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종(芒種)
보리밭에 누워 귀를 기울이면
누군가 저 너머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난다
문디 가시내 슬픈 노랫소리 같다
삘기를 뽑아 입에 물고
한없이 심심한 하늘을 올려보다가
육성회비 봉투로 비행기를 접어 높이높이 날린다
날개에 실려 떠가는 뜬구름들
저 구름을 따라가면 바다에 갈 수 있을까
애꿎은 질경이만 발로 밟다가
보리밭 너머 아른거리는 학교 교정을 바라본다
아차, 보리밭에 숨겨둔 책가방 속에
고구마가, 고구마가……
마른 입속에 뽀얀 냉이꽃이 핀다
아버지 낡은 자전거가 헐떡거리며 언덕을 넘는다
순둥이가 그 뒤를 졸졸졸 따른다
아버지 무서워 신작로는 못 가고
문둥이 무서워 보리밭길 못 간다
꽃이 빛나는 밤에
윤중로 벚꽃 축제를 보러 갔더니
밤하늘에도 꽃이 만발이다
목동자리, 처녀자리, 사자자리, 큰곰자리……
별자리마다 각양각색 꽃들을 달고
세상을 비추고 있다
지상에 벚꽃이 피듯
밤하늘에도 꽃들이 핀다
지상의 꽃과 하늘의 꽃이 만나
아이의 눈동자에 별이 빛난다
할아버지 백발에도 꽃이 빛난다
지상에는 별 잔치
하늘에는 꽃 잔치
별이 꽃을 낳듯
꽃이 별을 낳는다
홍학
섬에서 살던 플라밍고
칼라하리호의 바닥이 말라가기 시작하면
하늘에 또 다른 섬을 만든다
날개가 덜 여문 새끼들
마지막 물웅덩이가 먼지가 될 때까지
작은 섬을 이루며 산다
하늘에 떠 있는 섬이
소금밭에 떠 있는 작은 섬을
애타게 내려다본다
지리산의 봄
파란 양철지붕을 인 대장간 앞에서
노란 물결이 손을 흔든다
산수유 가지마다 달려 있는 앙증맞은 왕관들
어린 선덕여왕의 재림인가
작디작은 황금 꽃잎을 흩뿌리며
손님들을 맞는다
조신한 발걸음으로 언덕을 오른다
대장간을 지나 떡집을 지나
봄볕에 그을린 할머니가 권하는 노란 두부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내 몸가짐도 덩달아 떨잠* 떨 듯하다
작은 꽃의 향내도 맛보라며
꽃차 한 잔 내오는 손등에도 산수유가 피어 있다
담 너머에서 기웃대던 아이들의 얼굴에도
황금빛 물결이 어려 있다
지리산의 봄은
왕관을 쓰고 온다
* 궁중의 여인들이 큰머리 중심과 양옆에 꽂았던 장식.
모래 그림
사르르 구르는 것도 귀엽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예쁘다
삐쭉삐쭉 둥글둥글 돼지 코를 그리고
윙크하는 소의 눈동자를 그리고
무지개 위에 앉은 고래의 분수를 그리고
과자를 사냥하는 제비를 그리고
지렁이 따라 꼬물거리는 풀을 그리고
두 팔 벌린 도롱뇽을 그리고
애기 업은 누나를 그리고
머리 깎은 산등성이를 그리고
뚱뚱한 양떼구름을 그린다
알타미라 벽화가 이러했을까?
참으로 난해하고 오묘하다,
잠시 환상에 빠져 있는 사이
한 살배기
발칙한 볼펜이 오줌발을 갈긴다
태초의 벽화가 모두 지워졌다
― 『서둘러 후회를 하다』, 문학의전당,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