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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1] 윤관 장군의 묘소를 찾아서
* 촬영 : 이재익 시인 , 2013.04.29.
-파평 윤씨 윤관 장군 묘역
-부근에 청송 심씨 영의정 심지원 묘역
- 파평 윤씨 윤관 장군 묘 바로 위에 있었던 심씨들의 묘를 심지원 묘 부근으로
이장 하면서 묘지 문제로 오래 다투어 온 두 문중이 화해하게 됐다.
[ 2] 조선 영의정 심지원 沈之源 묘역
[1] 윤관 장군 묘소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1. 오늘 따라 4월말경의 봄날씨가 화창하다.
2. 홍살문 너머로 묘역이 규모 있게 펼쳐져 있다.
♣ 고려시대 여진과 윤관 장군
1) 여진족, 만주족
- 동부 만주(滿洲)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민족. 여진 또는 여직(女直)
- 춘추전국시대 숙신(肅愼), 한(漢)나라 때 읍루(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당(唐)나라 때는 말갈(靺鞨)로 불리었다.
-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였고, 청나라 때는 만주족이라고 불렀다.
-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2) 윤관의 여진정벌
- 숙종 때 만주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의 추장 영가(盈歌)가 북간도 지방을 통일한 후 아들 우야소[烏雅束]가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하여 있던 동여진을 아우르고, 정주를 경계로 하여 고려와 충돌함. 숙종 때 임간(林幹) 다음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에 모두 실패하였다.
- 윤관(? ~1111), 본관 파평(坡平), 문종 때 문과에 급제,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산소. 고조부 윤신달은 태조를 도운 삼한 공신임.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장상이 된 후 전쟁에 나갈 때에도 경서를 가지고 다님.
- 윤관은 숙종 9년(1104)년 별무반(別武班)을 편성, 1107년(예종 2) 총사령관 윤관, 부원수 오연총(吳延寵)이 17만 대군으로 여진을 물리치고 9성을 쌓았다
1년 7개월만에 반환함. 그 이유는 여진족이 환부(還附)를 애걸, 수비의 곤란 및 보수세력의 성장 때문이었다.
- 윤관은 전장에서는 이기고 정치의 마당에서 자기도 모르게 지고만 전쟁이었다. 이기고도 패군지장으로 몰린 비극의 장군. 아들 다섯중 둘이나 승려가 되었음은 아버지의 한이 맺힌 심정을 헤아리게 한다. 인종 8년에 예종의 사당에 배향하고 시호는 문숙(文肅).
3) 금에 사대
- 예종 1년 1115년 아구타[阿骨打]가 金건국. 1125년(인종 3) 요나라를 멸한 뒤, 1126년 금나라는 고려에 事大의 예를 강요, 이자겸이 수락, 사신을 보내 상표 칭신(上表 稱臣)
→ 북진정책 좌절, 고려사회는 내분만 격화되어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야기
3. 남부지방에서 3월 하순에 피는 목련이 파주에서는 4월 말경인데 아직 피어 있다.
4. 윤관 장군의 친필과 7세 어린이 적에 지은 시를 기록하고 풀이한 비석이다.
아래는 이 내용을 5부분으로 나누어 본 것이다.
4-1 : 첫째 윤관의 친필 부분
4-2 둘째, 친필을 풀이하기 위해 후손이 단락을 나눠 본 것이다.
4-3. 후손이 좀 더 쉽게 우리말로 해석한 것이다.
관외(먼 지역)에 명을 받든 후 오래 적조하였소.
천은(임금의 은혜)이 망극(매우 커)해서 그 중에도 사명을 다했소이다.
나에게 성심 있는 자 있어 간혹 승당(승진)시처럼
주연을 베풀어 영화롭게 하니 이 또한 천은이거늘
이제 마침 영감이 윤경과 더불어 온다하니 분에 넘치는구려.
명일(내일)에 윤경과 같이 온다함은 틀림없이 나의 벗이 되려하나
주연을 베풀어 나이 많은 늙은이를 위로한다함은
틀림없이 아주 저버리지는 아니함이로세.
거듭 바라는 바 절절하오.
경백 관 (윤관은 공경하여 사룁니다. 경백은 편지 끝에 쓰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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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충해설
( )속에 보충 말은 이재익 주
윤관이 변방에서 근무하여 공을 세우니, 왕이 위로하기 위해 신하를 보내서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고자 한다. 본인은 윤경潤卿을 주연을 베푸는 일을 담당하는 실무자로 파악한다.
윤관은 위로하러 오는 분에게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편지를 써 보낸 것으로 보인다.
4-4. 윤관이 7세 때 지은 한시, 뽕나무를 읊은 것이다. 필적은 후손이 썼다.
4-5. 윤관의 7세 시를 한글로 풀어 해석한 것.
뽕잎은 누에를 길러 추위를 막게 하고,
(뽕나무) 가지는 굳센 활이 되어 오랑캐를 쏜다.
이름은 비록 초목일지라도 참으로 국보로다.
자르거나 꺾지 못하게 아이들을 훈계하리.
* 어린 아이가 뽕나무의 유용함을 이토록 절실하게 바라보고 있구나.
벌써 장차 장재將材가 될 그릇이 엿보인다.
5. 장군의 사당을 여충사라고 한다.
6. 여충사 전경
7. 여충사 전경
8. 장군의 묘역이 잘 관리 된 것을 보니 파평윤씨의 명문가 전통이 느껴진다.
9. 윤관장군 묘역 안내판
10. 석물이 참 다양하고 많은 편이다. 웬만한 왕릉 버금간다.
11. 잔디도 잘 가꿨다.
12. 왼쪽편 석물
13. 오른쪽 편 석물
14. 돌 양이 양쪽에 두 마리씩 네 마리다.
15. 가운데 석등은 장명등이라고 한다. 우뚝한 돌은 망주석,
망주석은 멀리서도 무덤을 알아 보게 하는 표지석이다.
16. 문하시중은 고려 수상, 조선은 영의정에 해당한다.
17. 한가히 역사에 젖는 보람 있는 시간이었다.
18. 교자총과 전마총
* 좌측은 윤관 장군이 타고 다니던 교자총(교자轎子의 무덤)이고,
오른 쪽은 전쟁터를 누비며 타고 다니던 戰馬의 무덤, 전마총이다.
* 平轎子 준말은 교자 : 종1품 이상 및 기로소 당상관이 타는 가마. 앞뒤로 두 사람씩
네사람이 어깨에 메는 가마.
19. 장군의 묘에서 시원하게 바라보이는 묘역과 멀리 보이는 마을 정경
20. 이곳은 장군의 묘 담장 바로 뒤쪽(윗쪽)이다. 여기에 원래 청송심씨 묘가 여러기 있었는데, 이장하고 빈터가 됐다. 청송 심씨도 조선시대 세력 있는 명문가여서 감히? 이곳에 묘를 썼나보다.
21. 두 가문은 2007년에 화해했다.
22. 윤관장군 묘역 2~300m 오른쪽 도로가에 작은 사당이 있다. 파평윤씨 참의공파 윤해진 선생은 세적을 찾아 땅을 기부하고 문중을 규합한 공로자이다. 이 분은 24세에 북한쪽에서 단신 월남하여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23. 윤해진 선생이 이룬 선조의 사당, 선조를 사랑하는 마음이 엿보인다.
[2] 청송 심씨 심지원 묘소 일원
24. 조선 인조~효종시 명신 심지원의 사적
25. 신도비 : 왕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
26. 영의정 심지원의 묘
27. 심지원의 묘
▣ 영의정 심지원 沈之源에 대하여
* 본문 출처는 민족문화대백과(한국정신문화연구원) 참고, ( )속 해설 ; 이재익
-생애 : 1593(선조 26)~1662(현종3)
1) 조선 후기 문신. 본관 청송, 호는 만사晩沙. 1620년 광해군 12년에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 그의 족조族祖인 종도가 대북파인 이이첨의 심복이었던 관계로 대북에 가까왔으나, 대북의 정책에 가담하지 않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 앞을 내다 본 것으로 보인다.
2) 1623년의 인조반정 이듬해 검열에 등용된 뒤에 청요직을 두로 거치고, 1630년 (인조 8)함경도 안찰어사로 파견되어 호인 胡人(오랑케)에게 매마매인 賣馬賣人 한 자를 적발하는 동시에 육진방어 대책을 진언하여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 청렴 강직한 성품이 엿보인다.
3) 함경도에서 돌아 온 뒤에도 응교 집의 교리 부수찬 등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노모 때문에 뒤 늦게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달려갔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하였다. 강화도로 들어가 적에 항거하려 하였으나 강화마저 함락되자 죽을 기회도 잃게 됐다.
♣ 충 효를 겸전한 인물
4) 이것이 죄가 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한 때 벼슬길이 막혔다. 1643년 그의 억울함이 용서되어 홍주목사로 기용되었으며 1648년 이조참의가 됐다. 그 뒤 동부승지 대사간 대사성 대사헌 요직을 두루 거쳤고, 효종 초에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헌 병조 이조 참판 , 1652년 (효종3년) 형조판서에 올랐다.
♣ 청요직은 주로 언론활동, 그의 전문성은 언론이다.
5) 특히 거의 아들 익현이 효종의 딸 숙명공주와 결혼하여 효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 아들이 효종의 부마가 돼 왕과 사돈이 됐다. 신임을 얻은 것.
6) 이듬해 1653년 이조판서로서 국왕의 언행이 몹씨 급함을 때때로 경계하였으며,
♣ 언행 신중, 국왕에게도 할 말은 하고 견제 할 줄 아는 성격.
7) 11월에는 정조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 외교활동에 공로
8) 1654년 우의정에 승서되고 이듬해에는 좌의정, 1657년에는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으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 관직의 최고 영예.
9) 1659년 다시 좌의정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자 원상 院相으로서 국정으로 맡고 총호사 總護使로서 효종 상례의 책임을 졌다.
♣ 영의정에서 좌의정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비상시국에 가장 중요한 직책을 수행하였다.
10) 현종이 즉위하면서 자의대왕대비의 복제문제로 서인의 영수로서 송시열의 뜻을 좇으면서도 남인 조경을 적극 신구 伸救하기도 하였다.
♣ 예송논쟁
그의 당파는 서인, 효종의 상에 모후가 상복입는 기간에 대한 남서간의 논쟁, 효종이 장남이 아니었던 관계로 일어난 상복착용기간에 대한 예송논쟁의 한가운데 심지원이 있었다.
서인과 남인 사이 2차례 예송논쟁이 있었다
(1) 첫째 기해복제문제 己亥服制問題
현종 즉위 후 효종이 죽자, 효종의 모후母后 자의대비(조대비 趙大妃)의 복상服喪 문제.
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므로 기년설 朞年說(1년복상), 남인은 3년설(대통이었으므로 종통으로, 2년설)이 대립.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 사이에 벌어진 예학논의 禮學論議가 당론으로 전환, 일파만파가 됐다. 결과는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2) 2차 예송논쟁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 仁宣王后의 상喪에 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1년), 서인은 대공설 大功說(9개월) 주장. 결과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 남인이 정권을 잡았고, 서인정권이 몰락하였다.
이 때, 남인은 서인인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청남 淸南, 탁남 濁南이라는 분파도 생겨났다.
11) 그의 정치적 견해는 상당히 소극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즉 김홍욱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신구하지 못하였다든가,
♣ 반대당파 남인의 조경을 구해주기도 했는데, 김홍욱 까지는 능력에 한계가 있었을 것.
12) 강화설진에 반대하였다든가,
♣ 강화도 군사 진지화에 반대 한 것. 병자호란을 겪었는데도~,
청에 자주 간 것을 보면 외교력으로 안보 문제를 해결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13) 혹은 양역의 폐를 알고 있으면서도 사족에 대한 수포收布에 적극 반대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 양역이란 남자들에게 부과하는 年 군포 2필을 바치는 것을 말하는데, 양반에게 까지 부과하는 군포 조세개혁안이 대두했는데, 양반신분 옹호적 입장이라. 개혁적인 인물은 아닌듯.
14) 저서로는 만사고 晩沙稿가 있다. 글씨에 능하여 과천의 정창연비가 남아 있다. 영천의 송곡서원 松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 글씨는 명필이고, 산소는 경기도에 있는데, 경상도 영천 송곡서원에서 제향, 제사를 받든다 하네~)
* 송곡서원은 충남 서산군 인지면 애정리에도 있고, 경북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에도 있다. 영천의 송곡에는 처음 유방선을 모시다가 곽순, 이보흠, 이현보, 심지원, 윤봉오를 추가 배향해 왔다. 대원군 철폐 후 다시 지어진 후로는 1965년부터 유방선, 이보흠만 배향한다. (그 지방 유림의 공의 기준)
28. 영의정 심지원의 묘
29. 영의정 심지원의 묘 부근 일족들의 묘
30. 영의정 심지원의 묘역 부근 일족들의 묘 종합
31. 4월 묘역의 진달래가 내방객을 반갑게 맞이하며, 운치를 돋운다.
32. 영의정 심지원의 아들로 효종의 부마가 된 청평도위 심익현의 사적
33. 청평위 심익현공 천장비, 위의 비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건대,
주인공 심익현은 인조 19년(1641년)에 영의정 심지원의 3자로 태어나서 숙종 9년(1683년)에 43세로 졸한 분이다. 10세때 효종의 3녀 숙명공주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어, 청평위에 봉하여 졌다.
사신으로 청나라 연경(북경)에 3차례나 다녀오고, 오위도충부 도총관(요즘 육군본부 최고 지휘관 격, 실권보다는 명예적 의미가 강하다.) , 내섬시 제조를 지냈으며, 촉서체에 능하여 여러 곳의 비문을 남기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수명이 단명한 것이 안타깝다.
원래 산소는 고양군 원당면 석천리 도내동산에 넓은 선산에 묻혔으나, 1926년 몰지각한 후손이 매각하여 주위가 개발되고 주택이 들어서서 산소로소는 부적합 환경이라 문중이 고심하여 오던 차에 2009년 아버지 심지원 묘역 아래로 천장하고 11대 후손 심봉구가 대표가 되어 이 천장비를 세운 것이다.
그곳의 다른 선조들의 묘는 돌볼 겨를이 없고, 우선 청평위와 숙명공주 내외분 합장묘만 옮겨 온 것이 안타깝다. 숙명공주는 숙종 24년(1699)에 60세로 졸하였다. 조상의 숭배와 조상의 산소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