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4월호 월간객석 커버 스토리 -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I am not back, 떠난 적도 없으니, 돌아오지도 않았다
김중만의 렌즈와 마주한 정경화의 얼굴. 그 얼굴엔 다행히 웃음이 많았다. 또한 기억이 많았다. 정경화의 시선이 먼 곳을 향하자 두 눈엔 예술가의 40년 넘은 세계와 역사가 가득히 담겼다가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물론, 지켜보는 이의 환영이고 느낌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얼굴이 ‘이야기’를 담아낸다는 것은 얼마나 멋지고 귀한 일인가.
나는, 우리는…
이야기를 가진 얼굴의 주인이거나, 다가올 미래에 그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글 박용완 기자(spirate@) 사진 김중만
창간 28주년을 맞이한 월간객석의 복도 서재에는 338권의 ‘객석’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출퇴근길은 물론이요, 사무실 안에서조차 마감에 쫓겨 100미터 달리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도 그 수많은 얼굴 앞을 스친다. 그러다 어느 날은 멍하니, 아주 오랫동안 그 앞에 멈춰 서기도 한다. 유독 마음이 통하는 얼굴 앞에서 소리 없는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지금, 잘하고 있나요?’
정경화가 마지막으로 커버를 장식했던 2001년 12월호는 종종 답을 구하기 위해 바라보았던 ‘객석’이다. 11년이 흐른 후, 정경화가 다시 ‘객석’의 얼굴이 되기 위해 김중만의 카메라 앞에 섰다. 촬영 현장에, 익히 알려진 ‘완벽주의자 정경화’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찍히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았고, 편하게 렌즈를 바라보거나 혹은 시선을 멀리 보내곤 했다.
“촬영이라 하면 대부분 음반을 위한 것이었죠. 레이블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어 그것을 따랐지만, 언제나 최종 결과물은 내가 철저히 확인했어요. 지금은 촬영하면서 뷰어 한번 보려 하지 않으니… 사람이 이렇게 변했네요.”
떠난 적도 없으니, 돌아오지도 않았다
지난해 정경화는 고국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9년만이었다. 그런데 공연 제목 ‘She Is Back’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I’m not back! 난 돌아온 게 아니에요. 명훈이도 그러더군요. She has never left, 떠난 적도 없다고요.” 그러나 청중의 입장에서 5년간 정경화를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하다. 2005년, 마린스키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직전에 갑작스레 찾아온 손가락 통증으로 그녀는 연주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10년,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다시 무대에 선 정경화는 지난해 여름 대관령국제음악제에서 프랑크 소나타를 선보였고, 12월엔 리사이틀도 열었다.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이었어요. 인덱스를 다쳤으니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죠. 전부터 조금 안 좋아서 병원을 찾았는데, 그때 너무 지독스럽게 주사를 놓아 손이 약해졌어요. 그것도 모르고 연주를 계속 했으니…. 손가락이 퉁퉁 붓고 어깨 근육도 찢어져서 한 3년은 악기를 아예 건드리지도 못했어요. 3년이 지나니 손가락이 조금씩 나아지더군요. 활을 강하게 쓰지 않는 작품은 그때부터 잡을 수 있었어요. 왜 영화에서 종종 보죠, 교통사고로 몸을 쓸 수 없게 된 주인공이 힘겨운 물리치료를 통해 다시 서는 과정이요. 다를 바 없어요. 지난 12월 리사이틀 무대에 선 내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평생 해온 일이니까 으레 그렇게 돌아오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그 과정은 나만 알죠. 지금도 여전히, 끊어진 신경을 다시 하나하나 완벽하게 나 자신에게 이어가고 있는 중이에요.”
2010년 복귀 이후, 연주를 거듭할수록 점점 만족해가는지를 물었다. “만족이란 건 물어볼 수도 답할 수도 없는 얘기예요. 그냥 나는 행복했어요. 2010년 무대에 선 것은 기적이니까요. 농부는 농부의 주제, 장관은 장관의 주제가 있습니다. 나는 연주하는 사람이라, 다시 연주자로 섰을 때는 내 주제에 맞게, 어떻게 음악을 전달하느냐가 중요했어요. 그땐 그저 황홀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스트레스가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연주에 대한 불안감은 아니고, 내 몸이 견뎌낼 수 있느냐에 대한 스트레스죠.”
이때다 싶어, 정경화를 만나면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5년간 연주를 할 수 없었을 때, 무엇이 그녀를 가장 슬프게 했는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슬펐는지, 아니면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할 수 없어 슬펐는지 말이다. 정경화는 답했다.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어요.”
나는 하나도 슬프지 않았어요
종교가 있는 사람으로서, 손이 그렇게 된 데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 믿었다. 슬픔을 느끼는 대신, 지금 이 상황에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자문했다. 2007년부터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젊은 연주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다방면으로 궁리했다. 50대 후반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아픔들과도 마주했다. 7남매 중 가장 믿고 따랐던 큰 언니, 그리고 인생의 스승과 작별했다.
“결혼하고 아이엄마가 됐을 때도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흐려지고 우리 남편, 우리 아이, 우리 가족이 생긴 것이 정말 행복했거든요. 얼마나 황홀했는지 몰라요. 이번에도 연주를 못 하게 되니 인간으로서의 나에게 초점을 맞추게 되더군요.”
바이올린을 잡을 수 있을 때의 휴식은, 휴식이 아니다. 실제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몸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자 정신이 귀신같이 알아챘다. 평생 머릿속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습해, 연습해야지….’
정경화는 지독한 연습광이자 완벽주의자였다. 1984년 4월호 ‘객석’에는 ‘오빠 정명근이 밝히는 경화의 모든 것’이란 글이 실렸다. 연습과 전화 통화에 매달려 사는 세계 최정상의 바이올리니스트. 그 조밀한 일상이 모여 오늘의 역사가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읽는 이마저 버겁게 하는 나날들이었다.
“내 동생 경화의 하루는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침식사로는 주로 주스와 샐러드를 즐긴다. 간단한 아침식사가 끝나면 경화는 곧바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세 시간 반 정도 오전 연습을 한다. 평상시에는 하루 평균 네 시간 정도 연습을 하나 중요한 음악회나 새로운 곡을 공부할 때는 하루의 전부를 연습으로 보낸다. 오전 세 시간 반의 연습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다시 네 시간,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 한 시간 반 정도 연습을 한다. 특히 레코딩을 할 때는 몇 달 전부터 그렇게 준비한다. 연습도 거의 신들린 것처럼 집중적으로 한다. 연습 시간 틈틈이 경화는 또 전화 거는 일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서로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다른 아티스트들과 전화 통화로 친목을 유지하고, 고독을 달랜다.”
정경화가 커리어를 시작했던 1970년대, 작은 동양인 여성 솔리스트의 든든한 버팀목은 연습과 자기관리에 미쳐 있는, 오직 그 스스로뿐이었을지 모른다. 정경화의 매력적인 외모는 오히려 그녀의 내실이 더욱 완벽해야만 했던 이유로 작용했다. “1970년에 프레빈이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 협연했을 때, 오케스트라 단원 100명이 다 남자였어요. 44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여자애가 미니스커트 탁 입고 그 앞에 서니까 난리법석이 났지. 동시에 얕잡아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요. 그때 나는 strong(강한)보다 tough(굳센)에 가까운 여자였죠.”
완벽에 대한 가혹한 집착은 사그라졌을지언정, 연습에 임하는 자세는 4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정경화는 각 음이 지닌 뜻을 잡기 위해 끝도 없는 시간을 보낸다. 조성음악을 하면서도 각 음에 이렇게나 집착을 하니, 음악의 정해진 길이 없는 현대음악은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생각을 요구한다. “그래서 현대 작품을 많이 못 했어요. 그걸 해야 할 시기에 아이를 가지기도 했고요.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쇼스타코비치가 살아있었으니까 그의 작품을 꼭 하고 싶었고, 시마노프스키의 곡들도 그때 했어야 하는데….”
정경화의 연습법은 특별하지 않다. 기본적인 스케일로 시작하는데, 악기의 울림에 집중해서 완벽한 인토네이션과 컬러를 찾아간다. 이 과정이 명상에 가깝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린 연주에 혁명을 가져왔지만, 나는 그저 바이올린을 탐험하는 것이 좋아요. 지네트 느뵈도 한 곡, 한 음만 가지고서 거듭 연구를 했다는데, 당연한 얘기 같지만 모든 연주자들이 다 그렇게 하는 건 아니죠.”
정경화는 자신의 장점이자 특성으로 ‘컬러’를 꼽았다. 한 음 한 음 자신이 원하는 소리가 분명하고, 그것을 잡아내는 능력을 타고난 것이다. 여기엔, 음악가들 중에서도 유독 특출한 귀가 한몫을 한다.
티칭? 플레잉? 먼저 답해봐요
2007년부터 교편을 잡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그녀는 처음 열 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재주가 뛰어난 학생도 있었지만, 기본적인 테크닉의 문제를 가진 학생도 있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그 가장 좋은 방법은 아직도 연구해가는 중이지만 명백히 깨달은 것은 정경화 자신에게 열 명의 학생은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지금, 줄리아드에서의 학생은 딱 한 명이다.
“예전에도 레슨을 하긴 했어요. 학생은 아니었고, 나보다 나이가 많든 적든 ‘연주자’들이었죠. 연주를 한번 들어봐달라면 들어주고 가르쳐주고, 많이 해야 한두 세션이었어요. 지금은 나 스스로가 가르침보다 연주에 집중하는 시기니 학생 한 명만 두고 있지만, 다시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게 되더라도 이미 테크닉이 갖춰진 아이들을 맡고 싶어요. 즉 음악적인 조언을 주고 싶은 거죠.”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정경화가 물었다.
“내가 몸 관리를 열심히 해서 한 명이라도 더 제대로 가르칠지, 아니면 내 연주를 더 늘릴지… 지금 뭐가 더 중요해요? 티칭, 플레잉? 먼저 대답해봐요.”
“연주요.”
“대부분이 그렇게 답을 해요.”
정경화는 아직도 자신의 사명이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건 나 스스로가 악기를 다루는 거예요. 라이브 콘서트, 라이브 메시지… 음악이 숨을 쉬고 그 음악을 숨 쉬는 청중과 나눈다는 게 제일 신비로워요.”
그녀는 인터뷰가 있었던 3월에도 모차르트 소나타 33번 Eb장조, 베토벤 소나타 7번 C단조,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1번 F단조, 시마노프스키의 ’녹턴과 타란텔라’로 이뤄진 묵직한 프로그램의 리사이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여정에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가 동행했다. 최근 정경화는 조성진ㆍ케빈 케너ㆍ로버트 맥도널드, 세 명의 피아니스트와 호흡을 맞추고 있다. “재능을 타고난 연주자들끼리 앙상블을 이룰 때, 가장 중요한 건 케미스트리(화학적 반응)입니다. 무대 위에서 얼마나 신비로운 조화가 이뤄지는가가 관건이죠. 피아니스트와의 작업도 예전과는 좀 달라졌어요. 그땐 상대가 누구든 반복 또 반복을 해서 내가 원하는 걸 만들어냈는데, 지금은 그 사람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는 편이에요. 물론 그때나 지금이나 이중주에서 내가 가장 중점을 두는 건 듀오 파트너십이고요.”
지휘자는 어떠한가. 프레빈ㆍ줄리니ㆍ숄티ㆍ뒤투아ㆍ텐슈테트ㆍ무티ㆍ래틀… 커리어의 역사에 비례하는 숫자라 하기엔 적은 편이다.
“지휘자 고를 때 말도 못하게, 대단히 까다로웠어요. 협주곡은 기껏해야 한 시간 반 정도 리허설 하고 무대에 올리는 건데, 지휘자와 성격이 안 맞으면 결과는 뻔하니까요. 물론 레코딩할 때는 ‘만 퍼센트’ 내가 원하는 대로 했어요. 반주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 건 물론이고, 심포니 지휘자로서 완벽한 지휘자를 택했죠. 브람스ㆍ베토벤ㆍ버르토크 등 내가 했던 건 대부분 심포닉한 협주곡들이라서 지휘자의 힘과 개성이 더욱 강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브람스와 베토벤의 투티가 제대로 나오죠.”
리사이틀에 함께 서는 피아니스트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찾아왔듯, 정경화는 줄리니의 경우를 들며 또 한번 ‘변화’를 언급했다. 2009년, 테스터먼트 레이블을 통해 정경화의 베를린 필 데뷔 연주가 36년 만에 발매됐다. 1973년 5월 11일, 정경화는 줄리니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그때 줄리니는 한국 나이로 예순, 정경화는 스물여섯이었다. “줄리니의 템포는 느렸어요. 마에스트로가 워낙 신사인데다 반주는 잘 못하는 편이어서 그냥 내가 따라갔죠. 오케스트라 없는 상태로도 줄리니와 열 번은 맞춰본 것 같아요. 아, 그때의 나는 열정이 철철 넘쳤으니 느린 템포를 따르는 게 더욱 힘들었어요. 그리고 바이올린을 손에 잡을 수 없었던 바로 그 시기에, 테스터먼트에서 음반을 낼 계획이라면서 음원을 보내왔어요. 듣고 깜짝 놀랐죠. 연주 당시에는 불안하고 답답했는데, 수십 년 지나 다시 들어보니 그렇지 않더군요. 차이콥스키의 투티를 줄리니처럼 마음에 들게 한 사람은 없었어요. 어쩜 그렇게 웅장하죠?”
이제 정경화는 줄리니를, 줄리니의 그 느린 템포를 너무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타고난 재능과 젊음을 양 손에 쥐고 있었던 그 시절의 정경화를 먼발치서 차분히 바라보면서 말이다. “내가 늘 모자라다 생각해서, 연주가 끝나면 가슴을 쥐어뜯고 속상해했어요. 바이올린에 미쳐서 그렇게 안달을 했어요. 그때 나는 나 자신을 못 봤어요.”
I’m just a beginner
지난해부터 들려온 정경화의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 프로젝트가 5월 15일을 시작으로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펼쳐진다(5월 15ㆍ31일 BWV1001ㆍ1002ㆍ1003, 5월 22일ㆍ6월 4일 BWV1006ㆍ1005ㆍ1004). 같은 작품의 녹음 계획도 올해 중 예정돼 있다. EMI에서 발매된 ‘수버니어(Souvenirs)’에 이어 10여 년 만에 내놓는 솔로 음반이다.
“그냥… 라이브 레코딩으로 하면 안 되나? 녹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어요. 우선은 빅 리사이틀을 할 생각을 하니까, 그냥….”
찰나였다. 정경화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돌려 창밖 저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선생님, 1초 만에 아주 멀리 갔다 오신 것 같아요.”
나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그 무게, 그 무게에 짓눌린 순간의 침묵을 깨고 싶었다.
“하하하하, 그리 보였어요?”
정경화가 시원히 웃었다.
그녀는 이미 바흐 무반주 파르티타 2번과 소나타 3번(BWV 1004ㆍ1005)을 녹음한 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1974년의 일이다. 데카 시절의 오랜 파트너이자 명 프로듀서인 크리스토퍼 레번이 녹음을 이끌었고, 이듬해 LP로 발매됐다. 녹음 당시의 일화를 들려주다 말고, 그녀는 불현듯 하이팅크의 말을 인용했다.
“어느 날인가 하이팅크와 나란히 앉아 레코딩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가 한다는 말이 ‘Oh, I’m just a beginner’, 자기가 초심자라는 거예요.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녹음을 하고 나면 그제서야 그 음악이 조금 이해된다는 뜻이었어요. 난 그랬다가는 큰일나요. 어떻게든 그 안에 있는 몸부림을 다 쳐서 완벽한 걸 남겨야 했으니까.”
정경화와 마주앉은 지 2시간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긴장이 풀리고 사담이 오가자, 거실에서 기다리던 강아지 두 마리, 요하네스와 클라라가 이제 그만 이 유리 미닫이문을 열어달라며 무언의 텔레파시를 쏘아댔다. 요하네스와 클라라? 정경화는 브람스와 클라라 슈만이 이뤄지길 바랐던 걸까? “얘들도 플라토닉한 사랑을 하거든요. 그렇지, 요하네스?” 정경화는 한 녀석을 올려 안더니 그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청담동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하고, 구기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하기까지 며칠의 여유가 있었다. 촬영을 하고 헤어지는 길, 정경화는 나에게 “예전 기사는 읽지 말고 그냥 와요”라고 했다. “그래서 선생님, 제가 28년 전부터 지금까지 ‘객석’에 실린 선생님의 기사를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읽고 왔는데요.” “그랬어요?” “네, 근데 왜 읽지 말라고 하신지 알았습니다.” “왜요?”
‘객석’이 기억하는 정경화라는 연주자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완벽하고 열정적이고 매끈했다. 그러나 정경화라는 사람은 언제나 달랐다. 1980년대에는 자신이 늘 부족하다며 가슴을 쥐어뜯는 치열한 젊은이가, 1990년대엔 가족이 전부인 행복한 여자가 보였다. 특히 1994년 그라모폰 협주곡상 수상을 다룬 기사에서의 이 한 마디가 대표적이다. “나 같은 사람이 바이올린보다 아이들이 훨씬 중요하다고 하면, 그게 답이 될까요?”
“그래서 내가 계속 변하는 게 이상했어요?”
“아니요,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변한 게 아니라, 열정을 쏟는 대상이 변해가는 거니까요.”
“그래요, 이상하지 않죠? 난 그렇게 평범한 사람이에요.”
인터뷰 내내 정경화는 “나는 언제나 평범하기를 바랐고, 평범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언제 그만두어도 후회는 없다”라는 말도 반복했다. 각각 대여섯 번, 아니 열 번은 반복했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내내 “평범하다”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라는 정경화의 말을 옮기고 싶지 않아 나는 참고 참았다. 정경화는 평범하지 않고, 청중은 그 비범한 모습을 무대에서 더 보고 싶다.
우리, 관객이야말로…
정경화를 떠난 적도 없으니.
첫댓글 내용이 좋네요. 제일 밑에 정샘 사진도 좋고요. 어딘가 그 날카로운 시선이 중년의 코코 샤넬을 연상시킵니다.
올려주셔서 감사해요.
기사 참 잘 쓰셨네요. 모 기자처럼 노회한 검객 뭐 이따위 허황되게 겉도는 소리도 없고..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녹음을 듣게 해주시는 beldi님의 수고에 비하면야. :) 그런데 사진이란게 참 묘하죠? 다른 얼굴들을 보게 되니 말이에요. 김중만 작가께서 어떤 모습을 원하셨던 건지. 예전에 이은주 선생님을 한번 뵐 기회가 있었는데 단아한 모습과 말씀이 별로 없으셨던 것과 터프하셨던 웃음이 생각납니다. 한번 뵙고 이렇게 말하는 게 우습지만 그분의 모습과 그리고 사진들을 본 제 느낌으로는 예술가들의 "집중력"을 담고 싶으셨던 것 같아요. 김중만 작가님은...
하나도 슬프지 않았다는 정선생님의 말씀을 젊은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않될 거예요. 그렇다고 제가 늙었다는 말은 아닙니다,ㅎㅎㅎ. 여러 복합적 감정을 뛰어넘은 생각없음과 차분함.... 참 스산하네요.
기사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주하시는 음 하나, 소리 하나의 다채로움과 아름다움을 넘어, 선생님은 그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 제게는 도저히 존경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