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와 귀
―노운미와 박 승의 시
이 훈
1. 제대로 된 뼈 식사법
노운미 시인의 시집 『유령으로 나는 서 있네』에서 첫 번째로 수록된 「진실과 허상사이」는 그녀 시세계를 이해하는 출입문에 해당한다. “집 없이 떠돌던” 가족들은 “무덤 파내어” 집을 짓고 불법적으로 살다 한밤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주인에게 끌려 나간다. 주인에 맞서 “나뒹굴며 내 집이라고 소리 질렀지”만 아버지는 “고꾸라지듯 쓰러졌”고 그 이후 그녀는 “아무도 내 위에 집 짓지 못하도록” “하얗게 눈 뜨고” “아직 오지 않는 내 죽음을 밤마다” 기다리게 된다. 무덤 집은 직접적으로는 비참한 가족사의 공간이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생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상징적 잣대라는 데 있다.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생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무수한 살랑거림 앞에서 시인은 그냥 무덤 속 “뼈”의 자리에서 “눈뜨고 지키”겠다는 선택을 한다. 고통스런 인내와 자각의 자리를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선언쯤 된다. 그녀는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을 결정화하여 시 쓰기의 동력으로 활용한다. 말하자면 가장 절실하고 고통스런 순간의 진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삶은 가치가 없다. 그건 기껏해야 죽음의 자리에서 잠시 쌓아올린 허상, 죽음을 잠시 지연한 채 연장하고 있는 헛것으로서의 삶에 불과하다.
헛것에 대한 인식은 유년을 수놓았던 결정적 영혼의 흔적을 배회하는 현재의 유령(「유령으로 나는 서 있네」), 혹은 헛것으로 팽창한 생의 껍질을 응시하는 시선(「쪼글쪼글해진 하루」)의 형태로 변주된다. 이번 신작시 「나의 식사법」도 같은 연장선에 놓여 있다. “씨발씨발(詩發詩發)”은 “시발(詩發)”과 “씨발”의 사이에서 공명한다. “시발(詩發)”이 아무런 호흡과 기미도 포함하지 못한 사문화된 헛것이라면 “씨발”은 거짓의 틀을 빠져나와 발화하고 만개한 날것, “야생”이다. 당연히 야생은 단순히 종류별로 나누는 차이체계, 상징적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다. 그래서 팔딱거리는 생생한 활기를 지닌다는 점에서 어족(語族)은 어족(魚族)이기도 하다. 드넓은 대양의 바다, 언어의 바다에서 잡아 올린 “어족(語族)들은 신선도 유지가 관건”이다. 신선도는 “욕한바가지, 어처구니한국자, 짜증” 등 수많은 정념(情念)의 재료를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요리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판명난다.
정념으로 양념된 생은 결코 관념적 믿음과 논리의 세계가 아니다. 생활의 구체화된 굴레에서 삐걱거리며, 규격화한 앎과 상식을 어긋나게 한다. “야생에서 자라는 붉은 시화”는 “밟으면 밟을수록 질기게 자라”나는 법이다. 법과 사회에 의해 거부될수록 더욱더 강한 반탄력으로 스며 나온다. 그리하여 멀리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자의 피로감이 묻어난 어조로 시인은 묻는다. “외면하려고” 하지만 결국에는 외면할 수 없는 어떤 사실을 봤는지를 말이다. 어느덧 식사의 대상은 바뀐다. 어떤 언어가 살아 숨 쉬는지를 설명하며 같이 시식하려다가 이제 독자를 재료로 한 식사법으로 넘어간다.
당신은 시를 맛있는 요리인줄 알고 먹었지만 그건 “마약”, “황산”, “바이러스”, “미끼”이다. 시는 우리가 믿고 있는 허상에 안온히 살아가게 하는 요리가 아니다. 그걸 먹는 순간 당신은 평온한 일상의 껍질을 찢어버리고 죽게 된다. “위장이 녹아내리”고 “심장을 멎게 하는” 신체적 이미지는 조건반사의 감각체로 전락한 내밀한 욕망을 허물어뜨리려는 이물감의 표현이다. 이물감은 우리가 원하지 않은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폭력이지만 동시에 사랑이기도 하다. 안이한 자아를 열어젖히는 압도적인 힘. 해서 무의미한 감각으로 팽창된 껍질의 기억은 뒤로 밀려나간다. 우린 이내 “뼈”로 만나게 될 것이다. 시를 통해 체감하게 되는 이질감, 결절감은 그러고 보면 팽창된 헛것을 투과해서 생의 진경을 만나게 하는 삼투막과도 같다. 왜 사느냐고 계속 고통스럽게 물어서 일상의 의미를 붕괴시키곤 하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벗어나서는 결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경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앞에는 끔직한 생존의 수레가 놓여 있다. 속세의 「먹이사슬」은 피할 수 없고 구차하기까지 하다. “하나같이 쪼그리고 앉아”서 “악착같이” 하루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 때로는 “위풍당당”한 위선을 보이기도 하지만 남은 건 다만 먹고 먹히는 업(業)의 수레를 묵묵히 끌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천둥오리는 자신의 먹이 때문에 “물속으로 하나둘 씩 끌려들어”간다. 청둥오리는 물고기를 먹음으로써 물고기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잡는 관계에서 잡히는 관계로 의미론적 역전이 일어난다. 더구나 실제적으로 먹는 건 사실 보다 큰 생존의 그물망에서는 먹히는 관계로 묶인다. 자신은 포식자이자 피식자가 된다.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런 관점을 체득하는 것이다. 먹이사슬의 노역은 사라지지 않지만 그건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이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 사태를 관조하는 순간 비밀은 수줍게 자신의 베일을 벗는다.
아름다움은 이처럼 부정(否定)을 향한 관점변이 자체임을 기억해야 한다. 난경은 깨달음을 향하는 화두이다. 이를테면 「숲이 된 아이」에서 시인은 “숲이 되기 위해 떠난” 아이의 초대를 기다린다. 그녀의 모든 행위는 아이를 기다리는 순간을 향해 있다. 그러나 아이는 아름다운 숲이 아닌, 사각으로 접혀진 채 되돌아온다. 피동사 ‘접히다’의 어감처럼 아이는 내부에서 외부를 향한 순탄한 팽창의 아날로지(analogy)를 이루지 못했다. 아이가 어떤 가능성이라면, 가능성은 접혀지고 굴곡진 “비명”으로 굴절된다. 그렇다면 기다림은 사라졌는가. 아니다. 가능성은 결국 숲이 됐다. “사각으로 접혀진 너의 몸에서/어둠처럼, 광명처럼 광대한/숲이 출렁이는 바람이 불어왔”다. 가능성은 가능성을 제약하는 온갖 부정성의 필터에서 진정한 모습으로 전환한다. 어둠이지만 동시에 광명인 희망의 가능성은 주어진 제약과 싸워내는 전사의 상처와 굴욕 너머에 있다. 아이는 그래서 “군인”이 되었고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곳에 있다.
2. 기억, 시간 상영관을 가다
우린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살아간다는 건 시간을 떠나보낸 뒤에 남는 어떤 스산함을 간신히 견디는 자의 표정과도 같다. 애써 참아왔건만 순간의 방심으로 과거의 그림자는 문틈을 타고 넘어와 현재를 엄습하곤 한다. 이내 어렵싸리 내디딘 현존의 발걸음은 모두 사라지고 켜켜이 쌓아놓은 내밀한 어둠으로 되돌아간다. 울고 토닥이는 아련한 시간의 퇴적물 속에서 현재와 닿은 작은 끈 하나만이 손에 쥐어져 있을 뿐이다. 아마도 결국은 다시 발걸음을 돌려 빛의 세계로 되돌아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은 걸 우린 어둠에 두고 나왔다. 그리고 현실의 윤곽이 사라지는 침잠의 나락 끝에서 슬프게 잃어버린 풍경을 만나게 된다.
박 승 시인의 이번 3편의 시는 기억과 현재의 거리가 빚는 감성을 변주하고 있다.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보자. 먼저 방이다. “창 밖은 밤이다” 그리고 전등 하나에 의지해 무언가를 들으려, 느끼려하고 있다. 「자리와 자리」에서 그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옛날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다. 기억을 헤맨다. 30년 전 옛날이야기는 은은한 달빛을 배경으로 아이의 체온을 감싸고 잠을 청하는 아이는 모든 걸 느낌으로 기억해둔다. 이쯤 되면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과거의 달콤 씁쓸한 기억은 반드시 현재의 옷감 위에 겹쳐짐으로써만이 찬연한 색감을 내기 때문이다. 듣고 있는 것 때문에 단순한 과거기억이 아니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 두 가지 불일치와 어긋남의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생생하게 불러들여진다.
벽에 돋아난 “나이 많은 귀들”은 시간의 미세한 바람결로 느리게 자라나는 기억의 싹들이다. 상념과 추억을 자양분 삼아 자라는 귀,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그만큼 귀도 많아진다. 추억이 끝나고 이제 “차가운 어수선한 방”에서 시인은 되똑하니 정신이 든다. 버려지고, 혼란한 미로와도 같은 현재의 차가움, “어수선”함으로의 귀환은 슬프다. “입김 피어나는 잠속으로 눈을 뜬다.” “잠속으로”는 현실보다는 기억 친화적인 감성이 묻어있다. ‘잠속에서’가 일반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에서’가 아니라 방향을 알려주는 “으로”를 쓴 건 과거에서 현재로 향한 자의 머뭇거림 때문이다. 진정 과거에서 살아간다면 현실은 오직 잠깐의 악몽, 잠에 불과할 것이다. 그는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 시간은 오직 과거의 어느 한순간에서부터 자라고 흐를 뿐이기에 “눈을 뜨지 않아도 30년이” 지난다고 말한다. 그의 몸과 정신은 여기에 있지 않다.
시인에게 수많은 감성은 이처럼 “감지되는 순간”에 부풀어 오른다. 간신히 발 디뎠던 현실감은 허둥지둥 사라지고 아름다운 만개(滿開)의 시간이 드러난다. 「영화를 보러 가다」는 이 난만한 감성을 표현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기억을 뒤로 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에 간다. “튀어 오르는 팽팽한 바닥/하얗게 부푼” 팝콘의 “나른한 향기”를 느끼며 영화를 즐긴다. 아들의 회상,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그리고 여인과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영화의 스크린에는 틈틈이 자신의 기억도 같이 삽입된다. “웃는 얼굴 속에 핏물/흘러나오네 어머니” 등은 상영되는 게 단지 영화만이 아님을 상기한다.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은 스크린의 공간에서 팽창해서 “흘러”나온다. 흐르는 감정은 무겁지 않다. 절절하고 파괴적인 충동의 흘러내림이라기보다는 “보러 가다”는 행위에 암시된 바처럼 팝콘처럼 순간 가벼워진 기억과 감성의 유쾌한 소란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한다.
오늘 시인은 쉽게 집에 돌아갈 것 같지 않다. 이게 다 어젯밤의 상념 때문이다. 영화관을 나온 뒤 이번에는 전시회장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시간은 저녁으로 향한다. 전시회의 이름은 “서울의 이야기 경성의 이야기”, 「바람」이다. 시간의 창고를 뒤적거리며 보게 된 많은 면모들. 서울의 성장과 발전은 “나무의 세상”이다. 가지는 다른 가지로 뻗어나가 많은 방향의 팽창과 연결체를 만들어낸다. 서울의 이야기만은 아닐 터이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흐름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해서 나무는 결코 똑바로 자라는 법이 없다. “사람들의 마음 한 자락 굽어지는/물방울의 몸짓까지 구체적인” 만곡을 이룬다. 좌우로 흔들리고 생채기 때문에 움츠린 굴곡진 이야기는 바람결에 들려온다.
물론 전시회에서 바람을 느끼고 있는 마음이 편한 건 아니다. 화폭은 과연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냈던 걸까하는 의구심은 고스란히 자신의 시 쓰기 작업과도 겹치기 때문이다. “전시의 대나무를 보고 그림의 환한 바다가 되었던 벽을 보고/오래된 소리와 그 속으로 알 수 없는/상실이 흐르던 사연마저 이야기로 들을 수 있는 것일까요”라고 묻는 걸 보라. 그는 기갈에 허덕이고 있다. 세세한 소리의 잔향을 좇던 눈과 귀는 떨리고 소용돌이치는 고통에 시달린다. 마치 「자리와 자리」에서 달빛이 이제 노란색 전등으로 바뀌고 이야기를 듣던 다정한 귀들이 기억을 좇는 시로 아쉽게 대체될 때의 조바심과도 같다. 그러나 벽에 돋던 아름다운 귀들은 “왔다 가”버렸지만 그는 기억의 먼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다시 느끼는 순간을 기다린다. “이야기는 이야기로 나는 나로 다시 눈을 떠 보자고 말입니다”라는 다짐은 윤리적 책무로 단단히 남아 있다. 단언컨대 그는 오늘밤도 다시 자신의 방에 눈 떠 있을 것이다. 그는 시인이다.
이 훈
전남 화순 출생. 2007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에티카』 2010년 하반기 제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