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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편화된 언어를 그러쥔 마녀의 (불)가능한 꿈
- 권민경,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에 관하여
김정현
1. 독기 어린 고통과 슬픔
무섭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하는데
그으니까 이건
내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야기
- 「피크닉」 중에서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는 시집의 제목 앞에서 약간은 기이함을 느낄 사람들이 없진 않을 것 같다. ‘꿈을 꾸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한 그렇게 되었다’는 상식적이지 않아보이는 시집 제목은 어떠한 내적 맥락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보통 생각하듯 시인은 꿈에 대해서 자신있게 말하는 자가 아니었던가. 예컨대 자연의 풍요함이나 혹은 일상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에 대한 기대지평이라면, 권민경 시인의 두 번째 시집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민음사, 2022)의 시들은 그 고정관념들과 무관하게 존재한다.이 측면에서 주술적이라 할 마녀의 언어들을 통해 시인은 자신만의 고유하며 이름하기 불가능한 아름다움과 고결함에 대해 느끼며 인식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는 말하지 않으며, 자신의 언어가 지닌 고유성에 철저하도록 의거한다.
그러니 일견 산만해보일 언어의 미궁 앞에서 우리들이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는 점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인다. 종종 그렇듯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저 두렵거나 혹은 외면당하며 납득될 리 없으니까. 그녀의 언어가 지닌 내면적 에너지들은 일반적 세계와 무관하게 “아름다울 것이며 무서울 것”이며, 동시에 “세상의 것을 벗어난 아름다운 무엇”을 향한 ‘칼날’(「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같은 엄격함을 향해 있을 뿐. 그 ‘아름다우며 무서운, 세상의 것을 벗어난 무엇’을 향한 마녀의 중얼거림은 자신의 고통을 그러모으며, 파편화된 이미지적 언어를 통해 이 무가치한 세계와 다르게 존속하려 한다. 희망과 기대와 미래가 아닌, 말해지지 않았던 마음의 흔적들이자 슬픔과 고통과 알 수 없던 시간의 목소리들에만 의존하면서.
우리가 듣지 않으며 말하기 두려워했고 알지 못하는 무수한 것들. 그 고유한 고통의 엄밀함과 엄격함이란 어떻게 (불)가능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언어의 의미에 기대지 않고, 언어를 통해 그저 구현되기. 그 처참한 슬픔을 통해 희미하게 감각되어야 하는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더 마르고 고통스런 사람 되”려하며 “숲에서 사막으로 넘어”가는 자신의 “일생”(「무게」)을 분명히 인식하는 자의 시선에만 명료하게 비춰지게 되는 것들. ‘짙푸른 시간’(「활」)의 어둠을 통해 형성되고 가능해질 어떤 세계. 그러니 필요한 것은 “예언 같은 것을 하다가 목이 잘린”(「떨어진 머리를 안고」) 마녀의 육체 자체인 어두운 미궁 속 중심부를 향해 뛰어드는 것일 따름이다. 거기에는 미노타우르스처럼 ‘소머리탈을 쓴 멋대로의 소질을 가진 박력 넘치는 악한’(「미로」)이 든 도끼가 휘둘러지고 있을 테니. 요컨대 중요한 것은 그저 허망하게 떠도는 말들의 무가치함이 아닌, 고통의 통각에 침잠할 때 태어나는 언어의 세계를 감각하기이다.
하여 미궁의 악한이자 시인이 휘두르는 언어의 도끼 아래 우리는 시의 한 제목처럼 ‘침착하고 조용하게’(「침착하세요 조용하게 지내세요」) 우리의 사유가 난도질당하며 붕괴될 것을 차분히 기다리면 된다. 그녀의 독기 가득한 언어들은 도끼처럼 휘둘러지며 우리를 우리와 철저하게 단절시켜버릴 테니까. 한 가지 더 말해두어야 하는 부분은 분노하는 시인의 언어들이 지닌 ‘기원’의 이면이다. 이 폭력의 언어들은 무가치한 세계를 붕괴시키기 위한 분노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동시에 그 이면에 슬픔과 고통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마녀의 인식이 놓여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다층성에 대해 꼼꼼하게 접근해갈 때, 우리는 언어의 표면이 아닌 언어의 심연이자 그 실존적 의미들에 비로소 다가설 수 있다. 그녀가 온몸을 내던지며 겪어왔던 슬픔과 고통이며 또한 자신을 파괴하면서 증명하려 했던,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비정형의 ‘유해’한 진정한 꿈 ‘이야기’를 말이다.
아마 팔 다리
돋기 이전부터 그 모양
나는 훔치고 부수고 때리고 모든 내게 불 질러서
활활 타올랐다
밤나무 숲
플라스틱 타는 냄새
그때 마신 유해가스가 한아름
- 「초신성」 중에서
2. 분노를 통해 마녀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진화는 예측 불가능한
거 봐 내 말이 맞지?
(…)
인간 말이나 쓰는 주제에
모든 언어 흘러간다
- 「무게」 중에서
시인의 첫 시집에서도 나타난 것이지만, 이번 두 번째 시집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인의 목소리로부터 진득히 퍼져나오는 ‘자기파괴적’ 형상들이자 그 음울한 예외성이라 할 것이다. 시인의 언어가 지니는 고통의 감각들은 아마 다음처럼 이해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시인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되긴 하지만 (물론 당연하게도 시의 언어들이 사실로 전부 환원되지 않는다) 왜 그녀는 자기 자신을 일종의 ‘부풀어오른 시체’(「외상 후의 기록」)이자 “입술을 찢으며 웃을 수 있”(「플라나리아 순간」)는 끔찍한 표정으로 인식하는가.즉 그녀의 언어들은 왜 항상 피와 조각난 육체들을 머금고 있는 것일까.
비릿한 피와 조각난 육체들의 ‘비릿한 냄새’(「퇴근」)가 넘치는 시인의 다양한 형상들에게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한 가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이 마녀의 예외적인 목소리가 항상 ‘죽음’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이미 죽어있는 자이자 텅 비어있는 자 혹은 없는 자로서 자기 자신을 본다. 그러니 우리는 죽은 그녀가 바라보는 그녀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죽음의 지평 너머에서 오롯이 자신의 존재를 토해내고 있는 형상들을.
지금 내가 사람을 만들었다 아니, 아니, 낳지 않고 만들
었다 사람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처음엔 어, 어, 했는데
곧 내가 빚었다는 걸 알았다.
닮았다 이 벌판에 내가 가득하다고 생각하면 얼마
나…… 쓸쓸?한가 외로움은 오래 징그럽고 억지로 사지가
잘린 나무 어, 그러니까 나, 나였다 모든 신파들이 벌떡벌
떡 몸을 세우고 나는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아서,
자주 생각했다 저 손과 발이 없는 나무, 나는 보이지 않
는 곳을 잘렸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고 없는 장기 몇 개
& 마음이 잘린 표면이 매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식할
수 없는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 기록하면 나를 따라 질질 발을
끄는 검은 자음, 모음, 하나하나 나였고 신파였으며 잘린
가지, 뺏긴 못소리, 잘린 갑상선, 난소, 그리고 기타 등등
국민학생인 내가 백마 까페촌에 서 있어. 들어가지 못하
는 까페 입구, 음식 이름 옆에 적혀 있던 기타 등등이라는
글자 나는 그게 기타 치라는 소리인 줄 알았지. 기타 소리 등
등등…… 목소리도 없는데
순진한 내가 떠나가는 동안 등등 속에서 사람들이 벌떡
벌떡 일어나 오래 징그러웠다
- 「겨울나무」, 전문
「겨울나무」는 시집 전체를 통틀어 시인 자신이 인식하는 죽음의 이미지를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낸다.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위 시는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언어가 어떻게 출발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언어가 어떻게 ‘징그럽게’ 존속하고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문제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왜 이미 죽은 자는 자기 자신을 비로소 죽은 자로서 바라보며 기록하는가. 이미 죽은 자와 비로소 죽은 자 사이의 간극, 시집 서두에 적힌 ‘죽음과 사랑 사이에 뭐가 많다’는 시인의 말처럼, 이 간극 속에는 마녀의 언어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법론이 놓여있다. 그 지점을 이해할 때 우리는 이미 죽음 그 자체가 된 시인의 비릿하고도 피로 가득찬 진득한 언어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의 언어가 지닌 ‘기원’에 대한 명확한 지형도. 그 원천은 아마도 이미 죽은 자가 비로소 죽은 자로 자신을 이해하고, 왜 말하는가와 매개되어 있다. 사실상 이러한 시적 인식은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의 모든 시들에 적용되는 원천적 방법론이기도 하다. 이를 좀 더 쉬운 말로 바꾸면 이러하다. 즉 자기 자신 혹은 더 나아가 마녀이자 시인은 왜 세계와 근본적으로 불화하고 있는가. 혹은 시인의 직접적 말처럼 이 세계에 “태어나 버렸다/ 기왕”(「빈 하늘에 기도문」)이라면, 보이지 않을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도대체 어떻게 감각될 수 있는가.
시의 서두에서 시인은 명확하게 말한다. “지금 내가 사람을 만들었다 아니, 아니, 낳지 않고 만들었다”고. 말더듬이 시인이 탄생시킨 마녀인 자신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는 존재이며, 내가 빚어낸 존재이기도 하다. 이미 죽은 자가 빚어낸 비로소 죽은 자인 것.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은 이 세계에 “오래 징그럽고 억지로 사지가 잘린” 불가해한 형상. 파편화되고 잘려진 육체를 지닌 겨울나무여야 하는 것. 그러나 이 불길한 형상을 우리는 수동적인 무언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시인은 분명히 비로소 죽은 자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있기에. 즉 “어, 그러니까 나, 나였다. 모든 신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내가 잃어버린 수많은 것들로부터 마녀는 비로소 형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그 탄생한 나이자 시인이자 마녀의 존재는 ‘생각한다’. 일종의 의무이기도 한 질문. 자신은 왜 존재하는가. 이미 죽은 자는 비로소 죽은 자 사이의 간극에는 무엇이 놓여있는가. 그리하여 ‘생각한다’. “손과 발이 없는 나무”이자 ‘보이지 않는 곳을 잘린 나’의 존재이유를. 아마도 그 답은 바로 “내가 잃은 것들에 대해 기록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미 죽은 자이자 비로소 죽은 자에게 세계는 낮과 빛의 시간이 허락될리는 없을 터. 죽음과 어둠 밤의 시간 속에서만 시인은 비로소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들이자 나였던 존재들을 말이다.
내 몸에 매달린 채 나를 따라다니는 유령같은 잔해들. “질질 발을/끄는 검은 자음, 모음, 하나하나 나였고 신파였으며 잘린/가지, 뺏긴 못소리, 잘린 갑상선, 난소, 그리고 기타 등등”들. 그 모든 개별적인 하나하나‘들’의 형상은 이름받지 못한 자들이거나 말할 수 있는 입이 없는 존재들일 것이다. 그녀가 이 타자들과 사실상 동일한 존재이며, 마녀이자 시인의 시선은 바로 그들을 향해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그렇다면 이 잔해이자 유령들에게 불려질 이름과 말할 수 있는 입은 어떻게 부여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언어를 넘어선 ‘유희’를 통해야 한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말하는 ‘과거’의 사실적 재현이 아니다. 핵심은 그 속에 담겨진 마녀의 시선일 따름이다.
요컨대 존재하지 못하는 기타 등등의 세계 속에 숨겨져 있는 무엇. 하위징어의 말처럼 시인과 원시인과 어린아이가 사실상 동류의 존재라면, “기타 등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는 시인이자 마녀의 또 다른 형상이 된다. 오직 이 유희하는 아이만이 이 이름없고 입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가능성을 지닐 수 있기에. 다종다양한 유령들의 존재를 ‘기타’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리고 배제하는 세계에 맞서 그 이면에 감추어진 “기타 소리 등등등……”을 들으려는 자. 그러니 이 비로소 죽은 자이자 마녀인 시인은 튕겨지는 기타 소리의 미묘한 진동과 희미한 소리의 가능성 그 자체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중요한 지점은 “등등 속에서 사람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죽음의 이면 속에서 비로소 유령들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을 ‘오래 징그럽도록’ 바라보고 있는 자의 표정과 시선이 어떠한가를 묻는 것에 있다. 이미 죽은 자인 시인이 비로소 죽은 자인 마녀를 탄생시키며, 그것을 통해 ‘기타’라는 이름 안에 묻혀있는 유령들을 다시금 불러내고 존속시키기. 이것이 죽음을 사유하는 시인의 궁극적 지향점이 된다. 마녀가 된 시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하며,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의 파편화되고 혼돈에 가까운 언어들의 미궁은 오직 그 ‘징그러운’ 목적을 위해서 존속한다. “야무지고 억척스럽게// 살아남”(「빈 하늘에 기도문」)으면서. 마녀로서의 목소리가 왜 존재하는가를 명확하게 ‘느끼’고 ‘확신’하면서.
내가 하는 가장 비범한 것은 칼 쓰는 일,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스스로 느꼈을 것이다. 어둠이 무섭지 않은
지금 어느 때보다 훌륭하게 칼을 쓸 수 있었다. 세포 하나
하나의 떨림과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기거나 운이 좋은 경
우 팔이나 다리, 손가락 정도를 빼앗길 상대방의 숨결이나
체온, 때로는 기운이나 혼이라 부를 만한 게 느껴졌으므
로 나는, 나의 운명에 대해서 황홀하게 받아들이고 도취하
고 말았다.
내가 남이 되지 않는 이상 나의 칼쓰는 모습을 보지 못
할 테지만
나는 내 모습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름
다워야 했다. 밤은 깊었고 칼은 빛났으며 옷은 희었다. 내
발밑으로 검집인 붉은 천이 휘몰아치듯 떨어져 있는데 그
것은 내 피도 아니고 상대의 피도 아니었지만 어쩐지 소용
돌이치는 기운같이 느껴지는 것. 붉은 부적처럼, 문양처럼
내 발밑에 스르륵 나타나, 내가 칼을 잡고 휘두를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알려 주듯이 내가 그 부적 속에서 솟아난
새하얀 악귀나 고결한 도깨비라도 되는 양, 아름다울 것이
며 무서울 것. 밤. 바닥에 붉은 문양이 새겨지면 새겨질 수
록 나는 이름을 알렸고 그런 외형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 사랑이여. 나는 남편에게 병아리를 사 주었다. 남편
은 기뻐했다. 한 쌍이었으므로.
칼이 가깝다는 것, 이름을 널리 알린다는 것은 곧 죽음
과 가깝다는 뜻이다. 아마도 나는 두려움이 많은 성격 탓
에 예전에는 생업에 게을렀는지 모른다. 그래서 병을 얻었
을지도 모를 일인데
나는 생업으로서의 칼 씀이 아닌 자신을 악귀나 도깨비,
그것도 아니면 세상의 것을 벗어난 아름다운 무엇으로 느
끼며, 아름답고 초월적인 존재가 칼을 씀으로 표출되는 것
을 느끼며 내가 왜 운명적으로 칼잡이로 태어났는지 알 수
있게 되었고 왜 악사가 아니 되었는지도 알 것만 같았다.
우리는 결국 들린 존재들. 칼이 내 악기이자 내 몸 자체
가 악기이니 내 칼과 나는 서로 공명 중인 것.
-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부분
시인은 시집의 표제시인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의 마지막에 다음처럼 언급한다. “나는 칼을 쓰는 일이 나를 살게 하는 환희와 죽고 싶게 만드는 비참한 고통을 동시에 주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칼 쓰기에 더욱 매료되었다. 보이지 않는 칼날을 더듬어 깨끗하게 손질하고 내 몸처럼 아꼈다”고. 그리하여 “나는 이제 어둠이므로 밤이 무섭지 않다. 오 좋은 시절.”을 감각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 광기어린 주술적인 언어들의 목적지점. 마녀는 왜 낮이 아닌 밤의 시간에 칼을 휘두르며 자신과 언어와 정신인 ‘칼’을 일치시키는 것일까. 왜 “나는 내 이름을 가장 많이 발음한 사람이 아”(「내 이름 몸뚱이에 새겨 넣은 네가」)닐 수 있을까.
아마도 이는 어둠으로부터 탄생한, 혹은 비로소 죽은 자로서 자신을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행위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신’의 표상인 칼과 자신의 몸과 언어를 일치시키는 것이며,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할 죽은 잔여들을 불러일으키는 태도이기도 하다. 확실히 이 마녀의 영역은 시집의 해설에서 언급된 대로 ‘결코 자아의 비대한 확장이라고 볼 수 없는 무시무시한 연결망, 즉 그 자체로 횡단하는 신체’(184면)에 대한 시인의 근원적 욕망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부분은 스스로를 구축하려는 엄결한 욕망의 표정에 있다.
시인의 말처럼 언어란 “나를 살게 하는 환희화 죽고 싶게 만드는 비참한 고통을 동시에 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철저한 자의식을 통해 시인이자 마녀의 언어는 말한다. 자신의 운명을. “남들이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 스스로 느꼈을” 이 운명은 시인에게 죽은 자로서의 근본적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고지한다. 이미 죽은 자인 시인이 비로소 죽은 자인 마녀로 변신하게 되는 그 지점. 시인은 운명으로부터 부여된 의무를 철저하게 행한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나의 운명에 대해 황홀하게 받아들이고 도취하고 말았다.”고.
비로소 죽은 자로서 자신의 운명을, 마녀의 언어가 존속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기에 시인은 비로소 “내 모습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아름다워야만 한다.” 자신의 언어와 정신(칼)에 대한 의무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기. ‘붉은 부적’이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표식인 “문양”을 바라보는 자로서. 즉 “그 부적 속에서 솟아난/새하얀 악귀나 고결한 도깨비”처럼 스스로를 언어와 정신의 샤먼으로서 재탄생시키는 행위를 수행하기. 시인이 말하고 있는 ‘죽음’의 이면이자 형상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파편화된 ‘기타 등등’의 잔여들로부터 재탄생되는 시인의 육체는 그러하기에 삶이 아닌 ‘죽음’, 낮이 아닌 ‘밤’의 세계에, 언어의 객관적 재현이 아닌, 피를 머금고 있는 정신의 심연이라 할 ‘어둠’으로부터 오게 된다. 이것은 ‘병들어 있는’, ‘아름다우며 무서운’ 마녀의 형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 형성된 마녀의 시선은 “세상의 것을 벗어난 아름다운 무엇으로 느/끼며, 아름답고 초월적인 존재가 칼을 씀으로 표출되는 것”만을 인식하고 행한다. “칼이 내 악기이자 내 몸 자체”이며, ‘악기이자 내 칼이며 나와 서로 공명’하며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 시인의 언어에 대한 태도가 바로 이러하다. 그러니 시집 전체에 붙들려 있는 진득한 피와 ‘비릿한 냄새들’의 근본적 정체는 이 정신이자 말의 도끼이고 칼같은 휘두름을 통해 탄생하는 산물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오직 ‘들림’으로서만 부여되는 이름과 말의 세계를 향해 시인은 자신을 칼로 만들며 이 무가치한 세계를 파괴하고 붕괴시킬 따름이다. 이미 죽은 자가 비로소 죽은 자에게 부여한 ‘운명’이자 시인으로서 언어에 매달려야 하는 존재론적 이유.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진득한 피를 머금고 있는 시인의 이 처절한 행위가 역설적으로 ‘사랑의 행위’라는 점에 있다. “아 사랑이여”란 시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닌 어떤 울림처럼. 하여 우리가 이 분노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노하는 사랑이며, 동시에 잔여들과 무관한 중심의 세계들을 붕괴시키려는 파괴적 사랑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무가치한 세계를 붕괴 이후 도래하는 잔여들의 세계란 어떠한가. “끈적거리는 바큇자국처럼/ 길게”(「서킷으로」) 흔적같은 잔해들을 통해서, 정신과 언어와 육체가 공명하여 탄생할 새로운 가능성의 영역들. 시인의 사랑이 바로 그것을 향해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확하게 바라봐야 한다. 그녀는 단지 그것만을 위해 말하며 또한 본다. 이 세계에 대해 ‘기분나쁠 예정이기에 뱉은 말은 지킨다’고 중얼거리며, “영원히 놀리는 내 혀를 느끼”면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말들이란 이 마녀가 지닌 “최종무기”이자, “내일도 살려고 오늘은 죽지 않고” 존속할 나이자 잔여들의 세계를 스스로 명료하게 긍정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말이다.
! 예술가의 숭고한 희생 아니다, 위대한 시보다 자신
을 더 사랑한다, 그가 시 안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면 자기 자신 때문이다, 자신을 다스린다, 시가 무한
해 봤자 그릇, 내 정신을 가둔다면 결국 나한테 깨질
것, 내벽도 없는 시한테 들러붙어 시를 잡아먹을 예
정, 우주를 잡아먹을 것, 너네는 영원히 놀리는 내 혀
를 느껴야 할 것, 등 뒤의 기척에 돌아보면 아무도 없
을 것, 기분 나쁠 예정이므로 나는 뱉은 말을 지킨다,
이 협박을 최종 무기로 내일도 살려고 오늘은 죽
지 않고 여기에 내 애기무당 하나를 가둔다.
- 「마 푸어 베이베」 중에서
3. 이탈되고 부정한 ‘폭탄’같은 사랑의 진정성
나는 눈을 감고
너의 호칭을 상상하고
레몬을 깨문 것처럼 공감각적으로 부른다
멀리서
우린 그걸 아름답다 한다
명당자리를 찾아 구경한다
- 「불꽃축제」 중에서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는 이 마녀의 ‘사랑’이 무가치한 세계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불온한 죄에 불과하다는 것에 있겠다. 이해될 수 없고 불온한 말들의 영역이란 중심적인 세계의 입장에서 필요 없는 ‘기타’에 불과하며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을 따름이니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혹은 사회의 교환적 가치에 충실히 복무하는 사랑이란 이미 우리 주변의 미디어들 속에서도 지겹도록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안온하게 우리를 위로하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들에게 자신들의 방식만을 무의식적으로 강요하는 세계. 그 세계 속에 있는 우리는 편안하고 안락하며 또한 행복할 것이다. 세계로부터 만들어졌으며 부여된 그 환상들 속에서 그저 안온하게 말이다.
오늘날 인간의 삶 속에서 넘쳐나는 환상들과 다른, 마녀의 폭탄같은 이질적이며 불온한 말들의 존재 이유라 해야 할 것. 저 편안한 세계와 다른 폭력적인 사랑의 본질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세계가 아닌 스스로의 잔해들을 통해서만 존속하게 될 잔해들의 말과 입. 그렇다면 우리는 비로소 죽은 자이자 이 마녀의 언어화되기 불가능한 사랑을 어떻게 감각해 볼 수 있을까. “레몬을 깨문 것처럼 공감각적으로”만 불러낼 수 있는 “긴장되고 흥분된/ 사냥꾼이자 사냥감인/ 내가 나를 쫓아// 온몸을 벗어 놓고 비틀거”(「활」)릴 이 폭력적인 사랑의 본질을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 사랑을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미래를 읽은 죄로 내 살만 불어 갔다
아침
수학 선생에게 이유 없이 따귀 맞고 위로받는 사람
오후의 체력장 오래달리기 할 때에 떠올리는 사람
나의 연인
영과의 만남이 미뤄지고
스물여섯 살의 내가 수신자 없는
편지를 내다 버리고 아홉 살의 밤나무 숲엔 깨진 양변
기와 고기 타는 냄새와 봉인된
편지봉투가 굴러다닌다 내 나이 사이에 갇힌
버려진 편지를 영이 줍는 날
여름이 뛰어넘어 영이 온다
나의 연인 어느 고백에 따르면
드디어 악몽을 걷듯 느리게 온다 나는 천기누설의 죗값
치르며 마중 간다
맨발로 밤송이 밟으며 간다.
- 「첫사랑」, 부분
영이란 이름에서도 연상되는 것이지만, 시인이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영혼이기도 할 것이다. 자신의 영혼만을 바라보는 비로소 죽은 자로서, 시인은 세계에 대한 부적응기를 기록한다. 시인이 부적응할 수밖에 없는 세계란 그렇다면 어떠한가. 그곳은 “수학선생에게 이유 없이 따귀 맞”는 세계이자 “오후의 체력장 오래달리기”를 죽도록 반복해야 하는 곳에 다름 아니다. 그러한 현실의 세계 속에서 시인은 “미래를 읽은 죄로 내 살만 불려”간다. 징그럽도록 불어가고 있는 내 육체 속에 감춰진 잔여들의 공간을 위해.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앞서 말했듯 시인이자 마녀의 사랑을 일반적 남녀관계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다. 시인의 사랑은 마녀로서의 자신을 향해 있는 것이기에. ‘나의 연인인 영’을 향해서, 그 이름에서 연상되듯 자신의 진정한 영혼을 위해서, 시인은 사랑할 뿐이다. 시인이자 마녀는 “동정심 없는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사귀”는 존재이자 “고통스런 사랑을 하는 원인”(「동병쌍년」)인 잠재되어 있는 잔여들의 목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의무로부터 항상 출발하니까. 이 이탈적이고 불온한 사랑은 그렇기에 “수신자가 없는 편지”일 수밖에 없다. 아무도 그 편지 안에 씌여진 문자를 읽을 수 없도록 ‘봉인’되고 ‘버려져’ 있기에. 잔여들의 목소리는 그렇게 놓여져 있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문제적 지점은 바로 ‘수신자 없는 편지를 내다 버린 스물 여섯 살의 나’와 ‘아홉살의 밤나무 숲에 있던 나’의 간극일 것이다. 이 간극을 인식할 수 있는 자만이 불온하고 이탈적인 사랑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다. “몸을 지키는 이유는/ 살기 위해서입니다 무엇 하나 놓쳐서는 안되는/ 여러 조각난 사랑”(「구멍」)을 위해서 쓰는 것처럼, 이 불온하고 이탈적인 사랑의 영역에서만 삶은 존재할 수 있게 되니까. 그 간극 속에 놓여진 불길하고 음울한 잔여들의 “밤나무 숲속” ‘미래’의 편지인 것. ‘봉인’되어 있어 지금은 읽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그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고 있다는 바로 그 지점. 요컨대 비로소 죽은 자인 마녀는 이 측면에서 불가능한 무언가들에 대한 사랑을 욕망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 ‘버려진 편지를 영이 줍던 날’이 도래한다는 것은 그저 시간이 흘러 우리에게 당연히 도달하게 되는 미래와 무관한 어떤 것이 된다. “여름을 뛰어넘어 영이 오던 날”처럼, 나의 내면을 인식하는 “고백에 따르면”, 그것은 징그러운 “악몽을 걷듯 느리게” 올 뿐이다. 그 ‘악몽같은’ 잔여들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은 세계의 법칙을 위반하는 것이며 “천기누설의 죄”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보자. 시인은 자신의 피로서 그 댓가를 치를 의지가 충만해 있다. “맨발로 밤송이 밟”는 실존적 고통을 겪어가며 마녀는 죽은 자들의 세계로부터 도래하는 잔여들이자 그 자신에게 말을 부여하려는 의지에 속하려 한다. 그 고통과 쾌락의 동질성이 바로 마녀의 ‘칼날’같은 사랑의 원천이 된다. 즉 사랑의 본질적 양상이자 “니트로글리세린이 폭발”하는 것 같은 힘으로 존속하기를 마녀는 원한다.
지금의 말보다 더 쫀득한 말을 혀 위에 굴리고 싶어. 아
빠의 협심증과 혀 밑에 넣고 있는 니트로글리세린, 그런 짜
릿함을 혀 위에 굴리고 싶어. 니트로글리세린이 폭발하기
전에 혈관을 확장시켜 주러 왔어요. 고마운 일이지 고마운
일이야. 나는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
런 말을 모르니까. 알고 싶어 죽겠으니까. 차라리 외국인처
럼 말하고 싶어. 불가리아나 과테말라의 말. 언어가 아닌
습관을 말하고 싶어. 태도를 말하고 싶어. 기후와 풍토를
말하고 싶어.
마르코는 떠났지. 산 섧고 물길 설워도. 엄마 찾아 3만
리는 최양락 버전이 제일 좋아요, 트롯처럼 말하고 싶어.
두 번 꺾고 말하고 싶어. 그와 나 사이에 꺽이는 부등호.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위에서, 언젠가 잃어버릴 말들이지만,
기호와 부호를 섞어서 말하고 싶어. 떠나지 못한 내가 잃어
버리는 것, 떠난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 낯선 곳에서, 익숙
한 동네에서, 갈라지는 길 위에서. 공대생처럼 말하고 싶어.
먼 곳까지 닿고 싶어.
- 「노벨 화학상을 받을 노래」, 부분
말이 폭탄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지금의 말보다 더 쫀득한 말을 혀 위에 굴리고” “혀 밑에 넣고 있는 니트로글리세린”을 섬세하게 그것을 “폭발”시키기. 시인은 말한다. “그런 짜릿함을 혀 위에 굴리고 싶”다고, 언어라는 폭탄을 이 무가치한 세계에 투척하고 그것으로 세계를 증오하며 붕괴시킨다는 행위. 시인은 자신의 언어가 지닌 근본적인 목적성에 그저 철저하도록 투신한다. 그것이 바로 “공대생처럼 말하고 싶어”라는 말의 근본적 함의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의 행위는 “고마운 일이” 될 수밖에. ‘알고자 하며’ 지혜를 원하는 마녀의 시선은 따라서 언어를 자신의 ‘혀 위에서 굴리며’ ‘니트로글리세의 폭발’을 감당하려 하고 있으니까. 세계의 익숙하고 또한 객관적인 언어의 체계를 넘어서려는 폭탄같은 유희를 통해 마녀는 “차라리 외국인처럼 말하고 싶”어 한다. “불가리아나 과테말라의 말”로서. 언어라는 표면적 의미체계를 넘어선 “습관”으로만 감각하게 될 그 희미한 가능성과 태도를. 이 언어들 속에 감각되는 “기후와 풍토를”. 하여 시인은 스스로를 잔여들의 세계이자 말의 근원적 지혜를 찾아 떠나는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로 호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의해야 하는 지점은 시인의 이 처절하도록 엄정한 의식이 우리가 당연히 생각할 수 있듯이 그저 진지하기만 한 포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주로 웃는 용”이란 직접적 발화처럼 “너넨 왜 내가 늘 진지 빨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개체 차이 모르니?”(「웃는 용」)라는 시인의 질문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의 언어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지평과 무관하게 마녀는 자신만의 행로를 언어 속에서 지속한다. 고유한 유희로서. “산 섧고 물길 설워도 엄마 찾아 3만/리는 최양락 버전이 제일 좋”다고 중얼거리며. (참고로 최양락의 해당 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보길 권한다) 이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위해서”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는 시간과 공간 역시 알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언어가 지닌 유일한 목적만을 의식하면서.
이 파편화된 언어들의 미궁이 구축한 세계는 마녀의 발걸음이 언젠가 도달해야만 하는 시인의 근원적인 기원이 된다. 그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잃어버릴 말들이지만,/ 기호와 부호를 섞어서 말하고 싶”다고. 파편화되어 언어를 거치지 않고서는 전달될 수 없는 마음들의 영역. “떠나지 못한 내가 잃어버”려야만이 진정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 그저 “태도”로서만이 가능하며, 그 세계로부터 “떠난 사람들이 잃어버”려 볼 수 없게 된 그 무언가의 시공간을. 그저 자신의 언어에만 의지하며, “공대생처럼 말하”며, “먼곳까지 닿”게 될 그 말해지지 않음의 언어적 형상들을 시인은 기다리고 있는 것인 셈이다.
이 사유의 행위를 수행할 때만이 시인은 우리의 세계와 무관하게 아무것에도 기대하지 않는 마녀로서 존속할 것이다. “사람의 역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전환점을 맞”(「선배-유적」)게 되어야 한다는 것. “나는 뭘 믿어야 하지? 다 믿기질 않는데”라고 말하며 단지 “나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게 내 영혼이라는 것”(「새해」)을 믿지 않으며 믿는다는 불가능한 모순의 영역에 도달해야 하는 자. 그 유희를 시인은 ‘어려워하지 않’으며 멈추지 않으려 한다. “가위를 넣어 꿰맨 배”처럼 파편화된 잔여들 그 자체가 되는 불가능한 가능함으로. ‘니트로글리세린의 쫀득한 짜릿함’을 믿으며 ‘유희’의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도박하는 인간적인 인간이 되기.
따라서 그 ‘먼 곳에 도달할’ 도달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지리멸렬과 생각의 연산, 뒤죽/ 박죽/ 촛농의 알고리즘”을 스스로 신뢰하며 길을 만드는 자만이 쓰는 자가 될 것이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만 존재하게 될 “쾅!” 소리만에 대한 믿음을 외쳐대는 마녀로서 말이다.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이 불가해한 말들의 힘들 속에서 마녀의 ‘폭탄’같은 사랑이 지닌 본질적 양상. 이것이 바로 권민경 시인이 구축하는 ‘아름답지 않고 무서운’ ‘징그러움’이자 잔여들과 유령들의 칼날이 존재하는 이유이자 그 형상일 것이다.
자주 빨개진
몸 내보이는 건 어렵지 않으니
이제 진짜 나를 늘어놓는다
가위를 넣은 채 꿰맨 배
코발트 블루(#003FFF), 지리멸렬과 생각의 연산, 뒤죽
박죽
촛농의 알고리즘을
셈 못하는 군수업자가 천 억 들여 장만한
쾅!을
- 「밑천」 중에서
4. 이 미친 언어들의 몸짓을
지금 어디야?
네가 있는 곳
햇살, 악수, 핏줄이 비치는 손등,
비문증
휘몰아치네
꽃잎?
이야기-
쫓는다
그걸 잡으면
사랑을 이룬다는 미신
초자연적으로
사라지기 직전의 나들
껴안고 싶다
거기 없어서 정말
먄
- 「4월 30일」 중에서
시인이자 마녀인 존재. 이미 죽은 자가 비로소 죽은 자가 된다는 것. 언어를 믿지 않으며 자신의 유희만을 믿는 자는 왜 쓰는가에 대해 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언어의 세계가 우리의 표면적이고 객관적인 의미와 무관하게 손을 뻗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거대한 구멍‘(「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그 이름할 수 없는 세계를 감각하고 다가가야만 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해질까. 어떤 점에서 그것은 “사랑을 이룬다는 미신”을 믿으며, 이 세계로부터 “초자연적으로/ 사라지기 직전의 나들”을 “껴안”는 행위 자체라는 점에서도 중요할 것이다.
요컨대 이 유령같은 잔여들의 세계에 대해 “먄”(미안)하다고 중얼거리는 행위란 결국 시인으로서 쓰는 자의 숙명을 감당하려는 자의 마음의 흔적이기도 하다. 말과 입이 부여되지 못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그들에 불가능한 말을 (불)가능하게 부여하기. 혹은 ‘씌여지지 않은 것을 읽어내는 천사’(발터 벤야민)의 시선 속에서 우리가 알지 못한 파국이란 현재를 바라보기. 단지 새로운 ‘오늘’을 꿈꾸는 자일 것. 이를 염두에 두고 시집의 맨 뒤에 실려있는 「맺음, 말 – 하고 듣고」를 마지막으로 살펴보자.
쓰는 건 내가 아닙니다 내 손은 언덕 너머에 있으니
누군가의 이력을 빌려 쓰는 글 몸 안에 축적되는 수은
처럼
떨쳐 버릴 수 없어 뼈와 근육과 피 모든 유기물과 구분
되지
않는 생 중입니다 노래입니다 뜻과 내용을
담지 않는 소리, 깍깍 혹은 으르렁대는 본능입니다 어린
날은
태어났고 볼거리를 않지 않았습니다 맞지 않는 일기예
보처럼
내일은 내일로 이어집니다 출근 길에 길어지는 사람들 얼
굴에서 날 읽습니다
(…)
나는 나의 출발지를 적으려다 실패합니다
남의 이름만 되뇌다 멈춥니다 유리 공장에서 잘린
내 손목이 아직 언덕 너머에 있으므로
시시각각 다가오는
숫자와 숫자
사고의 비약
연속
- 「맺음, 말 - 하고 듣고」, 부분
위 시는 아마도 시인 스스로 사유하고 있는 진정한 시의 언어란 어디로부터 오는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적어도 그녀에게 확실한 것 중 하나는 시적인 것의 원천이 현상적인 나에게 있지 않다는 점이다. “쓰는 건 내가 아닙니다 내 손은 언덕 너머에 있”다는 시인의 말처럼, “누군가의 이력을 빌려쓰는 글”이야 말로 시적인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하여 “몸 안에 축적되는 수은/처럼/ 떨쳐버릴 수 없어 뼈와 근육과 피 모든 유기물과 구분되지 않은 생”을 진정으로 살아간다는 것. 유령과 잔여들과 말과 입이 없는 자들의 세계 속에 스스로 속한다는 것. 그러한 “노래”만이 이 마녀의 목소리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여 시인은 실패하고 멈춰야만 한다. “유리 공장에서 잘린 내” 써야하는 “손목이 아직 언덕 너머에 있으므로.
시인이자 마녀는 이 ‘노래’이자 시적인 것을 위해 그저 중얼거린다. “뜻과 내용을 담지 않는 소리”이자 “꺅꺅 혹은 으르렁대는 본능”처럼 세계의 무가치함을 불가능한 말들로 맞서기 위해. 이 무질서해보이고 파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언어의 미궁 속에서 헤매이며 머물기. 헤매이지 않는 자에게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심연이 여기에 있다. 바로 그 “출발점”을 위한 실패인 것.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다. 마녀인 시인은 나의 말이 아닌, “남의 이름만 되니이다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유령같은 잔여들에 대한 믿음이 없는 우리들은 영원토록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언어들의 미궁 속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숫자와 숫자/ 사고의 비약”을 가능하게 할 어떤 연속들에 대한 ‘폭탄’같은 사랑일 뿐이라는 점을.
그러니 “좆같이 부서져 있”(「2018 예술인 심리상담 지원」)는 “내 몸엔 점/이 여러 개 사람은 내장에도 점이 난다지 슬픔은 내부의/ 점 같은 것 그러니까 그냥 둘 수밖에”(「담담」) 없다는 것을 나지막히 고백하는 시인의 마음이 스스로이자 잔여들의 세계를 오롯하게 향해 있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미 죽은 자의 고통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통해 태어난 폭탄같은 사랑의 마음은 비로소 죽은 자인 유령들의 세계로부터 오고 있다는 진실을. 그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그저 ‘무릎 꿇은’ 채로 이 미친 언어들의 몸짓에게만 기도하며, “모든 가능성을 활짝 연/내가 가장 강하다는 걸 믿”(「장래희망- 내일 할 일」)어 의심치 않는 마녀의 마음과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와 죽을 때’에 비로소 ‘살아 있게 될’ 목소리의 미묘한 잔향들을 통해서. 이 솟아오르는 ‘헬륨같은 깔깔대는 웃음소리’의 다층적인 울림들을 오래도록 퍼트리면서.
보세요 예수님 우리들이 했어요 슬픔 속에 태어나 엉망
진창으로 자라자! 감사합니다 몸을 빠져나갈 때 헬륨으로
충만해져 있을 테니 깔깔깔 웃으며 천장을 향해 솟아오르
자 일제히
이제 와 우리 죽을 때, 하! 살게 하리!
- 「어린이 미사 2」 중에서
김정현.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너는 이제 ‘미지’의 즐거움일 것이다(황인찬론)」로 등단했다. 현재 『학산문학』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부산가톨릭대학교 인성교양학부에 재직하면서 문학과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공저로 『한국 근대시의 사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