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유혹과 은혜 1 ” 誘惑と恵み 1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말씀을 전하기에 앞서 사실 고백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본래 이 말씀을 준비하게 된 계기는 이 부분 중에서 어떤 부분이 떠올라서,
이 세 가지 시험에 대한 부분은 빨리빨리 간략하게 전해드리고, 제일 핵심이 되는 부분을 중점적으로 전해드리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까 제가 오히려 은혜를 받아서, 도저히 간단하게 정리하고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나누어서 말씀을 전해드리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구체적으로 두 번에 나누어야 하는지 아니면 3번이나
4번에 나누어야 하는지 아직 잘 감이 오지 않아서 일단 번호를 붙여보았습니다.
이 점 이해해 주시고, 몇 주 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시간에 제가 처음에 전해드리고자 했던 말씀까지 듣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는 광야로 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십 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 사탄으로부터 시험을 받으시게 됩니다.
오늘 이 장면은 마태복음 4장 1절~11절 외에도 누가복음 4장1절~13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과
누가복음 4장 1절~2절 말씀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4장 1절~2절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2절
“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それからイエスは、悪魔の試みを受けるために、御霊に導かれて荒野に上って行かれた。
そして四十日四十夜、断食をし、その後で空腹を覚えられた。
누가복음 4장 1절~2절
“1.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さて、イエスは聖霊に満ちてヨルダンから帰られた。そして御霊によって荒野に導かれ、
四十日間、悪魔の試みを受けられた。その間イエスは何も食べず、その期間が終わると空腹を覚えられた。
어떤 신학자들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시는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받으셨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대체적으로는 40일 금식이
끝나셨을 때 마귀가 나타나서 시험을 했다고 이해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점에 대해서 동의를 합니다. 그 이유는, 만약에
40일 동안 계속해서 시험을 당하셨다고 한다면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시험의 종류는 수 십 가지가 넘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 기록된 시험을 보면 세 가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아, 마귀는 예수님께서 금식을 끝내셨을 때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시험의 종류는 모두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4장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둘째는 마태복음 4장 5절~6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すると悪魔はイエスを聖なる都に連れて行き、神殿の屋根の端に立たせて、
こう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下に身を投げなさい。『神はあなたのために御使いたちに命じられる。彼らはその両手
にあなたをのせ、あなたの足が石に打ち当たらないようにする』と書いてあるから。」
셋째는 마태복음 4장 8절~9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悪魔はまた、イエスを非常に高い山に連れて行き、この世のすべての王国とその栄華を見せて、
こう言った。「もしひれ伏して私を拝むなら、これをすべてあなたにあげよう。」
이 세 문제, 이것이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한 모든 문제들이었습니다. 교회에 어느 정도 다니시고 성경을 좀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익숙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마귀는 첫째 시험에서 예수님더러 돌을 떡덩이로 만들어 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40일 금식을 마치셨습니다. 저도
기도원에 가서 금식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만, 금식 시간이 땡 하면 서둘러 식당으로 달려가서 허겁지겁 죽을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셨습니까. 광야에 계셨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사는 동네까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당장 잡수실 죽이나 떡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배고픔도 못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8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キリストは、神の御姿であられるのに、神としてのあり方を捨てられないとは考えず、
ご自分を空しくして、しもべの姿をとり、人間と同じようになられました。人としての姿をもって現れ、
自らを低くして、死にまで、それも十字架の死にまで従われました。
만약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배고픔도 별로 힘들지 않으셨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실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성경에서의 희생이란 곧 대신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들은 모두가 살아 있는 동물이나 새들을 잡아서 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이 되신 어린 양으로 오셨다면 죽으셔야 하는데, 하나님으로서 오셨다면 죽으실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사람으로서만 오셨냐 하면, 이렇게 해석해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만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셨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도 대신 죄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100% 하나님으로서만 오셨다 하더라도 문제가 생기고, 100% 인간으로서만 오셨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생깁니다.
그럼 중간을 따서 50% 정도로 하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50% 하나님과 50% 사람이라고 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50%의 값어치밖에 없게 되고, 우리의 죄는 50%밖에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0% 하나님과 100%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셨다고 이해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100% 하나님이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뿐만 아니라 100% 사람으로도
오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된다면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금식을 하신 다음에는 우리 인간과 100% 똑같이 굶주림을 느끼셨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탄은 예수님께 뭐라고 말합니까.
마태복음 4장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すると、試みる者が近づいて来て言った。「あなたが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なさい。」
이 얼마나 감미로운 말입니까. 너 지금 배고프잖아. 그리고 너 하나님 아들이잖아. 자, 어서 이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서 먹어라.
하지만 예수님은 이를 거절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돌멩이로 떡을 못 만드시겠어요? 아니에요.
요한복음 1장 2절~3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장 2절~3절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この方は、初めに神とともにおられた。
すべてのものは、この方によって造られた。造られたもので、この方によらずにできたものは一つもなかった。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하나님의 보조적인 분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도 하나님과
동일한 조물주이시며, 예수님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고까지 성경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분한테 지금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어요? 이것은 미슐랭 별 세 개 급 되는 쉐프가 컵라면 끓이는 것 정도? 아니요,
그것보다도 더 수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이 일이 어려워서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돌멩이를 떡덩이로 만들지
말지니라”라고 말씀하셨나요? 아니요. 그런 구절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거절하셨을까요. 여기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부분이 예수님의 답변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4장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イエスは答えられた。「『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神の口から出る一つ一つのことばで生きる』と書いてある。」
이 말씀은 구약 성경 내용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3절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それで主はあなたを苦しめ、飢えさせて、あなたも知らず、あなたの父祖たちも知らなかったマナを食べさせてくださった。それは、人はパンだけで生きるのではなく、人は主の御口から出るすべてのことばで生きるということを、あなたに分からせるためであった。
이는 모세가 한 말입니다만,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해서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그들은 한 곳에 머무르며 지금처럼
농사를 짓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낮에는 구름기둥과 밤에는 불기둥을 따라 이동하다가 그 기둥이 머물면 거기에 정착합니다.
그랬다가도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제 그들도 이동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어쩌면 에이, 나는 내가 원하는 곳에 가서 살래 삐뚤어질거야……하고 반항하는 사람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물론 그런 시도를 누군가가 했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만약에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고 대열에서 이탈을 했다고 하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들은 머지않아 다시 돌아왔거나, 아니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광야라고 하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풀이 많아서 목축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식량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가 전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매일 아침 모아서는 이를 먹으면서 하루하루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곳이 바로 광야라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만나는 광야 전체에 일어나는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매일매일 내려주시는 식량이었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이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쩌다가 우연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제외하고 매일같이 내리는 만나였기 때문에 이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식량이라고 하는 점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광야에서는 철칙이 있지요.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광야에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지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200명도 아닌 당시 이스라엘 민족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4일이나 40일도 아닌 40년 동안을
무사히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몸소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모세가 신명기에서 한 말은 무슨 비유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시로서는 대단히 현실적인, 대단히 상식적인 말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돌을 떡덩이로 해서 먹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아무리 어렵고,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먹고 살아가기 캄캄하다
하더라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것이 믿어지십니까. 특히나 요즘처럼 어렵고 힘든 시기, 사람의
머리로는 이 코로나인지 뭔지가 언제쯤 끝나서 예전과 같은 생활이 돌아올지 알 수 없더라도 우리는 이를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길을 열어 주삽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잘 안 나오더라도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 우리를 먹여 주십니다. 채워 주십니다. 아멘.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해서 돌멩이들을 떡덩이로 만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결국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재물을 추구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だれも二人の主人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一方を憎んで他方を愛することになるか、一方を重んじて他方を軽んじることになります。あなたがたは神と富とに仕えることはできません。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말씀하시면서 이 둘을 똑같이 섬길 수가 없다, 소중하게 생각할 수가 없다. 어느 한쪽만 소중하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만 보면 놀랍습니다. 아니, 어떻게 창조주 하나님과 한 낯 재물을 같은 선상에 놓고
말씀하실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재물이 똑같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은 전혀 같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이 하나님만큼 재물을 생각하고 의지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필요 없나요? 아니요. 필요 합니다. 재물이 있어야 하루하루 생활도 할
수 있고, 하나님도 섬기고 이웃도 섬길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들 먹을 것도 부족한데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시편 103편 5절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あなたの一生を 良いもので満ち足らせる。 あなたの若さは 鷲のように新しくなる。
잠언 10장 22절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人を富ませるのは主の祝福。人の苦労は何も増し加えない。
마태복음 7장 11절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このように、あなたがたは悪い者であっても、自分の子どもたちには良いものを与えることを知っているのです。それならなおのこと、天におられるあなたがたの父は、ご自分に求める者たちに、良いものを与えてくださらない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
가난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근심이 없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라고 주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재물만이 아니라 건강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리고
주님께서 지혜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이고, 하나님이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나 먹고 살기도 빠듯해요. 이러면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이웃을 외면하고, 오직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욕심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바로 돌을 떡덩이로 바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행원을 생각해보십시오. 손님이 돈을 맡기러 왔습니다. 누구는 1000만원을 맡기러 왔습니다. 누구는 1000원을 맡기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한테 더 친절하게 대해야겠습니까.
고객이라면 당연히 모두에게 친절해야지요. 그런데 만약에 1000만원을 맡기러 온 사람한테만 친절하게 대하고, 1000원을 맡기러 온
사람한테는 불친절하게 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직원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직원은 어쩌면 고객이 가지고 온 돈을 자기 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객이 가지고 오는 돈이 자기 돈이에요? 자기 월급이에요? 아닙니다. 그 돈은 자기 월급이 아니에요. 그 돈은 회사 돈이요,
회사 운영을 위해서, 그리고 고객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돈입니다. 그러면 자기 돈은 뭐예요?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주는 월급이 자기
돈인 것입니다.
이를 착각하고, 무엇이 자기 돈인지, 무엇이 자기 돈이 아닌지도 모르고, 이야, 은행원이 되니까 창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막 돈을
가져다 주네……. 이런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죠. 잘못하면 그 돈 중에서 슬쩍 주머니에 넣다가 잡혀가게 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가지 시험 중에서 첫 번째 시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만, 여기서의 떡덩이는 단지 돈이나 재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세상적인 방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면 세상적인 근심걱정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들을 주님께서 해결해주실 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근심걱정만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어느새 하나님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한숨 쉬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싸워서 마침내 승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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