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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있는 나쁜신자Ⅲ(눅10:38-42)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민교회를 포함해서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흥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120년이라는 짧은 선교 역사 속에 천만 명이 넘는 신자 수를 갖고 있구요.
해외파송 선교사 숫자가 2만명을 돌파하여
이제 얼마 있으면 미국을 제치고 1위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한국 교인들이 열심에 특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배를 얼마나 열심히 드립니까?
새벽예배 6번, 주일 예배 2번, 수요예배 1번, 금요철야 1번까지
일주일에 10번 이상 예배를 드립니다.
기도도 열심히 합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처럼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기도하는 신자들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심히 믿는데도
사회에서 제일 많이 비판받고 욕먹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입니다.
오죽하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된 데에는 우선 우리의 잘못이 매우 크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열심은 있는데 부족한 것이 세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실성, 예수님의 현존, 겸손입니다.
오늘은 이 세가지 부족한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열심은 있는데 진실성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얼마나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연설에 열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온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는 열심이었습니다.
세상에는 그렇게 열심있는 도둑도 있고 열심있는 사기꾼도 많습니다.
살인마 강호순 얼굴을 한번 보십시오.
미남형에 선한 인상이라 누가 그렇게 살인할 사람으로 보겠습니까?
그 많은 부녀자들이 그 외모에 그만 속아서 변을 당하고 만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른 것이 이 세상입니다.
사도행전 5장 1-6절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 소유의 모든 땅을 팔고
그 땅값 얼마를 감추고 다 드렸다고 거짓말하였습니다.
소유를 팔아 거의 다 드린 것도 많이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진실되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열심은 있는데 진실성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열심에는 반드시 진실성이 있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열심은 있는데 예수님 없이 열심히 일합니다.
성경에 마리아와 마르다가 등장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마르다는 예수님 없이 분주합니다.
분주하다 못해 예수님께 마리아로 하여금 자기를 돕게 해달라고 청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 42절에 예수님께서 마리아는 이 좋은 것을 택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없이 열심인 것은 대책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열심은 내야 하는데
나의 이 열심이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내 열심 속에 정말 예수가 있는가를 알 수 있는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을 부인하지 않는가? 입니다.
마태복음 16:21-25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지시고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가르칩니다.
베드로가 말하길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방법을 부인하는 베드로에게 바로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러시아사람들과 영어 그룹 스터디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단어를 내 놓으면 그 뜻을 서로 맞추어 보는 게임 형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자기가 맞는다고 너무 고집을 부려
사전까지 찾아 보이며 틀린 것을 증명했습니다.
그 사람은 심지어 그 사전이 틀렸다고 주장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한국 유학생 중에 비슷하게 막무가내인 학생이 하나 있었는데
학기가 끝나고 성적표가 나왔을 때였습니다.
교수가 그 학생에게 B를 줬는데
그 학생은 자기는 지금까지 한번도 B를 받아본 적이 없다며
많은 학생들 앞에서 불평을 늘어 놓더니 끝내 교수에게 항의하러 갔습니다.
사전과 교수님은 다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이 두 사람이 너무 지나치다고 느껴지시듯
혹시 우리도 "내가 열심이 지나쳐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지는 않는가?"
하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내 열심에 예수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질문은 내가 무엇에 만족하는가입니다.
내 열심히 진짜인지 아닌지는 나의 만족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만족하는 사람이 있고
내 자신의 열심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힘이 아닌 내 자신의 힘으로 하는 열심은 항상 시험을 당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를 할 때에 달라스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미 남부에서 100여명 모이는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데
그 교회는 오랜 숙원 사업이 자기 교회 건물을 갖는 것이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등록한지 얼마 안되는 교인 부부가 기도회에서 나누어진 이 내용을 듣고
자신들이 감당하겠다고 100만불을 헌금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경사입니까?
그래서 바로 50만불 론을 더 얻어서 교회 건물을 구입하고
헌당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헌당예배를 드리던 그때
그 교인부부가 나와서 자기 생각이 달라졌다면서
100만불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였답니다.
여러 목사님들과 간증을 들을 때에
그 목사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셨고
함께 그 고민을 들은 분들을 나름대로 여러가지 안을 내 놓았습니다.
저는 그때 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지 않고 자기 열심으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 소금, 김치, 돼지고기, 라면 등의 재료를 넣고 끓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김치찌개가 맛있다고 말하지 소금이 맛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용해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열심의 방향이 예수님께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인식속에 용해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열심에는 바드시 겸손이 따라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열심히 없어서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열심이었지만 너무 교만하고 겸손하질 못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의가 그 마음에 가득했습니다.
자기의 고집, 편견, 철학에 사로잡혀 있어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이 나에게 뭐라 말씀하시는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성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말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하기 가장 힘들었던 분이 바로 제 아버지이십니다.
연희전문학교를 나오셨는데 Mission School이라 4년 내내
전국의 유명한 목사님들 설교를 듣고 졸업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네가 나보다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아느냐”며
들으려고 하시지를 않으셨습니다.
나는 전국의 유명 목사님들을 다 안다고 하시며
복음을 거절하셨습니다.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기도하는 중에 아버님은
아주 어렵게 나중에서야 하나님의 역사가 있어 믿으시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자기 의입니다.
도둑질이나 간음같은 죄는 너무 부끄러운 죄이지만
적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그러나 자기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몇 년전 강호순 연쇄살인사건 때문에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스톤 박사는 다음과 같이 사이코패스들의 특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쁜 것에 대한 후회가 없습니다.
감정적으로 냉담하고 무관심합니다.
자신을 마치 신처럼 대단한 존재로 평가합니다.”
이 말을 듣고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저도 혹시 사이코패스가 아닌가?
저도 역시 연쇄 살인범이 아닌가? 이 말을 우리 열심있는 신자들에게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예수를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신앙의 깊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William Armot라는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구주에 대한 사랑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는 마음과 비례하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마음과 비례한다.
주님에 대한 사랑의 높이는 그 자신의 겸손의 깊음과 같다.
이것은 마치 땅속으로 보이지 않게 파고든 뿌리가
하늘 높이 꽃피는 가지를 뻗치는 것과 같다”
주역에 나와있는 64괘 중
화택규(火澤暌)와 택화혁(澤火革)이라는 괘가 있습니다.
화택규(火澤暌)는 상화하택(上火下澤) 즉 불이 위에 있고 물이 아래 있는 형상을 말합니다.
이런 경우는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택화혁(澤火革)은 수승하강(水昇下降)
즉 물이 위에 있고 불이 밑에 있어 순환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뜨거운 사람들은 차가운 사람 밑에 있어야 서로 소통이 됩니다.
기독교가 불이라면 세상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세상 밑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되고 차가운 세상이 데워 집니다.
열심있는 사람은 섬겨야 됩니다.
아래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례한 기독교가 됩니다.
한국 기독교인은 열심에 특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진실성이 없고, 예수님이 없고, 겸손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진실성을 되찾고 예수님을 되찾고
겸손을 되찾음으로서 세상을 데우는 불이되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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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진실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예수님을 따라 겸손한 삶을 살게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 없이! 가슴이 아픕니다. 진실하게 겸손하고 예수님을 항상 찾는 사람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