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현해놓은 작가의 집필실이 눈에 띈다. 밀랍으로 만든 작가의 인형이 책상 앞에 앉아 집필하고 있다.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뿔테 안경과 콧수염이 돋보인다. 한복을 입고 몽블랑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쓰는 모습이다. 집필실 벽에는 ‘기불탁속(飢不啄粟)’이라는 글이 씌어 있는 액자가 걸렸다. ‘굶을지라도 조(粟)는 먹지 않겠다’는 문사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표현한 글이다. 책상 위에는 작가가 평소 탐독하는 책 몇 권이 놓였다. 일본어판 ‘현대 프랑스어 문법’과 ‘Three Faces of Marxism’ 등 영문 원서들이다. 원고지와 담배 파이프도 있다. 유품 38점은 작가의 장남인 이권기 경성대 일어일문학과 교수가 기증했다.
전시실 한쪽 공간에는 대형 만년필 모형이 눈길을 끈다. 긴 세월 하루에 수십매씩 원고를 쓴 작가의 노고(勞苦)를 상징하는 물건이 아니랴.
헌책방 뒤지며 소설 찾아
이병주 문학관이 세워지기까지엔 최증수(崔增秀·63) 관장의 헌신적인 역할이 컸다. 최 관장은 인근에 있는 북촌초등학교 교장을 지내다 지난해 8월 정년퇴임한 교육계 인사다. 그는 교장 부임 초기에 제자들에게 읽힐 위인전을 고르다 나림(那林) 이병주의 작품을 발견했다. ‘나림’은 작가의 아호다. 나림은 북촌초등학교를 다닌 대선배였다. 모교가 낳은 문호(文豪)를 후배 학생에게 소개하는 것이 사명감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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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관이 세워지기까지엔 최증수 관장과 문화계 인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최 교장은 뿔뿔이 흩어진 이병주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고서점, 고물상 등을 돌며 눈에 띄는 대로 샀다. 10권을 발견하면 10권을, 20권을 찾으면 20권을 모두 사 모았다. 교장실 한쪽에 서가를 마련했다. 이렇게 수집한 책이 1000권에 육박했다. 책 표지를 덮은 먼지를 털고 가지런히 정리하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품을 꼼꼼히 읽는데도 시간을 보냈다. 이병주 문학을 재조명하고 계승, 발전시키는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겠다는 소명감이 꿈틀거렸다. ‘나림 문학’은 최 교장에게 ‘신앙’으로 다가왔다.
2001년 9월 최 교장은 ‘나림 이병주 선생 기념사업회’를 발기했다. 뜻있는 지역주민들이 주머니를 털어 성금을 냈다. 재경 하동향우회가 3000만원을 기부하고 하동군청이 2000만원을 지원했다. 조유행 하동군수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2002년 4월 제1회 이병주 문학제를 열었다.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지리산이 멀리 보이는 섬진강변에 이병주 문학비를 세운 것. 다듬지 않은 둥그스름한 자연석에 ‘那林 李炳注 文學碑’라 새겼다. 비석을 괴는 돌에는 이병주 아포리즘의 백미인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소설 산하(山河)에서’란 글씨가 새겨졌다.
최 교장을 비롯한 하동 문화계 인사들은 문학비 제막식, 학생 백일장, 문학강연회 등으로 꾸민 문학제를 준비하면서 강연회 연사를 초청하는 일에 골몰했다. 격(格)에 맞는 문인을 먼 하동 땅까지 모셔오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이문열 선생이 떠올랐다. 퇴짜 맞으면 어쩌나, 강연료는 얼마를 주어야 할까 고민하며 연락했다. 뜻밖의 성과가 있었다. 이문열 선생이 강연을 흔쾌히 수락하면서 강연료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한국 소설문학의 거봉인 나림 선생을 추모하는 행사에 초청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라는 겸양을 보이더라는 것이다. 이문열 선생은 하동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열강했다.
당시 상황을 취재한 강동욱 경남일보 기자는 ‘이병주와 하동 섬진강’이란 글에서 이문열 작가와의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문학비 제막식을 마치고 이문열 작가와 함께 섬진강 둑을 걸으면서 나림의 문학세계를 물었다고 한다. 이문열 선생은 “우리 문학이 근대사를 거치며 정치와 연관을 맺으면서 문학을 작품 자체로 평가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면서 “이병주 문학에 대한 평가가 미흡하다”고 말했다는 것. 그러고는 “지나간 사람은 모두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다”면서 “문학을 문학 이외의 것으로 판단한다면 도공이 내놓은 청자의 빛깔을 보지 않고, 도공이 만들다 깨진 도자기를 찾아내 실패한 도공이라 말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병주 문학제’는 그 후 매년 4월 하동에서 개최된다. 2005년에 열린 제4회 행사까지는 지역 행사로 치러졌다. 회를 거듭할수록 호응도가 뜨거워졌다. 지역인들이 애향심에서 시작한 행사가 전국의 유력 문인, 언론인, 저명인사들의 심금을 흔들었다. 2005년 11월 ‘이병주 기념사업회’가 정식 발족됐다. 기념사업회는 설립 목적으로 ‘나림 이병주 선생의 사상과 문학을 기리며 그 연구사업 등을 추진하는 동시에 범국민적 독서문화운동으로 확장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를 이끄는 임원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대표는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와 검찰총장을 지낸 정구영 변호사가 공동으로 맡았다. 부대표는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 김상훈 전 부산일보 사장,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정연희 한국소설가협회 이사장 등 4명이 추대됐다. 운영위원으로는 김광석 참존화장품 회장(재경 하동향우회장), 김언호 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이문열 소설가, 조남현 서울대 국문과 교수,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 등 6명이 선임됐다. 감사엔 김후란 문학의 집 서울대표, 이광훈 전 경향신문 고문이 선출됐다.
문장 대가들이 취지문 공동 작성
사업회의 실무를 맡는 사무총장에는 김종회 경희대 국문과 교수가 뽑혔다. 김 교수는 2004년 4월30일 제3회 이병주 문학제에서 ‘한 운명론자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의 이병주 소설 관련 평론을 강연한 문학평론가다. 김 교수는 고등학교를 하동 바로 옆 도시인 진주에서 나와 청소년 시절부터 나림에 관한 에피소드를 자주 들은 인연이 있다.
기념사업회 발기취지문을 읽어보니 글에서 향기가 풍긴다. 거장 문인을 기리는 글답게 품격이 드높다. 오늘날 한국문학의 문제점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담았다.
한국 문학의 걸출한 작가 나림 이병주 선생이 유명을 달리한 지도 벌써 13년의 성상을 헤아리게 되었다. 1921년 산자수명한 고장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1992년 타계하기까지 70여 년의 세월이 선생의 생애였으되, 그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아프고 슬픈 여러 사건들이 휘몰아친 격동의 현장이었다.
이 고난의 시기를 안으로 삭이고 문필로 가공하여, 선생은 탁발한 체험적 인식의 작가로서 소설적 발화법의 뛰어난 형상력, 그리고 근·현대사 전체를 아우르는 시각의 역사성을 확립해놓았다. 데뷔작 ‘소설·알렉산드리아’에서 대하 장편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선생의 작품에서 문학적 사상 및 세계관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그것을 소설로 풀어내는 장쾌한 작품 구조와 호활한 문장을 배웠다.
더욱이 시대 현실에 대한 문학적 각성도 사라지고 삶의 여러 부면을 절실하게 반영하는 리얼리즘적 표현 방식도 쇠퇴하여, 대다수 소설들이 얄팍한 문체를 앞세운 기교주의와 개별적인 형식 실험에 침윤해 있는 오늘날, 선생과 같은 수발한 작가, ‘새로운 한국의 발자크’를 기대하는 일이 섣부른 꿈으로 그치고 말 것 같아 두려운 형국에 있다.
그러기에 다시 이병주 선생인 것이다. 선생의 생전에 선생을 ‘정신적 대부’로 받들고 그 작품을 탐독하던, 광범위한 영역의 옛 독자들에게 소박하고도 소중한 충정을 담아 이 글을 보낸다. 동시에 이것은 이병주 선생을 중심에 둔 새로운 독서문화운동의 제안이기도 하다.(중략)
첫째, 이 모임을 통해 글읽기의 재미와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의 건실하고 격조 있는 문학적 만남을 주선하려 한다. 이병주 선생의 소설 읽기와 이를 기리는 일에서 시작하여, 평범한 일반적인 독자에서부터 전문성을 가진 문학연구자나 비평가가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그 글 읽는 즐거움과 깊이 있는 문학 해석을 함께 추구하는 모범을 만들고자 한다.
둘째, 이병주 선생의 문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분류하여 전집을 발간하는 한편, 그 문학 논의의 광장을 새롭게 펼쳐보려 한다. 작품의 수준에 따라 선별과정을 거쳐 값있는 글을 모은 발간 사업을 진행하면서, 이와 더불어 이병주 문학상을 제정·운영하여 후진을 격려하는 뜻 깊은 문학행사도 추진하려 한다.
셋째, 여기에 참여하는 이병주 선생의 지인들과 독자들이 수준 있는 유대와 친분을 나누는 동시에, 이러한 글읽기 운동이 범국민적 정신문화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도록 확장하려 한다.(후략)
─2005년 11월 이병주 기념사업회 발기인 일동
한국현대사 온몸으로 겪은 작가
기념사업회가 정식으로 발족된 이듬해인 2006년 4월7일에 열린 제5회 이병주 문학제는 규모가 더 커졌다. 여러 문인과 저명인사들이 경향 각지에서 하동으로 모여들었다.
멀리 서울에서 온 문인 가운데 공지영, 서하진씨 등 젊은 여성 소설가도 포함돼 있어 눈길을 끌었다. 공지영 작가는 “요즘 젊은이들이 이병주 문학을 모른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면서 “이병주 문학제가 세대간 문화 격차를 좁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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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림의 교유 폭은 그야말로 ‘대통령부터 거지까지’였다.
참석자들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굴지의 양서 출판사인 한길사가 곧 이병주 전집 30권을 출판한다는 것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이처럼 한꺼번에 출판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김종회 문학평론가는 “전30권이 일시에 발간되는 일은 세계문학사에서도 드문 대사건”이라 평가했다. 그만큼 이병주 문학을 재조명하려는 열망이 뜨겁다는 증거다. 김언호 한길사 사장은 이병주 문학의 애호가이기도 하다. 그는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로 근무하던 시절에 작가의 육필 원고를 읽고 감동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한길사는 그해 4월 중순에 전집을 냈다. 책날개에 전집 발간의 취지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진실을 추구하는 기개와 용기를 지닌 사관(史官)이자 언관(言官)이고자 했던 언론인으로서의 오랜 경험은 그의 문학정신의 튼튼한 자양분을 이루며 한 시대의 ‘기록자로서의 소설가’, ‘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탁월한 평가를 받게 했다. 또한 일제 강점기로부터 해방공간, 남북의 이데올로기 대립, 6·25동란, 정부수립 등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작가의 개인적 체험은, 한 지식인으로서 누구보다 우리 역사와 민족의 비극에 고뇌하게 했고 이를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킨 동력이 되었다. (중략)
탄탄한 이야기 전개와 구성으로 소설문학 본연의 서사성을 이상적으로 구현하고, 역사에 대한 희망,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시선으로 깊은 감동을 자아내는 그의 문학은 역사의식 부재와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오늘날 더욱 빛을 발한다.
이 작품들은 19세기 말 개화기에서 1980년대의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에 걸친 우리 현대사를 관통하고 있다. 우리가 그의 작품세계를 ‘소설로 읽는 한국 현대사’라 명명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전집 출판기념회가 2006년 5월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열렸다. 김병익 한국문학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축사에서 “이병주 문학은 소설을 통한 해방 전사(前史)의 재인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해방 전후의 정신세계를 이어주는 다리가 될 것”이라 말했다.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는 특강에서 “이병주 문학은 한 사람의 글이 아닌 ‘학병 세대’ 전체를 대표하는 글로서 작품을 세대 밑바닥에 놓고 파악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지영, 20대에 이병주 탐독
후배 작가 공지영은 이 전집의 발간 의의에 대해 ‘산하가 된 그 이름 이병주’란 글을 썼다. 그에게 박경리의 ‘토지’가 모성적 글쓰기로 매혹시켰다면 이병주의 ‘지리산’ ‘산하’는 남성적 글쓰기의 호쾌함을 일깨워주었다고 한다. 이 두 작품은 소설이 진실로 서사, 즉 이야기이며 ‘역사의 그물이 놓치고 있는 인생에의 따뜻한 애정과 기록’임을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공지영은 20대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병주…. 나는 그를 생각하면 하는 수 없이 나의 이십대를 함께 생각하고야 만다. 1980년대 초,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젊은 날이 하염없이 한심해지고 있을 때 도서관 안에 도피하듯 틀어박혀 읽은 것이 그의 소설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되고 싶은 것도 하나 없고 되어야 할 것 하나 없던 것 같은 시절, 과연 생을 걸고 우리가 도전할 만한 것이 하나라도 있을까 하는 고민이 아마도 세상은 어차피 불의하고 불우하다는 확신으로 나른하게 굳어져 가고 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때 만난 ‘지리산’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나에게는 조국이 없다. 오직 산하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구절 하나로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옥에서 실형을 살고 나온 그의 마흔네 살 늦깎이의 젊은 피가 갓 스물, 늙어가고 있는 나를 두드린 것이었다. 유신이라는 독재정권의 코미디 같은 억압과 그 현실의 틈새에서 어떻게든 역사의 잃어버린 한 결을 재현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을 행간으로 느끼며 나는 책에서 밤새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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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림은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지식과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은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했다.
이병주 문학제는 2007년부터 ‘이병주 하동 국제문학제’로 확대됐다. 외국 문인들을 초청해 강연회와 심포지엄을 열고 ‘이병주 국제 문학상’도 제정됐다. 2007년 국제문학제에는 일본, 중국,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태국 등에서 대표 작가들이 초청돼 왔다. 이들은 이병주 국제 문학상의 시상 기준을 정했다. 이병주 선생의 문학정신과 문학세계에 비추어 장편소설 작가 가운데 역사성과 이야기성의 소설적 특성을 보여주는 작가를 선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작가보다는 새로운 성과물의 장편소설을 발표한 참신한 작가를 우선하기로 했다.
올해엔 4월 24~26일 두 번째 국제문학제가 하동에서 열렸다. 이병주 문학관 개관식도 열려 더욱 의의가 있는 행사였다. 제1회 국제문학상 대상 수상자로는 베트남의 레 민 퀘 작가가 선정됐다. 특별상은 이병주 전집을 발간한 한길사 김언호 사장에게 돌아갔다.
‘한국의 발자크’ 꿈꾸다
소설가 이병주는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인물’로 꼽힌다. 자신의 절실한 체험에다 약간의 소설적 장치를 가미하면 작품이 될 정도다. 언론인으로, 지식인으로 교감하며 그와 가까이 지냈던 남재희 전 노동부장관은 ‘이병주의 소설을 읽는 이유’라는 글에서 “이병주 소설은 대개 자서전적이거나 반(半)자서전적이다. 어떤 작가나 그러한 면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병주의 경우는 의식적으로 그러는 것 같다. 지주의 아들, 수재, 주로 불어인 대단한 어학력, 광범위에 걸친 독서량, 일본 유학, 학병, 중국대륙, 교사, 좌우익의 사상 대립, 신문사, 감옥, 선거, 정치 등등 그의 소설만 면밀히 분석 종합하면 전기(傳記)는 쉽사리 완성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술회한 바 있다. 이병주 문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생애를 살펴봐야 한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21년 산골 마을인 하동군 북천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북촌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고 1933년 양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하동과 가까운 도시인 진주에 가서 진주공립농업학교(27회)를 다녔다.
청년 이병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 4월 메이지대학에 입학했다. 거기서 2년 6개월간 문학과 예술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불어를 배우면서 발레리, 보들레르 등 프랑스 시인들에 매료됐다. 위고, 발자크, 졸라 등 시대상황을 소설로 쓴 작가에도 관심을 가졌다. 프랑스 문화를 직접 체험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드물게 파리에 가서 1주일간 머물렀다. 현장에서 본 화려한 서양문명은 근대화 이전의 조선에서 자란 청년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초라한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면 허탈감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짐짓 오연(傲然)한 결기를 과시했다. 책상 앞에 ‘나폴레옹 앞엔 알프스가 있고 내 앞에는 발자크가 있다’는 글을 써붙였다. ‘소설에 의한 사회사(社會史)’라는 거창한 구상을 펼친 프랑스 소설가 발자크를 경쟁 상대로 삼은 것이다. 그는 불어를 더 배우기 위해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학업을 마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4년 학병으로 동원돼 중국 소주(蘇州)로 갔다. 일본군 제60 사단 치중대에서 보초병으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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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와 정구영 전 검찰총장 등이 이병주문학비 앞에 헌화하고 있다.
귀국 후 ‘해방공간’에서는 진주농과대학, 진주해인대학(현재 경남대학교) 등에서 영어, 불어, 철학 등을 강의했다. 당시 대학은 조용한 상아탑이 아니고 정치운동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곳이었다. 물론 진주의 대학가는 서울보다는 조용했다. 그는 진주 문화예술계에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해박한 지식을 전달하는 명강의, 일본 유학과 중국 체류 경험을 전달하는 구수한 입담 덕분에 ‘스타’로 부상했다.
6·25전쟁이 터져 형제처럼 살갑게 지내던 친구 이광학을 잃는다. 천재라 불리던 지기였다. 그 충격으로 이병주는 잠시 해인사로 입산하기도 한다. 학승 고봉(高峰) 스님의 상좌로 지내며 고승 경허(鏡虛) 스님과 용산(龍山) 선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정희와 통음하며 시국 토론
1955년 이병주는 부산에 있는 국제신보에 입사, 언론인으로 활동한다. 자유당 정권을 통렬히 비판하는 사설을 써서 국제신보의 성가를 높였다. 그는 경쟁지 부산일보의 황용주 주필과 친했다. 황 주필도 프랑스문학 애호가였다. 딸 이름을 ‘란서’라고 지을 정도였다. 프랑스의 한자식 표기인 ‘불란서’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의기투합한 그들은 시대를 논(論)하고 문화를 평(評)했다.
어느 날 “요즘 신문 소설 수준이 형편없다”고 이병주가 개탄했다. 그 말은 들은 황 주필이 “그러면 자네가 부산일보에 소설을 연재해보게”라고 제의했다. 이래서 부산일보에 ‘내일 없는 그날’이란 장편을 1957년 8월1일부터 이듬해 2월28일까지 6개월간 연재한다. 국제신보의 논설위원이 부산일보에 소설을 연재한 것은 이례적인데 황 주필의 후원 덕분이었다.
박정희, 황용주, 이병주. 이들이 부산에서 만난 것도 운명적인 것일까. 박정희와 황용주는 대구사범학교 4회 동기생이었다. 박정희가 1960년 1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이들 동기생은 자주 만나 대폿잔을 기울였다. 국제신보의 주필 겸 편집국장 이병주도 가끔 동석했다. 세 사람이 만나면 시국을 논하며 통음하기 일쑤였다. 1917년생인 박정희는 자신보다 네 살 아래인 이병주를 동생처럼 다정하게 대하려 했으나 이병주는 그리 탐탁찮게 여긴 것으로 알려졌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이병주는 이를 비판하는 관점에서 ‘조국이 없다. 산하(山河)가 있을 뿐이다’는 내용으로 남북통일에 관한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논설을 썼다가 필화(筆禍)를 입어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2년 7개월간 복역했다. 출감 이후엔 거주지를 서울로 옮겨 외국어대, 이화여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한다.
1965년 월간 ‘세대’에 이병주의 원고뭉치가 왔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제목이 붙었다.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언론인 이야기였다. 이병주 자신의 체험과 관련된 것임을 독자는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언뜻 읽으면 논픽션 같기도 했다. 불필요한 오해를 없애기 위해 편집인은 원작자가 붙인 제목 앞에 ‘소설’을 덧붙였다. 독자에게 소설임을 확실하게 나타내려는 의도였다. 이 중편 소설이 이병주의 공인된 데뷔작이다. 이 작품 하나로 이병주는 일약 유명 소설가로 부상한다.
지인들과의 술자리도 잦았다. 고급 요정에서부터 허름한 선술집까지 가리지 않고 다녔다. 요정에 가면 남은 안주를 종이에 싸달라고 해서 가져갔다. 마포의 전세방 근처에 있는 단골 포장마차에 들러 날품팔이꾼들과 어울려 한잔 더 하기 위해서다. 나림은 “거기에 가서 일류 요정의 안주를 풀어놓으면 통금시간까진 대통령이 되는 거라”고 말했다. 나림의 교유 폭은 그야말로 ‘대통령부터 거지까지’였다.
1966년 월간 ‘신동아’에 ‘매화나무의 인과(因果)’를 발표해 주목을 받았고 1968년 4월부터 1970년 3월까지 ‘월간중앙’에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관부연락선’을 연재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며 정권을 연장하자 이병주는 개탄했다. 지인들과 통음하며 “내가 ‘한국의 사마천’이 되어 소설로 이를 비판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신동아에 연재된 ‘그해 5월’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작품을 구상할 때 이병주는 고뇌의 늪에 빠져 가까운 지인들은 그가 혹시 자살 충동 또는 피살 위협을 느끼지 않는지 걱정했다. 당시 서울에 와 있던 영국인 기자 프리드리히 조스는 이병주에게 “영국으로 망명하는 게 낫겠다”면서 “홍콩까지의 밀선이나 영국망명자협회의 일은 내가 맡겠다”고 제의하기도 했다.
나림은 사초(史草)를 쓰는 심경으로 신들린 듯이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집필했다. 소설, 수필, 칼럼, 르포, 독후감 등 장르도 다양했다. 한 달 평균 집필량이 원고지 1000매라고 하니 가히 초인적이다. 단행본으로 나온 책만도 100여 권이나 된다. 장편소설만도 35편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일부 작품은 태작(?作)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들과 식당 술집 순례
‘아버지 이병주’는 어떤 인물일까. 나림의 아들인 이권기 교수의 증언을 들어보자. 부산 경성대에서 일본문학을 강의하는 이 교수는 ‘이병주, 그리운 나의 아버지’란 글을 정리한 바 있다.
이 교수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아버지는 한마디로 매우 자상한 분이셨다”면서 “꾸중할 것이 있으면 언성을 높이는 대신에 종이에 쓴 메모를 주셨다”고 말했다. 이 교수가 소개한 몇몇 에피소드에서 짙은 부성애가 나타난다.
아들이 대학 1학년생이던 여름방학 때였다. 친구와 여행을 가려고 아버지에게 꽤 큰돈을 요구했다. 아버지는 “서가에 꽂힌 영어책 중 아무거나 뽑아서 한 페이지만 번역해 그게 마음에 들면 요구한 금액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아들은 보기에 멋진 두툼한 하드커버 책을 뽑아왔다. 아버지는 “다른 책을 가져오는 것이 어때?”하고 운을 떼며 “옆에 펄 벅의 책이 있을 텐데”라고 말했다. 아들은 자존심 때문에 처음 고른 책을 번역하겠다고 우겼다. 아들은 한 문장도 해석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 책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제임스 조이스 작 ‘피네건스 웨이크’였다.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며 아들이 요구한 금액의 절반을 주었다.
1991년 3월30일, 부산 하얏트 리젠시 호텔에서 나림의 고희연이 열렸다. 아들이 부산에서 살기 때문이다. 칠순잔치 후 아버지는 아들에게 경비가 얼마 들었는지 물으며 그 돈을 부쳐주겠다고 했다. 아들이 괜찮다고 했더니 아버지는 “나는 ‘영원한 현역’이며 물려줄 재산 없는 아들에게 신세지고 싶지 않다”며 곧 송금했다. 아들은 섭섭한 감도 있었으나, 다른 친구들의 아버지를 생각할 때, 칠순에도 경제활동을 하는 건강과 능력을 가진 아버지가 한편으론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이래서 나는 이병주를 좋아한다목 “지리산처럼 우뚝한 문학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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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언제 봐도 인물이 출중하다. 산에다 ‘인물’이라는 표현을 쓰면 우습지만,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데야 어쩔 수 없다. 국립공원 1호라는 명찰을 떼고 관찰해도 산 자체가 잘났기는 마찬가지다. 올여름에도 어김없이 지리산 주변을 서성거렸다. 함양군 마천면에서 자동차를 몰아 1023번 도로를 따라 가파른 오도재를 넘고 뱀사골을 지나 천은사를 거쳐 구례에서 하동으로 건너가면서 이병주 선생을 생각했다. 지리산 수많은 골짜기 곳곳에 선생의 문학혼이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작가 이병주는 둘레가 340km에 이르는 거대한 지리산마냥, 문학의 한 독립 영토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이병주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1974년 가을,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창간호부터 애독해오던 문예지 ‘문학사상’ 10월호에 이병주의 단편 ‘칸나 X 타나토스’가 실렸다. 1950년대 후반, 이병주가 부산에서 ‘국제신보’ 주필로 일할 당시 신문사 편집국에서 조봉암의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며 책상 위 화병 속 칸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는 삽화가 이 작품에 담겨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 유장(悠長)한 문체에 매료되어 읽기 시작했던 이병주 문학은 그때 이후 만년 문학청년으로 지내오고 있는 내게 크고 길게 영향을 미쳤다. 첫째, ‘소설·알렉산드리아’를 들고 등단했을 당시 이병주가 마흔 네 살이었다는 사실은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마흔넷에 이르러서는 등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둘째, 이병주 문학에 등장하는 엄청난 지식 데이터베이스와 깊은 철학적 사유는 내게 열등감을 안김과 동시에 인문학적 학구열을 부추겼다. 셋째, 한 달에 원고지 1000장 분량을 탈고하는 이병주의 속필과 열정은 대학 졸업 후 실용적 글쓰기를 생업으로 삼게 된 내가 직업적 성실을 다잡는 데 훌륭한 채찍이 되었다. 넷째, 장편 ‘그해 5월’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듯이, 언론인 이병주의 놀라울 정도로 꼼꼼한 자료 챙기기는, 내 선친보다 1년 연상인 지난 세대 지식인 이병주의 학구적 정열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거울이 되어 후학으로 하여금 자신을 끊임없이 이 거울에 비춰보게 했다. 다섯째, 동경 유학에서 학병 출전, 교직생활, 언론 활동, 투옥, 문단 데뷔로 이어지는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사적(私的) 기록 공간인 일기장으로부터 끄집어내어 사회적 공유(共有) 영역이라 할 소설에 담음으로써 이병주는 역사의 문학화 또는 문학의 역사화에 독특하고도 크게 기여했다. 걸출한 작가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문호(文豪)란 만들어지기보다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병주 또한 마찬가지다. 수십 권에 이르는 그의 장편 중편 단편을 하나씩 찾아 읽으면서 우선 작가의 엄청난 독서량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지만, 그보다는 서사(敍事)를 이끌어가는 정교한 솜씨와 긴 호흡에 압도당한 적이 부지기수였다. 이런 소설가적 유전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문창과(문예창작과)에서 습작에 습작을 거쳐 등단하는 작가들의 작품세계와는 다른 무엇이 이병주류(流)에는 분명 있으며, 나는 이런 천품(天稟)의 작가들에게 유달리 매료되는 편이다. 박경리의 ‘토지’를 읽으면서 줄곧 들었던 생각은, “나와 같은 경남 출신이 아닌 독자는 작품의 독해에 때로 애를 먹을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었다. 물론 나는 ‘토지’를 100% 독해했다. 이병주의 몇몇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하동, 진주, 부산, 김해, 산청, 함양, 지리산 등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더러 사투리가 등장하기도 하며 해당 지역의 고유한 정서가 담기기도 한다. 이런 지리적 배경 때문에라도 개인적으로 이병주 소설에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초기작품인 ‘예낭풍물지’만 하더라도 조금만 문면(文面)을 파고 들어가면 배경이 부산임을 쉬 짐작할 수 있다. 물질의 부유(富裕)와 정신의 부박(浮薄)이 한데 엉켜 어지러운 요즘 이병주 선생이 더욱 그립다. 송철복(자유기고가·번역문학가) | |
1991년 11월 나림은 미국 뉴욕으로 갔다. 교포들이 많이 사는 플러싱에 거주하며 작품을 구상했다. 솔제니친이 러시아 혁명의 진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집필한 ‘붉은 수레바퀴’와 같은 대작이었다.
이권기 교수는 1992년 문교부 해외파견교수로 일본에 갔다. 그해 2월말 이들 부자(父子)는 도쿄에서 상봉한다. 건강이 상한 나림이 도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부자는 데이코쿠(帝國)호텔에 묵으며 1주일여를 보냈다.
나림은 병세가 악화돼 자주 피를 토했다. 그러면서도 점심시간 때는 호텔 근처의 책방에 들르고 근처에 있는 유명한 식당으로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나림은 그때 이미 짠맛을 느끼지 못했고 아이스크림과 커피맛만을 느꼈다. 아버지가 식사를 제대로 못하자 아들도 식욕이 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게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먹어라”면서 “네 월급으로 쉽게 갈 수 없는 집들을 데려가줄 테니까 애비가 사줄 때 실컷 먹어두라”고 했다.
낮에는 식당이나 책방, 밤에는 술집으로 부자의 데이트는 계속됐다. 어느 날 조그만 술집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저기 접시를 닦고 있는 아가씨 있지, 저 아가씨가 이 집 주인 마담의 딸인데, 시카고대학의 철학박사야, 그러니 너 대학교수라고 지식이 있는 체하다가는 큰코다쳐, 조심해” 하고는 웃었다.
아버지는 학창 시절 다니던 술집에 가보자고 했다. 긴자에 있는 허름한 술집이었는데 7~8명의 손님이 겨우 앉을 수 있는 집이었다. 손님 시중을 드는 호호백발 할머니가 아버지를 반갑게 맞았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나오자 “그 여자도 젊은 시절엔 꽤나 미인이었다”면서 “이 집은 일본 문단사에 나오는 유명한 집”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나중에 확인해보니 탐미주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1930년에 친구인 시인 사토오 하루오에게 자기 부인을 양도한 사건이 있었는데 양도 약속 장소가 바로 그 술집이었고 그 장면의 증인이 그 술집 주인 할머니였다.
관 속에 보부아르 책 넣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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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를 끔찍이 귀여워하는 ‘촐레로’노인과 함께한 이병주 작가.
서울로 출발하기 전날 나림은 가지고 있던 돈 중에서 달러를 제외한 일본 엔화를 전부 아들에게 주면서 “모처럼 일본까지 와서 너무 궁색하게 지내지 말고 가보고 싶은 데가 있으면 여행도 하고, 먹고 싶은 것도 사먹고, 릴랙스하게 생활해라”고 당부했다. 1992년 3월9일 나리타공항에서 나림은 계속 기침을 하면서 아들에게 “나중에 또 보자”고 말하며 떠났다. 그것이 부자의 마지막 대면이었다.
나림이 타계할 무렵의 행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소설을 주로 출판한 서당출판사의 이종호 발행인이 ‘선생님과 보낸 마지막 한달’이라는 글을 쓴 바 있다. 이 글은 ‘세우지 않은 비명(碑銘)’이란 이병주 작품집 서문에 실려 있다. 이 발행인은 나림과 함께 국제신보에서 근무했고 나림이 상경한 후 서울로 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이 글과 아들 이권기 교수의 회고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김포공항에 도착한 나림을 본 이종호는 깜짝 놀랐다. 너무도 수척했기 때문이다. 곧장 서울대 병원으로 모셔갔다. 입원 5일째부터는 호전 기미를 보였다. 6일째는 머리맡에 원고지와 펜을 갖다놓았다. 입원한 지 한 달이 가까워오자 꽤 회복됐다.
아들이 국제전화로 안부를 물었더니 나림은 “많이 좋아졌으니 걱정 말고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의 이와나미 문고판을 사 보내라”고 말했다. 나림은 이종호에게 “이제 퇴원해도 좋다고 하니 롯데호텔에 방이나 하나 얻어 좀 쉬었다가 뉴욕으로 갈까 해”라면서 “뉴욕으로 동행할 속기사 한 사람을 빨리 구했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이종호가 대졸 여성 속기사를 데리고 나림을 찾은 것은 4월3일 오전 11시경. 그 여성은 면접에서 통과돼 이튿날 오전에 속기 준비를 하고 다시 병실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날 오후 3시 나림은 각혈이 심해 질식사하고 말았다. 나림은 한 달 전에 폐암 선고를 받았다.
문상을 온 황용주 선생은 “너 내 절 받으려고 먼저 죽었나”면서 오열했다. 황 선생의 도움으로 남한강 공원묘지에 장지를 정했다. 아들은 아버지가 저승에서도 그렇게 좋아하던 독서를 하시라고 아버지 안경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책을 관 속에 넣었다.
젊은 독자에게도 호응 일어나
대학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는 강사 K씨는 박경리 선생이 타계했을 때 수강생들에게 “한국 근·현대사의 시대 상황을 소재로 한 명작을 읽으면 감동과 배경 지식을 얻는다”면서 학생들에게 “이런 부류에 들 명작이 어떤 것인지를 열거해보라”고 말했다. 조정래 작 ‘태백산맥’과 ‘아리랑’이라 대답하는 학생이 몇몇 있었다. 읽지는 않았고 책 제목만 들었다고 했다. 현기영 작 ‘순이삼촌’을 들먹인 학생도 “읽지는 않았고 고교 때 국어 선생님에게서 꼭 읽어보도록 권유 받았다”고 밝혔다. 읽은 책을 말해라 했더니 여러 학생이 조세희 작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라 대답했다.
K씨는 “이병주 소설을 아느냐”고 물었다가 머쓱해졌다. 아무도 몰랐다. 주옥같은 대하소설이 있다고 소개했지만 학생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K씨는 “그렇다면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라는 중편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유했다. 며칠 뒤 어느 학생이 “추천하신 작품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면서 “다른 작품도 읽어보겠다”고 했다. 또 다른 학생도 “하루키 등 일본 작가의 소설을 즐겨 읽었는데 이병주 소설을 읽어보니 새로운 경지가 열리는 듯했다”고 말했다.
K씨는 대학생인 아들, 딸에게도 이병주 소설 몇 권을 안겼다. 며칠 뒤 반응이 왔다. 영화보다 더 박진감 있는 내용이었다며 전집 30권을 독파한다는 목표를 세웠다고 한다. K씨는 인터넷을 검색하다 젊은이들이 부산에서 페리호를 타고 일본 오사카로 가면서 ‘관부연락선’을 중심으로 한 이병주 문학토론회를 가졌다는 글을 발견했다. 매우 좋은 아이디어였다. 자신도 가족과 함께 그런 선상 토론회를 가지기로 결심했다.
이병주 전집의 편집 업무를 맡았던 박희진 한길사 편집부 교양팀장은 “오늘날 독자에게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 망설였던 게 사실이었다”면서 “전집 가운데 ‘지리산’과 ‘소설·알렉산드리아’가 많이 나갔다”고 말했다. 한길사에서는 올 4월엔 ‘이병주 문학연구-역사의 그늘, 문학의 길’이란 평론서를 내기도 했다.
이병주 문학관에는 요즘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학생들의 현장 학습장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부근에 있는 이명산 부일수련원에서 수련활동을 하는 중·고교 학생들은 으레 이곳에 들러 이병주 문학의 일단을 맛본다. 최증수 관장은 “학생들에게 이병주 문학의 가치를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면서 “이들이 자라면서 이병주 문학의 생명이 영원히 이어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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