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1947. 2.14~2011. 12.30)의 관에 붙은 '민주주의자'라는 표현대로 그는 온 삶을 민주화에 바쳤다. 1983년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에 최초의 재야민주화운동조직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여 의장을 지냈으며 이로 인해 85년 수감됐다. 당시 이근안으로부터 9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받은 사실은 아내 인재근(59)을 통해 전세계에 전두환 독재의 실체를 폭로하는 계기가 됐다.
참여정부의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노인요양보험을 제정하고 암환자 진료의 본인부담률을 10%로 낮췄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동교동계 해체를 주장하고 참여정부 시절에는 한미FTA 반대나 공공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주장하는 등 몸담은 정부 내 비판도 서슴지 않은 원칙주의자였다. 인재근은 이화여대 사회학과 재학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후 민주화운동실천가족협의회(민가협)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활동을 통해 남편만큼 민주화에 헌신한 투사였다. '김근태의 비밀병기' '(감옥에 갇힌) 김근태의 바깥사람'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던 그를 만났다.
- 어떻게 지내셨나요?
"아직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요. 어제는 모란공원에 갔어요. 이 사람이 진짜 땅 속에 묻힌 거를 내가 봐야지 정신을 차리든지 싶어서요. 여기(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반도재단 사무실)도 영결식 하고 오늘 처음 나왔어요. 2004년 (국회의원) 3선 할 때부터 쓰던 사무실인데 여기를 참 좋아해요. 이 사람은 기온이 높은 걸 싫어하는데 이 사무실이 맞는 거야."
- 지금은 혼자 지내시는 건가요?
"재작년에 장가를 보내서 따로 살던 아들이 남편이 아프면서 들어오겠다고 했어요. 아파트가 안 빠져서 짐은 못 옮겼지만 아들과 며느리가 제 곁에 붙어 있어요. 막 결혼한(12월 10일) 딸과 사위도 퇴근하면 집으로 와서, 돌아가시고 1주일은 다 같은 방에서 잤어요."
- 2008년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충격이 컸지요?
"낙선하리라고는 생각도 안했지요. 선거에서 지지도가 30% 이상이면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좋아요. 1278표인가 졌으니. 나는 하느님께서 쉬라는 기회를 준 거구나 하고 딱 그날로 마음 정리를 했어요. 나한테 주어진 행복한 안식년이다 그렇게 지냈어요. 아침에 눈 뜨면 집 뒤에 초안산이라고, 낮은 산이 있어요. 정상에 가서 맨손체조도 하고 둘이 손잡고 내려오고. 남편이 축구를 좋아하니까 바로 집 앞에 고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저는 운동장 걷고 자기는 축구하고. 지금 생각하면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뉴타운 바람으로 패배했으니 물신을 선택한 사람들을 원망은 하지 않았나요?
"김근태는 정부와 당이 국민의 마음을 읽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반성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그래서 2년간은 인터뷰나 강연요청이 와도 때가 아니라면서 거절했어요.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는 민주주의의 후퇴다, 민간독재다, 이렇게 발언을 시작했지요. 최근에는 야당 통합을 위해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다녔는데 그게 몸에 무리였던 것도 같아요."
- 건강은 언제부터 나빠지셨어요?
"고문 당한 게 85년 9월인데 매년 9월부터 추운 기간을 넘기기가 힘들었어요. 몸이 기억을 하나 봐요. 한번 아프면 땀이 나고 열이 나고 벌겋게 떠가지고 앓아서 유리그릇처럼 조심스레 겨울을 났어요. 2007년 3월에 한미FTA반대 단식을 하면서 손이 떨리기 시작했어요. 사실은 환자인데 보통사람 취급했지요. 그 해 여름에 의사가 파킨슨병이라고 진단을 내려서 약을 복용해왔어요. 올해도 10월 15일부터 아픈데 평소하고는 많이 달라서 11월 25일 서울대병원에서 MRI를 찍었더니 정맥혈전증이 발견된 거예요. 11월 29일에 입원해서 혈전을 녹이는 여러 가지 치료를 했어요. 딱 하루 위험하다 그랬는데 결국에는 그 하루를 못 넘기고 돌아가셨어요. 걸어서 병원에 들어왔으니까 내가 그냥 집에 데리고 있으면서 한약 먹고 침 맞고 그랬으면 살았을텐데 너무 고운 사람을 만신창이로 만들어서 보낸 것 같아서 너무 미안해요. 그래서 병원도 원망하고 자책도 하다가 하느님만 원망해야겠다, 원망도 하느님만 하고 감사도 하느님만 하고, 그렇게 정리를 했어요. 하느님이 이렇게 데려간 것은 무슨 뜻이 있지 않을까."
- 한국역사에 김근태가 와서 어떤 것을 남겼다고 생각하세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자기 한 몸을 던져 희생했다. 장례기간에 정말 많은 분들이 찾아왔어요. 특히 아이들을 굉장히 많이 데리고 왔는데 아이들한테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해요."
- 고문을 이겨낸 것인가요, 아니면 민청련 조직 같은 민주주의 운동을 말하는 것일까요?
"결국은 그게 다 하나지요. 독재시절에 그런 결단을 하기 힘든데 가정도 있고 애들도 다 있는 사람이, 그 결과는 고난이 뻔히 예정된 것이었는데도 갈 수 있었다는 거. 그 결과 시련을 겪었고 결국은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 거지요."
- 살면서 답답했던 적도 있었나요?
"남편이 축구를 하면 날쌘돌이인데 행동도 생각도 느려요. 이게 뒤집으면 오래 생각해서 실수가 없고 입으로 나오면 틀림이 없어요. 한미FTA에 대해서 반대했던 것이나 자유투표제 지지나 전자신분증, 의료민영화에 대한 우려 같은 것을 일찍부터 했으니까요."
- 2002년 대선 국면에서 정치자금을 솔직하게 밝힌 것도 당시는 순진하다, 정치인으로 자질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옳다 하지요.
"우리 윗세대는 어땠는지 몰라도 저희가 정치를 시작하면서는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부정한 정치자금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아래 세대도 여전한데요.
"가치를 어떻게 두느냐에 있는데 김근태씨는 원래 휴지도 큰 걸 다 안써요. 꼭 반으로 잘라서 쓰고 불도 다 안켜고 냉방도 낮추고 내핍생활이 몸에 배있어요. 그래서 곽티슈도 절반 짜리를 사다 놓고 썼어요. 세면기에도 자기가 헹군 물 담아놓고 나가고. 신혼 때는 신경질이 나서 확 뽑아버렸는데 나중에는 거기다 손수건이라도 빨게 되더라구요."
- 일찍부터 가톨릭이었어요?
"이 사람이 83년부터 민청련 의장을 했는데 내가 '가톨릭노동청년회 25년사'를 쓰면서 먹고 살았어요. 가톨릭에 드나들면서 신자들이나 신부님을 많이 보니까 가톨릭 신앙을 갖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때 통신교리를 했는데 이 사람이 구속되는 바람에 영세를 못 받았어요. 95년에 수유성당에서 교리를 새로 배워서 영세를 받았어요."
- 김근태 고문도 그때 같이 영세를 받았어요?
"이번에 돌아가시면서 받았어요. 함세웅 신부님이 병실에 여러 번 오셨어. 나는 남편이 금방 회복될 거라고 생각해서 '비몽사몽일 때 영세를 줘버려' 그랬어요. 신부님이 '꼭 영세 안 받아도 돼. 기도만 할 줄 알면 돼.' 그러다가 결국 29일 아침에 영세를 받게 됐지. 내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니까 남편은 그 남편인 즈카리야가 된 거에요."
- 돌아보면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요?
"고문 당하고 12월 19일 첫 재판 열릴 때까지가 제일 힘들었지요. 9월 26일 검찰청 5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났는데 고문 이야기를 들은 거에요. 그리고는 면회금지를 해서 다시는 못 만나게 하니까. 증거인멸이 위험하다는데 증거인멸은 지들이 하는 거지. 그 다음으로는 87년에 노태우가 당선되고, 결국 김대중 비판적 지지가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해서 그런 거다 하는 비판이 쏟아지는데 남편은 감옥에 있고 나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처럼 아파서 아마 진단을 내렸으면 우울증이라 했을 거에요. 그때부터 내가 매일 성경을 읽는데 특히 힘들 때는 시편을 읽어요."
- 그 힘든 것을 이겨낸 힘은 뭐지요?
"그때는 진짜 내가 군사독재를 끝내겠다 반드시 끝내고 말겠다는 신념으로 뛰었던 것 같아요."
- 결국 고문경찰인 이근안 이야기를 안 할 수 가 없네요. 용서를 한 건가요?
"용서하기 어렵죠. 당시 도봉구청장 지낸 분이 여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는데 거기 면회를 갔다가 이근안이 있다고 그래서 주변에서 보라고 했나 봐요. 그가 용서를 빌었다는데 돌아와서 며칠간 말을 안했어요. 나중에 이야기를 하는데 용서를 못한다고 하더라구. 나중에 누가 이렇게 말해줬대요. 용서는 신의 영역이다, 그걸로 그걸로 마음에 스트레스 받을 필요가 없다고."
- 용서하지 않은 거지요?
"용서 못하지. 그거는 신에게 맡긴 거야."
- 사실은 고문 피해자가 인간성이 무너져 내리잖아요. 그런 흔적들은 전혀 없었나요?
"나도 그게 가족들한테 나타나면 어떡하나 굉장히 두려워했는데 전혀 안 그랬어요. 오히려 전보다 더 가족들한테 따뜻하게 대하고 아이들은 정말 사랑으로 대하고. 그러니 속으로 썩었겠지."
- 자제분은 잘 자라셨나요?
"아들은 소비자 심리학을 전공하고 리서치 회사에 다녀요. 며느리는 범죄심리학을 해서 청소년 상담을 해요. 딸은 홍대 미술관큐레이터고요 사위는 박선숙 의원 비서관이에요. 아주 밝고 건강하게 자라서 취직도 알아서 하고 대학교 때 짝을 만나서 잘 살아요. 나는 애들한테 엄마로서 사랑을 주려고 했고 선생님들도 아이들한테 아빠는 자랑스러운 분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참고서도 주고, 체육선생님은 체육복도 주고. 주변에서 염려해준 덕분이야."
- 정치권에서 제안도 많이 받으셨을텐데 왜 공직을 맡지 않은 거지요?
"남편이 감옥에 있을 때 출마 제안이 왔지만 거절했어요. 이 사람이 참 고운 사람이라서 제가 했으면 저를 외조했을 사람이라. 남편은 내가 아깝다고 했지만 남편이 더 큰 일 하는데 내가 도와줘야겠다 생각했어요. 이 사람이 제도정치권으로 오면서 저는 장애인 노인 여성이라든가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을 했어요."
- 이런 건 정치인의 아내가 하는 건데 선생님은 정치인의 아내가 아니라 인재근이잖아요.
"그것도 인재근의 삶이다 그런 거죠. 그런 것도 참 중요해요."
-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세요? 앞으로 계획은?
"이명박 정부의 실정도 크고, 사회 전반적인 현상도 무섭고. 일단은 그 사람이 유언처럼 남겨준 말이 있어요. 참여하고 점령하라. 2012년 총선과 대선, 두 번의 기회가 있다. 두 번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모두가 참여해서 권력을 창출하라, 그 권력이 세상을 바꾼다. 그 말을 실천하는 방법을 찾아보겠지만 아직은 상중입니다."
- 마지막은 편하게 가셨나요?
"웃으면서 떠났어요. 남편이 가려고 할 때 내가 귀에다 대고 그랬어요.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편안하게 가서 기다리라고. 굉장히 어려운 일도 많고 고비도 많았지만 행복했었다'고.(눈물이 괸다.) 그랬더니 아랫니가 다 드러나면서 웃는 표정이 되는 거야."
- 그건 위로가 되겠어요.
"그리고 모란공원이 따뜻한 곳이어서 차가운데 혼자 묻혔다는 생각이 안드는 거야. 어제도 다섯 시 직전에 갔는데 그 시간까지도 거기가 따뜻한 거야. 그게 참 위로가 돼요."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 전 경감의 악연은 26년 전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시작됐다. 김 상임고문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1985년 9월 4일 구속됐다. 그 후 그는 17일간 매일 5시간씩 이 전 경감에게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받았다.
"고문을 할 때는 온 몸을 발가벗기고 눈을 가렸습니다. 그 다음에 고문대에 뉘면서 몸을 다섯 군데를 묶었습니다... 머리와 가슴, 사타구니에는 전기 고문이 잘 되게 하기 위해 물을 뿌리고, 발에는 전원을 연결시켰습니다. 처음엔 약하고 짧게, 점차 강하고 길게, 강약을 번갈아 가면서 전기 고문이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김근태 책 <남영동>)
고문 트라우마는 '죽음의 그림자'처럼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는 치과에 가는 것조차 꺼렸다고 한다. 의자에 반쯤 누운 채 얼굴을 가리는 순간, 바로 전기고문이 연상됐기 때문. 2001년 대선 경선 때 참모진은 물고문으로 얻은 비염과 축농증 때문에 전달력이 떨어진다며 수술을 권했다. 그렇게 수술대에 올라 마취를 하는 과정은 그를 다시 남영동 대공분실로 데려갔다. 수술 후 그는 "칠성판(고문대)에 다시 올라간 느낌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기억은 다르다. 이 전 경감은 작년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고문 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신문(訊問) 기술자"로 지칭,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근태 상임고문에게)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내가 취미 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AA 건전지 2개'를 가지고 겁을 준 것뿐...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한 씨 고문 혐의로 88년부터 수배를 받던 이 전 경감은 10년 10개월 만인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했다. 이미 김 상임고문 사건을 포함해 대부분의 사건이 도피생활 중 공소시효가 지난 상태였으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4조의2' 규정에 따라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자수는 했지만, '청룡봉사상'을 포함하여 재직 기간 중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고 대공 분야에서는 "이근안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는 말을 들었던 그는 '고문 기술자'라는 말이 억울했다. 그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며 "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라고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런데 2010년 2월 7일 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김 상임고문이 이 전 경감을 옥중면회 했다. 이 전 경감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김 장관이 들어오자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난 일은 죄송하게 됐다'며 고개를 숙이자 김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정작 면회를 마친 김 상임고문은 그날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면회 2주 뒤 자신의 홈페이지에 "저 사죄는 사실일까?"라며 혼란스러워했다. 자신의 사타구니에까지 전기고문을 가했던 자였다.
작가 공지영 씨는 관련 일화 한편을 트위터(@congjee)에 소개했다.
"몇 년 전 뵈었을 때, 우연히 이근안을 만났다고. 그가 울며 잘못했다 용서해달라고 했을 때 너무 가식처럼 느껴져 도저히!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고. 그게 몇 달 후까지 자신을 괴롭힌다고. 나 너무 옹졸한가? 물으셨죠."
이 전 경감은 2006년 11월 출소해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자신이 목회자로 입문한 건 "간첩죄로 잡아들인 애들이 후일 민주화 인사로 보상받는 걸 보고 울화가 치밀어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 나라를 찾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김근태는 애초 이근안을 만나야 할지 망설였고, 면회 사실 공개도 원치 않았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물론 이근안 씨를 만난 것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이 정리되지 않고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참회하겠다며 목사가 된 이의 마음은 미해결 사건으로 남을 것 같다. 김근태는 "당신을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 이 자리에 왔다"고 말했으나, 시대가 이근안을 용서했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