적인 말씀을 쉽게 풀이한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는 어떠한 시련과 갈등에도 아랑곳없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사람들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잡을 것이라고 믿으신 예수님의 신념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란 본래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내기 위해 사용하는 법인데,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를 가리키는 히브리어(아크티프)와 아람어(마틀라)가 본래 ‘수수께끼’를 뜻하는 것임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됩니다. 수수께끼는 그것을 애써 풀려는 노력이 없으면 그 답을 얻어낼 수 없습니다. 스무고개의 경우 처음 몇 고개는 힌트만 줄 뿐입니다. 본인이 끈질지게 물고 늘어지지 않으면 해답에까지 이를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선문답의 화두처럼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듣다 보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설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올바로 실천해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전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이미 받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열매를 맺는 충실한 신앙에 강조점이 주어집니다. 비유에서처럼 신앙은 들음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구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일회적 결단이 아니라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열매를 맺는 항구함과 인내를 요구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이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며 하늘나라를 지금 현세에서 사는 것입니다.
고 도미니코 o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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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키엣대주교님. 복음의 전파(연중 제15주일)
사랑의 하느님, 사랑은 말로 드러나야 합니다.
천지창조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은 여러 방법으로 끊임없이 인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주를 창조하셨고 허무하게 사라질 인간을 영원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느님 외에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사랑, 바로 창조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을 보살펴 주십니다. 바위에서 물을 찾게 하고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보살핌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심으로써 인류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말씀의 씨를 뿌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땅의 온갖 고난을 감내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냉담하고 무심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고, 주님의 은총은 물에 젖지 않는 감자 잎처럼 스며들지 않았습니다. 돌덩이처럼 굳은 수많은 영혼들에 의해 점점 시들어 갔습니다. 거친 가시덤불처럼 욕망으로 가득 찬 영혼들로 주님의 씨앗은 열매도 맺지 못하고 질식되어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끊임없이 씨를 뿌리셨습니다. 주님 당신 스스로 한 알의 씨앗이 되어 황폐한 땅에 묻히셨고 거름이 되셨습니다. 황폐한 땅을 풍부한 수확의 기름진 땅으로 만들기 위해 당신을 헌신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의 뒤를 이어 각처에서 쉼 없이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를 뿌릴 때는 아끼지 말고, 어떠한 계산도 없이, 가리지 말고 모든 곳에 씨를 뿌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입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한 삶과 새생명을 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한 명도 빠뜨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라는 생명의 양식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은 기름진 땅뿐아니라 모든 땅에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정적인 사랑만이 잡초와 잡석을 변화시켜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2000년 주님께서는 베트남의 최북단 가장 어려운 교구인 랑선(Lang Son)이라는 황폐한 밭에 저를 보내셨습니다. 그 곳은 중국접경지역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울 뿐아니라 신앙적으로도 베트남에서 가장 많은 박해를 받았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제가 태어난 곳입니다. 비록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떠난 곳이지만 그분들은 저를 가족처럼 맞아주었습니다. 주교였지만 직접 종을 치고 교회문을 열고 청소를 하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더욱 잘 전하기 위해 말씀의 나눔, 이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자녀라면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 아끼지 말고 듬뿍, 쉬지 말고 꾸준히 희망과 사랑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뿌리는 대로 거둬 들일 것입니다. 자비를 뿌리면 사랑을 거둘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한 주님의 자녀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에도 주님의 사랑이 충만한 계절이 다가올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지치지 않고 말씀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하느님께서는 쉼 없이 복음의 씨를 뿌리니다. 그 씨앗을 받아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2. 하느님께 받은 사랑의 말씀을 다시 나누고 있습니까?
3. 쉼없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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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새벽을 열며. 연중 제15주일. 빠다킹신부님.
어느 학생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가 대화를 나눴으면 해서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도무지 의욕 없이 살아가는 아이의 변화를 위해 대화를 나눠 달라는 것이었지요. 학생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어렸을 때는 뭘 하고 싶었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가 되고 싶었죠.”라고 말합니다. 곧바로 “그렇다면 의사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보았니?”라고 질문을 하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의사가 되기 위한 노력을 이제까지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학생만 그럴까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되고 싶은 모습은 있지만 이를 위한 노력이 없습니다. 잘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를 원하지만 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사랑 주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고 싶은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아닐까요? 막연하게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그 나라에 가기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 말씀을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어떤 농부도 돌밭이나 가시덤불 속에 씨를 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곳에 씨를 뿌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면 농부는 씨를 뿌리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해서 뿌린 것이라면, 농부의 잘못이 아니라 씨를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잘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룰 가능성, 그래서 커다란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기에 이 땅에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이가 불가능한 이유만을 찾으면서, 자신의 모습이 변경 불가능한 돌밭이고 가시덤불의 모습처럼 생각합니다. 씨를 뿌리신 주님의 잘못이 아니라, 변하지 못한 우리의 영혼이 잘못입니다.
따라서 막연히 ‘어떻게 살고 싶다’라는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떠올리면서 적극적으로 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의 뜻에 맞춰서 이 세상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굳은 사람은 거룩한 씨앗을 받아들이지 않고, 더러운 영들을 위해 잘 다져진 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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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창문을 통해 이동하며 서로를 환기해주듯 삶의 가장 존귀한 것이 나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내가 남기는 유산이길 바란다(마크 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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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사람
예전에 아는 지인들과 함께 동남아에 있는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나라이고, 이제야 겨우 경제적인 성장을 조금씩 이루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래서인지 계속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이드분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와주면 계속해서 사람들이 다가오니까 처음부터 그냥 무시하세요.”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가이드의 말을 따라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자매님이 지갑을 열어 1달러를 건네주는 것입니다. 이분의 남편이 “가이드가 무시하고 그냥 지나가라고 했잖아.”라고 핀잔을 주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 돼 보이는 얼굴이 계속 밟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도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데도 돕지 않으니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함께 있던 사람 모두가 불편했나 봅니다. 그래서 다음에 도움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서로 나서서 조금의 도움이라도 주려고 합니다.
불행한 사람은 돈이 없고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슴에 따뜻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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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한상우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 13, 3)
주님께서
뿌린 말씀의
씨앗입니다.
주님의
씨앗입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시며
말씀으로 우리를
만들어갑니다.
끝까지
말씀으로
살길 원하십니다.
씨앗에서
열매까지
말씀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말씀으로
만나게되는
주님이십니다.
씨앗도 열매도
말씀이 만들어가는
말씀의 시간입니다.
마음만 있고
말씀이 없으면
삶은 결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음안에
있어야 할
말씀입니다.
마음은 말씀과
함께 가야합니다.
말씀은
씨앗과 열매를
닮았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말씀을 줄 수
있는 삶이
되게하소서.
말씀으로
낮아지고
말씀으로
고개숙이는
씨앗과
열매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살게합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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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이영근 신부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연중 15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이 왜 있는지’를 밝혀줍니다. 곧 말씀은 이룰 수 있는 권능을 지니고 다가와 우리에게서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말씀의 권능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리는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제2독서>에서는 모든 피조물이 ‘말씀의 실현’을 기다립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복음>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9)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사실,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내가 좋은 땅인가 아닌가를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실 씨앗이 떨어질 때 좋은 땅 이었는가 아니었는가 보다도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씨앗이 뿌려진 땅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곧 말씀으로 나 자신의 밭과 세상의 밭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의 사람은 땅을 지배하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밭에서 일할 줄 알며 하늘을 쳐다보고,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품은 농심입니다. 곧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 그 씨앗이 뿌려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여쭈었습니다.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만약, 이 말씀대로라면 하느님께서 저들에게는 하늘나라를 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그런데, 먼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늘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그 신비가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허락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 은혜를 거역한 까닭일 것입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똑같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이 하늘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분명, 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들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보여주는 것을 보았고, 들려주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음은 그들의 눈과 귀와 마음이 어둠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당신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둠이 초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도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5;이사 6,10)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지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 주어가 “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눈을 감고서 빛이신 진리 보기를 거부하고, 알아들으려 하지 않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깨닫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 이처럼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행복이 선언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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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연중 제15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텃밭에 상추 모종을 심었습니다. 처음에는 물을 주어도 잘 자라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추들이 빠른 속도로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삼겹살을 먹었어도, 여전히 텃밭에는 상추가 한 가득입니다. 옆에 있는 본당 사제관에도 나누어 드렸습니다. 방울토마토도, 고추도, 오이도 쑥쑥 자라는 걸 보니 참 신기합니다. 열배, 스무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물을 준 보람도 느낍니다. 텃밭의 야채가 그렇다면 사람을 만나고, 인재로 키우는 기쁨은 더 할 것입니다.
옛 어른들은 좋은 재목을 만나서 큰 사람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의 기쁨이라고 하였습니다. 교구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입니다. 중3 학생들을 면담하고 예비 신학생 기숙사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아이들이 묵주기도를 함께하고, 아침기도와 미사를 함께하는 걸 보았습니다. 저녁에는 양심성찰을 하고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3년 동안 키도 커지고, 마음도 성숙해진 아이들이 신학교에 입학하는 걸 보는 것은 제게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신부님들과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니 다리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팠습니다. 부르클린 다리 밑에서 햄버거를 먹고 강 건너 맨해튼을 보았습니다. 뉴욕은 자전거 도로가 잘 되어 있어서 좋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메고 갔던 가방을 놓고 온 걸 알았습니다. 다시 가보았지만 가방은 어디론가 가고 없었습니다. 이어폰, 보조 배터리, 차키, 안경이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신부님들은 핸드폰과 지갑은 있으니 다행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키는 여분이 하나 더 있어서 큰 문제가 없었고, 이어폰은 함께 가신 신부님이 새로 구해 주신다고 하니 더 잘 되었습니다. 안경은 한국에서 여유로 하나 더 가져왔으니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보조 배터리야 새로 구하면 됩니다. 20년 만에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했는데 아무 사고 없이 잘 다녀온 것만도 감사 할 일입니다. 엉덩이가 아팠는데 가방을 잃어버렸더니 엉덩이 아픈 것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고통은 위안이 되기도 합니다. 한걸음 더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기도 합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도 삶의 방법입니다.
코로나19로 3달 동안 공동체 미사가 없었습니다. 사회적인 거리두기를 하면서 공동체 미사를 재개하는 교구가 있습니다. 제가 속한 부르클린 교구도 공동체 미사가 재개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어떤 분에게는 길가에 떨어진 씨일지 모르겠습니다. 의무적으로 나왔던 성당을 안 나오게 되고, 신앙의 싹이 시들어갈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돌밭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방송미사를 참석했지만 그것도 점점 귀찮아져서 그만두었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방송미사도 참례하고, 가족들이 기도했지만 날씨가 좋아지면서 깜빡 잊어버렸는지 모릅니다. 락다운(Lockdown)이 조금씩 해제 되면서 다른 것들에 마음이 갔는지 모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코로나19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일지 모릅니다. 집에 머물면서 성경책을 통독하기도 합니다. 미사 강론을 요약해서 이웃들에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 힘든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나눠주기도 합니다. 성당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가서 성체조배를 하기도 합니다. 박해시대에 사제 없이 공소예절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것이 순교의 길이 될 수 있을지라도 성체를 모시던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을 배우고자 합니다. 이제 공동체의 미사가 재개되고 우리는 예전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나의 모습이 좋은 땅에 떨어진 씨였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이 더 풍성해지고,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하느님을 더 깊이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내리고,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부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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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구원의 삶
-희망하라, 항구하라, 겸손하라-
참 열심한 분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납니다. 새로운 힘을 얻는 기분입니다. 어제의 예수성심형제회 모임이 그렇습니다. 그러고보니 어제 2020.7.11.일 성 베네딕도 아빠스 대축일은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제가 요셉 수도원에 부임한지 만32주년(1988.7.11.)이 되는 날이자 사제서품 만31주년(1989.7.11)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 대축일 미사때는 정아브라함 수사의 유기서원 갱신 예식이 있었습니다. 어제 모임을 가진 7명의 형제자매들도 참 성실한 분들이었습니다.
“꼭 예수님 제자들이 앉아 있는 모습같습니다.”
미사는 물론 강의에 앞서 배치된 책상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고 나눈 덕담입니다. 시종일관 진지한 참여 자세는 얼마나 든든했는지요. 책임을 맡은 형제의 아침 카톡 메시지도 잊지 못합니다.
“신부님, 베네딕도 성인 축일 축하드립니다. 어제 저녁에 본당 주임신부께서 연령회장하라고 임명하셨습니다. 아침에 매일미사 읽다가 베네딕도 성인 축일 전야에 임명받았으니 큰 축복을 주셨나보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로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주변에서 뜻밖의 변고나 죽음을 대하며 깨닫는 바이기도 합니다. 한 치도 내다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해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후 알뜰히 모임을 끝내고 떠날 때는 함께 수도원 정원에서 사진도 찍었는데 참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들에 덕담 메시지와 더불어 사진도 전송했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예수성심의 성덕으로 아름답게 빛납니다! 주님 안에서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런 믿는 형제들의 모임은 말그대로 광야 세상에 구원의 오아시스입니다. 참으로 요즘 저절로 자주 바치는 행복기도문중 일부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이요 구원의 하루입니다. 구원도, 행복도 오늘 지금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갈 때 깊고 아름다운 한 폭의 인생 그림이 완성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구원의 삶일까요? 오늘 말씀을 중심으로 알려 드립니다.
첫째, “희망하라”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을, 꿈을, 비전을 잃을 때 인간성도 황폐화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품위 유지에도 결정적인 희망입니다. 참으로 영혼의 건강에 필수인 희망입니다. 광야인생에 피어난 희망의 꽃이요, 광야의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있기에 항구한 인내의 믿음이, 사랑이 가능합니다.
궁극의 희망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궁극의 희망입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둔 자는 결코 무너지지도 타락하지도 않습니다. 자포자기의 절망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정말 절망이 대죄입니다. 미래의 희망이 없다는 자에게 저는 “하느님이 미래요 희망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런 희망을 고백합니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가 나타나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뿐 아니라 피조물들도 구원의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있다는 놀라운 고백입니다. 바로 이런 희망이 있어 구원을 앞당겨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보세요.
바로 예수님의 모습을, 참으로 믿는 이들의 항구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절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고 항구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었기에 가능합니다. 하느님은 물론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그러니 절망의 자살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정말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잘 살다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항구하라”입니다.
제 삶의 자리에 한결같은 항구함이 구원입니다. 우리 분도 수도자의 정주도 항구한 인내를 뜻합니다. 제가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평생 가장 많이 바라본 , 또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한 대상이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항구한 인내의 정주의 모범이 불암산입니다.
결코 배경의 하늘 환경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은 불암산입니다. 하늘 배경이 흐리던 맑던, 어둡던 밝던 언제나 한결같이 크고 깊고 고요한 불암산입니다. 참으로 항구한 사람들은 경거망동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습니다. 바로 씨뿌리는 사람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이 그러했고 그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한결같이, 기쁘게, 자발적으로 순교적 삶에 항구했고 충실했습니다.
길가에 떨어졌다하여 돌밭에 떨어졌다하여 가시덤불에 떨어 졌다하여 좌절하지 않고, 어떤 환경이든 환경에 일희일비 좌우되지 않고 항구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끝까지 살아있는 그날까지 씨뿌리는 삶에 항구했습니다. 희망과 함께 가는 항구함임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 삶은 과정입니다. 길고 넓고 깊게 삶을 조망하다 보면 객관적 시야도, 하느님의 시야도 지니는 법입니다.
어찌 보면 삶은 리듬입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희망과 절망, 관상과 활동, 쉼과 휴식이 리듬처럼 펼쳐집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러니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삶의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좁게 보면 실패인생 같아도 지금 어디선가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들은 잘 자라 열매를 맺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마태13,8)
저 역시 사제서품후 만 31년 동안,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고 씨뿌리는 마음으로 과정에 충실하여 항구히 날마다 하루하루 강론을 써서 나누었고 매일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간절한 단 하나의 소원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잘 쓰든 못 쓰든 강론을 쓰고 미사를 봉헌하며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항구한 인내의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겸손하라”입니다.
오늘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전반부의 중심은 씨뿌리는 사람에 있다면 후반부 초대교회의 비유의 해설은 씨가 뿌려지는 땅이 중심입니다. 말씀의 씨가 아무리 좋아도 밭이 문제입니다. 하느님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내 마음밭 관리에 소홀하고 태만했기 때문입니다. 추호도 하느님 말씀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줍니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이렇듯 좋은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신고배도 끊임없이 잘 가꾸고 돌보지 않으면 돌배가 됩니다. 물도 주어야 하고 거름도 주어야 하고 농약도 주어야 좋은 땅에 좋은 나무입니다. 그냥 방치하면 신고 배나무는 돌배나무가 되고 땅은 잡초雜草 우거진 박토가 되고, 잡목雜木 우거진 야산이 됩니다.
이래서 한결같은 수행의 노력입니다. 수행에 게을러지면 온갖 잡초들 우거진 밭처럼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됩니다. 길바닥이 돌밭도 가시덤불밭도 될 수 있고 하느님 말씀의 씨앗은 자라지 못합니다. 영적성장도 성숙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래서 마음의 귀를 활짝 열어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의 ‘경청(傾聽, 敬聽)’과 실천입니다. 이점에서 저는 늘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여전히 부족한 경청이요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래야 겸손한 마음의 좋은 땅입니다.
인간homo과 겸손humitas의 어원은 흙humus에서 기인합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겸손의 수행으로 좋은 땅의 마음밭을 만드는 것이 모든 수행이 목표하는 바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참으로 겸손의 수행에 항구할 때 하느님의 은총으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같은 마음밭도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모합니다.
사실 변모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냥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겸손한 자세로 과정에 항구할 때 주님은 분명 풍성한 결실을 주실 것입니다. 바로 다음 복음의 결론이 주님 말씀의 경청과 겸손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지금도 정치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마디입니다. 농부는 한 겨울에도 봄을 준비하고 봄날에 씨뿌리는 것을 잊지 않고 한 여름 폭염속에도 가을걷이를 준비합니다. 날씨도 탓하지 않으며 하루하루 오늘에 충실하며 내일을 준비합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도 환경도 아닌 내탓입니다. 참으로 씨뿌리는 삶에 항구한 이들은 절망, 실망, 원망의 삼망이 없고 늘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삶은 단순명쾌합니다.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하루하루 한결같은 노력으로 겸손히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 우리 마음밭에 뿌려 주시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13,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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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 15주일
제1독서(이사 55,10-11)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초대합니다.
좋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즐기라고 하느님께서 초대해도 응답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하느님께서 멀리 계시다고 탓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이사 55,1-9) 제2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비처럼 마른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을 돋아나게 하는 고마운 빗방울처럼 자비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기”(이사 40,8) 때문에 우리를 풍요롭게 하고, 새로 태어나게 하고, 기쁨의 삶을 이어가게 합니다. 이렇게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비로 비유하면서 비가 땅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게 하듯이, 한 번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말씀의 내용이 실현된다고 합니다. 땅이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거부할 수 없듯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는 데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느냐고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제발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헛되이 떠도는 메아리가 되지 않고, 우리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우리 마음의 밭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싹틔워(말씀대로 살아)보라고 합니다. 화답송(시편 65장)도 하느님을 하늘에서 내리는 비로 묘사하고, 인간을 땅으로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농사꾼으로, 우리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는 초목으로 표현합니다. 비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부드럽게 하시며”, “풍요롭게 하시고”, “영글게 하시고”, “복을 내리시는데”, 이 모든 것을 그분께서 “장만해주신다”고 합니다.
복음(마태 13,1-9)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가지 마음(공동체)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찾아왔지만 밖에 서 있었던 어머니와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50)라고 하신 뒤에,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경청하는 사람들과 가르치시는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무슨 씨를 언제 뿌리는지, 기후가 어떤지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소개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3ㄴ-9절)와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10-17절), 그리고 비유의 핵심인 “설명”(18-23절)으로 이어지는 긴 이야기는 하늘나라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정성과 지향에 대한 설명도 없이 씨앗을 뿌렸는데, 그 씨들이 떨어진 네 가지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농부라면 씨가 아무데나 뿌려지게 하지 않으며, 새들이 쪼아 먹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농사기법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이해한 사람들의 체험에 대한 말씀입니다.
비유는 씨가 떨어진 네 가지 상황을 우리의 마음(공동체)에 비유하면서 단순하게 씨가 뿌려졌다는 것에 집중하게 합니다.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이고, 뿌려질 땅은 사람의 마음입니다(마태 13,19). 마음은 나름대로 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들여 신앙의 신비를 포착하고 파헤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4절)은 그야말로 싹을 틔우기도 전에 새들이 와서 쪼아 먹어 버리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제아무리 많이 들어도 마음에 담아두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지 못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지도 못하는 이들을 말합니다(마태 13,14-15).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은총과 진리를 이 땅에 보내주셨건만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요한 1,11.17).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앗(5절)은 싹은 틔웠지만 뿌리를 제대로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뜨거운 햇볕(시련)을 견뎌내지 못하고 즉시 말라버리듯이 신앙이 없는 사람은 돌 같은 마음이라서 비록 하느님의 말씀이 자기 마음에 와 닿았지만 그 말씀을 사는 것보다 다른 일들이 더 중요하고, 핑계가 많고, 게을러서 신앙이 성숙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이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쉽게 휘둘리기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즉시 걸려 넘어지기 때문에 사랑이 쉽게 식어갈 것입니다(마태 13,21; 24,12).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앗(7절)은 싹은 제대로 틔웠고 뿌리를 내렸지만 울창하게 자란 가시덤불이 숨통을 막아버려 햇빛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랄 수 없듯이, 세상 걱정과 재물에 의한 유혹(마태 13,22) 때문에 말씀이 풍요로워지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신앙이 뿌리는 내렸지만 함께 해주려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아니 도와주려는 이들을 거부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신앙생활을 못하는 이들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의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한 번 하느님의 말씀을 싹틔운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한 노력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8절)은 싹이 잘 터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꾸준히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되새기고, 잘 깨달은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을 말합니다(마태 13,23). 좋은 땅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열린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을 되새기는 사람이며(시편 1,2), 하늘나라의 신비를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만 깨달을 수 있음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마태 7,21) 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때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제2독서(로마 8,18-23)는 말씀의 씨앗을 싹 틔우면서 느끼는 아픔을 이겨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로마 8,17)고 강조한 뒤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고통은 미래에 닥칠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겨내라고 합니다. 지금 겪는 고통 때문에 우리 자신을 마치 땅에 버려진 씨앗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의 자유를 얻도록 해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로봇처럼 조종하신다는 예정론적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수확할 수 있는 열매를 미리 마련해놓으시고 우리를 이 세상에 하나의 씨앗처럼 뿌려주신 것이며, 동시에 땅을 기름지게 할 빗방울까지 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광의 자유라는 열매를 따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땅에서 말씀의 씨앗을 싹틔워야 하는 아픔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싹을 틔우는 것은 우리 몫이지 하느님께서 싹을 틔워주시는 일까지 손수해주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기 위해 이 세상에서 싹을 틔우는 일이 힘겹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희망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탄식과 진통을 마치 고통의 바다에서 멸망의 종살이를 하도록 하느님께서 내치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한 몸부림이며, 세례성사의 선물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인내를 가지고 이겨내야만 하는 과정(종말론적)입니다. 그래서 장차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에 견준다면 지금 겪고 있는 고통과 탄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으려면 모진 풍파를 이겨내야 하듯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겼다.”(요한 16,22)고 할 수 있으려면 세상을 이겨내야 합니다.
인간(땅)은 하느님의 자비(비)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말씀)를 싹틔워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딱딱한 길과 사막과 언덕뿐인 황량한 곳(회색)에 비가 뿌려지면, 기름진 땅이 되기 때문에 풀밭(초록)으로 바뀌어 윤기가 흐르고, 아무것도 자랄 수 없었던 언덕들도 기쁨의 띠를 두릅니다. 비로 인해 풀이 많아진 목장들은 양 떼로 뒤덮이고(흰색), 끝내는 골짜기에 곡식이 가득 쌓여(황금색), 환성을 올리며 노래한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이들을 비유하는 것입니다(화답송).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하느님의 말씀이 파고 들어가 싹을 틔우고,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할 내 마음의 밭은 어떤 상황입니까? 땅이 비를 거부할 수 없듯이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마음속에서 말씀에 대해 아무런 반응이 없다면 분명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어 풍요롭게 해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 한다면, 비록 자주는 아닐지라도 가끔, 말씀에서 느껴지는 기쁨과 행복조차도 맛 볼 수 없다면, 그리스도라는 말씀의 씨앗이 떨어지는 내 마음이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도 못하며, 눈을 감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마태 13,13-17).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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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연중 제1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마태 13,3-4).”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마태 13,19).”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길’에 씨를 뿌리는 것은 아닙니다.
실수로 길에 뿌리는 것도 아닙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백지 상태와 같은 ‘땅’에 씨를 뿌리는데,
어떤 땅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땅은 ‘길’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됩니다.
(그 당시의 농사법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뜻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또 ‘모든 사람’을 위해서 선포됩니다.
누가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모두가 다 처음에는 백지 상태와 같습니다.
본인들이 얼마나 노력하는가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좋은 땅’이 되고, 어떤 사람은 ‘길, 돌밭, 가시덤불’이 됩니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면’이라는 말은, “믿지 않으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을 듣고서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닙니다.
‘악한 자’, 즉 사탄이 와서 빼앗아 간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버리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자기가 들은 ‘말씀’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배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안 믿으려고 하고,
자기가 정한 어떤 기준으로 복음을 판단하려고 하고......
믿음이란,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간에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된다고 해서, 또 믿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자기가 들은 복음을 사탄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마태 13,5-6).”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마태 13,20-21).”
뿌리가 없다는 것은,
의지가 부족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하고,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경우,
또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 마음도 없고, 자신을 버리려는 노력을 할 마음도 없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라는 말은,
처음에는, 또는 편안한 시기에는 ‘돌밭’과 ‘좋은 땅’에 차이가 없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아무 어려움이 없는 시기에는 누구나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있는지, 없는지가 금방 드러납니다.
“선천적으로 의지가 부족하고 인내와 끈기가 없는 경우라면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의지, 인내, 끈기가 선천적인 문제인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든 신앙생활에서는 의지, 인내, 끈기는 ‘믿음’과 관련된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믿음을 지키려는 의지도 부족해지는 법입니다.
그리고 인내와 끈기도 부족해집니다.
(순교자들은 ‘남들보다 더 믿음이 강한 분’들입니다.
그 강한 믿음에서 ‘남들보다 더 강한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강하게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처럼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비결은 없습니다.
“나는 원래 의지가 약한 사람이다.” 같은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마태 13,22).”
‘가시덤불’은 현세에서 먹고사는 일을 ‘영혼 구원’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현세의 삶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빌기만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린다는 말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점점 커져서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할 겨를이 없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신앙생활의 목표라는 것을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먹고사는 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먹고사는 일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은가?”)
다음 말씀들을 이 질문의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빵도 필요하지만, 말씀이 더 필요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영원한 것은 잊어버리고 허무한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면,
그것이 허무하게 사라질 때 그것과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2테살 3,10).”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2).”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노동은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의 숨’이 막힐 정도로 물질에 집착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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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이사야 55,10-11
로마 8,18-23
마태오 13,1-23
마음이 정해지면 머리와 몸은 봉사한다
살다 보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떠한 것을 판단해놓고 그 판단이 옳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이런 경우를 오늘 복음에서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은”
마음이 무딘 사람입니다.
이들 마음 안에 아무리 진리의 씨를 뿌려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면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하는데, 우리 안에 증거 자체 조작 기능이 내재하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자신의 주장을 확증해줄 근거를 찾는데 그 근거는 사실 그들 주장을 조작해 줄 도구밖에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증거가 믿음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어야 보이는 것이지, 보인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2004년 5월 미국 FBI 요원들이 들이닥쳐 변호사이자 미군 전직 장교였던 ‘브랜던 메이필드’를 마드리드 폭탄테러 용의자로 체포하였습니다.
그해 3월 11일 192명이 사망하고 2천 명이 다친 끔찍한 마드리드 공격에 연루되었다는 혐의였습니다.
그는 미국인이지만 이슬람으로 전향했고 이집트 여성과 결혼한 상태였기 때문에 FBI에 계속 감시를 당하던 중이었습니다.
FBI는 마드리드 현장에서 폭발물이 담긴 파란색 쇼핑백을 발견하였는데 거기서 메이필드의 지문이 나온 것입니다.
FBI는 그 지문이 100% 일치한다고 주장을 했고 그것이 틀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지문이 미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8700㎞ 떨어진 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바로 그날 아침, 스페인 경찰청이 폭탄 공격과 관련 있는 인물로 알제리 남성
‘우나네 다우드’를 체포하였습니다.
메이필드보다 그의 지문이 FBI가 무시했던 애매한 영역을 포함한 검지 지문에 더 잘 맞을 뿐 아니라 그의 엄지 지문도 쇼핑백에서 발견된 지문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메이필드는 다음 날 풀려났고 FBI는 굴욕적인 사과를 공개적으로 해야 했습니다.
물론 200만 달러의 피해보상금을 지급해야 했습니다.
당시 미국은 2001년 911테러로 공포에 휩싸여 있어 아랍인들에게 대한 편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문가들의 판단을 맹신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미국 최고 지문 감식반의 판단이 틀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참조: ‘지능의 함정’, 데이브드 롭슨, 유튜브 채널 ‘책한민국’]
사람들은 증거가 믿음을 만든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사실 믿음이 증거를 조작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요구하는 세대를 비판하신 것입니다.
눈과 귀를 막아놓고 보고 듣겠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들도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어버리면 눈이 감기고 귀가 막혀 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고 뻔히 보이는 것도 보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경우는 세상 사람들이 똑똑하다고 인정해주는 전문가들에게 더욱 자주 일어납니다.
1920년대에 미국 심리학회 회장이었던 ‘루이스 터먼’이라는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도 자신의 편견을 배열하며 과학이라 믿었습니다.
그는 IQ가 삶과 직결되고 IQ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 학급에서 IQ가 140 이상인 아이들을 골라내어 그 아이들의 인생을 수십 년 동안 수집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차이가 없었습니다.
IQ가 높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아주 조금 좋은 성과를 내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 이유는 그 실험을 하며 터먼이 그들에게 특별한 지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가 좋은 아이들에게만 특별한 지원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집 식구들의 IQ를 재서 지능이 높은 순서대로 식탁에 앉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데이브드 롭슨의 ‘지능의 함정’이란 책에서는 이런 사례가 아인슈타인, 에디슨, 스티브 잡스 등
모든 고집불통인 뛰어난 천재들에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고집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고집은 한마디로 하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믿는 마음이 교만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힘으로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가 있습니다.
그 자아를 믿으면 진리에서 멀어집니다.
그 자아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약해집니다.
뱀이 하와를 그렇게 만들어 하느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귀를 막는 것이 내 자신임을 알지 못하면 이 교만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가 길바닥에 씨가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먹는 까마귀가 창세기의 뱀이요, 탈출기의 파라오요, 우리가 버려야 하는 자아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자아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길이 되지 않으려면 겸손하면 되고,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절제하면 되며, 가시밭이 되지 않으려면 청빈하면 됩니다.
겸손과 절제와 청빈을 ‘복음삼덕’이라고 합니다.
복음삼덕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는 무기입니다.
나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교만과 육체적인 욕구와 재물에 대한 탐욕만 줄여가면 자아가 죽고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립니다.
그러면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가 뿌리는 말씀의 씨는 비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비유로 우리 마음에 떨어집니다.
그렇지만 교만과 육욕과 탐욕은 그 비유를 이해할 수 없게 우리 감각을 마비시킵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을 멈춥시다.
그러면 교만이 줄어들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절제합시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봅시다.
그러면 눈이 열려 비유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인터넷의 어두운 소굴로 과감히 발을 들여놓으면 케리(Kery)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세상의 질서를 바꿀 해안을 가졌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그는 캘리포니아 나바로 강 근처에서 몸에서 빛이 나는 너구리같이 생긴 물체를 만나 외계인에 납치되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점성술을 절대적으로 믿고 에이즈 바이러스나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는 믿음은
다 가짜라고 주장합니다.
케리가 정신이상자처럼 보입니까?
케리 멀리스는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입니다.
다만 자신 안에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를 믿으면 바보가 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너무 비참합니다.
진리와 반대되는 자아의 주장이 자신 안에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것을 모른 상태로 하는 과학적 연구는 모두 자체 증거 조작 기능에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멀고 귀먹은 마음이 무딘 백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결정하면 머리는 따라줄 뿐입니다.
또 눈과 귀는 머리가 찾는 것만을 보고 듣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완고해진 마음은 외부의 것들로 바꿀 수 없게 됩니다.
완고한 마음을 버리려면 내가 아닌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를 믿어서는 안 됩니다.
내 안에 뿌려지는 말씀이 진리이고 나는 그 진리를 열매 맺게 하는 좋은 밭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 때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릴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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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마태오 13,1-23 <또는 13,1-9>
초보 농사꾼의 추억
애기 수사님들과 같이 지인들의 땅을 빌려 한 5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얼마나 웃기는지 모릅니다.
밭이랑을 수십 개 만들고 나서 밭이랑 한가운데다가 호박 모종을 심었다가 지나가는 할머니한테 엄청 혼난 적이 있습니다.
고추모종이 자라기 시작하면서 지지대를 세우고 끈으로 묶어줘야 하는데, 그 지지대 값을 아낀다고 부러진 야구방망이, 우산대 같은 걸 쭉 세워놓으니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고구마 줄기를 두 박스나 사서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을 해보니 총 수확량이 두 박스였습니다.
농사 이거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서는 하나하나 겸손하게 이웃 농부 할아버지께 자문을 구했습니다.
제가 깨우친 바로는 농사에서 가장 기본이자 키포인트는 좋은 토양을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좋은 토양은 아무런 노력 없이 되는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이를 위해 농부들은 이른 봄부터 엄청 신경을 쓰십니다.
일찌감치 밭 여기저기 겨우내 묵혀둔 퇴비를 왕창 뿌리더군요.
날씨가 조금 풀리면 퇴비와 함께 땅을 완전히 갈아엎습니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비닐이며 돌들을 골라냅니다.
갖은 정성을 기울인 좋은 토양과 적당한 일조량과 강수량이 합쳐져야 그해 가을 서른 배, 예순 배, 백배의 결실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 각자의 마음도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래야 하느님 말씀이란 씨앗이 그 좋은 토양 위에 뿌려져 왕성히 성장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리 하느님 말씀을 전해도 완고하고 닫힌 마음으로 인해 도무지 말씀의 씨가 발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은 길바닥이나 돌밭과도 같습니다.
영혼의 귀가 닫힌 사람이라 절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일단 받아들이기는 하는데 발아되고 성장하는 과정이 얼마나 더딘지 모릅니다.
그의 내면은 가시덤불로 가득합니다.
갖은 의혹, 불신을 걷어내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마음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경청, 이해, 수용, 적극성으로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 같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옵니다.
하느님 말씀이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의 삶 전체를 기름지게 만듭니다.
농부이신 주님께서 바라보시고 흐뭇한 미소 지을
‘좋은 토양’을 우리 내면에 일구어야겠습니다.
매일 하느님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겠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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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오늘 미사에서는 '말씀과 우리의 상호성'을 이야기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먼저 제1독서에서 우리는 당신 말씀의 성취에 대한 주님의 확신을 듣습니다. 사람이야 '말 따로 행동 따로'이기 일쑤지만 하느님은 그러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의지가 그분 입을 통해 발설되니까요. 말씀이 곧 그분 의지의 표현이고, 성취는 그 의지의 완성입니다. 그분의 의지와 말씀과 성취는 일체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아들이는 네 종류의 토양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마태 13,4).
말씀을 듣는 영혼의 땅이 "길바닥"이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든 사물이든 정보나 이념이든 아무것이나 내 영혼을 함부로 짓밟고 다니며 점령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깨어서 내 땅의 주권, 그 영혼을 지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마태 13,5-6).
마찬가지로 내 영혼의 땅이 "돌밭"이 되지 않으려면 내 안에 가득한 돌들이 부서지고 갈아져 흙이 되어야 합니다. 그저 딱딱하고 물기 없는 돌인 채로는 생명의 말씀을 품기 어렵지요.
돌이 흙이 되는 과정은 결코 쉽지도 않고,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습니다. 시간도 걸리지요. 더 작아지고 미약해지고 무력해지는 과정을 견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산산이 부서지고 짓이겨지고 으깨진 흙이 되어서라도 말씀을 품을 수 있다면 인내와 견딤, 기다림은 가치가 있습니다.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마태 13,7).
말씀의 숨을 막는 가시덤불은 사실 내가 키우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은 장마 뒤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잡풀처럼 엄청난 번식력을 자랑하지요. 영혼이 가시덤불 땅이 되지 않으려면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서로 덩굴을 엮기 전에 잘라내어야 합니다. 걱정과 유혹에 한치의 땅도 허용해서는 안 되지요.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마태 13,3).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열매 맺습니다. 들음과 깨달음과 실행이 하나입니다. 이는 그의 들으려는 '의지'와, 깨달음이라는 '앎'과, 열매 맺는 '사랑'이 일체일 때 가능합니다. 그는 이미 의지와 말씀과 완성이 하나인 주님을 닮았습니다.
우리 영혼이 말씀을 품기 적합한 좋은 땅으로 유지되려면, 지향의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바라는 바와 아는 바와 움직이는 바가 하나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 하나가 곧 주님의 뜻이지요. 이런 영혼이 지닌 통합성이 곧 인격적 영적 성숙의 표지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우리의 지향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로마 8,23).
우리는 주님의 자녀로서 구원되기를 바랍니다. 이 진정한 원의에서 우리 지향이 들음과 깨달음과 실행으로 구체화되고 방향을 잡고 성장해 나가지요. 결국 우리의 구원은 말씀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마음 밭, 영혼의 토양을 잘 가꾸시는 한 주간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땅이 말씀을 잘 품어야 농부이신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즐겨 이루실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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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5주일>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마태13,3)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을 우리 일상에서 일어나는 씨 뿌리는 일을 비유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13,13)
오늘 복음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우리 '마음의 밭'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말씀의 씨가 마음의 밭에 잘 떨어져, 그곳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농부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좋은 먹거리를 제공해주려고 땀을 흘립니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씨가 뿌려질 밭을 잘 가꾸는 일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 밭을 갈고 돌도 치우고 거름도 주고 - 씨를 뿌리기 전에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애씁니다.
이렇듯 하느님 말씀의 씨가 뿌려지는 내 마음의 밭도 잘 가꾸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 마음의 밭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하느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깨닫지 못하는 '길'의 모습인가?
하느님 말씀을 기쁘게 받고도 환난과 박해 앞에서 넘어지는 '돌밭'의 모습인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걸려 넘어지는 '가시덤불'의 모습인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깨달아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모습인가?
매일매일 성찰과 회개를 통해 내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성찰과 회개를 통해 내 마음의 밭을 잘 가꾸면 성령이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천국을 위하여!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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