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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의 둘째 부분에서 믿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죄에 빠진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그리스도가 전한 말씀을 믿는 것만이 유일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영혼은 내적인 존재라서 외적인 것이나 종교적인 행위들, 구약의 계명을 지키는 선한 행위들로는 영혼을 의롭게 하거나 자유를 줄 수 없다고 말한다.
절망에 빠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홀로 말씀하시고, 홀로 성취하신 말씀, 즉 새 언약이다. 새 언약은 의와 거룩함과 자유, 선, 진리 등 하나님에게서 나온 모든 것들이 약속되어 있고,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 간단히 이 모든 것을 포함시켰다고 루터는 말한다. 바른 믿음을 가지고 말씀에 매달리는 영혼은 말씀과 온전히 연합하여 말씀의 덕(능력)을 가지게 된다. 어떤 선행도 믿음만큼 말씀에 매달릴 수 없으며, 말씀과 믿음만이 영혼을 지배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외적인 것으로부터 독립된 영혼
3. 속사람이 의롭고 자유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위해 먼저, 속사람,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어보자. 분명한 점은 외적인 것은 내적 인간을 자유하고 의롭게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의 의와 자유, 그리고 그 반대의 악과 속박은 육체적이거나 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체가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며 사는 것이 영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반대로 육체가 속박되고 병들고 무기력하며 원치 않게 굶주리며 목마르고 고통을 당한다고 영혼에 무슨 해가 되겠는가? 이것 중 어떤 것도 영혼에 도달하여 영혼을 자유롭게 하거나 속박하지 못하며 영혼을 의롭게 하거나 불의하게 하지도 못한다.
영혼은 종교적인 것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4. 육체가 목사나 성직자들처럼 교회와 거룩한 장소에서 거룩한 의복을 걸치고 거룩한 것들을 다룬다고 해도, 이러한 것은 영혼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또한 육체가 기도하고 금식하며 성지순례를 하고 다른 모든 선행을 한다고 해도 영혼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선행은 육체만으로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혼에 의와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은 완전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행위와 행동 양식들은 악한 사람, 경건한 체하는 사람, 위선자 역시 가질 수 있고 행할 수 있다. 그러한 행동으로는 단지 위선자만이 생겨날 뿐이다.
반대로 육체가 거룩하지 않은 의복을 걸치고 거룩하지 않은 장소에 있고 자유로이 먹고 마시며, 성지순례나 기도를 하지 않고, 앞에서 언급한 위선자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것은 영혼에 해가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통해 자유하게 된다
5. 영혼이 하늘이나 땅에서 살며 의롭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데에는 거룩한 복음, 즉 그리스도가 설교한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리고 마태복음 4장 4절에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영혼이 다른 모든 것은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 외의 어떤 것도 영혼을 도울 수 없다. 다시 말해 말씀을 가진 영혼에는 다른 것이 더 이상 필요 없고 말씀만으로 충분하다.
영혼은 말씀 안에서 양식, 기쁨, 평화, 빛, 유능, 의, 진리, 지혜, 자유를 포함한 모든 좋은 것을 풍성하게 소유한다. 이 때문에 시편 119편에서 선지자(시편 기자)는 오직 하나님 말씀만을 달라고 외친다. 아모스 8장 11절 이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서 말씀을 빼앗아 가시는 것을 가장 혹독한 재앙, 하나님의 진노라고 표현한다. 반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보내시는 것보다 더 커다란 은혜는 없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라는 시편 107편 20절 말씀과 같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단 하나의 임무를 위해 오셨다.(비록 오늘날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모든 사도, 주교, 목사, 그리고 모든 성직자 신분도 오직 말씀을 위해 부름을 받고 임명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바른 사용
6. "그렇게 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라고 당신이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바로 복음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에 관한 설교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생명과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가치가 없으며 당신이 당신의 모든 것과 함께 영원히 파멸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도록 설교되어야 한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설교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르게 믿는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해 절망하며 호세아의 말씀이 진리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오 이스라엘아, 네 안에는 타락만이 있도다. 그러나 너에 대한 도움은 오직 내 안에 있도다"(참조 13장 9절).
당신이 당신 자신, 즉 타락에서 빠져나오도록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 앞에 세우시고 그의 살아 있는 위로의 말씀으로 당신에게 말씀하신다.
"확고한 믿음으로 당신 자신을 그에게 맡기며 주저하지 말고 그를 신뢰해야 한다. 그러면 이 믿음으로 당신의 모든 죄는 용서되고 당신의 모든 부패한 본성은 극복되며 당신은 의롭고 진실하고 평화롭고 바르게 될 것이다. 또한 모든 계명이 성취되며 당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울이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한 바와 같다.
믿음이 유일한 행위이다
7.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유일하게 행하고 연습해야 하는 것은 말씀과 그리스도를 바르게 마음에 새기고 믿음을 끊임없이 실행하고 강화하는 일이다." 다른 어떤 행위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일과 그리스도의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6장 28~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 유일한 하나님의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직 그만을 구주로 믿도록 정해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르게 믿는 것은 엄청난 부유함이다. 이 믿음은 구원을 가져다주며 모든 불행을 없앤다. 마가복음 16장 16절에서 "믿고 세례를 받은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믿음의 부유함을 보고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신속한 심판이 있게 하시며, 이러한 신속한 심판 가운데 의가 마치 홍수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사 10:22)라고 말했다. 모든 계명을 성취하는 믿음은 모든 믿는 자를 넘칠 정도로 의롭다 한다. 이 때문에 의롭고 바르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다. 같은 의미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장 10절에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라고 말한다.
옛 언약의 역할
8. 성경에는 많은 율법, 계명, 행위, 규정, 행동 양식들이 우리에게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만이 의롭게 하고 행위 없이 풍성한 부유함을 줄 수 있는가? 여기서 부지런히 명심하고 진지하게 붙들어야 하는 사실은, 행위 없이 오직 믿음만이(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고 자유하고 복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에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명(율법)과 약속(확언), 이 두 가지로 나뉜다. 계명은 우리에게 많은 선행을 가르치고 지시하지만, 그것으로 계명이 성취되지는 않는다. 계명은 지시하지만 돕지는 않는다. 계명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지만, 그것을 행할 힘은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계명이 주어진 목적은 그것을 통해 인간이 선한 것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에 절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옛 언약으로도 불리며 모두 구약에 속한 내용이다. 예를 들어 "너는 탐내지 말라"(출 20:17)는 계명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한다 해도 악한 탐욕이 없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에 절망하게 되고 다른 곳에서 도움을 구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악한 탐욕을 없애고 (자신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계명을 다른 이의 도움으로 성취하기 위함이다. 이 계명과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계명 역시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 언약의 역할
9. 만일 사람이 계명을 통해 자신의 무능을 깨닫고 계명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면(율법을 성취하든지 아니면 사람이 저주받아야 하기 때문) 참으로 겸손해져서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 보게 된다. 자신을 의롭게 할 만한 어떤 것도 자신 안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그에게 이제 다른 말씀,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확약이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당신이 계명이 촉구하고 요구하는 대로 계명을 성취하고 악한 욕망과 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분 안에 모든 은혜, 의, 평화와 자유가 분명하게 약속되어 있다. 당신이 믿기만 하면 믿은 대로 그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지만, 믿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유익이 없는 수많은 계명의 행위로 불가능한 것을 당신은 믿음으로 쉽고 간단하게 성취할 수 있다. 나는 모든 것을 믿음에 간단히 포함시켰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구원받을 것이고 믿음을 갖지 않은 자는 어떤 것도 갖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은 계명이 요구하는 것을 주고, 계명이 명령하는 것을 성취한다. 이것은 계명과 성취가 하나님의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 홀로 명하시고, 또한 하나님 홀로 성취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새 언약의 말씀이고 새 언약에 속한다.
영혼과 하나님 말씀이 하나됨
10.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거룩하고 참되며 의롭고 평화롭고 자유하며 모든 선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바른 믿음을 가지고 이 말씀에 매달리는 자의 영혼은 말씀과 온전히 연합하여 말씀의 모든 덕(능력)을 소유한다. 그래서 영혼은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하고 평화롭고 자유하며 모든 선으로 가득 차게 된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2절이 말하는 것과 같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믿음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왜 어떤 선행도 믿음에 필적할 수 없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선행도 믿음처럼 하나님 말씀에 매달리지 못한다. 어떤 선행도 영혼 안에 있을 수 없으며, 오직 말씀과 믿음만이 영혼을 지배한다. 마치 쇠가 불과 연합할 때 불처럼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처럼, 영혼은 이를 통해 말씀의 본성과 같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의롭게 되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필요하지 않다. 그에게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행위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면, 그는 분명 모든 계명과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방되어 있다면 그는 분명 자유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며 유일무이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우리로 게으르게 행하거나 악을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행위도 필요하지 않도록 한다. 이에 관해 이후에 더 말하고자 한다.
마틴 루터 저, 권진호 해설 및 번역, 『루터, 구원을 말하다』(서울: 신아사, 2023), pp. 21-28.
첫댓글 매우 좋은 포스팅입니다.
작성자님의 인트로에서 루터의 1차 자료를 요약해 주니 보기가 더욱 편하군요.
네, 공감합니다.
옛 언약은 통칭 구약이고 신약은 통칭 신약인데, 칼빈 츠빙글리 등의 개혁주의에 비해서... 루터는 신구약의 단절 내지 엄격한 구분을 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도덕률폐기론자나 구원파 스타일의 이단들이 루터에 대한 비난은 없지만 칼빈에 대해 집요한 비난을 하는 이유는 도덕률폐기론이 루터의 신학에서는 그나마 비빌 언덕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일 것 같습니다. 칼빈은 수사관처럼 치밀하거든요.
맞아요. 칼빈은 이단에 대해서 수사관 같은 치밀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킨 것에서는 오해나 오류를 조장할 가능성이 다른 주요 개혁자에 비해서 더 있어 보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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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킨 것과는 달리, 츠빙글리는 율법을 복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
츠빙글리의 주장처럼 율법과 복음은 첨예한 대립이 아니라 구분되며, 불연속만이 아니라 연속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주기도문인데 이는 십계명을 요약한 것입니다.
https://cafe.daum.net/1107/bzn6/30
링크 본문은 대강 기억나지만, 댓글 서두에서 루터의 마인드를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①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②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으며, 그에 더해진 ③번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①•②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③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용도에 대한 이해는 개혁주의의 원조인 칼빈의 주장을 벤치마킹 한 것입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칼빈이 말한 율법의 3번째 용도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이전에 올린 초판이 아니라 1559년판 기독교강요).
https://cafe.daum.net/1107/Y4cZ/106
루터와 칼빈주의 모두 훌륭하지만 율법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는 칼빈주의 쪽에 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래 글도 함께 보면 더욱기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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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율법의 용도(초판 기독교강요)
https://cafe.daum.net/1107/Y4cZ/82
초판 기독교 강요를 보니 서술체로 더 이해가 잘 되는 갓 같습니다.
몇 가지 어려운 표현이 있지만 영혼이 믿음을 통해 말씀의 감동을 받는다!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좋은 포스팅을 통해서 성찰하고 배웁니다.
공감합니다.
가톨릭 교회가 구원의 조건으로 선행을 강조하고 온갖 고행과 비성경적인 방법들을 동원하니까 루터로서는 그것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겠죠. 의롭게 되는 것은 그런 외적인 행위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내적인 것, 영혼을 의롭게 하고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가능한데 그것이 믿음이라는 거죠. 루터는 믿음의 위대한 능력을 그 자신이 오랫동안 방황하고 번뇌하다가 발견한 그것이 너무나 크고 기뻤기 때문에 믿음의 능력에 대해서 이렇게 휘몰아치며 글을 썼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방향을 잡아주신 대로 잘 읽고 은혜를 얻습니다.
더구나 자신을 파문하려는 교황을 어떻게든 성경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설득하기 위해서 행위가 얼마나 구원과 칭의에 아무런 기여를 못하는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나기도 하죠.
네, 좋은 포스팅을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