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마 26:69~75
제목: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고 회개하는 성도
● 기독교는 성도가 주님의 말씀에 의하여 주님을 부인하며 죄를 지은 것이 생각나서 통곡하고 회개하는 신앙입니다.
마26:69.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묵상자가 성경을 읽으며 수시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대목은 위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을 알고 주 예수님의 무한 공로도 이미 알지만, 베드로의 통곡과 극한의 슬픔이 잘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 같은 자가 아니고 진심으로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믿은 자였습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주 예수를 사랑한 성도이고 제자이며 사도였습니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그 과정에서 저주하며 맹세까지 했으니 베드로의 심령과 양심은 얼마나 갈가리 찢어지고 아팠겠습니까? 그것을 간접으로 조금이나마 느끼면 우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이 권력을 잃고 지명수배를 당해서 도피 생활을 했었습니다. 김옥균이 고향에 올 것을 예상한 관군은 김옥균이 보고 들으라며 김옥균의 나이 어린 여조카를 형틀에 묶어 고문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보고 경악한 김옥균은 조카딸을 지키기 위해서 자수했습니다. 친딸도 아닌 조카딸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수하여 체포된 김옥균은 불신자이지만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청종하고 자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에 비해서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부인한 모습은 매우 참담하고 비참했습니다. 사람을 낚는 훌륭한 사도인 베드로가 주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가 불신자 김옥균이 조카딸을 대하는 마음보다도 못했구나!!ㅠㅠ 베드로가 그 정도였다면 나는? 우리는? 오죽 했을까? 염려하고 근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일지라도 여전히 나약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성도일지라도 견인(堅忍)할 수 없습니다.
● 마26:69~75는 한 문단인데요.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한 베드로가 뒤늦게나마 후회하고 뉘우칠 단서가 된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말씀에는 죄인을 회개하게 하는 능력이 있음은 물론이고 일시적으로 죄를 저지르고 극심한 영적인 혼란에 빠진 연약한 성도가 깨닫고 회개를 할 수 있도록 역사하는 거룩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러한 회복과 회개의 역사가 죄를 짓기 전후로 상시 대비되기 위해서는, 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 생활화되는 것이 좋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자신의 영혼을 늘 최고의 순도와 상태로 유지하는 성도야말로 진정으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1: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
하나님의 말씀을 이교도들이 독경하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 가장 복 받은 사람의 모습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죄악을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한두 번이 아닌 세 번이나 부인할 때에는 나름 잔머리를 굴리고 계산을 하며 그저 육체의 안전만을 추구했습니다. 오죽하면 제가 위의 첫 문단에서 김옥균이 조카딸 대하는 것만도 못하게 예수님을 대했다고 하겠습니까? 치열한 이해타산의 과정에서는 회개가 어렵거나 아예 안 됩니다. 오직 성령의 조명을 따라서 말씀이 생각날 때 그때에 회개의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상고하는 것을 은혜의 방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수1:8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
말씀을 묵상하면 은혜가 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실제로 순종하면 형통합니다. 기복종교가 과대 선전하고 오도(誤導)하는 그런 돈 벼락 맞은 부자는 못 되어도 베드로처럼 죄를 짓고 극한의 혼란에 처했을 때 말씀이 생각나서 통곡하고 회개하는 그러한 형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묵상을 읽은 우리 모두에게 말씀을 늘 붙잡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 마26:69~75 한 문단은 하나님의 경륜∙섭리와 성도의 견인 교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진실한 신앙고백을 한 성도였고 그 신앙고백은 즉흥적이고 주관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베드로가 주님을 유일한 구원자(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삼위일체의 성자)로 고백한 것은 베드로 개인의 지식과 능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삼위일체의 성부)가 알게 해주신 것 때문이었습니다. 마26:69~75는 베드로처럼 참되게 믿는 성도조차도 죄의 유혹에서 완전히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인 성도의 현실을 알려줍니다. 성도가 견인(堅忍)하며 죄와 투쟁하는 현세의 고난과 미래의 승리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는 절대 주권과 우리가 다는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비교하면 알 수 있는데, 쉽지는 않습니다.
마26:24.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
눅22: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성도의 견인)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유다가 베드로보다 인간적으로 더 못나거나 악하다는 어설픈 비교 판단을 못합니다. 성경의 독자가 결과를 이미 알고, 베드로가 천성적으로 유다보다 우직하고 의리가 강했다는 가정도 함부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유다나 베드로 두 명 모두 죄를 지었지만,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했고 유다는 그리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 회개를 못했을까요? 그것은 참 회개의 원인이 되는 참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선물이지요.
엡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
참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참 성도는 은혜의 방편인 말씀 묵상의 효과로 인하여 설령 죄 가운데에 빠졌을지라도 베드로처럼 깨달아 믿음을 유지하며 은혜로 복귀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성도의 견인입니다.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위에 쓴 묵상 본문만 읽으셔도 됩니다.
한편, 더 깊은 이해와 다양한 내용을 보실 여유가 되는 분은 아래 주석의 내용으로 보충하세요!
네, 본문을 먼저 읽고 소화한 후에 주석을 보는 것이 좋을 것도 같아요.
@노베 알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6장
* 가룟 유다의 변절.
공관복음서는 모두 예수의 죽음에 가룟 유다가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막 14:10,11;눅 22:3-6), 그의 변절의 동기에 관해서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동기를 대략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유다는 스스로 생각한 메시야 상이 어긋남에 따라 그 극도의 실망감을 배신으로 나타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는 예수의 수많은 권능을 목도하고서 이 사람이야말로 로마 압제로부터 유다 민족을 해방시킬 자라고 믿고서 따랐을 것이며, 당신의 거듭되는 십자가 죽음에 고나한 예고를 듣고서는 큰 낭패감에 빠졌던 것 같다.
둘째로, 가룟 유다는 단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예수를 팔아 넘겼는지도 모른다. 그는 예수를 팔아넘기는 대가로 대단한 포상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 한 사람의 몸값(출 21:32)에 만족한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는 자신이 예수의 열두 제자 중한 사람이었던 사실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행위는 구약 에언의 성취(슥11:12)였으며, 예수를 잡아 죽일 궤계로 노심초사하던
대적들에게 마침내 결단을 내리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진정 그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자보다 못한 자'라는 영영히 씻지 못할 오욕의 인물로 기억되게 되었다.
@장코뱅 흔히 아는 예정과 선택 교리에서 유기된 자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6장
* 예수를 멀찍이 좇은 베드로.
예수의 심문 현장을 뒤쫓아 갔던 베드로를 통해 우리는 그의 두 가지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가) 예수께 대한 사랑.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따라간 베드로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그는 아마도 대적들을 한 순간에 물리치실 예수의 능력을 아직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예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남달랐다는 점이다. 방금 전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었던 베드로가 그 뜰에 들어갔다는 것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것 같은 위험을 무릅쓴 행위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극한 사랑이 아직 인간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야말로 유동적이고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나) 육신의 연약함. 우리가 베드로를 유달리 약한 인물로 몰아붙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생명이 위협당하는 상황 앞에서 움츠려드는 것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베드로에게서 실망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열 두 제자들 중 수제자의 위치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만찬 석상에서 거듭 단언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26:35).
이로써 우리는 첫째,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때로는 목숨마저 버릴 각오가 되어있어야 하며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은 인간적 혈기나 능력으로써가 아니라 오직성령의 충만하신 임재의 능력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하튼 베드로는 주를 사랑하면서도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고, 자신의 신상을 염려했기 때문에 떳떳하게 주를 좇지 못했고, 급기야 극한 상황에서 주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참담한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69-75절). 한편 당시 예수의 심문받던 장소에 함께 있었던 사도 요한은(요 18:16) 훗날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일 4:18)는 말씀을 남겼는데, 이는 베드로의 예수게
대한 불완전한 사랑을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실로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 후 그분과 재회한 후 '온전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었으며 그 후로부터 참으로 담대한 복음 전파자가 될 수 있었다(행 4:19-21).
@장코뱅 해설의 소제목이 예수를 (멀찍이) 좇은 베드로인데요. 연약한 가운데에서도 멀찍이나마 예수님을 좇은 것은 그의 마음에 진심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노베 네. 공감합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분명한 차이점은 회개의 있고 없음에서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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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마 주석: 마태복음>, 26장
본문에 수록된 변절 예고(17-21절) 및 부인 예고(30절)가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의열두 제자 중 두 사람에게 주어졌음은 주목할 만하다. 가룟 유다는 사단의 유혹에 빠져 끝내 회개할 줄 모르는 완악한 마음 때문에 주를 배신하였고, 베드로는 주를 따르고자 하는 열의는 누구 못지않게 강하였으되 영적 무지와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주를 부인하였다(72절). 그러나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분명한 차이점은 회개의 있고 없음에서 발견된다. 베드로는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여 본의 아니게 주를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한 후(74절) 남몰래 통곡하며 회개하였다. 이러한 베드로의 실패와 좌절의 체험은, 훗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가운데 예수의 지난날의 모든 가르침을 새로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의 타고난 진취적 기질과 결합하여 도리어 초대 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성장케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가룟 유다를 지나치게 악마화 하기보다는 명목상의 신자가 참 믿음이 없어서 회개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사례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매튜 헨리 주석>,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함 (마태복음 26:69-75)
우리는 여기에서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이야기를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일부분이 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지금 심문을 받지 않고 잠시 휴식 상태로 대제사장의 뜰에 계셨다. 그 때에 그가 가까이에 있는 그의 친구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약간의 위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그의 주위에서 그 어떤 친구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가 얼마간의 거리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어떻게 떨어졌으며, 회개함으로 어떻게 다시 일어섰는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Ⅰ. 그의 죄는 여기에서 편견 없이 공평하게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는 성실하게 다룬 성경 기자의 명예를 위한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베드로의 범죄의 직접적인 동기. 그는 뜰 밖에서 대제사장의 종들 가운데 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나쁜 친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범죄케 하는 동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필요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마귀의 땅으로 가서 그 무리들에게 어울리며, 또한 베드로와 같이 미혹되어
덫에 걸리거나 조롱을 받고 미혹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들이 죄를 짓거나 슬픔을 맛보지 않고 이러한 무리들에게서 빠져 나올 수는 거의 없다. 하나님의 계명들과 그 자신의 계약을 지키려고 하는 자들은 행악하는 자들에게 "나를 떠나라"(시 119:15)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베드로가 그의 새로운 개심자들에게 "패역한 세대에서 자신들을 구할 것"을 경과한 것은 그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 가운데 한번 들어감으로 멸망을 받을 뻔 하였기 때문이다.
2. 범죄에로의 유혹. 베드로는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는 자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첫 번째 한 비자(여종)가, 다음에는 또 다른 비자가 그에게 이 사실을 들어 말하였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9절). 또 다시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71절). 또 다시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네가 갈릴리 사람임을 표명한다"(73절)고 말하였다. 갈릴리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음은 다른 유대인들의 그것과 달랐다. 말소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것처럼 진실하고 거룩함으로 말미암아 은연중에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드러낼 수 있는 자는
드러낼 수 있는 자는 얼마나 행복한가 ! 그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얼마나 모욕적으로 말하였는가를 살펴 보라. 그들은 그를 "갈릴리" 사람 예수, "나사렛"예수와 같이 그이 출신지인 고향을 들어 비난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 대해 얼마나 모욕적으로 말하였는가. 그들은 베드로를 "이 사람"(This fellow, 이 친구, 이 녀석)이라고 불렀다. 마치 그들은 베드로가 그들 가운데 있는 것이 그들에게 어떤 비난거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에 대하여 고소할 만한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들은 베드로가 수상하고 무엇인가 꺼림직한 데가 있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였다.
3. 범죄 그 자체. 그가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을 부인하였으며, 자신이 그러한 제자라고 시인하는 것을 수치스러우면서도 두려운 것으로 여겼으며, 또한 갖은 수단 방법을 사용하여 그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며 그에 대하여 어떤 호의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믿도록 하려고 하였다.
(1) 맨 먼저의 비난을 받고 그는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회피하는
대답이었다. 베드로는 비자가 말하고 있는 "갈릴리 사람 예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는 그녀가 말하는 "그와 함께" 있었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을 낯선 것으로 만들고 말았다.
[1] 이와 같이 어떤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우리 자신의 이해나 생각들 그리고 감정들을 허위 진술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즉 우리가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 어느 것보다 더 범하기 쉬운 거짓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 점에 대해 쉽게 논박을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그 자신 이외에 누가 알리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를 두려워함으로써 이러한 악행을 억제해야만 한다(잠 24:2).
[2] 우리가 그리스도를 고백하도록 부름을 받았을 때 그리스도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그에 대해 시치미를 떼거나 그에게 대한 신앙을 고백하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은 실로 큰 잘못이다. 그것은 실제로 그를 "부인"하는 것이다.
(2) 그 다음 질문 공세에도 그는
여전히 명백하게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했으며, 이를 맹세로 뒷받침하였다(72절). 이것은 실제로 "나는 그를 시인하지 않는다. 나는 기독자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베드로는 그렇게 하였는가 ? 당신은 법정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서 바라보며,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 당신은 그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았는가? 당신은 그의 모임에 참석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당신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그를 더 잘 알지 못하였는가? 당신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당신은 그에게서 받은 호의와 온화함과 또한 그와 더불어 가졌던 교제를 모두 잊어버렸는가? 당신은 그를 정면에서 바라보면서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3) 세 번째 질문 공세를 받자,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였다(74절). 이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사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범죄의 방법이 졸렬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저주하고 맹세한 것은,
[1] 그가 말한 것을 뒷받침하고 그 말에 신임을 얻기 위함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또다시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것을 "말"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맹세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은 거짓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는 성급한 맹세와 저주로써 뒷받침된 것들에 대해 그 진리성을 의심해야만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이다. 마귀가 말한 것 이외에는 마귀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모독하지 말라는 셋째 계명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자는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는 아홉째 계명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2]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에 대한 증거가 되기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의 일상적인 어법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주와 맹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그의 원수들의 일상적인 어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들에게 쓰여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베드로가 범죄하였던 것과 같은 유사한 죄를 짓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함이다. 즉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구속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의 속전을 거절하거나 그의 성령을 거부하거나 그에 대해 모른다고 하거나 그 자신과
그의 말씀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또는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받는 백성들과 더불어 고난받기를 두려워함으로써 그를 부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4. 이 범죄의 악화. 이것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리는 동일한 범죄를 우리가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생각해 볼 것은,
(1) 베드로는 누구였던가? 그는 처음 세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사도로서, 어느 때든지 그리스도의 명예를 위해 앞장을 서서 말하였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더욱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하면 할수록, 우리가 만일 합당치 못한 일을 한다면 우리의 죄는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2) 주님께서는 그에게 닥쳐 올 위험한 사태에 대하여 분명히 경고를 하셨다. 만일 그가 이 일이 자신에게 닥쳐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였더라면 그는 결코 유혹 가운데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3) 베드로는 이 밤에 그리스도를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고 엄숙히 약속하였다. 그는 거듭하여, "내가 결코 당신을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아니, 내가 맨 처음으로 당신과 함께 죽겠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약속들을 여지없이 깨뜨리고 말았으며 또한 그의 말은 "예" 했지만 "아니오"가 되고 말았다.
(4) 그는 주님과 더불어 식사를 하고 난 다음 재빨리 이러한 범죄에 빠져들었다. 거기에서 이와 같이 구속의 사랑에서 넘쳐 나온 지극한 축배를 받고서도 아침이 오기도 전 바로 그 밤에 그의 구속자를 버린 것은 실로 "재빨리 돌이킨 것"이었다.
(5) 시험은 비교적 약한 것이었다. 그에게 예수의 제자라고 고발한 것은 재판장이나 판사들 중의 어떤 사람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한 두 사람의 하녀(비자)였다. 아마도 그 하녀는 그를 해칠 목적이 없었으며 또한 그가 그 사실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 아무 일도 행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보행자와 함께 달리는 것"(렘 12:5)에 지나지 않았다.
(6) 그는 그 사실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베드로는 닭이 한 번 운 후에도 계속적으로 시험 가운데 빠져들었으며, 두번째 세 번째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 사람이 베드로인가? "당신은 어떻게 떨어지고 있는가 !"
이와 같이 그의 범죄는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이렇게 된 것은 그가 "경겁 중에"(시 116:11) 말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드로가 범죄한 것은 유다처럼 고의적으로 하지 않고 경겁 중에(놀라서)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그는 매우 사악하게 말을 했지만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엉겁결에 한 것이다.
Ⅱ. 이 범죄에 대한 베드로의 회개(75절). 앞의 것은 우리로 하여금 범죄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위하여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느 때든지 우리가 넘어지게 된다면, 여기에 기록된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급히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쓰여진 것이다. 몇 가지로 살펴본다면,
1. 베드로를 회개케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1) "닭이 울었다"(74절). 이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경고하실 때 닭이 울 것을 말씀하셨으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을 되찾게 해 주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즐겨 사용하시는 표정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중대성을 부여하실 수 있으시며, 또한 그 말씀으로써 자기의 백성들의 영혼들을 매우 유익케 만드실 수 있는 것이다. 닭 우는소리는 베드로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목소리인 세례 요한의 대신으로 사용되고 있다. 양심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것을 생각나게 하는 닭 우는소리가 되어야만 한다. 다윗의 마음이 "자신을 때릴"때 닭이 울었다.
비록 현재에 시험에 의해 압도당한다고 할지라도 영혼 속에 살아 있는 은혜의 법칙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곁길에서부터 그것을 회복하려고 하실 때는 약간의 암시라도 그것을 기억해 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여기에 영혼을 회심케 하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 준 닭 우는소리가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종종 "닭이 울 때" 자비를 행하신다.
(2) "그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였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리게 했으며, 또한 경건한 슬픔의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그가 자신을 배반하며 경솔히 여길 것을 자비스럽게 경고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은 회개케 하는 데 강력한 동기가 될 것이며, 범죄하려고 하는 마음을 분쇄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회개치 않은 자에게 그가 주 예수님의 은혜와 그의 사랑의 표시에 대해 범죄하였다는 사실 이상으로 고통을 주는 것은 없다.
2. 그의 회개는 어떻게 표현되었는가?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1) 그의 고통(슬픔)은 은밀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온 것을 괴로워하면서 그 곳을 빠져나갔으며,
지금 그가 있는 곳에 어떤 함정이 있는가를 알아차리고서는 급히 그 속에서 나왔다. 그는 조금 전에 있던 앞문(71절)으로 나갔다. 만일 그가 앞문까지만 갔더라도 두 번째, 세 번째 부인은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앞으로 나갔었다. 지금 그는 밖으로 나갔으며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골짜기의 비둘기와 같이"(겔 7:16; 렘 9:1, 2) 자신을 "한찬"할 수 있는 은밀한 어떤 장소로 나아갔다. 그가 밖으로 나간 것은 이러한 슬픈 경우에 자신의 기도를 하는데 방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대화와 사업에서 가장 자유스럽게 될 때에 하나님과 더불어 가장 자유스럽게 교제할 수 있다. 죄를 통회할 때에 우리는 가족들이나 아내를 따로 해야만(슥 12:11, 12) 할 것이다.
(2) 그의 슬픔(고통)은 심각한 것이었다. "심히 통곡하니라." 죄에 대한 통회는 독자를 잃었을 때 하는 것과 같이 크고도 깊은 것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머지않아 죄는 쓰라린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깊은 통회가 필요한 것은, 신적인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눈물의 바다도 그것을 할 수 없다)
죄를 미워하고 사죄를 구하기 위하여 회개의 본질인 마음이 참된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한 것에 대하여 그렇게 심히 통곡하였던 베드로는 결코 또다시 그를 부인하지 않았으며, 위험에 처해 있을 때나 언제든지 공중 앞에서 그를 "시인"하였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는 말과는 전혀 다르게 그는 "이스라엘의 집들로 하여금 바로 이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도록 하였다. 어떤 죄에 대한 참된 회개는 우리가 이와는 전혀 상반된 은혜와 의무를 풍성히 가짐으로써 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표징은 심하면서도 진지하게 통곡하는 것이다. 옛 사람들 중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베드로는 살아 생전에 닭 우는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곡하지 않은 때는 없다고 한다. 죄에 대해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은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애통을 할 것이다. 그것을 감추는 것보다는 오히려 들추어 낼 때에 그들은 하나님과 또한 그의 자비와 은혜 가운데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
@장코뱅 와! 이것은 긴 설교 한편 읽는 것보다 더 기네요. 잘 참고하겠습니다.
@장코뱅 매튜 헨리의 주석이 길지만 잘 읽어 보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듯이 참 신앙에 기초한 회개와 성도의 견인이 가능한 원인 등을 알 수 있고, 또한 복음과 은혜를 얻습니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이 말씀이 떠오르네요.
영혼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베드로의 회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그 말씀이 어찌나 자신의 양심을 찌르는지 통곡을 한 장면을 보면서 아, 정말 그렇구나 하게 되네요.
말은 발이 없지만 천리를 달리고, 시공을 초월해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네요. 어렸을 때 들었던 부모의 말씀이 뇌리에 박혀서 자녀를 움직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수천 년 전의 말씀도 여전히 성도들의 영혼을 움직이는 힘이 있네요. 영혼의 양식이 되어서 성도의 생명력을 유지시키고, 활력과 기쁨과 소망과 능력을 주는군요. 영혼을 회개시키고 시시비비를 가려주며 하나님의 심판대에서도 말씀으로 하게 되겠지요.
가룟 유다는 전형적인 외식자였군요. 겉으로는 제자로서 예수를 따르고 연보도 관리하고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 같았지만, 속에는 이미 다른 영을 받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예수님을 잘 알지도,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던 거죠.
베드로도 사단이 자기 편으로 끌어갈려고 애를 썼지만 예수님의 기도로 무산됐네요.
네,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하며 배웁니다.
말씀이 유전자처럼 우리 내면에 깊이 꽂혀 있기를 기도합니다.
@노베 아멘!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대비를 보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과 은혜도 생각하게 되는데, 가룟 유다의 멸망의 자식으로서의 저주 받은 예정은 역사 속에서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악역을 전담할 특별한 소수가 필요하여 허용하지만, 선택은 당사자 자신이 한다는 것이죠. 베드로도 예수를 부인하고 악한 자들에게 동조하여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존재를 확실히 파악을 하였고 구원 받는 신앙고백을 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은혜받은 자였기에 주님이 지켜주신 것 같습니다. 육신의 나약함, 비겁함으로 부인을 했을지언정 말씀으로 양심의 가책을 받고, 곧 통곡하며 회개한 반면,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못이겨 자살하였죠. 그에게 예수님은 가서 네가 할 일을 하라고 허용하십니다. 베드로와는 다르죠. 베드로는 회개하고, 칼을 쓰려던 마음도 고쳐먹고, 더욱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되어 간 것을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평소에 주야로 말씀을 즐겁게 묵상하는 습관이 귀하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좋은 묵상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정과 선택 교리는 늘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조금은 알되 다는 모르는 '불가해성' 영역이 있음을 새삼 느낍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베드로가 불가항력적 은혜를 받고 성도의 견인을 한 참 성도였다는 것이고, 그 와중에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믿음에 기초한 회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수혜는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성도의 견인)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장코뱅 두 분의 좋은 댓글에서 배우고 성경적 이해도 깊어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숙연해지고 은혜도 얻는 좋은 묵상을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