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중앙정부 통치시대의 거제(巨濟),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
2015년 작성.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1) 남북국 시대의 거제군(巨濟郡)
거제는 변한의 소국에서 출발해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신라에 복속되고 말았다. 반대로 거제는 육지가 아닌 섬이라는 점에서 인접한 고성과 다른 길을 걷게 된다. 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자 거제는 자연스레 제국주의 국가 신라의 영토에 편입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통일신라의 지방제도는 9주 5소경을 근간으로 하는 군현제를 시행하여 전국을 120개의 군(郡), 305개의 현(縣)으로 편재하였으며, 군·현에는 중앙에서 외관(外官)을 파견하였다. 이와 함께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후반에는 거제지역도 신라의 지방 군현체제에 완전히 편재되는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거제도는 9주 중 강주(康州)에 속하였다. 강주는 본국 경계 안에 설치한 세 주(本國界內置三州)중에 하나지만, 560년대에 편입된 가야 지역으로, 주 1, 군 11, 현 30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제는 강주의 11개 군(郡) 중 하나인 상군(裳郡)이며, 그 중심지는 둔덕면 거림리이고, 군현성(郡縣城)은 둔덕기성(屯德岐城)으로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권 34, 지리지(地理志), 거제군(巨濟郡)에는 「거제군(巨濟郡)은 문무왕(文武王)이 처음으로 상군(裳郡)을 설치하였으며, 바다 가운데 섬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렀으며, 영현(領縣)이 셋이다. 아주현(鵝州縣)은 본래 거로현(巨老縣)이며 경덕왕이 이름을 바꾸어 지금에 이르고, 명진현(溟珍縣)은 본래 매진이현(買珍伊縣)이며 경덕왕이 이름을 고치어 지금까지 이른다. 남수현(南垂縣)은 원래 송변현(松邊縣)이며 경덕왕이 개명(改名)하였으나 지금은 다시 예전대로 바꾸었다.」이라 하여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는 처음으로 둔덕면 거림리에 상군(裳郡)을 설치하면서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통치가 시작된다. 이에 거제 섬을 ‘상도(裳島)’라고 부르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조선시대까지 ‘거제섬의 별칭’으로 ‘상도(裳島)’라는 명칭을 이어왔다. 경덕왕 16년(757년)에는 거제군(巨濟郡)으로 개명함과 동시에 아주현(鵝州縣: 現 아주동), 명진현(溟珍縣: 現 거제면 명진리), 남수현(南垂縣: 現 남부면 다대리)의 세 현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이와 함께 지명도 한자식으로 바뀌었다.
덧붙여, 이후 거제도는 685년(신문왕 5)에는 상주군(裳州郡)으로 개칭했으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부터 개명한 3현(縣)을 거제현의 속현으로 삼으면서, 거제군(巨濟郡)으로 개칭되었고, 부곡과 향을 동시에 설치하니 이로부터 중앙정부에서 섬 전체를 "거제도'라 부르게 되었다.
거제읍지에 따르면, 거제군(巨濟郡)은 ‘경덕왕이 이름을 거제군으로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영현이 셋이었다. 아주현(鵝洲縣)은 본래 거로현(巨老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명진현(溟珍縣)은 본래 매진이현(買珍伊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도 그대로 쓴다. 남수현(南垂縣)은 본래 송변현(松邊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은 예전대로 회복하였다. 그리고 거제군의 향⋅부곡은 하청부곡(河淸部曲, 현의 북쪽 20리), 고정부곡(古丁部曲, 현 고현성), 죽토부곡(竹吐部曲, 현 동쪽 14리), 말근향(末斤鄕, 죽토부곡 동쪽), 연정장(鍊汀莊, 현의 동쪽 15리), 덕해향(德海鄕, 현 동쪽 30리) 등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로써 거제군은, 3속현(縣) 3부곡(部曲) 2향(鄕) 1장(莊)의 행정구역을 갖추게 되었고 고려시대까지 이어갔다.
이 같은 사실은 거제지역의 유력한 세력들이 그 독립적 위상을 상실하고, 신라 중앙정부의 지방 통치구조에 편입되었으며, 결국에는 신라의 통치체제 내부로 서서히 종속되어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시기 거제지역의 통치 및 행정 중심지인 치소(治所)는 둔덕면 거림리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최근 거림리 유적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유구의 배치상태와 성격, 동반유물의 특징과 함께 특히 ‘상사리(裳四里)’라는 명문(銘文) 기와의 발견은 그 개연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점은 곧 상군(裳郡) 주위에는 상일리(裳一里)부터 상사리(裳四里) 이상의 행정지명이 분화되어 있었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삼국~통일신라시대 상군(裳郡), 즉 거제군의 치소는 명문기와가 발견된 거림리 일대이며, 10세기까지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통일신라시대 거제군과 세 영현(領縣)에도 다른 군현과 마찬가지로 치소인 읍사(邑司)와 함께 그 하부의 말단행정 구역에는 행정촌과 자연촌이 편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여러 곳의 자연촌을 묶어 행정촌으로 편재하였으며, 행정촌에는 지역의 토착세력인 촌주가 외관의 통제 하에 촌락민을 자치하였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촌에는 각각 군현민(郡縣民)인 농민층이 거주하였으며, 이들은 촌주를 통하여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일본 정창원 소장의 「신라장적(新羅帳籍)」과 같은 사례에서 엿볼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 거제지역의 촌주도 촌락거주의 농민에게 역(役)과 조세를 부과하는 공문서로 농민의 토지(土地), 호구(戶口), 우마(牛馬), 상마전(桑麻田) 등을 모두 계정하는 장적을 3년마다 조사·정리함으로써 자신의 농민 지배력을 확대시켜 나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촌주는 촌락민의 과실나무와 가축의 수까지도 자세히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촌주의 대민(對民) 자치 지배력은 나말여초 재향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군현민의 간접통치 조직과 신앙적 안식처로 역할한 지방의 관립사원(官立寺院)은 거제지역에도 설치·운영되었다고 짐작되며, 거제에도 주군(州郡)의 승강(僧綱)과 교화(敎化)를 담당하는 승계조직이 파견되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거제지역에서 전설로 전하고 있는 북병산록(北屛山麓)의 은적사(隱寂寺)나 취산(鶯山)의 정수사(靜水寺) 등이 지방 관립사원으로 짐작될 수 있다. 이들 사원은 통일신라시대 거제지역에 있어서 불법(佛法) 연구와 신앙(信仰) 보급의 핵심적 공간으로써, 지역민에 대해 정치·사회적 지배이념과 일상의례나 생활신앙을 제공하고, 군사·교통의 근거지 등의 기능을 하였을 것이다. 이에 통일신라 전 기간 동안 거제지역에 살았던 모든 계층은 신앙의 성소(聖所)로 각인하여, 인적·물적 지원(보시)을 적극적으로 하였으며, 그 결과 거제지역의 교(敎)·속(俗)이 교류하는 공간으로 위상을 굳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신라 말 불교의 세속화 과정에서는 세속인과 충돌하는 현상도 있었을 것이나 이들 사원이 가진 거제지역 내부에서의 순기능이나 긍정적 역할을 통해 지역민과 우호적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던 객관적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들 사원은 통일신라시대 거제지역민들을 결집시키는 현실공간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권 10, 소성왕(昭聖王) 원년(799)에는 청주(菁州 現 진주)의 거로현(居老縣), 즉 거제군의 아주현(鵝州縣)을 국학생(國學生)의 녹읍(祿邑, 食邑)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은 아주현 지역의 농업 생산력 기반이 상당하였으며, 그 결과 신라 중앙정부의 직접적인 지배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7세기 중엽 경덕왕이 거로현을 아주현으로 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7세기 말인 소성왕 원년까지 이전의 군현명인 거로현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 연유는 여러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겠으나 이 기사를 그대로 인정한다면 소성왕 원년 국학생 녹읍이 설치될 때까지 거로현에 중앙정부의 군현 통치체계가 철저하게 미치지 못한 결과와도 일정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는 소성왕이 이 지역에 대한 직적접인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학생 식읍을 설치한 사실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거제지역은 신라 중앙정부의 통제력을 어느 정도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태도는 거제지역이 가지는 해양문화의 특징과 함께 풍부한 해상 경제력 및 농업 생산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분적으로는 진골 귀족, 지역적 공간으로는 경주(慶州)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골품(骨品)체제를 유지하였던 통일신라시대, 그 외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거제지역과 그 재향 토착세력은 경주인(慶州人)에 비하여 일정한 소외를 받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이 시기는 우리나라의 동남 연안지역을 중심으로 대중(對中)·대일(對日) 교섭이 전개되었음으로 경주와 그 주변지역에 대한 해상교통의 거점에 있었던 거제지역은 그 역할과 위상에서 일정한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 골품제의 동요, 토지지배의 문란, 전면적인 농민항쟁 등에 따라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나말여초의 사회변동기에는 각 지역에서 재향 지배세력이 성장하여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그 지역에 대한 행정적·경제적 지배권을 배타적으로 행사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의 유력자층은 해상 경제력도 장악해 갔는데 경남 남해연안 지역사회에서도 이 곳에 산재한 수산물의 생산 관리권과 대중국·일본 무역권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한 지방세력이 등장·성장하고 있었다. 금주(金州, 現 김해)지역의 김인광(金仁匡)과 소율희(蘇律熙, 또는 金律熙)·충자(忠子) 형제, 청주(菁州, 現 진주)지역의 왕봉규(王逢規) 등이 그 대표적인 세력이다.
이 같은 역사적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나말여초 거제지역에서도 재향 지배세력이 등장하여 성장하였을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들은 나말여초∼조선시대 거제지역의 토착세력으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권 150, 경상도(慶尙道), 진주목(晋州牧), 거제현(巨濟縣), 토성(土姓)에 기록된 정(鄭)·반(潘)·박(朴)·윤(尹)·조(曺)·손(孫) 등의 여섯 토성 이족(土姓吏族) 집단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거제지역이 남해연안 지역사회의 해상교통 중심지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들은 김해지역이나 진주지역의 토착 해상세력과 연대세력을 도모하거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활로를 모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경남 남해연안의 수산물 생산과 대중국·일본 무역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을 것이며, 거제지역의 농업 경제력도 장악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나말여초 거제지역의 토착세력은 그 지역의 ‘해상경제와 농업 경제력’을 장악하여 신라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주변의 유력한 재향 지배세력과 연대세력을 구축하는 반독립적 세력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2) 고려시대 거제현(巨濟縣)
고려 태조에서 6대 성종까지는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고 지방에 산재한 호족들을 포섭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지방 제도 개편 같은 데 신경 쓸 겨를이 미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983년(성종 2)의 향직명호(鄕職名號 지방관직 품계의 명칭)의 개편이 취해진 것은 바로 이런 뜻이 포함된 것이라 하겠다. 이와 동시에 전국에 비로소 12목(牧)을 설치하였다. 다시 995년(성종 14)에는 12목을 고쳐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12목은 12주 절도사로 개편하였다. 각 도 밑에는 다시 주(州)․부(府)․군(郡)․현(縣)을 두었다. 1012년(현종3) 1월에 절도사를 파하고 5도호부와 양(楊)․광(廣)․충(忠)․청(淸)․진(晋)․경(慶)․길주(안동)의 7주에 안찰사를 두었다. 이리하여 1018년(현종 9) 2월에 이르러 다시 지방 제도를 개편하여 전국을 4도호부 8목으로 나누었다. 거제는 고려시대의 지방제도 개혁에 따라 군(郡)에서 현(縣)으로 변경되었고, 하청부곡과 함께 죽토부곡·덕해향·고정부곡 등의 행정구역은 그대로 이어졌다.
한편 거제현의 관청소속 군사는 보승, 정용, 일품 부대 등이 있었다. 부대와 인원을 살펴보면, 정용(精勇)이 50인, 일품이 128인이다(巨濟道內, 精勇五十人, 一品一百二十八人). 일품군은 보통 군대와 달리 공인(工人)으로써 조직된 공역군이란 것이 특색이었다. 복무 기간은 추기(秋期, 가을 추수기)를 기해서 연 2번째로 교체되었으며, 1191년(명종 21)부터는 3번째로 바뀌었다.
참고로 <거제군읍지(巨濟郡邑誌),1899년(광무3년)>와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고려시대(高麗時代) 거제현령을 지낸 분은 다음과 같다. ① 진중명(秦仲明 1078~1137)은 중원(中原) 사람으로 아버지 진상(秦相)은 국자제주(國子祭酒)이고, 어머니는 채주선(蔡周善)의 딸이다. 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갔으나, 과거에는 합격하지 못하였고, 청새진판관(淸塞鎭判官)과 궁궐도감녹사(宮闕都監錄事)를 거쳐 거제현령(巨濟縣令)이 되었다가, 병으로 귀경한 후 별세하였다. ② 거제현령(巨濟縣令) 송저(宋詝)는 명종조(明宗朝) 신축 11년(1181년)에 문관의 지방관 임명과 관련하여 탄핵을 받아 좌천되어 왔다. ③ 고려중기에는 이윤섭(李允涉) 현령이 있었고 ④ 고종 10년(1223년)에 최유공(崔愈恭)은 문반을 살해하려는 모의를 주동하여 상장군(上將軍)에서 강직되어 거제현령(巨濟縣令) 부임했다. 그리고 ⑤ 거제현령 진용갑(陳龍甲)은 1226년(고종13년) 1월에 거제도에서 사도전(沙島戰)을 벌렸다. 고려 고종조 현령으로 왜구와 수군전을 벌이니 야밤에 왜놈들이 도망갔다(高麗 高宗朝 縣令 陳龍甲 以 舟師戰 倭于此倭夜遁). <고려사>에는 경상도 연해주군에 왜가 침구하므로 거제현령 진용갑이 수군으로 사도에서 싸워 2급을 참살하니 적이 밤에 도망하였다. 또 다른 기록에는, ‘사도(沙島, 사두도)는 고현(古縣) 동쪽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때에 왜적(倭賊)이 침입하자, 현령 진룡갑(陳龍甲)이 수군(水軍)을 이끌고 사도에서 싸웠는데 적이 밤에 도망쳤다.’고 한다. 진룡갑은 이후에 장평진장(長平鎭將)으로 승차했고, 북쪽변방 화주(和州 지금의 영흥) 동진과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 당시 진용갑에게 내린 조서에 "농사일이 한창인데 한발이 재해를 끼치고 있다. 이는 정치와 형벌이 잘못된 탓이니 나는 심히 두려워하노라. 참형과 교형 이하로서 유형 중에 있는 자는 가까운 곳으로 적당히 옮겨주고 감금되어 있는 죄수는 다 놓아줘라. 무인일에 동진이 화주에 침입하여 마소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하므로 진용갑이 사람을 보내 타일렀더니 다 버리고 갔다. 마지막으로 ⑥ 이윤보(李允甫) 거제현령은 1230년 전후에 재임했다.
그리고 위의 최유공(崔愈恭)과 송저(宋詝)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정중부 무인정권부터 최씨 무인정권까지도 거제섬은 변방지역 내지 소외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짐에 따라 점점 황폐화되어 갔다.
(가) 고려시대 거제현의 행정구역 변천
거제 임내는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3영현과 부곡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고려시대 거제지역의 군현체계도 재편에 대하여 살펴보자. 12목(牧)이 설치된 성종2년(983년)에는 기성현(岐城縣)으로 개칭하여 성을 쌓고 12목 가운데 하나인 진주목(晋州牧)에 편입되었으며, 당시 본도(本島)의 칠천도(七川島)와 가조도(加助島)는 목장(牧場)으로 상마(上馬)의 공급처가 되었다. 성종 14년(995년) 이래 개편된 12절도사(節度使)체제에서는 거제지역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여 진주(晋州)절도사의 통제 하에 놓였고 거제의 유일한 역(驛) 오양역(烏壤驛)이 설치되었다. 5도 양계체계로 재편되기 시작하는 현종 9년(1018년)에는 거제현으로 다시 복명되고 현령관이 파견되었으나, 당시 거란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조성하고자, 남해안 전 지역에서 대장경판을 제작하기 위해, 지금의 통영과 고성지역인 자고현(自固縣)을 거제현의 임내에 두고 현령(縣令)을 파견하면서, 경상도(慶尙道)의 진주목(晋州牧)에 소속시킴으로써 거제현이 주현(主縣)으로 됨과 동시에 그 행정규모가 확대되었으나[최초 광역통합행정구역], 뒤에 고성현이 분리됨으로 인해 다시 그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고려시대 거제읍치(巨濟邑治)는 사등면 사등성 인근 사월포(沙月浦)였던 것으로 문헌 기록상 유력하다. 먼저 <거제군읍지> <거제읍지>에 의하면, ‘고려 고종조 거제현령 진용갑이 수군전 왜구를 밤에 격퇴하다(高麗高宗朝縣令陳龍甲以舟師戰倭于此倭夜遁).’ 고종 13년(1226년) 1월, 왜(倭)가 경상도(慶尙道) 연해 주군(沿海州郡)에 침구(侵寇)하므로 거제 현령(巨濟縣令) 진용갑(陳龍甲)이 주수(舟帥,수군)로 사도(沙島)에서 싸워 2급(級)을 참살(斬殺)하니, 적(賊)이 밤에 도망하였다.[사도전(沙島戰)] 여기서 사도(沙島)는 거제도의 고지도에서 모두 사등면 앞바다 ‘사두도’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전함을 이끌고 밤에 바다로 나아가 적을 물리칠 수 있는 곳은 사등성 인근 사월포(沙月浦)였을 것이다. 두 번째로 <청구요람 거제부> 고지도에 ‘고려 고종 때 거제현령 진용갑이 왜를 격파하니 도주했다.’고 적힌 섬이 현재 사등 앞바다 ‘사두도’이고 지도에는 유자도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거제군읍지의 기록을 증명하고 있다. 세 번째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4년(1422년) 환도(還島) 직후의 거제현 치소(治所)인 수월리(水月里)에 목책을 설치하였으나 현민들의 거주와 농업생산에 있어서의 입지조건, 그리고 군사적 지형조건 등에서 불리하였다. 그래서 세종 7년(1425) 2월에는 거제현의 치소를 그 조건상에서 유리한 고읍(古邑)으로 옮겨가는 방안이 검토·의결되었으며, 가을부터 시행하기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고읍의 읍성은 세종실록(世宗實錄)권30, 7년 10월 신사에서 사월포(沙月浦)에 위치하는 것으로 지칭하고 있으며, 지금의 사등(沙等)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원종 12년(1271)에는 진도의 삼별초 항쟁군이 거제지역을 내습함으로 인하여 거제현과 명진현 등의 속현의 관리와 가솔들 약1000 명 정도가 인근 내륙지역인 거창현(居昌縣)의 가조현(加祚縣) 등지와 진주목의 임내인 영선현(永善縣)으로 분산·이주시켰다. 하지만 대다수 거제민은 섬에 남아 생활했으며, 거제현령이 거창군 가조면 거제현으로 부임하면서 거제 본섬은 행정권 밖에 놓여있게 되었다(중앙정부에서 섬이 텅 비어 있다고 기술했다). 거창군 거제현은 충렬왕(忠烈王) 때 관성(管城)에 병합하였다가 곧 복구하였다. 우왕(禑王) 때에는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인 조운흘(趙云屹)이 황폐화된 거제섬의 농업·어업의 산업 생산력과 군사적 기능을 복구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비록 행정관청은 육지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지만, 남해안의 수군진영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이 후에 몽고의 일본 침략과 맞물러 거제 본섬에는 고려말 1300년대 초기, 송변현에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다대포)'가 설치되면서, 거제본섬에는 다시 육지로부터 유입되는 유민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1356년 (공민왕5년) 김보(金普)가 거제도 가라산(加羅山)으로 유배왔는데, 이를 관리한 관리는 수군진영 가라산방어소였다. 또한 조선 태조 때 1392년~1394년 사이에 고려 왕씨들이 둔덕기성으로 유배 왔을 때에도, 이들을 통제 관리한 관리는 ‘견내량 수군만호’였다. 또한 조선초기 경상우수영을 거제도 오아포(가배량)에다 설치한다. 태종11년 1411년, 가배량(加背梁, 통영)·견내량(見乃梁) 등지의 만호로 하여금 옥포(玉浦)로 옮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른바 그 목구멍을 틀어막은 것이었다.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하는 곳이 여덟이니, 고성(固城) 가배량(加背梁), 지금은 거제(巨濟) 옥포(玉浦)에 있으니 도만호가 수어한다. 병선 22척, 군사 1천 1백 22명이었다. 거제(巨濟) 영등포(永登浦)에는, 병선 8척, 군인 7백 20명이 있었고, 1404년 견내량(見乃梁), 거제(巨濟) 옥포(玉浦)에는, 병선 20척, 군사 9백 40명이다. 1418년 당시 오아포 수군절도영에는 병선 28척, 군사 2천 6백 1명이 주둔했다. 조선태종 때 거제본섬 수군인원만 3000 여명이 넘었다. 수자리 살던 수군이 대부분이라 그 가족을 헤아리면, 조선건국 후 1410년대에 벌써 엄청난 인원이 거제도에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 이래 고려시대까지 거제지역은 진주목의 관할 아래에 있었으며, 중앙정부의 지방통치 관철, 정치·군사적 상황에 따라 중앙정부로의 종속적 재편을 겪었고, 군현 행정관청의 존립적 위기까지도 맞이하게 되었다. 거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앙정부의 지방제도에 따라 진주의 군현에 속하다가, 조선전기는 경상우수영관할로 이어왔고, 조선후기에는 김해진관 소속으로, 근대에는 잠시 동래부에 속하기도 했다.
(나) 거제관문(巨濟關門) 오양역원(烏壤驛院) 설치
<역(驛)>은 옛날에 공무를 띠고 여행하는 관리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장소였다. 또한 이외에 사신왕래에 따른 접대, 중앙과 지방 공문서의 전달, 진상물과 관급물자의 수송을 통해 중앙집권체제가 유지하는데 큰 기능을 담당하였다. 특히 변방의 군사상황을 알리는 파발제도를 역에서 주관하였기에 군사통신의 기능도 수행하였다.(역리는 기본적으로 세습제) 변방의 역원은 성곽을 구축해, 국가의 정보통신을 보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시대 운송체계 관리>에서 살펴보면, 역에서 하는 일은 교통, 운수 외에 죄인의 체포, 수감, 석방 등을 주관하였고 노비의 추쇄도 수행하였다. 역의 위치가 교통의 요지이므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였기 때문에 감찰의 기능을 부여하였다. 반면에 수시로 중앙의 관리와 공문서가 오갔으므로 한양과 다른 지역의 소식을 지역사회에 가장 먼저 전달하는 정보전달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역의 소용경비는 보름이나 월말에 정산하고 관장(官長)의 확인을 받았다. 역리는 한 달 혹은 일 년 정산서에 역에 사용한 모든 것, 예를 들어 식사에 소용된 쌀, 기름, 장, 소금 등을 물품별로 지출내역과 소용된 양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하였다. 따라서 누가 언제 역을 이용하였으며 지출된 것은 무엇인가가 분명하였다.
○ 고려시대 995년(성종 14년)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중앙 개성으로부터 전국으로 뻗어나간 22개 역로 중에,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통영 거제)까지의 길에서, 28개의 역참 마지막 역이 거제의 오양역(烏壤驛)이었다. 오양역은 고성의 배둔역(背屯驛)과 함께 진주 평거역(平居驛)으로 연결되며 다시 여러 역로를 통해서 개경으로 연결되었다.
고려시대 정과정곡(鄭瓜亭曲)을 지은 정서(鄭敍, 생존 연대 미상)가 역모로 동래에 귀양살이 하다가, 1157년(의종11년)에 거제도로 이배되어 왔다. 거제현 오양역 인근에서 13년이라는 오랜 기간의 유배생활을 했다. 또한 1170년 고려 의종이 거제까지 유배를 온 결정적인 이유도 고려시대 역로 길 중, 당시 개성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마지막 역이, 거제 오양역이었기 때문이다.
○ 고려말기 거제현이 거창현 등지로 주민이 소개될 때, 오양역도 거창군 가조면(加祚面)에 본도(本島)의 이름 그대로 마양역(馬壤驛,오양역)이 옮겨가 있다가, 조선 초기 두 차례의 대마도 정벌 후에 남해안 도서지방이 안정을 찾자 1425년(세종7년)에 다시 복구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복구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거제현(巨濟縣)의 오양역(烏壤驛)을 복구(復舊)하였으니, 지현사(知縣事) 손이순(孫以恂)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당초에 고성(固城)의 송도역(松道驛)에서 거제현까지가 70리이고, 거기서 옥포(玉浦) 영등(永登) 각 포까지는 또 요원(遼遠)하므로, 송도역 말이 많이 시달려서 죽게 되는 까닭으로 이 역을 설치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세조 29권, 8년(1462년) 8월 5일 기사에는 "병조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과 역승을 두었고 오양역을 포함한 16역은 소재도 역승(召材道驛丞)으로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500년(연산6년) 오양에다 오양보(烏壤堡)와 역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오량성은 사등면 오양리 오량성(烏良城·도기념물 제109호)이고 1500년(연산군 6년)에 쌓은 성으로, 당시의 오양역(烏壤驛) 보루터다. 말 5필에 역리 20명에 권관(權管)을 두어 방수(防守)하게 하여 그 기능을 강화시켰다. 석축으로 된 이 성(城)은 둘레가 1,172m, 높이 2.6m, 폭 5m이며, 성내는 마을이 대부분 들어섰으며, 성 밖은 논으로 사용되고 있다. 북쪽과 서쪽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오양포(烏壤浦)를 말할 때 ‘오양역에 있다’는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주 소촌역 문산찰방 관할로서의 역로의 끝에 위치한 종점이었다.
○ 거제도 지역 중에 ‘오양‘에다 역원을 둔 것은, 당시 고려시대에는 바다를 건너 최단거리인 이곳에서, 말이나 수레를 갈아타고 아주현 송변현 명진현 고정리(고현)로 가장 빠른 시간에 도착 할 수 있는 최단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의 재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공해전이 필요 했는데 견내량에서 가장 가까운 근처에 하천과 들녘이 있는 지역이 여기 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거제도는 유배자가 많아 견내량을 진선(나룻배)를 타고 오양리까지 건너와서 배소지로 이동했다. 거제유배문학 중에 진선으로 건너는 그때 심정과 풍경을 읊은 시가 다수 전해지고 있다.
○ 참고로 '오양'의 지명어원은 우리나라 고어 '오랑'=뱃대끈, 즉 안장이나 길마를 소나 말 위에 지울 적에 배에 조르는 줄을 말하는 뜻으로, 역참의 제일 마지막 역인 오양역에서 역말을 교체하고 다시 안장과 길마를 장착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오랑>오양(烏壤)으로, 한자어는 음을 빌려 차용한 것으로써 별 의미가 없다.
(다) 고려 1128년 거제도 3속현의 항쟁
고려중기 1128년, 개경정부에서 고대로부터 한·일 해상교류의 거점이자 교통로인, 거제도 남동부해안 명진현(거제면)·송변현(남부면 동부면)·아주현(일운면 舊장승포읍)에 거주하던 거제해상민족을 해적으로 단정하였다. 이에 거제현민 약 1000명 이상이 봉기하여 약5개월간 항전하다 결국 투항하였고, 살아남은 이들 중에 약 820명을 합천 진주 등지로 분산, 강제 이주케 한 안타까운 역사가 있었다. 거제도 남동부는 고대로부터 자유로이 바닷길을 항해하며 살아온 해상민족이 터전을 일구어 온 곳이었고, 통일신라 때부터 중앙정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거제군의 3속현이 된 지역이었다. 그러나 1128년 이 사건을 계기로 거제해상민족이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대마도, 일본과의 유대관계가 소멸하기 시작하였고, 소위 '왜구'라 불리는 해적이 보복성 약탈을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1700년대까지 거제도에는, 해상민족의 풍속을 버리지 못해 선박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일부 '해상족'이 있었다고 사료에 전한다. 거제의 정체성(Geoje's identity) 확립에는 이러한 점을 눈여겨 고찰해야하며,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 각종 정사 기록물인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는 당시 사건내용을 살펴보자. ① 먼저 정사(正史)로 알려진 고려사(高麗史)15권 인종(仁宗)6년 1128년 4월, “남쪽 경계에 해적(海賊)이 많이 일어남으로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응문(鄭應文)으로 선문사를 삼아 가서 효유(曉諭,알아듣도록 타이름)하게 하였다.”라는 내용과 함께, 그해 10월 임자에는 "임자 초하루에 동남해 안찰사(東南海按察使) 정응문이 ‘명진(溟珍)·송변(松邊)·아주(鵝州) 세 현(縣)의 해적인 좌성(佐成) 등 820명이 투항하여 복속하였음으로 이에 합주(陜州)의 삼기현(三岐縣)에 귀순(歸厚)·취안(就安)의 두 장(場)을 설치하고 진주(晋州)의 의령현(宜寧縣)에 화순장(和順場)을 두어 거처하게 하였습니다."라고 아뢰니 여러 신하들이 하례를 하였다한다.
여기서 인종 6년(1128)에 활동한 남쪽 경계의 해적이라 칭한 '좌성(佐成,佐城)'은 고려시대 주현의 '속현 관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므로 거제3속현의 우두머리를 해적이라 부른 것이다. 1128년 4월 왕명으로 개경 정부에서 선문사를 파견하고, 10월 보고를 받았으니, 약 5개월 정도 거제3현이 정부군에 항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해적의 투항에 여러 신하가 의종에게 하례하였던 사실은 곧 거제 남동부지역을 거점으로 삼은 해상세력이 개경의 귀족 관료층에게 큰 영향을 줄만큼 활발하게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선박을 이용하여 일본이나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지 않고, 5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정부에 항전한 점과 이후 투항 한 점은 이들이 거제지역의 사회·경제적 모순과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거제현민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한 ② 거제도지역은 기원전부터 중국 일본 백제 가야지역을 잇는 해상교통의 경유지로써,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지 않는 국제자유무역항의 역할을 해왔었다. 그러나 신라 문무왕 때 상군(裳郡)이 설치되면서 사실상 중앙정부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고려건국으로 개경이 수도가 되자, 거제지역은 그 역할과 기능이 약화되어 변방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와 함께 고려시대 대외 교류에서도 중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국(對中國) 교류가 부각되고 대일(對日) 교섭이 극히 미미함에 따라 대일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역할을 해왔던 거제지역의 위상은 더욱 위축되었다. 육지와 가까운 사등면과 둔덕면 지역과 하청면 장목면은 남해연안 지역에 위치한 조창과 세곡 해상운송로에 위치한 관계로, 정부에서 거제현령을 파견하여, 정부의 영향권에 있었다. 그러나 거제 남동부 해안지역, '명진현(거제면)·송변현(남부면동부면)·아주현(일운면, 장승포읍)' 3속현은 고대로부터 동아시아 해상민족의 문화권이 면면히 이어오던 지역이라, 지역유력자가 현을 다스리고 있었고, 관리를 '좌성(佐成)'이라 불렀으니, 지방색이 뚜렷한 토호세력의 수장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정부에서 3속현의 토착인 모두를 잡아, 정부통제를 굳건히 하고자 육지로 강제소개 시켰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예로부터 동일한 해상문화권인, 일본 큐슈 대마도 남해안 연안지역의 관계가 단절되기 시작하였고 바다의 국경이 뚜렷하게 경계 짓게 되었다. 당시 1128년 3속현의 해상 활동은 중앙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남해연안의 해상조운을 위협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이들을 해적(海賊)으로 취급했겠지만, 이로 인해 대마도 이끼 큐슈북부 지역의 해상족이 왜구로써 우리나라를 적극적으로 침탈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거제민의 항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26년 5월에 인종에 대한 이자겸의 난이 평정된 후에, 이자겸 아들 이지언(李之彦)이 일부 가솔들과 함께 거제도로 유배 왔다. 당시 이지언과 거제 3속현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한 연관성(기록물)은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기록에 관계없이 이들과 관련성을 추정하여 서술 할 사건은 절대 아니다. 당시 3속현 항쟁에는 최소 1000 여명 이상이 봉기하여 농어민들에게 장악되었는데, 인근 진주목 지역에서 대규모 진압군이 들어와 농어민들을 처참히 도륙하였다. 그 중 820명은 사로 잡혀 진주 합천 지방의 천민 마을로 이주 당하였다. 이후 1155년 완산에서 농민반란, 1162년 이천 등지에서 대규모 민란발생, 1163년 남도지방에 농민반란 발생, 1168년 제주에서 농민반란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고려 인종(재위 1122년~1146년)과 고려의종(재위 1146년~1170년) 동안 끊임없이 민중의 항쟁이 일어나더니 1170년 무신정권 이후에도 민중항쟁은 전국적으로 수없이 발생했다.
○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문호를 개방하고 개방적 정책을 지향하여, 1128년 당시 5개월간 항전한 거제민을 정부에서 해상무역 발전을 고려해 이들을 대우하고 폐쇄적 정책을 지양했더라면, 몽고의 침략에도 굳건히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며,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이어온 해양국가의 명맥을 유지하여, 지금쯤 대마도 이끼섬 등지는 우리나라 지역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고려사 고려 인종6년 1128년 3월의 기록을 보면, "지금 수령은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이익으로 삼는 자가 많고 근면과 검소함으로 무민하는 자가 적어 창고는 비고 백성은 궁핍하다. 여기에 역역이 더해지니 백성이 손발을 둘 곳이 없게 되어 일어나 함께 도적이 되는 자가 많다"한다. 또한 이 시기 전후에는 왜구의 침입사실이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들 해적 항쟁세력의 실체는 자신의 정체성과 생계를 잇기 위하여 저항한 거제3속현의 백성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약 900년 전 우리 거제도에 아픈 항쟁의 역사가 있었음을 오늘을 사는 거제민들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더 나은 미래를 견지하는데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라) 고려시대 거제 유배상황
고려시대 995년(성종 14년)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에 역(驛)을 설치했는데, 산남도(山南道)길 즉,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합천∼진주(통영 거제)까지 마지막 역참으로, 거제의 오양역(烏壤驛)이 최초 신설되었다. 오양역은 당시 개경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우리나라 역참이었다. 이로 인해 이후부터 거제도는 중앙정부에서 유배지로 활용되기 시작하여 이후 약 800년간 지속되었다.
고려초기에서 조선초기까지는 오늘날 사등면과 둔덕면 일대와 오양역(烏壤驛) 부근에 정배되었고, 그 외에 해안 수군 방어소가 있었던 가라산 아래 다대포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대부분 자신의 가솔들을 데리고 거제로 유배 왔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거제도 첫 유배자는 1112년(예종 7) 속리사(俗離寺) 주지이자 문종의 6번째 아들 ‘승통(僧統) 탱(竀,정)’과 문종의 12번째 아들 ‘부여공(夫餘公) 수(燧)’이다. 이들은 왕위 계승을 두고 여러 배다른 형제들과 암암리에 다투다가 반역에 연루되어 멀리 거제도까지 찬축되었다. 고려 순종 선종 숙종이 그들의 형제였다. 한편 고려시대 기록물은 조선시대와 상대적으로 전하는 자료가 부실하다보니, 지금까지 총 14 사람 정도의 거제 유배자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고려시대 거제 유배자를 살펴보면, 이자겸의 아들 이지언(李之彦)이 1126년(인종4년) 가솔들을 데리고 왔고, 정과정곡을 지은 정서(鄭敍) 정사문(鄭嗣文)이 1151년(의종 5) 본향인 동래에 연고지 유배형에 처해져 있다가 다시 1157년(의종11년) 거제 오양역으로 이배되어 1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또한 고려 의종(毅宗)이 1170년 무신정변으로 폐위되어 약3년간 거제도에 유폐되었다.
특히 정서(鄭敍)의 <정과정곡(鄭瓜亭曲)>은 1170년 9월 고려 의종이 개경에서 축출 되어, 정서의 유배지인 오양역 인근 둔덕기성(폐왕성)에 와서, 1170년 10월 정서와 거제도에서 약 한 달간 재회한 후(고려사절요), 창작된 것이 확실하다. 정서의 유배기간은 관향인 동래 5년 10개월, 거제현 13년 8개월, 총 19년 6개월의 기나긴 귀양살이였다. 당시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 임춘(林椿, 1148~1186)이 정서가 남겨 놓은 글을 보고 지은 <정시랑(정서) 서시 차운(次韻鄭侍郞敍詩)><추도정학사서(追悼鄭學士敍)>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증언해 준다. 당시 임춘의 글에는 정서의 동래생활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다. 다만 그의 시구에는 거제현에서 유배생활만 기록해 놓았다. ‘이배 된 거제도 역참에서, 허물은 예전에 벌써 징계되었는데도, 20년간 도깨비와 싸웠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고종(高宗) 15년(1228년)에는 직학(直學) 경유(景儒)가 무인 최씨정권에 대해 정치를 비방했다는 무고를 당하여 거제로 귀양 왔고, 1356년(공민왕5년) 공민왕의 수종공신(隨從功臣) 김보(金普)가 가라산(加羅山)방어소로 유배되었다가 1366년 복권되어 수시중(守侍中)에 까지 올랐다. 고려말기 나계유(羅啓儒)가 친척 아우 나계종(羅繼從, 1339~1415)에 연루되어 유배 왔다가 이내 풀러나기도 했고, 조선건국 1392년부터 1394년까지 왕화(王和), 왕거(王琚), 왕우(王瑀)부자, 왕강(王康) 外, 고려종성(宗姓·왕씨)들이 둔덕기성에 유폐되기도 했다. <거제부읍지>에 의하면 ‘둔덕기성은 읍치 서쪽 30리 석성이며 둘레 1002척 높이 9척내 못 1개이다. 대대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본 조선초기 고려 종성 왕씨들이 유폐 되었던 곳이다.(屯德岐城 在府西三十里石城周一千二尺高九尺內有一池世傳 本朝初高麗宗姓來配之處)’고 기록하고 있다.
앞서 정서(鄭敍)의 유배처럼 본향(本鄕)이나 관향(貫鄕)에 보내지는 귀향형은, 죄인의 연고지로 유배 보낸 고려전기 가벼운 형벌인데 송제(宋制)의 영향을 받아 특혜적인 성격이 강했다. 고려의 연고지 유배형은 조선시대에는 부처(付處) 또는 안치(安置)형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거제도는 당시 개경에서 가장 멀리 보내야할 중죄인이나, 권력에서 패배한 강성 정치범의 유형지로 활용되었다.
(마) 고려범종 거제 북사종(巨濟北寺鐘) 혜일사종(惠日寺鐘)
고려시대 하청부곡(河淸部曲)에 북사(北寺)라는 사찰에 걸려 있던, 거제 최고의 유물 ‘고려범종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이 있다. 1026년(현종17년) 9월 제작, 1232년 일본 왜구에 의해 약탈(?)해간 북사종명(北寺鐘銘), or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 or 혜일사종(惠日寺鐘)이 현재 일본 좌가현(佐賀縣) 동송포군(東松浦郡) 경정(鏡町) 혜일사(惠日寺) 사찰에 보관 중이다. 총 높이 72cm(종 머리 포함), 무게 약72Kg정도인 거제북사종은 건장한 장골이 지게에 지고 산 위로 나를 수 있는 무게로써, 당시 일반 사찰에 하나씩 걸려있던 고려범종이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하청에 부곡북사(部曲北寺)라는 절이 있었고, 수월사 인근에 연정장(鍊汀莊, 고려초~고려중기)이, 거제 연초면 연사리'에 위치했고, 수월리(水月里) 수월사(임진왜란 소실), 하청면 가이포(加耳浦)의 가이사(임진왜란 소실)도 고려시대부터 존재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 현종9년(1668년) 1월 19일 기록에, ‘거제에서 구리가 산출되다. 거제(巨濟) 지역에서 동(銅)이 산출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동이 나지 않다가 지금 비로소 산출된 것이다.’라는 사실은 왜구의 침범으로 폐광되고 사라진 제련소를 이때 다시 복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불교 사찰에서 사용하는 종은 일종의 악기이며, 불교를 의미하는 범(梵)자를 붙여 '범종'이라고 한다. 불교 예불에 사용하는 4가지 중요한 기물을 사물(四物) 즉, 법고(法鼓)·목어(木魚)·운판(雲版)·범종(梵鍾)이라 하고, 이 사물 중에서 종소리는 백팔번뇌에서 벗어나게 하며, 자비하신 부처님의 신앙심을 가다듬게 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다.
◯ 거제의 하청부곡 북사종(部曲北寺鐘)의 구성요소를 살펴보자. 혜일사종(惠日寺鐘)은 원명(原名)이 부곡북사종(部曲北寺鐘)이고, 현재 일본 좌가현(佐賀縣), 당진시(唐津市) 대자종정(大字鐘町) or 동송포군(東松浦郡) 경정(鏡町)에 있는 사찰종이다. "후쿠오카(福阿)에서부터 카라츠시(唐津市)까지 달려가야 혜일사종(惠日寺鐘)을 볼 수 있다. 혜일사종(거제북사종)은 구경 514 mm, 전고 730 mm, 두께 45mm의 종이다. 혜일사종(惠日寺鐘)은 종정에 단용과 음통을 갖고 있고, 종신에는 견대 상대 하대 유곽 당좌 및 비천상과 위패형 명문 등 고려종의 구성요소를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종은 상협하광형의 모양을 비롯하여 당좌 비천상 위패문 등의 문양수법이 용두 상대 하대 유곽 등의 수법과 전혀 다른 점이 있어 일반적인 고려범종과 많은 차이점이 있다. 이 종에는 태평6년 병인(太平六年丙寅)이라는 명문이 있어 고려 현종 17년 (1026년)에 주성된 것임이 틀림없다. 이 종에는 종신후측의 당좌와 좌측면의 비천상과의 사이에, 그리고 또한 하대에 인접하여 만든 위패형 명문곽 중에 다음과 같은 명문이 양주되어 있다. 즉 ‘太平六年丙寅九月日河 淸部曲北寺鍮鍾壹軀入 重百二十一斤 棟梁僧談曰’[태평6년 병인9월 일 하청부곡북사 유종일구입중 121근 동량승담일].
종신 아랫부분 하대에 접하는 곳에는 사각형으로 구획된 방곽(方廓內)을 만들고 그 상부를 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방곽 안에는 글씨를 새겨 넣었는데, 이 같은 방식은 국보 제28호 천흥사동종 또는 현재 일본 사가(在賀)현 혜일사(惠日寺)에 소장된 태평6년(太平六年, 1026)명 거제북사종(巨濟北寺鐘) 등에서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이 명문에는 '太平六年'에서 태평은 요나라 성종(聖宗)의 연호이고 그 6년 병인은 고려 현종(顯宗) 17년 (1026년)이다. '하청부곡북사(河淸部曲北寺)'에서 하청부곡(河淸部曲)은 경남 거제시 하청면의 집락(部池)의 명칭이고, 북사(北寺)는 그 부곡의 북쪽 사찰(寺利)인데 정식사명을 말하지 않고 단지 북사라 했다. 고려 현종(顯宗) 17년 (1026년) 9월 거제도 북사 청동종 1구, 입중 121근이고, 담당스님(동량승) 담일(談 曰)이라고 명문을 요약할 수 있다."
○ 일본 좌가현(佐賀縣) 동일한 혜일사종(惠日寺鐘)과 승낙사종(勝樂寺鐘)
혜일사종(惠日寺鐘)의 형상(形狀) 및 문양(紋樣)과 동일한 승락사종(勝樂寺鐘)이 일본(日本) 구주(九州) 당진시(唐津市)의 반단료승락사(半團燎勝樂寺)에 있었다고 하며 그 탁본이 동경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명치(明治) 초에 독일인에 의해 해외로 반출되었다 하나 그 소재를 알 수 없다. 이 혜일사종(惠日寺鐘)과 승락사종(勝樂寺鐘)은 용두를 비롯하여 모든 문양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명문도 동일하다(크기는 다소 다르다). 만약 한국에서 만들었다면, 어떻게 한국 거제도 북사에 2개의 동일 명문의 종을 걸었을까? 일본 카라츠시(唐津市)에 있는 인접한 2개의 사찰에서 동일종이 어떻게 있게 되었을까? 아마도 ①첫째로는 당좌 비천상 위패문 등의 문양수법은 재일 고려종의 지문판(地紋板)을 떠서 만들어 고려식(한국식)이고, 용두 상대 하대 유곽 등은 일본식 수법으로 만든, 모조고려종(模造高麗鐘)으로 추정할 수 있다.(승락사종은 혜일사종의 모조 종으로 판단된다). ② 둘째로는 거제도 청동 제련소 연정장(鍊汀莊, 거제시 연초면 연사리 일대인데, 매립과 복토전의 옛 연사리 하천 하류 근처에 위치함)에서 만든 북사종을 왜구가 약탈해가고, 뒤이어 다시 만든 북사종도 약탈해 가, 결국 일본 구주(九州)에 2개의 동일 고려범종이 있게 되었을 수도 있다.
○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거제북사종은 일본에 있는 대표적인 고려범종(高麗梵鐘)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인 범종과 같이 단두(單頭)의 용두(龍頭)와 음통(音痛)을 갖추고, 상하대(上下帶), 당좌(撞座), 천인상(天人像) 등을 갖추고 있다. 명문은 종의 배면(背面)의 당좌와 왼쪽 천인상과의 중간 하대(下帶)에 마련된 위패형 명문곽 안에 양주(陽州)되어 있다. 명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 종은 1026년(현종 7, 大平 6)에 만들어져, 현재의 경상도 거제시 지역에 있었던 하청부곡(河淸部曲)의 북사(北寺)라는 절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새긴 추기(追記)에 의하면, ‘1232년(고종 19) 사가현(佐賀縣) 당진시(唐津市)에 있었던 비전종사(肥前鍾社)의 사람이 고려에 건너와서 많은 진기한 보물을 훔쳐 돌아왔는데, 가마쿠라 바꾸후(鎌倉幕府)에서 그를 체포하고, 보물들은 압수하였다’고 한다. 결국 이 종은 13세기 왜구(倭寇)에 의해 약탈된 것으로 보인다.
(바) 삼별초 항쟁과 거제현민의 강제 이주
거제현은 고려시대 1271년(원종 12)에 삼별초의 난이 발생하자 정부에서 육지로 소개령이 내려져 거제현(巨濟縣)의 관리와 관노 수졸(戍卒) 등 약 1000 여명이, 거창현의 속현인 가조현과 진주 영선현(훗날 강성현→진성현→산음현→산청군으로 개칭)으로 피난을 떠난 아픈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 거제현의 관청은 거창군 가조현에 더부살이를 했고 조선조 1422년 세종4년 거제 본섬으로 환도(還島)하는 불행한 역사가 있었다. 조선시대 각종 기록과 많은 사람들은 지금껏 왜구의 침범으로 인하여 피난 간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1270년에 삼별초항쟁이 시작되어 1271년 진도에 있던 삼별초가 여⋅몽 연합군에게 함락 당한 후, 주력 부대가 제주도로 옮겨간 삼별초는 남해안의 세곡선과 세곡창고를 습격했다. 이에 정부는 거제지역 뿐만 아니라 남해도 등 인근 섬지방 사람들이 삼별초 항쟁세력과 연대할 수 있는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 1271년 미리 육지로 소개령을 내렸던 것이다.(남해현민들은 이후 남해본도로 돌아갔으나, 거제현민은 1422년까지 돌아가지 못하였다) 거제본도(本島)안의 속현(屬縣) 및 역(驛)·원(院) 등 총 1000명 정도의 관청 관계자와 노비 등이 거창군 가조현(加祚縣), 진주목 영선현(永善縣)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현령은 현의 수령으로, 현의 인구가 1만 명 이상이면 현령을 두고 그 이하이면 현장(懸長)을 두었다. 당시 거제인구는 최소 8000명 이상이었다(수군 인원 제외). 육지로 거제관청을 옮긴 1년 후인, 원종(元宗) 13년(1272년) 11월에는 삼별초(三別招)가 거제현(巨濟縣)에 쳐들어 왔다. 이때까지 남아 거제현민을 지키던, 거제현령을 잡아가고 전함(戰艦) 3척을 불태웠다.
이후 중앙에서 파견되던 거제현령은 거창군 가조면 거제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초기까지 거제관청이 본도(本島)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왜구의 침범으로 인한 불안한 정세 때문이었다(150년 간). 거제현 관아가 거창현에 더부살이 하여 마치 거제도 본섬에 사람이 살지 않은 것으로 오해 하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육지로 피난 간 거제민은 일부에 불과 했으며 대다수는 그대로 생업에 종사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수군진영 포함).
○ 그렇다면 당시의 여러 정사(正史)의 역사기록을 살펴보자. ‘거창군의 가조현에 임시로 의지하여 살았으며, 충렬왕 관성(관성)에 병합하였다가 곧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였다’(『고려사』권57, 지리지, 경상도, 거제현).
거제현이 가조현에 임시로 의지하여 살았을 때 본도(거제섬) 안의 속현 및 역·원 등을 가조현 경내에 아울러 임시로 설치하였다. 아주촌(鵝洲村) 아주현은 군(거창군)의 동쪽 10리 지점에 있고, 송변현은 무촌역(茂村驛)의 남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오양역도 가조현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하여) 사는 거제현민들이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31, 경상도, 거창군, 고적).
거제의 명진폐현(溟珍廢縣)은 원종 때에는 왜를 피해, 육지에 나와서 진주의 영선현(永善縣)에 살았다. 본조(조선) 공정왕(定宗) 때에 강성현(江城縣)과 합병하여 진성현(珍城縣)이라 하였고, 세종 때에는 본 섬(거제도)에 다시 내속시켰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32, 경상도, 거제현, 고적).
명진현은 원종 신미년에 왜적을 피해 육지로 나와서 진주 임내인 영선현에 살았다. 본조(조선) 공정왕(定宗) 원년 기묘에 두 현(강성현과 명진현)을 합하여 진성(珍城)이라 이름하였다.(『세종실록』권150, 경상도, 진주목, 진성현)
이들 문헌은 거제현의 이주 배경을 ‘왜적(왜)을 피해’ 가조현과 영선현으로 이주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거제현은 속현 및 역·원 등을 가조현에 임시로 살았다. 거제현의 속현 아주촌(아주현)은 가조현의 동쪽 10리 지점(지금의 거창군 남하면 일대)에 있었다. 송변현은 무역촌의 남쪽 5리(지금의 거창군 남상면)에 이주했다. 명진현은 진주의 영선현(지금의 산청군)에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거창부편에는 오양과 송변역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참고로 영선현은 진주에 있었다가 명진현과 예전의 강성현을 합쳐 진성현으로 변경되었다. 진성현은 명진현이 거제섬으로 돌아가자 단계현과 강성현을 합쳐 단성현이라 했다. 지금의 산청군이다. 한편 명진현은 1427년(세종 9) 이후 거제현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세종실록』35권, 9년(정미) 1월 13일(임인) 6번째 기사 참조). 1436년(세종 18) 2월 4일자 세종실록에는 명진현 사람들이 이미 거제현에 옮겨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로 명진현은 1427년~1436년 사이에 거제섬으로 돌아왔다고 하겠다.
위의 기록에서 1271년~1272년 사이 거제현민이 육지로 피난 갔던 이유가 모두 왜구의 침략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고려는 삼별초를 역도 역적(逆賊) 혹은 왜구로 아울러 표현하다보니 삼별초를 왜구로 잘못 표기한 것이다.
◯ 삼별초 때문에 육지로 피난 간 기록들을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거창군 속현조에 의하면, 원종 때에 거제현(巨濟縣)이 삼별초(三別抄)의 난을 피해서 관아도 여기에 우접(寓接, 우거)하고 그대로 거제라 일컬었다. 우리 세종조에 와서, 거제는 본래 섬으로 돌아가고 현도 또한 거창으로 도로 예속되었다.
◯ 다음은 1470년,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재직 時, 고려 때 피난 와서 살다가 조선초기 거제도로 돌아가지 않고 거창군 가조현에 남아 살고 있는, 거제 유민(留民)의 평화로운 모습을 보면서, 지나간 거제민의 역사를 상기하며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가조현에서 자다(宿加祚縣)> 김종직(金宗直, 1431~1492)
“가조현은 거창(居昌)의 속현(屬縣)인데, 고려시대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있을 때에 거제(巨濟)의 이민(吏民)들이 바다를 건너 이곳에 도망쳐 와서 부쳐 살았다. 그러다가 본조(本朝) 초기에 와서는 그들이 옛 고장으로 돌아갔는데, 지금도 이 고을을 거제라 부르고 있고, 또 마을 이름도 아직까지 아주(鵝洲)ㆍ송변(松邊)ㆍ오양(烏攘) 등의 칭호를 띠고 있다.”(縣屬居昌 高麗三別抄之亂 巨濟吏民 渡海奔逬于此 遂僑寓焉 本朝初 還其舊土 至今號此縣爲巨濟 又村名尙帶 鵝洲 松邊 烏攘等稱)
“농사 짓는 사람이 빽빽히 사는데 공연히 섬의 명칭이 남아있구려. 계산은 은거한 선비들과 함께하고 부로들은 태평성대를 말하네. 고요한 밤엔 우리에서 돼지가 울고 텅 빈 처마엔 달이 기둥을 비추누나. 술이 깨자 촛불을 부르고 보니 이제야 속진에 얽혔음을 믿겠네.[桑柘人居密 空留海島名 溪山共隱逸 父老說升平 夜靜豚鳴圈 簷虛月到楹 酒醒仍喚燭 方信俗塵縈]”
◯ 당시 거제현(巨濟縣) 연혁(沿革)에 따르면 고려 원종 때의 거제현이 삼별초의 난을 피해 관청(官廳)과 백성을 거느리고 가조현으로 옮겨 왔기 때문에 원종(元宗)12년(1272)에 가조현(加祚縣)이라는 명칭을 잠시 버리고 거제현(巨濟縣)이라 하다가 조선 세종때 거제현이 본도(本島)로 돌아감에 따라 가조현은 거창현(居昌縣)에 붙여졌다.
또한 거창군읍지에 의하면, 원종 12년(1272년)에서 조선(朝鮮) 세종(世宗) 4년(1422년)까지 150년간을 이곳에 머무는 동안 潘氏(반씨), 諸氏(제씨), 申氏(신씨), 玉氏(옥씨) 같은 성씨들이 이곳에 옮겨 살았는데 환도(還島)하지 않고 남아 산 사람도 있었으며 또 오랫동안 맺어진 인연으로 함께 거제도(巨濟島)로 옮겨간 성씨들도 있었다. 지금도 가조현과 거제도에 동일한 지명이 있다. 수월리, 우두봉, 가조, 아주 등이다. 現거창군 가조면에 살고 있는 옥(玉), 반(潘), 신(申), 제(諸)씨의 뿌리는 거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거창부편(居昌府編)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가소(加召,가조현)에 들어온 거제현은 본도(本島)에 있던 속현(屬縣)의 이름을 따라 아주현(鵝州縣), 송변현(松邊縣)을 지금의 거창군 남하면 아주(鵝州)와 남상면 송변리(松邊里)에 두고 가조면(加祚面)쪽에는 본도(本島,거제도)에 있을 때 이름 그대로 마양역(馬壤驛,오양역)을 두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 태종 14년(1414년)에는 거창(居昌), 거제(巨濟), 두 현(縣)을 합하여 제창현(濟昌縣)이라 불렀다.[巨濟萬加祚時以本島內屬縣及驛院等竝僑置千 加祚不境鵝州縣在府東十里 松邊縣茂村驛南五里 島壤驛赤在加祚不西居民至今廼仍稱不松邊驛].
◯ 1274년 1281년 두 차례의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의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로 인해 거제도는 다시금 평온을 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난 간 거제현 관청은 여전히 귀도하지 않았다. 이때 환도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다시 왜구가 들끓었고, 조선 1418년 세종1년, 상왕 태종과 세종이 대마도 정벌 후에 거제현 관청을 본도로 옮길 것을 공표하여, 세종(世宗)4년 1422년에 거제관청이 옮겨왔고, 이후부터 8차례에 걸쳐 피난 간 거제현민이 옛 섬으로 환도하여, 지현사(知縣事)로 하여금 거제수령을 두었는데 그 뒤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실제 조선세종 때 육지에서 환도한 거제현민은 약 400 여명에 불과했다).
◯ 참고로 고려시대 거제도 성씨(姓氏)편을 살펴보면, ‘본현(거제현)에는 "반정박윤조손라" 있으며, 래성으로는 영산 "신"씨, 고성 "이"씨, "박", "백"씨가 있는데 함께 산다.
명진현에 사는 "임조한허하". 아주현에 "신문갈조". 송변현에 "박손". 하청에 "김손". 말근곡(말근향)에 "박". 해덕동(덕해향), 고정리(고현동)에 "조". 죽토동(죽토리) 연정장에 "조신". 새로 더하여 죽토동에 "옥". 의령에서 온 함안 "송정조"씨, 명진에 기계"유"씨가 있다.‘ [本縣潘鄭朴尹曹孫羅 來辛靈山 李固城 朴白 竝村 溟珍任曹韓許河 鵝州申文葛曹 松邊朴孫 河淸金宋 末斤谷朴 海德同 古丁曹 竹土同 鍊汀曹申 新增竹土玉 宜寧 松丁趙 咸安 溟珍兪 杞溪]
그리고 조선조 세종연간인 15세기 전반기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거제현의 관련기록에서, 하청(河淸)·죽토(竹土)·고정(古丁)부곡, 말근곡(末斤谷)향, 연정장(鍊汀莊)에는 모두 사람들이 없다고 한 사실에서, 고려시대까지 이어온 거제의 부곡제도가 조선조 거제 섬으로 환도하면서 해체되었음을 반증(反證)한다.
(사) 고려말 변방지역으로 재편, 독립적인 지방행정 단위의 존립위기
고려사(高麗史)권 27, 원종(元宗) 13년(1272년) 11월에는 삼별초(三別招)가 거제현(巨濟縣)에 쳐들어 와서 전함(戰艦) 3척을 불태우고 현령(縣令)을 잡아갔다.」 라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거제현을 인근 내륙지역으로 옮긴 다음 해인 원종 13년에는 삼별초 항쟁군이 거제지역으로 쳐들어 와서 전함 3척을 불태우고 현령을 잡아갔다. 이 같은 군사행동은 원종 12년 거제를 인근 내륙지방으로 옮기는 개경정부의 정책을 거제현의 지방관이 동조하고, 삼별초 항쟁군에 대한 진압군의 군사적 거점을 제공하는 등 삼별초 항쟁군에게 보인 비협조적 태도에 대한 응징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별초 항쟁기에 있어서 거제지역은 일정 기간 동안 삼별초 정부의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적극적으로 호응한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원(元)나라의 과중한 군량요구와 개경정부의 가혹한 수취에 따라 합포·고성·거제를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에 있었던 군현민들의 생활상이 피폐화되어 갔다. 이 같은 여건으로 때문에 다른 동조지역과 마찬가지로 거제지역의 토착세력과 하층 군현민들도 삼별초 항쟁군에게 어느 정도 호응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거제현을 인근 내륙지역으로 옮긴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삼별초 항쟁군이 여·원 연합군을 심한 곤경에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해상 군사력을 가지고 개경정부를 위협하면서 지속적인 항몽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거제 지역을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사회의 토착세력과 하층 군현민이 적극적으로 호응·협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도 거제지역이 전통적으로 해상교통의 중요 거점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사회·경제적 모순과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의식과 실천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물론 원종대에는 몽고의 강력한 요구였던 일본의 귀부(歸附)문제가 제기됨에 따라 한·일 해상교통의 거점이었던 거제지역이 일시 주목되기도 하였다. 고려사(高麗史)권 26, 원종 8년(1267년) 정월의 “송군비(宋君斐), 김찬(金贊)이 몽고의 사신과 더불어 거제도 송변포(松邊浦)에 이르러 풍파가 험한 것을 보고 두려워서 드디어 돌아왔다.”라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러나 삼별초 항쟁군이 와해된 이후에도 거제현은 원래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그 존립의 위기는 지속되어 갔다.
이 시기 이후 지속적인 왜구의 침략과 함께 여·원(麗元) 연합군의 일본동정(日本東征) 준비에 소용되는 막대한 인적·물적 자원은 고려정부, 특히 삼남(三南)지역이 부담 하였다. 이 과정에서 거제현을 비롯한 남해연안 지역사회의 군현민들은 대거 몰락하였으며, 거제지역도 더욱 피폐화되어 갔던 것이다. 또한 거제현이 관성(管城)에 병합됨으로써 그 독립적인 행정체계의 존립기반이 일시적으로 해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혁파되어 복구됨에 따라 그나마 독립 지방행정 군현 단위로써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고려말까지 거제본섬은 크게 황폐화되어 있었다. 고려사(高麗史)권 112, 조운흘전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바다로 왜국(倭國)과 가깝고 육지로는 오랑캐 땅과 인접되고 있으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경은 서해(西海)로부터 양광(楊廣), 전라(全羅), 경상(慶尙)까지 바닷길이 거의 2,000여 리가 됩니다. 바다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큰 섬은 대청(大靑), 소청(小靑), 교동(喬桐), 강화(江華), 진도(珍島), 절영(絶影 현재 부산시 영도구), 남해(南海), 거제(巨濟) 등의 큰 섬이 20곳이나 있으며, 작은 섬들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섬들은 토지가 비옥하고 어염(魚)의 자원이 있는데 지금은 모두 황폐되어 경영하지 않으니 한심한 일입니다.」라고 하여 고려말 우왕(禑王) 때까지 거제섬은 황폐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서해도 도관찰사(西海道都觀察使) 조운흘(趙云?)은 고려의 군사적 전략과 연결시켜 거제섬의 농업 생산을 바롯한 산업생산력을 복구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우왕(禑王)이 이 방안을 수용하여 도당에 회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시행이 불투명하여 거제섬의 복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중앙정부 통제권에서 벗어남). 그 결과 옮겨간 거제현과 그 속현의 관아 및 지역 사람들은 고려말까지 거제섬으로 복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있어서 거제지역은 남해연안의 변방지역으로 재편됨으로써 민족사에 있어서 그 역할이 크게 약화되어 왕족와 관료 및 고승의 변방유배지, 반정부의 항쟁지역, 빈번한 왜구의 침략지역, 삼별초 항쟁의 관련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고려의 성립과 더불어 대일교섭이 소원해짐에 따라 한·일 해상교류의 거점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크게 축소되었다. 12세기 초기이후 무인집권기에도 이들 지역은 변방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고려후기 삼별초 항쟁군의 세력권과 왜구침략 및 여·원 연합군의 일본동정(日本東征)에 있어서 최일선에 노출됨에 따라 거제섬의 피폐화가 가속되었고, 거제관아와 그 지역민들은 인근 내륙으로 옮겨가서 더부살이를 하였으며, 일시적이나마 독립적인 지방행정 단위의 존립도 위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같이 열악한 조건에서도 거제현민들은 민족사와 지역사의 전개과정에 있어서 그들의 역할을 유지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남해 연안지역의 해상조운로, 한·일 교섭의 거점지역으로서의 역할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개경정부의 사회·경제적인 모순구조에 저항하고, 왜구나 몽고의 침략에 대한 민족적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한 의식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지역사와 민족사의 발전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유배의 땅이라는 변방의 입지 조건을 오히려 중앙의 고급문화를 수용하여 자기지역 문화와 의식을 발전시키기는 계기를 삼기도 하였다. 이런 점이바로 고려시대 거제현민들의 저변에 흐르던 역사·문화적 성격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