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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씀 : 박 찬 덕 선교사
오늘은 마태복음 1장16절 예수님의 계보에 대한 말씀을 여러분들과 교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6절에 보면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라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만 누가복음 3장 23절에서는 요셉은 사실은
헨리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따른 바로 사람들이 아는 대로 이 법의 아들임을 율법의 규정에 따른
이 엘리라는 사람이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대신 이 마리아의 남편 될 요셉이라는 사람을 자신의 대릴 사위이며 아들로 법적인
후사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바로 이 율법에 따라 그의 아들로 여겨졌다 라는 것이 여기서 나온 야곱이 바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누가복음 3장 23절에 사람들이 아는 대로 법대로 율법에 따른 그래서 요셉이 사실상
헨리의 아들이 아니라 율법에 따라 그의 아들로 여겨졌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말씀이 1장 16절에 헨리의 법적인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을 낳았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23 〔예수의 세계〔마 1:1-17〕〕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요셉은 이 마리아의 아버지인 헬리의 사위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마리아의 아버지인 헨리라는 사람이 후사가 없이 딸만 가지고 있었으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기업을 합법적으로
물려주어서 자신의 지파 가운데 속하게 하기 위해서 바로 유다 지파 출신이었던 헬리는 또 유다 지파의 한 사람으로 나타난
요셉을 데릴사위로 삼았던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바로 민수기 27장 1절부터 8절까지 말씀과 36장 특별히 1절부터 12절까지 기록된 하나님께서 만든 규정에
의하여 바로 이 부모가 자식에게 상속자로서 기업을 물려줘야 되는데 만약에 이 남자의 씨인 후사가 없을 경우에는 딸만 있다면 그 기업이 그 유업이 딸들에게 가야 한다 라는 것이 구약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규정에 의한 것임으로 말미암아 반드시
그 딸들은 그 기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지파에 똑같은 유다 지파에 속해 있던 마리아는 또한 유다 지파의 한
사람으로 나타난 요셉이라는 자를 헬리의 법적인 후사가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유업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하여 바로
이 유다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서 나타난 것이 바로 야곱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라는 이 얘기인 것입니다.
민수기:27:1 〔슬로브핫의 딸들〕 요셉의 아들 므낫세 가족에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나아왔으니 그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27:2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족장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가로되
27:3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스려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에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27: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 가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27: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품하니라
27: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7: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비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얻게 하되 그 아비의 기업으로 그들에게 돌릴찌니라
27:8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기업을 그 딸에게 돌릴 것이요
27:9 딸도 없거든 그 기업을 그 형제에게 줄 것이요
27:10 형제도 없거든 그 기업을 그 아비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27:11 그 아비의 형제도 없거든 그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얻게 할찌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한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율례가 되게 할찌니라
마태복음: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래서 요셉이 예수님을 낳았다라고 말하지 않고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 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서
사실은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솔로몬을 통한 바로 이 남자의 노선을 따른 것이 아니라 여자의 노선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인 여자의 노선을 따라 태어나셨다 라고 말씀을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로 처녀에게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예언되었던 창세기 3장 15절에 최초의 복음이 있었죠.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또 이사야서 7장 14절에 바로 이 임마누엘에 대한 처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는
그리스도께서 요셉에게 나오시지 아니하시고 처녀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셨다 라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요셉이 남자였고 여고냐의 후손이었기 때문에 여고냐의 그 후손들은 포로기간 동안에 세상에 나온 여고냐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예레미야서 22장 28절, 29절, 30절에 기록에 의하면 다윗의 보좌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바로 이 이 남자의 후손 처녀인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후손이 되셨다 라는 누가복음
1장 27절 말씀과 31절, 32절 말씀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기에 모든 미비한 사항이나 결함이나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다윗의 후손으로서 여자의 노선인 마리아를 통해서 남자의 노선인 솔로몬의 계보를 통해서 온 요셉을 통해서 이렇게 세상에
나올 수가 있어서 합법적이며 적법한 이러한 절차를 통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하나가 되는 연합되어지는 결혼을 통하여 요셉이
그리스도와 연관이 있게 됨으로 말미암아 포로가 되어 있는 모든 자들도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속해 있는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이렇게 어우러지는 것을 통해 품에 안으시고 그 모든 자들까지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포함되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이끌어오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계보의 두 계열이 하나로 결합되어지는 일들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씨이고, 처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말씀을 통해서 절대 남자의 노선인 요셉에게 태어나지 않으시고 여자의
노선인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나단이라는 이러한 왕의 혈통을 가진 자를 통해서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여자의 노선을 따라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남자인 요셉이 아닌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음에 있어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그런 적법한 상태로 오시기 위하여 이 나단의 계보를 통한 여자의 노선을 따라 오셨다 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요셉에 의하여 태어남을 가졌더라면 다윗 왕이 바깥에 있어야 될 제외되어야 됐었던 문제가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여자의 노선인 마리아와 그리고 남자의 노선을 따라 온 요셉을 통해서 왔지만 여고냐는
다윗의 왕위를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수 없는 그러한 예레미야서 22장 28절, 29절, 30절 말씀에 의하여 그가 남자의 노선이
아닌 여자의 노선을 통해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이 남자의 노선인 요셉과 여자의 노선인 마리아와의 결혼을
통하여 42대 중에서 마지막이 되며 시작이 되시는 일몰이 되시고 일출이 되시는 바로 둘째 주 가운데 첫째 날인 여덟 번째
날을 위하여 42대로서 두 족보를 통한 두 계열을 하나로 결합시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 말씀이 상당히 난해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여러분이 되새김질하고 묵상한다면 참 진리 안에 속해 있는 그 진리의 중심
속으로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깊은 하나님의 안배에 따른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으로서 구주로서 세상에 오셔서 왕이 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천국 백성이 된 자들에게 생명을 나눠주시는 만왕의 왕의 모습을 우리가
마태복음을 통하여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이 계보를 하나의 이 계보로 상징된 전체적인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이 특별히 누가 복음을 통하여 첫 번째 이름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마지막 이름으로 등장되고 나타내고 계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담으로 아담에서 아브라함으로 이 두 가지 족보를 합쳐서 나온 전체적인 그림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아담으로 아담에서 아브라함으로 그러니까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피조된
족속인 아담이 창조되어졌으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실족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바로 부르심받은 족속인 약속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을 불러 특별히 분별시킴으로 말미암아 부르심 받은 족속의 대표자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삭과 야곱을 산출시킴으로 말미암아 그것이 다윗 왕까지 이루어지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새의 여덟 번째 막내 아들로 태어났던 것을 알 수가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가 바로 이 하나님의 백성인 왕에게 기름 붓기 위하여 찾아왔을 때 첫 번째 부름을 받은 7명의 아들들이
아닌 두 번째 부름을 통한 여덟 번째이며 마지막 단 한 사람인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바로 이 다윗을 택하여서 그에게 하나님의 백성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통하여
바로 이 선택받은 여덟 번째 마지막 사람인 그를 통하여 두 번째 주의 첫날이며 여덟번째 날인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바로 이틀 동안 죽음의 깜깜함과 어둠 가운데 있는 무덤 가운데 계셨다가 3일째 되는 날에 깜깜함을 지나고 바로 새 생명의 시작을 가져오는 일출의 삶을 위하여 새벽 미명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여덟째 날인 두 번째 주의 첫날인 여덟째 날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이새의 7곱번째 아들이 아닌 여덟 번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부활 안에 속한 사람들 곧 두 번째 주의 첫째 날에 속한 사람들인 여덟 번째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한 여덟 번째 자녀들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4세대 가운데에서 12세대의 마지막이었고, 또 그리스도의 족보, 열왕들의 족보 가운데서 처음이기 때문에,
다윗은 그리스도의 족보 중 열조들의 세대 가운데서는 마지막 결론이었고, 또 이 왕의 세대에는 첫 번째 시작이었던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이들 동안에 그 황폐하심과 삼일째 된 날에 부활하심을 통하여 이 다윗을 통하여 왕의 직분이 있는 왕국이 들어온 것처럼, 바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왕이시며 그리스도로서 바로 이 전의 세대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마지막이시면서 결론이 되시고, 또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의 문을 새롭게 여는 시작이기도 한 바로 다윗의 모습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다윗이 두 시대의 마지막과 시작이 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첫 아담 안에 있었던 창조된 모든 사람을 품에 안으시고 두 번째 아담 곧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산출해 줄 수 있는 두 번째 주의 첫날인 여덟째 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부활 안에 계신 여덟 번째 사람들에게 여덟 번째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생명의 풍성함과 안식과 누림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바로 여덟 번째 날 여덟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이 부활 안에 있는 여덟 번째 나라의 자녀들이 되게 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여덟 번째 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이기는 자가 되어야 되고, 강한 자가 되어야 되고, 강한 자가 됐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통일제국을 이룰 정도로 강한 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솔로몬이라는 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일을 완성시키는 다윗과 같은 자가 되기 위해서는 바로 여덟 번째 사람으로 이렇게 하나님에 의하여 기름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사울이 아닌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적합하지 않은 자였기 때문에 버림을 받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다윗이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회개를 통해서 커다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허물과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합쳐짐으로 말미암아 그 합당한 생명의 열매의 결과로 솔로몬이라 하는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자가 세상에 나오게 될 수가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가 막힌 안배와 기가 막힌 하나님의 그 오묘하신 지혜 안에서 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된 족속인
아담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실족하게 돼서 부르심받은 족속인 아브라함에게 넘어가고 아브라함이 그 자신의 씨를 통한
이삭과 야곱을 거쳐 다윗까지 이르게 함으로 말미암아 다윗을 통하여 두 계열인 나단이라는 아들과 솔로몬이라는 아들로
이렇게 분류가 되어서 두 가지 족보를 이루는 데 두 가지 족보가 바로 이 마리아라는 다윗의 아들이었던 왕의 혈통을 가진
나단이라는 자의 후손으로 바로 이 마리아가 여자의 노선을 따라 옴므로 말미암아 요셉이란 남자의 노선을 따라 솔로몬의
후손으로서 바로 이 남자의 노선을 따라온 그런데 그는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여고냐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태어나기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합당한 자였던 다윗의 혈통인 그 여인의 노선 여자의 씨
창세기 3장 15절 그리스도가 태어나기에 합당한 적합한 사람의 씨로 오시기 위하여 나단이라는 그러한 계보를 통해서
후손인 마리아와 이렇게 다윗의 왕의 혈통을 가진 자였지만, 하나님에 의하여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여고냐의
자손이었던 그 솔로몬의 후손의 계보를 통해서 온 바로 이 요셉이란 자와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로 연합되어져서
바로 그리스도의 42세대 때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이 두 가지 족보가 하나로 통일되어짐으로 말미암아 나단에서
마리아로 솔로몬에서 요셉으로 이어져서 이 마리아와 요셉의 이 두 가지 족보의 두 계열이 결혼이라는 하나의 통합되어지는
일을 통하여 합쳐짐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생산해 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예의주시하면서 살펴보아야 될 중요한 계시의 말씀은 하나님의 합당하시고,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안배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라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여자의 노선으로 온 마리아와 남자의 노선인 솔로몬을 따라 온 요셉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어지는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처럼 신비한 42대에 속한 일몰의 모든 삶을 끝내주시는 분 깜깜함과 어두움을
끝내시고 죄와 사망을 다 해결해 주시고 바로 이 죄와 사망 대신에 의와 생명과 거룩을 이 땅에 우리에게 부여해 주시고자
42대에 바로 이 생명의 부활 안에 계신 생명 주시는 영이 오신 바로 이 결혼으로 인한 하나님의 주권을 우리가 볼 수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펼쳐지는 모든 결혼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이러한 주권들 안에 속해 있다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는 삶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잘못된 결혼을 통하여 잘못된 삶을 살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지 아니하는 그러한 바로 12지파 가운데
북 이스라엘 왕국처럼 선택되어지기는 했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단 한명의 이름도 그곳에 포함되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은 그들이 선택된 백성이었고 부르심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삶을 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자들로 나타나졌기 때문에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 까지의 그리스도의 계보중에
북 이스라엘 왕국에 대한 왕의 혈통에 따른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다윗까지의 계보가 한 노선이었고, 또 다윗부터 예수님까지가 또 이렇게 두 노선으로 나타나서 14대
그리고 다윗부터 예수님까지 또 이 14대와 14대를 합해 28세대가 합쳐짐으로 말미암아 42세대 가운데서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 두 노선 열조에 대한 하나님부터 다윗까지 열조에 대한 계보의 노선과 또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을 통해서 남자의 노선과
여자의 노선, 곧 나단의 계보와 솔로몬의 계보의 결혼을 통해서 하나로 합쳐짐을 통해서 동정녀 마리아에 의하여 태어나신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말씀들 모든 계시의 말씀들 예언들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분이 바로 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씨에 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죠 예 그리고 이사야서 7장 14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 하라 라는 이러한 마리아에 의하여 태어나신 예수님은 바로 구약 성경의 예언의 말씀들을 이루시고 성취하는 말씀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시며 구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왕으로서 천국 복음을 선포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천국 백성이
된 자들에게 생명을 공급해 줄 수 있는 생명 주시는 영이 되신 분이라고 성경은 얘기를 하고 있는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모든 민족들에게 그 축복을 가져다 줄 씨를 갖게 된다 라는 말씀이 창세기 22장 18절에 있고요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라고 이 복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계신데요 이복이 바로 로마서 9장 27절과 그리고 히브리서 11장 12절에 기록된
이 축복에 대한 말씀이 바로 삼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9장 27절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히브리서 11장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그래서 이 창세기 22장18절을 통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축복을 가져다 줄 그 씨의 축복은 바로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삼일 하나님의 영를 부어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게 하시는 그 놀라운 축복 놀라운 생명의 씨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이 축복의 말씀인 예언과 그리고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창세기 26장 4절과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28장 14절 통해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예언의 말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예언의 말씀 유다에게 하신 그 유다 지파의 사자로서
왕의 지파가 될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인 창세기 49장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 모든 말씀이 다윗에게 하신 예언을 통하여 성취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에게 한 예언인 사무엘하 7장 12절 말씀인 것입니다.
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7:13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42대 가운데에서 출생하신 이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성경 39권에 있는 많은 예언들을 이루시고 성취하였지만
반드시 그분은 남자의 노선으로 오는 여고냐의 후손은 절대적으로 돼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남자의 노선인 솔로몬의 후손을 따라 바로 요셉을 통해서 낳았다 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단을 통한 다윗의 또 다른 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다윗 왕가의 혈통을 가진 나단의 계보를 따라 바로 마리아가 세상에 옴으로 말미암아 마리아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나왔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형적으로 볼 때는 이 여고냐의 바로 이 예레미야 22장 28절 29절, 30절에 다윗왕의 보좌를 물려받을 수 없는 하나님께서 거절한 여고냐의 그 자손들이었기 때문에 왜 그렇습니까? 바벨론 제국의 포로로 잡혀가서 사단의 세력 안에 있었던 그들을
통하여 다윗의 왕위를 가진 그리스도께서 태어하시면 합당한 사람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문제 때문에 두 가지 족보를 가지고 올 수 밖에 없었다라는 것입니다.
22:28 이 사람 고니야는 멸시받으며 부서진 우상이냐? 그는 아무 기쁨도 없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들이 쫓겨나되 곧 그와 그의 씨가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는 땅으로 쫓겨났느냐?
22:29 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주의 말을 들을지어다.
22:30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을 자식이 없는 자, 자기 날들에 형통하지 못할 자라고 기록하라.
그의 씨 가운데 형통하여 다윗의 왕좌에 앉아 유다 안에서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그래서 남자의 노선이 아닌 여자의 노선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의 몸에 의해서 세상에 나오셨다 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적이고도 절대적인 적합한 방법과 절차와 적합한 하나님의 의를 통해서 이루어지고자
하는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왕의 혈통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러나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여고냐의 자손인 남자의 노선을 따라온 솔로몬의 자손을 통해서 온 요셉과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어머니인 동정녀
마리아가 여고냐의 후손과 바로 이 여고냐의 후손이지만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요셉과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 제국에 잡혀 있던 70여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였던 그들까지도 하나로 연합되어지는 요셉과 마리아의 바로 이
남자의 노선과 여자의 노선으로 온 이 두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어지는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모든 그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까지도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게 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안배를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포로로 잡혀갔던 첫 사람 아담 창조된 족속인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하여 사단에게 사실은 사로잡힌 바 된 모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불행을 가지고 어쩔 수 없는 운명에 빠져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담이시며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될 수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자의 노선인 바로 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과 여고냐의 후손인 요셉과 그 왕의 혈통에 있는 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라 할지라도 요셉과 마리아가 이렇게 이 결혼을 통하여 하나가 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는 왕의 혈통의 계열로 보이는 그러나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합당한 사람이 여고냐의 자손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합당치 않아 보이는 포로로 잡혀간 그들까지도 품에 안으시고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될 수 있도록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런 여자의 노선인 마리아와 남자의 노선인 요셉과 결혼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품어주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여고냐의 왕의 혈통을 가진 자처럼 보이지만 절대적으로 다윗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는 그런 하나님께 거절당한 백성들이지만 바로 42대 속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모두가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는 여덟 번째 아들들이 되게 하는
바로 이 둘째 주의 첫날인 여덟 번째 날을 통하여 여덟 번째 아들들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2일간의 황폐함과 깜깜함과 어둠
속에 있었던 일몰의 삶 가운데 있었던 우리를 아담 안에 있었던 우리를 둘째 아담 안에 이렇게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일출의 삶을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어울어 품어주시는 다윗의 자손들이 되게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된 자들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안에서 사는 여덟 번째 아들들이 되게 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안에 속한 두 번째 주 첫날인 여덟 번째 날을 통하여 우리가
말하는 주일날을 통하여 새벽 미명하에 부활하신 이 막달라 마리아 앞에 나타났던 그분을 통하여 그 하나님만 행할 수 있는
그런 일을 바로 여자의 노선인 마리아와 남자의 노선인 요셉의 정말 외형적으로 이 왕의 혈통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포함될
수 없는 전혀 가질 수 없는 예레미야의 22장 28절, 29절, 38절 말씀에 왕의 혈통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포로로 잡혀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는 그러한 것들을 새로운 생명의 아들들로 전환시켜주기 위하여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안배 속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만남을 하나님께서 주선하셔서 그 일을 통해서 42세대에 바로 이 부활 안에 계신 생명 주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오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절대적으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기가 막힌 하나님의 안배와 절대적인 하나님만의 주권 속에서
우리들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구원의 원칙을 이렇게 안배 속에서 설정해 놓으시고 그 안배
속에서 설정해 놓으신 길을 따라 선민 이스라엘 왕국을 그렇게 다루신 것이 남왕국 유다의 다윗을 중심으로 하여서 이런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이렇게 과정을 지나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의 이 결혼은 우연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연히 그렇게 만나서 됐는가 보지 아닙니다. 남자의 노선인 요셉과 여자의 노선인 이 마리아와의 이러한 만남이
있을 수 있도록 포로로 잡혀간 그들을 70년 후에 고토의 땅으로 돌아오게 해서 어떻게 베들레헴이라는 그러한 땅에
그들이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참 기가 막힌 그 하나로 결합되어지고 연합되어진 결혼이라는 것을 통하여 바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게 하는 일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주님의 크신
세밀한 안배와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통하여서 우리가 지금 삶을 살면서 이렇게 경험하는결혼 생활까지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것이라고 우리가 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 우리가 어느 시간에 결혼을 하고 또 결혼함과 동시에 또 예수님을 우연찮게 만나게 돼서 교회 생활을
통하여 성도들이 되고 한 이런 모든 것은 만세전에 영원 안에 계셨던 하나님의 바로 이 안배와 계획에 따라 신성한 그분의
세밀한 계획표에 따라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 가운데서 존재하게 되었고 세상 가운데 나타나게 되어서 바로 그리스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속한 그러한 포함된 자가 될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연히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아주 오래전에 정말 천년 2천년 다윗 시대에 막 이렇게 태어났다거나 또는 종교가 지금 단절되고 있는
북한이라는 이 공산 국가에서 태어났다라고 한다면 여러분들과 우리가 어떻게 됐을까요? 참 그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힐 일입니다.
세상 가운데 내가 이곳에 존재하여서 이곳을 통해서 주님을 내가 이렇게 우연찮게 영접하게 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설정된 계획에 따라 신성한 그분의 손길에 따라서 계획되어져서 내가 존재하고 내가 결혼하고 내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위해서 살게 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필연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영원 언에서 태고 때부터 상고 때부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중심이며 목적이며
전부이신 그리스도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오시게 한 것처럼 우리의 나타남 또한 똑같은 방법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매우 주의 깊게 배려하시고 유념하시고 안배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주 하나님의
신성한 손길에 의하여 구원의 길들을 계획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같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 정말 미비한 사람들 티끌보다도 못한 우리들 정말 변변치 못하고 세상 가운데 정말 그 무엇조차도 드러낼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하여 모든 삶 속에서 나타난 것들을 안배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포함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되어졌다 라는 것은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고 하나님의 크신 우리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열지파가 아닌 두 지파처럼 바로 유다 왕국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을 이루기 위한 바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통로가 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불러세워 주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은 마태복음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특이한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이 계보를 통해서 5명의 여자가
계보에 나오는데 5명 가운데 4명의 사람들은 이방 여인이었고 대부분 삶의 흔적이 있는 부정한 여인이었습니다.
라합이라는 창기 좋게 말하면 창기죠 여리고성의 창녀로서 태어나고 삶을 산 기구한 운명을 가진 그리고 룻이라는
바로 자신의 옛 남편으로 인하여 짊어진 그 빛 때문에 자유함과 해방을 누리지 못했을 때 새로운 남편인 보아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새 남편인 보아스 부유한 자요 능력 있는 자요 구속 해줄 수 있는 빛을 탕감해 줄 수 있는 놀라운 그런 부와 능력과 힘을 가진 보아스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의 크신 능력의 힘 구속하는 힘이 바로 보아스에게 있다라는 뜻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있다라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주는 그 보아스를 새로운 남편인 보아스를 만남으로 룻의 삶이 전환되어지는 이런 것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말이라는 유다의 며느리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하나님의 그 신성한 장자권에 대한 신성한 세 가지 요소 두 배의 못인 땅과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소유하기 위한 그 일념으로 갈망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지탄받고 조롱받고 수치가 됨에도 불구
하고 오직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씨를 생산 해내기 위한 그 일 때문에 시아버지인 유다와 잠자리를 통해서 나온 자가 바로
놀라운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다말이 됐던 기생 라합이 됐던 룻과 같은 이방 여인이 됐든 밧세바가 됐던 이러한 5명의 여인들 가운데 모두가 이방 여인이었고 하나님의 회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자격이 부적합한 자들 자격이 없는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
이 여인들을 이렇게 지명하여 이름을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선택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된
자들이라는 것을 이렇게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근데 그 4명의 부정한 자요 4명의 이방인 여자들 가운데 마리아만큼은 합법적인 이 다윗 왕가의 후손으로서 적합한 순결하고
독특하고 순종하는 자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였기 때문에 바로 그 여자인 특별히 선별되어지고 분별되어진
마리아라는 여자의 노선으로 온 다윗왕의 또 하나의 아들이었던 나단이라는 아들을 통하여 여자의 노선인 바로 헨리의
딸이지만 후사가 없었던 그 딸을 통하여 바로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장면을 성경은 바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리아는 바로 이 사람이 아닌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그리스도를 낳았다 라고 누가복음 1장 34절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 바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님으로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인성을 가지고 오셨던 것입니다.
신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마리아 몸에 성령님으로 잉태되어짐으로 말미암아 인성을 가지고 오신 신성과 인성
두 종류의 본성 모두를 가지고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온전하신 그리스도가 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1장 18절과 20절 말씀이죠
1:18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니라.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였을 때에 그들이
함께하기 전에 그녀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밴 것이 드러나매
1:20 그가 이 일들을 생각할 때에, 보라, 주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 이르되, 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녀 안에 수태된 이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 계보에 따라서 바로 거룩함으로 태어난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태어나신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41세 때까지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태어난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누가복음 보다도 특별히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1장 1절부터 바로 16절까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태어났다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장 34절에 사람이 아닌 사람의 그 남자의 씨를
받아서 여자가 임신을 해서 자식을 산출해야 되는데 사람이 아닌 남편이 아닌 남자의 씨가 아닌 성령님으로 잉태하여서 나오신 분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로 거룩한 성령님에 의하여 잉태되어져서 태어난 그리스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바로 이 부정한 자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죄악 가운데에서 태어났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거룩함으로 태어난 성령님으로 인하여 잉태되어진 분이기 때문에 마태는 그리스도라 칭하는
바로 이 그리스도라고 불리시는 이 말씀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마태복음 1장 16절 하반절에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기름부음을 받은 성령님으로 잉태하여 거룩함을 가지고 태어난 바로 죄 가운데서 태어나지 아니한 신성한
생명의 씨로 태어난 분이심을 얘기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언급되지 않고 대신에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계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께서
인자 사람의 아들로 오신 인성으로 오신 사람으로서 오셨음을 강조하고 나타내기 위해서 누가복음에서는 바로
그 그리스도이신 그 예수님께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왕과 메시아로서가 아니라 인자로서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지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구약 39권에서 예표하고 계시하고 있는 그 왕이시며 메시아이며 기름부음
받은자 라는 것을 바로 나타내시기 위하여 그리스도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1장 16절에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라고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장면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장 31절에 이 소식을 전하는 천사 가브리엘 천사장이죠
그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라고 부르십시오 왜죠? 예수님은 기름부음 받은 자인 그리스도와
다른 똑같은 분이시지만 그런 관점의 왕으로서 오신 분이 아니라 메시아로서 오신 분이 아니라 인성으로 오신 인자 사람의 아들로 오셨음을 강조하고 입증하기 위해서 예수님이라 부르십시오라고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왕이시요 메시아 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라고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의 얘기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계보 42대에 대한 마태복음 1장 17절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정말
여기에는 좋은 이름을 가진 좋은 삶을 산 그러한 위대한 믿음의 선진자들의 이름도 있고 또 그렇지 아니하고 흠이 있고 흔적이 있는 삶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포로가 되어 바벨론 사탄의 세력 아래 잡혀감으로
말미암아 참 어둡고 암울한 삶을 산 사람들의 모습도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마리아는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예 그러나 바로 이 아브라함과 다윗과 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품어 끌어안아주시는 바로 이 42대 가운데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특별한 이 아브라함의 얘기가
42대 가운데서 가장 먼저 나오고요 열조의 위대한 자의 이 족보 가운데서 1장 1절에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 얘기가 나오죠
그다음에 열조의 위대한 자의 족보의 마지막을 다윗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고 또 왕들의 계보 가운데 또 처음으로 시작된 것을
통해서 다윗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1장 16절에 예수님이 42세대 가운데서 일출의 삶 생명 주시는 영으로서 오시는 그분을 바로 나타내기 직전인 마지막에
마리아와 같은 아주 순결하고 정말 믿음으로 사는 자의 이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통하여 처음에 계보의 시작에서 아브라함이 그리고 열왕들의 계보에서 다윗의 이름이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통해서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한 생명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생명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인 것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부름을 받고 난 후에 그는 믿음을 통한 믿음에 의한 생명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씨를 산출할 수 있게 된 믿음에 의한 생명을 대표하고 있는 자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럼 다윗은 뭐죠? 예 자기 자신이 큰 잘못 큰 허물을 지음으로 말미암아 그 큰 허물을 통해서 큰 회개를 하나님께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속한 아버지의 그 영원하신 사랑 안에 속한 바로 이 크신 용서하심에 따라 다윗의 허물과 회개와 하나님의 그 용서하심이 합쳐진 결과로 영적인 결혼을 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내지고 세상에 산출하게 된 것이 평화로운 자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 솔로몬이라는 자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여서 완성할자 하나님의 그 마음을 기쁘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을 자라는 여디디야라는 이름을 주었다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죄가 있고 잘못이 있고 허물이 있을지라도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죄와 허물들을 다 제거해
주시고 처리해 주시는 십자가의 처리 아래에 있는 생명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주님께 절대적인 순종 누가복음 1장 38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수 있듯이
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을 보소서. 당신의 말씀대로 그 일이 내게 이루어지리이다,
이게 얼마나 큰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나타내는 순종의 생명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믿음에 의한 생명을 다윗을 통해서는 허물과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라는 십자가의
그런 처리를 통해서 용서받는 생명을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갖고,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모든 생명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함을 전해주는 자로
그리고 절대적인 순종의 생명을 대표하는 마리아를 통해서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의뢰하고 의지하고 의존하는 하나님
아버지만을 신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42세대 가운데에서 나타나신 우리의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인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이러한 세 종류의 모든 생명을 함축하고 있는 가운데서
이 세 종류의 생명을 통해서 바로 그리스도께서 인성 안으로 태어나셨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 전파하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우리가 교제를 통해서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성 안으로 이끌어오는 것이 바로 이 복음 전파의
목적이라는 것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같은 정말 크고도 우월하고 탁월한 믿음과 그리고 다윗과 같은 십자가의 처리 아래 자신의 허물들을
다 용서받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산출할 수 있는 생명과 그리고 주님 앞에 절대적인 순종의 생명을 보여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가 이러한 종류의 생명들을 갖고 있다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인성 안으로 이끌어오게 함으로 말미암아 인성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로 만들어짐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과 그리스도의 모양을 가진 자가 되어서 주님을
표현하고 주님을 대표할 수 있는 자로 우리가 만들어질 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열조들의 마지막으로 등장 되고 있죠. 가만히 이 숫자를 따져보면 1장 17절에 모든 세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어디까지? 다윗입니다. 다윗이 끝에 있고 결론에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들의 계보의 시작인 다윗부터 바벨론에 끌려갈 때까지
또 시작점에 또 있습니다. 예 다윗은 열조들의 세대의 마지막이고 결론이고 종지부를 찍는 자입니다.
그리고 왕들의 세대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모든 것들을 이렇게 마지막이
되시고 모든 것을 품에 안으시고 깜깜한 어두운 무덤 가운데 이틀 동안 황폐함 가운데 계심으로 말미암아 일몰의 삶은 자신이
담당하시고 세 번째 날에 일출의 삶 둘째 주 첫날인 여덟 번째 날을 통해서 바로 일출의 삶을 갖게 하기 위해서 왕들의 세대에
시작점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첫아담에 속한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끝내주시고 종결케 해주시고 종지부를 찍어주시고 그리고 자신 안에 속한 바로 여덟번째 자녀들 두 번째 주의 첫날인 여덟 번째 바로 이새의 아들 가운데 막내둥이인 여덟 번째 아들인 다윗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왕이 될 그 다윗을 기름을 부어준 것처럼 바로 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부활 안에 계신 그리스도 만왕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시작하시겠다 라는 말씀이 마태에 의하여 기록된 마태복음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윗은 하나님에 의하여 열조들의 시대를 모두 마감하고 옛 창조 안에 있었던 첫 아담에 속한 모든 시대를 마감하고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그 왕의 시대를 새롭게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통하여 부활 안에서 두 번째 주의 첫날이며 여덟째 날인 주의 날을 통하여 새벽 미명에 일출의 빛 빛은 생명이라고 요한복음 1장 4절에 기록하고 있죠
1: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더라.
예 생명의 빛을 갖고 오게 하기 위해서 새로운 왕의 시대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시작한 하나의 경계표로 아담을 통해서는
마지막이 되시고 둘째 아담을 통해서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됨으로 말미암아 부활 안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여덟 번째
사람으로 다윗 안에 속한 사람으로 이기는 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바로 이 왕의 직분을 가진 자로 살 수 있도록 세 가지
그 신성한 장자권의 신성한 요소 가운데 아주 이 끝에 완결이요 완성인 왕의 직분을 가진 다윗을 통하여 이러한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일들 그리고 누가 복음에서는 아담 때부터 시작되어서 창조되어졌으나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실족되어져서 깜깜함과 어둠에 이르게 된 우리 모두를 그리고 마태복음에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서 열조의 위대한
자들로 시작된 그 문제들을 다윗이 세대를 나누는 경계표가 되어 열왕들의 또 시작점이 됨으로 말미암아 다윗부터 바벨론에
끌려갈 때까지 14대이고 그리고 바벨론에 끌려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라고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당시에 열조와 왕의 경계표는 바로 이 다윗 왕이 하나의 경계표 마지막이 되고 시작점이 되었고 그리고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간 것은 바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바로 마지막이 되고 시작이 되는 아브라함과 이 다윗이 열왕 가운데 마지막이 되고 시작점이 되어서 하나의 세대로 연결시키는 것이 되며, 또 두 세대를 나누는 경계표가 되고 또 합치는 연결고리가 된 것은 유일하게
이 다윗을 통하여서만 됐기 때문에 왕에 대한 칭호를 그에게만 붙여 주었던 것입니다.
1:1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에 대한 책이라. 1:2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고 다윗 왕은 우리야의 아내였던 여자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1 요시야는 여고니야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는데 그 무렵에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니라. 1:12 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간 뒤에 여고니야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님이 태어나시니라. 1:17 그러므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의 모든 세대가 열네 세대요, 다윗부터 바빌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열네 세대요, 바빌론으로 끌려간 때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세대라.
아담을 연결할 수 있는 자가 둘째 아담으로 오신 연결고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다윗처럼 이렇게 열조와 열왕의 시대를 하나로 연결고리가 되게 해서 마지막이 되고 시작점이 된 것처럼 첫 아담에 속한 모든 문제를 종결시키시고, 둘째 아담에 속한
생명의 빛에 속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이게 하는 일들을 하게 하는 것의 시작점이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포로가 되었다 라는 이 17절 말씀에 바벨론에 끌려간 후부터는 바벨론에 끌려간 이 일은 하나의 정말 좋지 못한
수치와 얼룩이 되고 흔적이 되는 경계표가 되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께서는 이 경계표를 바로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간 것을
통해서 이 사람이 아닌 다윗이나 아브라함이 아닌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라는 것을 통해서 경계표를 삼음으로 말미암아
그 세대를 위한 경계표는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어떤 사람도 절대 포로가 되어 있는 아담 안에 속해
있는 마치 우리가 둘째 아담으로 되게 하는 새 생명에 속한 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게 하는 연결고리는 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포로가 되어 갔다 라는 얘기를 통해서 하나의 경계표로 드러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갖고 오게 할 수 없는 무익한 사람들 유용하지 못한 사람들 연결고리가 될 수 없는데 오직 42세대 가운데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바로 포로가 된 자들을 연결시키는 고리의 마지막 결론의 종지부가 됨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을 담고 있고 함축하고 있는 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간 그 세대를 위한 모든 경계표가 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만이
포로가 되어 잡혀간 남왕국 유다의 모든 자들의 허물과 잘못됨과 죄악들과 수치를 덮어줄 수 있는 덮개가 되고 증거궤인 바로
하나님의 이 지성소에 있는 그 덮개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덮개가 될 뿐만 아니라 바로 아담과 하와가 먹어서는 아니 될 지식의 나무 선악과를 따먹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여
숨었을 때 가죽 옷을 입혀주신 것처럼 바로 그들의 수치와 죄악으로 말미암아 얼룩진 허물들과 잘못된 일들을 통하여 포로가
되어 사단의 세력 안에 잡혀가서 포로가 된 그들을 끄집어내줄 자 구출해 줄 자, 자유함을 줄 자, 수치를 덮어주는 옷이 될 자가
예수 그리스도 42세대 가운데 마지막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분은 천국의 왕으로서
오셔서 그러한 수치를 덮어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 17 절에 보면 모든 세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그리고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까지
14대 바벨론에 끌려가고 난후부터 그리스도까지 14대 이 열넷이라는 숫자가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열넷이라는 숫자가 만들어서 나타내지기 위해서는 열이라는 숫자와 넷이라는 숫자가 합쳐져야만 열넷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열이라는 숫자는 뭐죠?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성의 숫자입니다. 그럼 일곱이라는 완성의 숫자보다 더 큰 충족되어진 숫자가 열이라는 완전의 숫자예요. 열이라는 완전의 숫자 위에 2를 더하면 그 완전의 완전을 두 개를 합한 것이 총만이라는 뜻을 가진
12이라는 숫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 성이 열두기초석과 열두대문 그런 게 나오고 있죠 .
이 신약시대 12 제자들과 구약시대의 12지파들 이 12지파는 완성의 완성을 더해서 완전해진 열이란 숫자 위에 또 둘이라는
것이 더해짐으로 말미암아 완전과 완전히 합해진 충만한 모자람이 없는 그러한 숫자가 열이라는 숫자인 것입니다.
열은 완전한 숫자인 것입니다. 여기에 넷이라는 숫자 피조물의 숫자예요. 예 바로 인류를 상징하고 있죠.
그래서 계시록 7장 1절에 7:1 이것들 후에 내가 보니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아 바람이 땅에나
바다에나 어떤 나무에도 불지 못하게 하더라. 그래서 마태복음 25장 1절에서도 그때에 하늘의 왕국은 마치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으리라 라는 열처녀에 대한 얘기가 나오죠.
그리고 제가 언제 손가락에 대한 교제의 말씀을 나눈적이 있는데 오른손에 다섯 손가락 왼손의 다섯 손가락이 각각 있죠.
각각 1개의 엄지 손가락과 4개의 손가락이 있습니다. 4개의 손가락 그리고 엄지 하나 5개 이렇게 손가락이 합쳐짐으로
말미암아 5개를 이루므로 완전을 이루어서 바로 열이라는 충만을 상징하고 있는 숫자가 됩니다.
그런데 넷인 피조물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엄지로 나타내고 있는 이 유일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4개의
그 손가락을 덮어서 씌워줄 때 온전한 손가락으로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손가락으로서의 기능을 온전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엄지손가락이 우리를 반드시 덮어주어야만
우리를 덧입혀주셔야만 처리해 주셔야만 우리가 바로 이 온전한 것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2개가 합쳐져서 10개의 손가락을 가지고 10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열이라는 숫자는 충만을 상징하고 있고
넷이라는 숫자는 피조물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열넷이라는 숫자는 충만한 피조물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충만한 피조물 안에는 바로 이 엄지 손가락을 통해서 나타난 유일하신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열넷 곱하기 3을 하면 42대 예수 그리스도께서 출생하신 세대인 42세대가 나오는 것입니다.
14세대 곱하기 3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삼일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영 하나님이신 삼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충만한 피조물들과 하나로 결합되어졌음을 하나로 연합되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이 14세대입니다.
열조들의 세대가 14세대인 것은 바로 이 삼일 하나님이신 하나님 자신이 바로 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최종 완성되어 산출되어진 그 삼일 하나님의 영을 사실은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구약 성경에서는 아직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삼일 하나님이신 자신이 충만한 피조물들과 연합되어서 이렇게 이 열조들과 함께하신 삶이 14세대의 위대한 족장들의 얘기인 14세대의 얘기인 것입니다.
이 삼일 하나님의 인격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고 그랬죠. 예 인간의 몸이 마치 육체와 혼과 영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바로 삼일 하나님의 인격이 신격도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서 이렇게 조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조를 통해서는 바로 이 충만한 피조물인 열조 맨 먼저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윗까지 나타난 아브라함이 시작이 되고,
마지막이 다윗이 된 열조의 부분들에서는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열조들의 14 세대의 부분들과 부합되는 것을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알 수가 있고 그리고 이 왕의 계보를 통한 다윗부터 시작되어져서 바벨론에 끌려갈 때까지의 그 다윗의
왕의 혈통을 따른 계보를 통해서 이 기나긴 역사의 과정을 가졌을 때 바로 아들 하나님께서 열왕의 부분과 부합된다는 것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 하나님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간 후 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14대니까 얼마나 긴 세월이 지났겠습니까/
포로가 된 자들이 고토의 땅 유다라는 나라로 돌아와서 각자의 처소에서 예루살렘이 됐든, 어디가 됐든, 또 베들레헴이 됐든
이렇게 삶을 사는 가운데 바로 영 하나님께서 그 일반인들과 바벨론에 끌려가서 고토의 땅으로 돌아온 평범하지만 바로
이 왕가의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목수의 아들로 삶을 산 요셉처럼 평범하고 어떤 경우에는 낮고 천한 자 그리고
이 베들레헴이나 특별히 나사렛에 사셨던 바로 그곳에 출신의 사람들은 비교적 아주 천한 비천한 삶을 소유했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 하나님께서는 일반인들이며 포로가 되어서 잡혀갔다가 돌아온 평범한 모든 일반인들의 부분과
부합되는 것이 영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열조들과 함께하시고, 아들 하나님께서 열왕과 함께하시고, 또 이 영 하나님께서는 평범하면서도
이 고토의 땅으로 돌아와서 포로가 된 그들이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의 삶과 부합됨으로 말미암아 열넷이라는 이 숫자가
셋을 나타내는 삼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피조물들과 완전히 연합하셔서 함께 하셨다 라는 것을 그 전체를 다 아우르고
전체를 다 포함하고, 함축하고 있고, 담당하고 끌어안고 피조물들과 연합되어져서 함께하셨다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의 계보가 삼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들과의 연합을 갖기 위해서 태어나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42대
가운데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출생이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일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삭, 야곱, 유다, 보아스 뭐 이렇게 믿음의 선진자를 통해서
다윗까지 오셔서 마지막 정점을 찍으시고 또 다윗을 통해서 새롭게 왕의 열조를 시작하여서 다윗을 통과하시면서 계속적으로
삼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로 이 열조들의 마지막인 다윗까지 그리고 다윗이 열왕의 초대 통일제국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초대의 왕이 되었던 다윗왕 때부터 삼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사셨고 또 포로가 되어졌으나 고토의 땅으로 고레스 왕에 의해서 고토의 땅으로 돌아오고 스룹바벨이라는 왕의 직분을 가진 그 스룹바벨이라는 왕의 인도자에 의해서 돌아와서 새 삶을 갖도록 정착하기까지 모두 삼일 하나님께서 함께 그들과 여정을 같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계보 안에는 이들 모두가 포함되어 있다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후부터 바벨론에 포로가 된 모든 자들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 때부터 시작하여서 다윗을 통과하고 그리고 마리아와 요셉에 이르기까지 3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하나가 되어서 움직이는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고통 당할 때 함께 고통당하시고, 시련당할 때 함께 시련당하시고,
유혹당할 때 함께 유혹당하시고, 그들이 아플 때 함께 아파하심으로 말미암아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드디어
세상에 오셔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42대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 14대와 14대와 14대 42세대 가운데 마지막 세대로 태어나신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불리우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은 누굽니까? 삼일 하나님이 모든 제자들과 함께 눈물 흘리시고 그 모든 41세대까지도 어우러지고 품에 안고 함께
고통당하시고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유혹당하고 함께 시험받고 함께 슬픔에 잠긴 이 분이 삼일 하나님 이분이 41세대
까지 함께하셔서 임마누엘 하신 이 하나님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며 구주로서 세상에
오신 천국 백성에게 왕으로서 통치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와 같은 삶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아브라함의 후손인 12지파 바로 그들이 애굽에서 400년 동안
종살이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을 때 삼일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의 그 세대들과도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노예와
종의 삶을 함께 하셔서 고통당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 소선지서 말씀들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 애굽에 살고 있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목에 걸려 있는 그 멍예를
풀어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친히 멍에를 친히 소처럼 담당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대들이 안고 있는 그런
아픔들을 주님께서 친히 함께하신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그분이 삼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터쳐 나온 생수 자신의 삶을 으깨어서 생수의 강을 터쳐 흘러 흘러 그들에게 생명수의 강이
되게 하셨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이 만나도 자신의 몸을 으깨어서 생명의 그 피와 살을 나눠주기 위해서 자신의 피와 살을
쪼개고 으깨어서 산출되어진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벽 이슬과 함께 떨어지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피와 살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만나의 모습을 그렇게 담고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애굽에서 탈출한 그들을 품에 안고 그들이 매어야 될 멍에가 예수님 자신께서 친히 자신의 목에 걸어
묶어두심으로 말미암아 고통당하셨고 그리고 그 고통당하는 대신에 그들을 구출시킬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서 죽음에서 세상에서 마귀에게서 건너뛰게 되는 그런 삶을 살게 하시고 죽음의 바다 피의 바다인 홍해
바다를 주님께서 친히 품에 안고 그 선민 이스라엘의 그 세대들 모세와 함께했던 그 세대들을 모두 함께 임마누엘 하셔서
그 어려움을 함께 고난당하고 시험당하고 유혹당하고 고통당하고 어려운 환경에 직면하신 분이 선민 이스라엘과 함께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로 부터 나와서 어디서부터 출발했냐면 태양의 아들 세상의 아들 사단의 아들이라는 뜻인 라암셋 이라는 곳부터
출발하여 42곳의 여정을 거처 도착한 곳이 민수기 33장에 보면 모압 평야인데 그 모압 평야에서 바로 가나안 땅을 바라볼 수
있는 생명과 안식이 있는 그곳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42이라는 숫자가 이러한 기가 막힌 숫자인 것입니다.
41곳까지 갈 때만 해도 안식이 없었습니다.
42곳의 종점에 이를 때 마지막 부분이 될 때 가나안 땅에 이제 발만 딛고 들어가면 안식과 생명이 있는 것을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둘째 주 첫째 날인 여덟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그들을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모압평야 아버지의 아들, 아비의 자식이라는 뜻을 가진 그곳에 우상의 아들, 태양신의 아들, 바로 왕의 아들이었던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까지 기가 막힌 41곳의 이 장소를 지나 맨 마지막 장소인 42번째 모압 평원에 그들이 이르게 되어서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안식과 생명을 주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든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임마누엘 하셔서 그 모든 어려움을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42곳을 지날 때까지 얼마나 기가 막힌 일들이 있었습니까?
그 모든 것을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들을 품에 안고 홍해 바다를 건너신 그분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되셔서 그 뜨거운 불기운을 대신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구름으로 우산을 펼쳐주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자신의
진노의 심판을 불로 태워서 불로서 그들을 따뜻하게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40년 동안에 시험과 시련과 아픔과 유혹의
시간들을 거치게 하고, 통과하게 하고, 이기게 하는 삶을 하게 하신 것이 임마누엘 하신 그들 모든 세대들과 함께 삶을 사셔서
임마누엘 하신 그분을 통하여 통과하시는 삶을 산 우리들의 모습이 바로 그러한 42라는 숫자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열넷의 3배가 42인 것입니다.
열넷의 충만한 피조물을 상징하고 있는 열넷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열넷에 또 3을 곱하면 42라는 숫자가 나오기 때문에
삼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은 충만한 피조물들과 연합하였다 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 때부터 요셉과
마리아 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은 아담까지도 포함한 모든 세대들과 함께 임마누엘 하셔서 함께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어둠과 깜깜함, 그런 죽음의 여정을 통과하시고 인성과 신성의 연합으로 나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에 3을 곱하면 42를 나타내고 있는데요 40이라는 숫자와 2라는 숫자가 합해진 것이 42인 것입니다.
40이라는 숫자는 예수님께서 바로 마태복음 4장 2절에 마귀로부터 시험을 받으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 받은 기한이
있었죠. 그리고 이집트에서 구원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이 40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삶의 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4: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들어가사
4: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시고 그 뒤에 주리시니라.
이 40이란 숫자는 42라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42세대라는 마지막 종점에서 이렇게 드러나 나타내 보이게 하기 위한 일을
하기 위해서 40 플러스 2를 가져야 되는데 40이란 숫자는 먼저 시험과 유혹과 고통과 시련과 죽음과 고난의 숫자인 것입니다.
이 고난의 숫자라고 히브리서 3장 9절과 그때에 너희 조상들이 나를 시험하여 입증하고 사십 년 동안 내가 행한 일들을 보았느니라. 열왕기상 19장 8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19:8 그가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의 힘을 의지하여 밤낮 사십 일을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그리스도께서는 42대인 것입니다.
40이라는 시험과 유혹과 죽음과 고통과 시련의 어둠의 숫자를 지나서 2를 더하면 시험 후에 찾아오는 안식과 만족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압 평야라는 42번째 마지막 장소에 도착했을 때 젖과꿀이 흐르는 안식과 생명이 있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소망과 희망을 갖게 한 것이 바로 둘째 주 첫날인 여덟 번째 날인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여덟 번째 아들들이
되게 한 부활 안에 사는 삶을 살게 함으로 말미암아 일출의 삶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일몰의 삶은 주님께서 담당하셔서 종결 하시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부활의 삶을 살기 하기 위해서 40이라는 시험과
유혹과 고난과 죽음의 숫자는 주님께서 친히 담당하셔서 다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시고, 좋은 것은 다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시험 후 이틀 뒤에 나타나는 안식과 생명과 만족을 의미하는 것이 바로 42라는 숫자인 것입니다.
민수기 33장에 보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난 땅에 들어가기 전 라암셋이라는 태양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그곳에서부터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모압의 평원에 이르기까지 긴 행로의 지점인 이 시험과 유혹과 고난과 죽음과
슬픔과 눈물이 있는, 어두움이 있는, 깜깜함이 있는, 그것을 바로 삼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와 같이 모든 세대들을
아울러서 자기 것으로 친히 경험하면서 통과하여서 그들을 품고 모압 평원 앞에 이르게 하여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42라는 지점들을 통과하기까지 바로 이 민수기 33장에 나오는 모든 길에서 얼마나 많은
아멜렉 족속으로부터 이 삼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서 죽음의 바다인 홍해의 바다를 건넘으로 말미암아
세상을 상징하고 있는 사탄과 하나가 된 바로와 그의 군사들을 피하여 바로 구원함을 받은 다음에 그날부터 모든 길에서
고통과 시련과 고난과 눈물과 유혹과 시험을 받는 가운데 그 모든 것들 모든 지점을 통과하면서 받는 모든 선민 이스라엘의
고난과 시련과 아픔, 고통과 눈물은 사실 삼일 하나님께서 그것을 모두 담당하시고 모두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모든 세대들을
통과 하시게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42곳이라는 장소를 통과하면서 말할 수 없는 시련과 수많은 가늠할 수 없는 유혹들과 시험들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깜깜한 가운데 살았지만, 그 깜깜한 가운데 살았을 때 주님께서 품고 계셔서 안식과 생명이 있는 땅으로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여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한 이 일 때문에 42곳이라는 지점들을 통과한 후에 가나안 땅이라는 안식 안으로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삼일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모든 세대들과 함께하여서 통과하셨다라는 기가 막힌 얘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과거에만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과거의 성경은 이와 같이 선민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났지만 지금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교회 안의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일들이 지금도 반드시 일어나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42달에 관한 내용이 계시록 13장 5절에 보면 13:5 또 용이 그에게 큰 것들을 말하며 신성모독하는 입을 주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지속할 권능을 주매 13:6 그가 입을 벌려 하나님을 대적하며 모독하되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성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모독하더라. 13:7 또 그가 성도들과 전쟁하여 그들을 이기는 것을 허락받고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받았으므로 13:8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 다 그에게 경배하리라.
그리고 다니엘서 9장 24절부터 보면은 9:24 주께서 네 백성과 네 거룩한 도시에게 칠십 이레를 정하셨나니 이것은 범법을 그치고 죄들을 끝내며 불법에 대하여 화해를 이루고 영존하는 의를 가져오며 환상과 대언을 봉인하고 또 지극히 거룩하신 이에게 기름을 붓고자 함이라. 9:25 그러므로 알고 깨달을지니라.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건축하라는 명령이 나가는 때로부터 통치자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심지어 곤란한 때에 거리와 성벽이 다시 건축될 것이며 9:26 육십이 이레 후에 메시아가 끊어질 터이나 자기를 위한 것은 아니니라. 장차 임할 통치자의 백성이 그 도시와 그 성소를 파괴하려니와 그것의 끝에는 홍수가 있을 것이며 또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황폐하게 하는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9:27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그가 그 이레의 한중간에 희생물과 봉헌물을 그치게 하며 또 가증한 것들로 뒤덮기 위하여 심지어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것을 황폐하게 할 것이요, 작정된 그것이 그 황폐한 곳에 쏟아지리라, 하니라. 라고 마태복음 1장 17절을 통해서 42세대라는 것을 추가로 설명해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니엘서 9장24절 후반부에 지성소에 기름을 바르려는 것입니다라고 칠십이레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고요
그 칠십 이레의 목적이 지성소에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 메시아 통치자의 때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있으리니 이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합쳐지면 69이레가 되죠.
그러면 칠십이레가 되기 위해서는 한 이레가 빠지고 있습니다. 한이레는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바로 이 로마
황제의 황태자인 티토스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멸절이 되고 땅이 짓밟힘을 당하고 성소가 불타지고 훼파가 되는 일들을 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2천 년이라는 기나긴 역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한이레가 바로 지금의 2천년이라는 가까운 시대가 지나도 이것이 한이레인 것입니다.
한 이레 2천 년이 지나는 동안에 전반부 반 이레이고 한 이레는 7일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1일은 1년을 계산함으로 전반부의
3년반과 후반부의 3년반 지금은 후반부에 3년 반에 적그리스도가 오기 바로 직전인 후반부 3년 반의 시작점이 지금 오늘날에
우리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이 후반부 3년 6개월의 42달의 시대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면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나고 한 이레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요
27절에 보면 그가 많은 사람과 한 이레 동안 언약을 확정하리니 이 마지막 이레인 한 이레의 가운데서 종결 부분이
이 2천년이 지나도록 지금 전반부 3년 6개월인 전반부 3년 6개월과 후반부 3년 6개월이 지나면은 이것이 합쳐져서
바로 7년이 바로 이 한 주 1일은 7일이기 때문에 1일을 1년으로 계산했을 때 7년이란 숫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전반부 3년 6개월과 후반부 3년 6개월이 합쳐져서 한 이레가 되는데 우리는 후반부에 3년 6개월 시대에
지금 살고 있는데 이 3년 6개월이 달로 계산하면 42달이라는 것입니다.
42달은 특별히 마지막 환란이 임하는 적그리스도가 임하는 마지막 7년 가운데 후반부 3년 반 시대가
지금 42달 가운데 오늘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라는 것입니다.종결 부분입니다.
여러분 요셉과 마리아가 바로 42세대에 중심점이 되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의 마지막 점이 되는 것처럼
바로 이 애굽에서 탈출했던 선민 이스라엘이 42곳이라는 장소인 모압평원에 그들이 발을 딛고 있는 것처럼
바로 칠십이레 가운데 육십이 이레가 이미 지나고 또 일곱이레가 지남으로 말미암아 마지막 한 이레인 7년을 지금
남겨놓고 있는데 7년 가운데서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때 42달에 지금의 시대는 후반부에 바로 42달의 마지막
시간으로써 대환란이 시작되는 시점이며 적그리스도가 올 무시무시한 그러한 시대인 것입니다.
이 시대에 안착하고 이 시대에 안식과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이 42세대의 종점으로 나타나시는 마지막 결론이며 새로운
일출의 시간을 갖고 오시는 42달에 이 모든 것을 종결시키시고 새로운 천년 왕국을 이루시는 그분을 우리가 도래케 하기 위한
일이 아니면 이 시험과 유혹과 고난을 견디기가 힘들다 라는 것입니다.
이 42달이 마감될 때 안식과 생명이 있는 그 천년 왕국 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마리아까지는 마치 선민 이스라엘이 라암셋으로 부터 구원되어진 후에라암셋부터 42곳이라는
여정의 마지막 종점인 모압 평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련과 시험과 아픔과 고통의 세월을 지난 것처럼 아브라함 때부터
마리아때 까지도 고난과 시험과 유혹과 시련과 깜깜함의 때를 지나서 그래서 말라기의 선지자가 430년 동안 나타나지 않은
그때까지가 깜깜함의 시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마리아까지 41대까지는 고난과 시험과 유혹과 죽음의 때였고 이 모든 고난과 유혹과 시련의 세대 후에
42세대의 완결로, 완성으로, 종결로서, 결론으로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둘째 주의 첫날이신 여덟째날 부활의 날을
갖고 오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곧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에게 안식과 생명과 만족이 되기 위한 42대로서 세상에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42대가 되어주신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완전한 안식과 충만한 생명의 만족을 갖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서를 가만히 읽어보면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사실은 45대인데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마태가
42대만을 기록한 것은 저주받은 이 세대를 축복받는 세대로 연결시키는 이 숫자에 대한 적합한 것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빛과 생명으로 찾아 오시는 그리스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부적합한 이 저주받은 세대는 왕의 혈통을 가진 자임에도 불구하고
포로가 되어졌던 이 선민 이스라엘의 왕의 혈통을 가진 자들과 그리고 사실은 북왕국의 악한 왕이었던 바로 사단과
하나가 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로 나타난 그 아합왕과 이세벨과 그 사이에서 낳은 딸을 바로 이 남왕국 유다의
여호람왕과 결혼시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 그들을 제외시킴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은
세대는 제외시킨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금을 많이 거둬서 바로 사단과 하나가 된 이 느고왕에게 바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을고통 중에 빠지게 했던
그 왕 한 사람 바로 이 저주받은 세대와 부적합한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지 않았던 부적합한 왕 한 세대를 빼고 바로 이 다윗을
두 세대로 둠으로 말미암아 한 세대는 열조 가운데 다윗이 들어나 있고 한 세대는 열왕 가운데 시작점으로 나타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세대가 14세대인 새 시대로 구분되는 연결고리의 마지막이 되고 시작점이 된 것이 다윗 왕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특별히 마태복음에 이러한 성경 말씀을 통하여 42대라는 14대, 14대, 14대를
통해서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포로로 끌려갈 때까지 14대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14대라고 기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중요한 진리의 생명의 말씀인 교리를보여주고자 하나의 원리와 원칙을
보여주고자 이렇게 기록돼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선 자격이 없는 자들은 저주받은 세대에 세금을 늑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받은 한 세대 이들은 자격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포함되지 않았고 그리고 바로 네 번의 세대가 자격이 없으므로 또 끊겨진 것을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 사단과 사단의 세력안에 가두어진 바로 여고냐의 후손들에 대한 네 번째 세대가 자격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다윗 왕의 보좌 위에 앉아 있지 못하는 바로 하나님께 거절 받게 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다윗을 통하여 열조 시대의 마지막이 되고 열왕 세대의 시작점이 된 그 다윗을 통하여 이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옛 창조안에 속한 아담의 속한 모든 세대를
다 마감시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바로 둘째 주 가운데 첫째 날인 여덟 번째 날인 주님의 날을 열므로 말미암아
두 세대가 주님의 날을 열므로 말미암아 두 세대가 하나가 되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왕의 직분을 이끌어오고, 또 그 왕의 직분을 통해서 왕국이 설립되어졌고, 그리고 자신의 결과물로
이렇게 합당한 열매로 나타나진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고 완성되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바로 이 열조 가운데 또 열왕 가운데 두 세대로 합산해서 계산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계보는
각각 14세대를 가진 것으로 나타나서 세 부분 안에서 42세대가 됨으로 말미암아 42 곱하기 3을 이렇게 나타내는 일을 통해서
바로 삼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들과 영원히 임마누엘 하시는 연합 하심을 보여주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삼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세대들과 함께하시고, 모든 세대들과 죽음도 십자가를 통하여 함께하시고, 생명도 부활을 통하여서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삼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세대들을 통과하신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나오신 왕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것입니다.
그래서 이 누가 복음의 기록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로 이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 얘기로 시작되어서 하나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77세대에 대한 얘기가 누가 복음의 족보에 대한 얘기라면 마태복음의 기록은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로 이렇게 땅으로 내려온 인성을 가지시고 오셨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스도 기름부음 받으신 바로 이새의 아들인
막내 아들 여덟 번째 아들이 된 바로 다윗 안에 이 여덟 번째 아들이 되어서 우리에게 둘째 주에 첫날인 여덟 번째 날을 주시는
생명을 주시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복음은 하나님께로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해서 거슬러 올라가고, 마태복음은 바로 하나님이신 그분이 땅에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이렇게 보여주기 위하여 땅으로 이렇게 내려오는 전진해 내려오면서 이렇게 이어져서 이렇게 마주한 것이 바로 남자의 노선을 따라온 요셉과 나단이라는 다윗왕의 왕가의 혈통을 가진 그 여자의 노선을 따라온 마리아를 통해서 두 사람이 합해져서 결혼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세대들 안에 바로 42세대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자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셨다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안배 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모든 세대들이 아담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의 모든 세대들 이 말씀들을 기초로 하여 모든 세대들이
바로 생명의 빛으로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향해 있으며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서 바로 이 세대가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없이는 41세대 뿐이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41세대는 어둠과 깜깜함과 시련과 유혹과 시험과 이런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는 세대일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2세대의 둘째 주의 첫날인 주의 부활의 날인 여덟 번째 날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종점이 되고 결론이 되고
마지막이 되며 새로운 시작점이 되는 이렇게 모든 것을 덮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그러한 결론이 되기 위해서
마지막이 되기 위해서 종지부가 되기 위해서 시작과 나중이 되기 위해서 처음과 끝이 되기 위해서 알파와 오메가가 되기 위해서 결론이 되기 위해서 41이라는 것은 어둠의 숫자요 죽음의 숫자이기 때문에 둘을 더한 곧 41에서 하나를 더한 42를 가지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42이라는 숫자를 통해서 오신 분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와 사망을 종결 시켜 주시고 어두움과 이 부정함을 완전히 청산해 주는 빛이 되어 주시고 생명이 되어 주시고 이 부활 안에 계신 생명 주시는 영을 통하여 완전케 함으로 우리를 온전케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의 예언들을 성취하고, 그 구약 선민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들이 필요한 것들을 충족시키는
여호와 샤다이라는 분이 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구약의 예언들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유다와
다윗의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42세대로 오신 분이 바로 이 14대, 14대, 14대를 통해서 오신 그리스도의
오심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41대만 있고 42대인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구약의 39권의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다 헛되고
다 무효가 되었다 라는 그런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42대에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어두움이 빛이 되게 하시고, 사망이 생명이 되게 하시고, 불의가 의가 되시게 하시고, 모든 빛과 생명, 구원과 치유, 만족함과 자유와 평안과 안식과 생명, 영생과 기쁨의 모든 것이 42대를 통한 둘째 주의 첫날인 여덟째 날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로 이새의 그 여덟 번째 막내 아들인 두 번째 부름에 따라서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왕에게 기름 부어진 그 다윗이라는
자를 통해서 두 번째 주의 첫날인 여덟째 날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첫 번째 주의
41세대까지 속한 그 모든 첫 번째 주의 사람들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갖게 하는 두 번째 주의 첫째 날에 속한 부활 안에 속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여덟 번째 자녀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바로 이 열조 시대의 마지막이 되고, 바로 왕조 시대의 첫
번째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바로 다윗 왕의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42세대를 가지고 태어나심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속한 자, 다윗 안에 속한 여덟 번째 아들이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열조의 시대와 왕의 시대와 포로가 된 시대들 모두를 다 마감하고 다 청산하고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인 여덟 번째 아들을 통하여 두 번째 주의 첫날인 여덟째 날을 통해서 이기는 자 다윗처럼 강한 자가 되게 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이기고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수 있도록 42세대 가운데서 이렇게 주님께서 위대한 왕으로서 세상에 오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네개 복음서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러한 모든 예언들을 성취하신 이 구약 성경에서 예언하신 그리스도로 왕으로서 오신 분이시며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선민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 그들이 당면했던 40년 동안의
행로와 또 40년 동안의 시험과 시련과 죽음과 부정함과 깜깜함 모든 일몰의 삶들을 다 해결해 주기 위하여 우리들의 눈물을 고통을 없애주고 눈물을 씻어주기 위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주시기 위한 여호와 샤다이라는 분으로 오시기 위해서 모든 것이 되시는 분으로서 오신 분이 42세대 가운데 마지막 결론이요 마지막 종점이요 마지막 으로 오신 그분을 통해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두 번째 주의 첫날이 여덟 번째 날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기 위하여 생명의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갖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 되시기 위한 분으로서 오신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 드리면서 오늘의 교제의 시간을 마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