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만나라
33: 17-23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가로되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22.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
멀티 미디어의 세계가 어디까지 진행될까?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지난주간 보냈습니다. 막힌 길에서 신속한 교통정보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였습니다. 10시간씩 차안에 있으면서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라디오와 휴대전화라는 매체를 통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신속한 길을 찾기 위해 애를 쓴 한 주간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차안에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저의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만약 ! 이렇게 시작되는 21세기 미래형 교회는 아마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요즘 e-learning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인터넷을 통해서 성경공부가 실시되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로 올 필요도 없어지고, 바빠서 출근한 남자성도들도 회사에서 고화질 HDTV를 통해서 화상으로 담임목사님과 상담을 하고, 목사님도 설교시간에 마태복음 24장 32절의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설명하신다면 예루살렘과 실시간에 컴퓨터로 연결하여 지금 감람산의 무화과 나무를 대형 화면을 통해서 보여주시면서 설교하시고, 이스라엘의 광야길도 3D 입체 영상으로 마치 우리가 광야길을 걷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보여주시면서 은혜스러운 설교를 하신다. 심방도 온라인으로 화상으로 심방을 하고, 심지어는 헌금도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는 전자화폐로 결제하면 은행구좌에서 자동으로 이체된다. 그러면 아마 온라인 예배 후에는 이런 메시지 창이 뜰 것이다.
현금으로 헌금을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카드로 헌금을 하시겠습니까? 카드로 헌금하실 분은 1번을, 현금 인출을 이용해 자동이체를 원하시는 분은 2번을 눌러 주십시오. 기타 다른 방법은 3번을 눌러 주십시오라는 메시지 창이 뜰 것입니다."
더 우스운 것은 카드로 헌금을 결제하면 3개월 무이자로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목사는 어떻게 변신해야 하나? 이제 목사는 비디오 형 목사가 뜰 거야. 화면에 은혜스럽게 보이기 위해 화장도 하고, 옷도 근엄하고 경건한 모습이 배어 나오는 옷을 입고 설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생각 끝에 한가지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런 컴퓨터와 화상 설교, 교육을 통해서 과연 하나님을 가슴으로 느끼게 해 줄 수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너무 생생하게 보이니 도리어 우리의 심령으로 느끼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우리 성도들이 앞으로는 놓치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여러분들에게 오늘 하고자 합니다. 욥은 고통중에서 23장 3절에서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라고 했습니다. 아직도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부르짖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보다 더 확실하게 느끼고 싶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들 모두가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고 우리 육신에 눈에 보인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그래도 미미하나마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그 심령이 피폐해 있는 상태라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느끼느냐? 못 느끼느냐?에 따라 믿는다, 혹은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온 몸으로 매 시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찾을 수 있는 방법이 그러면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들을 짚어보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연구하고, 몸부림치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일 원시적인 방법입니다만, 가장 보편적으로 초신자인 경우 이런 방법들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의 본능적인 직관과 느낌을 좇는 형태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우리 심령안에 '내적인 빛'과 같은 것을 하나님이 비추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내적인 빛을 따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안에 '내적인 빛'을 따라 가기만 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비주의자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타락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과 몸부림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이성과 지혜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라는 것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연구하고 관찰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물론 아무런 하자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가장 선한 것이 있다고 믿고 그 선한 것을 찾는다고 해서 가장 선한 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헬라 철학에 젖어있는 헬라인들에게는 아주 의미심장한 말이었습니다.
"똑똑하다고 난체하는 헬라인들아 ! 너희들의 이성과 지식이 아무리 뛰어난다고 해도 결국 그 지혜와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야"
왜 우리는 그러면 우리 심령의 내적인 빛으로 달려들어가도, 그리고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단 말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첫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이 너무 광대하시고, 무한하시다는 이유입니다.
너무 무한하시고 완벽한 인격을 특성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한정된 이성이나 추리, 직관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죄악에 빠져 있는 우리 인간들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는 것을 더욱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기 좋은 최적의 조건속에서 우리가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기란 사실 더 어려워졌는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이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어려워질 것 같습니다.
신세대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만, 신세대는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사람들은 절대 개인적입니다. 자신의 삶의 질을 가장 존중하고 최대 가치로 여깁니다. 심지어 부부조차도 자신들의 삶이 간섭받기를 싫어하여 아기 갖기를 거부하고 삽니다. 이런 사람들을 딩크족(DINK:Double Income No Kids)이라고 한다.
또 신세대들은 흥미본위입니다. 한 달에 용돈이 100만원도 모자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즐거운 일이라면 어떤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신세대들의 세 번째 특성은 자연스러움을 좋아합니다. 모자도 바로 쓰지 않습니다. 남의 눈은 의식하지 않고 되는대로 옷을 입습니다.
신세대들의 또 다른 특징은 성별 구분이 모호합니다. 또 자기 사랑이 극진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이 자기 사랑이 극진한 신세대들에게 순종과 헌신을 강조하는 교회는 이들에게 터부시해야 하는 금기사항 1호입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더 어려워진 세상에 우리는 던져져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발견하기가 정말 어려운 것으로만 끝날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우리에게 지금 보여 주시길 원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키울 때 이런 장난을 한 기억이 납니다. 아주 가까운 벽에 붙어서 아이가 안보이는 곳에 있다가 갑자기 아이의 눈앞에 짠하고 나타나면 아이가 좋아서 까르르 웃습니다. 아빠가 갑자기 안 보이다가 눈앞에 보이면 그것이 신기하고 좋은 모양입니다. 지금 다 큰 녀석에게 그런 장난을 하면 도리어 저를 우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마치 아빠가 아이에게 숨어 있다가 나타나면 좋아하듯, 우리에게 나타나시길 좋아하시고 우리들도 그렇게 아버지가 나타나는 것 외에는 아버지를 도대체 제대로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 주셔야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속에도 당신의 흔적을 남기셨고, 만물의 질서, 보존, 유지시키는 섭리라는 당신의 계획을 진행시키시고 있고, 역사 속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결과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을 두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그 하나는 일반계시라고 하고, 또 하나는 특별계시라고 합니다.
일반계시라 함은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자연을 통해서 이성이라는 도구로 어느 정도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장 19절에서 20절 말씀을 보면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 말씀은 피조물인 이 자연 세계 속에 하나님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반 게시는 만물을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자연적인 현상, 그리고 우리의 역사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특별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특별히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 있는데 그 하나가 성경이고, 또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특별한 지식을 오직 성경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종교적인 탐구를 해 놓은 책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준 책이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영도하기 위해 자신의 부족함을 누누이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모세의 의견을 묵살하시고 계속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모세는 그렇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그 때 하나님은 나를 보게 되면 너는 죽게 된다는 엄한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모세는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등만 보여주시는 영광을 모세에게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바로 하나님이 모세에게 자기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 주어야만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보여준 사건이 기록된 책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은 우리를 복되게 하는 이유는 복되신 하나님이 당신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지 않았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만날 수 없습니다. 이 계시의 말씀, 즉 성경은 그러기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굳게 서야 합니다.
오늘 광고 해 드린 것처럼 25일부터 성경 통독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과 함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하는 행사이니 열심있는 사람들만 참석하고 나는 그냥 방관하며 남아 있으련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두 참석하셔서 은혜의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영광을 체험하는 귀한 시간들이 되길 바라면서 성경 말씀을 사모하며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