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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배반
《이미지의 배반》(La trahison des images)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대표작이자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를 제공해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흔한 파이프가 그려져 있지만 그 아래에는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관습에 따르면 파이프를 재현한 그림 속의 파이프는 파이프가 맞지만, 마그리트는 관습적 사고방식을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림과 문장을 모순적으로 표현하였고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작가 르네마그리트
초현실주의 시대에 대표적인 작가 중에 한 사람인 르네 마그리트(프랑스어: René Magritte)는 초현실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벨기에의 화가이다. 그는 1898년 11월21일에 벨기에에서 태어나 1967년 8월 15일에 사망하였다. 1916년 브뤼셀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고,1920년 중반까지 미래주의와 입체주의 성향의 작품을 그렸다. 그러나 그 이후 조르조 데 기리코(Giorgio de Chirico)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적인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초현실주의적이지만 자신만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작품들을 제작했다.주로 우리 주변에 있는 대상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그것과는 전혀 다른 요소들을 작품 안에 배치하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였다.1940년대에는 그 전까지 했었던 작품들과는 다른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는데, 인상주의시기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과 바슈시기의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제작되었다.그의 작품들은 주로 신비한 분위기와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발상의 전환 등의 특징을 보이며 이러한 특징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작품 '이미지의 배반'
이미지와 말
그려진 이미지는 통속적 재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화가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그리는 기법, 즉 자신의 눈과 손을 통해 포착된 자신의 몸, 그 화가 개인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화는 증명사진처럼 동일성의 의미를 전하지 않는다. 회화의 목적은 외형적 현실 자체가 아니라 현실 이면에 있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비밀에 주의를 돌리는 것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에 그려진 이미지는 언제나 사유의 이미지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그것이 이미지로서 갖는 고유한 상황을 반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가시적 환영이라는 의미에서, 현실 묘사를 위한 단순한 외관의 재현이 결코 아니다. 특히 이미 친숙하기 때문에 이름 붙여질 필요 없는 것을 이름을 붙이고 그것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부조리한 표현을 하였으며, 거기에서 단지 결정되지 않고 얽매이지 않은 상황에 놓인 파이프의 재현밖에 없다. 이미지와 문구는 긴밀한 관계에 있어도 그 문자의 주장이 허위인지 진실인지 말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미쉘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뎃상’일 뿐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다’ 라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고,‘파이프가 아니다’란 문장은 ‘파이프’가 아니며,‘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란 문장에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며, 그림, 쓰여진 문장, 파이프의 뎃상, 이 모든 것 ‘파이프’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미지가 대상인 사물, 오브제를 나타낼 수도 있고, 잘못된 언어와 결합하면 이미지가 심지어 오브제 그 자체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말과 이미지의 관계의 임의성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이미지와 글귀가 명백히 연관되어 있더라도 글귀의 내용이 옳거나 그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즉, 언어의 임의성이란 문제 외에도, 그려진 대상은 2차적인 물체일 뿐이고, 현실의 환상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제시한다.
작품해석
위에 보이는 그림처럼 그려진 파이프를 가지고는 담배를 피울 수 없다. 따라서 그려진 파이프는 파이프가 아니다. 이미지와 대상 사이가 그런 것처럼, 말과 대상 사이에는 정의하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간극이 존재한다.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말을 통해 실재를 포착하고 이 두 보완적인 체계들의 협력을 통해 실재를 단단히 붙들어두는 장치를 구성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말에 대한 내적 거리와 이미지에 대한 외적 거리를 이용하여 잠에서 깬 상태에서 지각할 수 있는 꿈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사유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두개의 언어(시각적인 것과 말로 되어 있는)가 서로 무효화시키도록 만들고 있다. 그 자신은 자신의 그림이 "생각의 자유에 대한 물질적 기호로서" 여겨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유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의를 내렸다."삶, 우주, 무한한 공간 등은 생각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경우에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한다. 그것에 대하여 가치를 지니는 유일한 것은 의미, 즉 불가능한 것들이라는 정신적 개념이다."
그의 이런 방식은 전통적인 묘사방식을 부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파이프 그림이 파이프 자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에 놀라는 자신을, 관람자는 발견 하게 된다.
실체와 명명
두 개의 비밀(The Two Mysteries) 1966년, Oil on Canvas,65 x 80 cm, 브뤼셀 이시 브라쇼 미술관 마그리트는 이미지와 말을 통해 실재를 포착하고 이 두 보온적인 체계들의 협력을 통해 실재를 단단히 붙들어두는 장치를 구성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말에 대한 내적 거리와 이미지에 대한 외적 거리를 이용하여, 잠에서 깬 상태에서 지각할 수 있는 꿈을 보여주는 비밀, 저 손상되지 않은 비밀스러운 차이, 독창적인 사유를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말(言)은 가시적인 것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 개념 자체에는 말의 특성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진 말(馬)이라는 '개념'과 이 피조물 사이에는 오로지 추상적인 관계만 존재한다. 이미지와 마찬가지로, 말(言) 또한 언어의 본성과 그것이 언급하는 사물 사이의 차이를 가지고 게임을 한다. 또 다른 예로 '센 강'이라고 쓰인 말은 파리를 연상시키지만 이것은 실제적이지 않고 단지 추상적인 과정일 뿐이다.
파이프의 재현물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것으로 우리가 명명하는 것과 그 실체는 엄연히 다를 수 있다는 간단하고 평범한 결론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것은 마그리트가 거듭 언급하는 세속적인 비밀을 그만큼 더 감추고 있다. 대상을 지시하는 말도 대상을 그린 그림도, 대상이 실제 존재한다는 점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할 수 없다.
연애의 기술
데페이즈망
정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란 용어는 본래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또는 ‘다른 생활환경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데페이즈망은 자동기술법과 같이 잠재된 의식을 내포한 것이기는 하지만 추상적인 성격이 아닌 사실적이며 구체적인 형상을 비논리적이고 모순적인 결합으로 표현한다. 이는 물체나 영상을 그것이 놓여있는 본래의 용도, 기능, 의미를 이탈시켜 놓은 전위법으로 모순, 대립되는 요소들을 동일한 화폭에서 결합시키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는 기법이다. 오토마티즘을 보다 정교하게, 효과적으로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프로이드의 자유연상과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은 데페이즈망 기법을 낳게 되는 가장 직접적인 유래가 된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자들이 주로 탐닉했던 자동기술법(Automatism)이나 꿈의 세계에 대한 환각적 탐구와는 달리 현실의 신비 등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만의 독자적인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시적 이미지를 창조해나갔다. 현실세계에 대한 논리적 회의와 인식에 대한 문제들의 반문으로써 사용했는데,그는 이성과 합리적인 사유에 저항하여 의식적이고 계획된 행동인 데페이즈망으로 자기만의 독특한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의식과 무의식이 융합되는, 분화하기 이전의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을 즐겨 표현해왔던 마그리트에게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은 매우 적절했다. 마그리트는 평소 익숙했던 사물들의 위치를 전환시켜 엉뚱한 다른 요소들과 결합시키거나, 사물과 말 사이의 엉뚱한 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기존의 재현체계, 의사소통의 체계를 거부하고 말과 사물, 언어와 사고 사이의 의미관계의 전복을 꾀했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은 전혀 관계가 없는 일상적 사물을 전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만나게 하여 현실에서 미처 느끼지 못하던 신비로운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패러디
Ceci n'est pas une pipe. This is not a pipe.[c 1]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고 파이프 그림이다. 그러나 말이란 간결하면서 명료해야 하는 바, 이 두 미덕 또는 조건은 다소 모순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파이프다"는 "이것은 파이프 그림이다"의 간결한 표현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작가가 간결한 표현 요건을 무시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1929)는 논리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파이프 그림은 파이프 실물이 아니다"의 간결한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알프레드 코르집스키, 1933) 및 의미삼각형 (옥든 & 리차즈, 1923)과 같은 이론적 맥락이라고 믿어진다. 우리는 실물처럼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림과 글 등 상징에 너무 휘둘릴 수도 있다. 교육 훈련 뿐만 아니라 선전 선동 세뇌도 그런 경우다. 우상을 가리키며 "이것은 신이고, 따라서 우리는 이것에 우리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면....
<이미지의 배반>이라니 무슨 뜻일까?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것은 파이프를 그린 이미지일 뿐, 실제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진짜 파이프'는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다만 우리가 '파이프'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일 뿐이고 단지 '파이프'라고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지, 실제의 '파이프'는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철학자 마그리트'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이다.
https://naver.me/FtTiPd47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유사와 상사 어느 날 『말과 사물』을 읽은 마그리트가 그 저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화... blog.naver.com 이미지의 배반>이라니 무슨 뜻일까?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것은 파이프를 그린 이미지일 뿐, 실제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진짜 파이프'는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은 다만 우리가 '파이프'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일 뿐이고 단지 '파이프'라고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지, 실제의 '파이프'는 아니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를 '철학자 마그리트'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이다.
https://naver.me/FtTiPd47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유사와 상사
어느 날 『말과 사물』을 읽은 마그리트가 그 저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화가와 저자는 몇 차례 서신을 교환하게 된다. 푸코의 텍스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바로 이 서신 교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푸코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마그리트는 푸코의 책에 나오는 유사resemblance와 상사similitude의 구별에 관심을 기울인다.
푸코의 마그리트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유사'와 '상사'의 개념을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말해 '유사'란 '원본과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말하고 '상사'란 "복제와 복제 사이의 닮음의 관계'를 가리킨다. '유사'는 원본의 존재를 전제하는 반면, '상사'는 굳이 원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유사'가 원본과 복제의 일치라는 인식 이론적 요구를 함축한다면, '상사'는 원본 없는 복제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므로 원본을 증언할 인식론적 의무가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 조금씩 차이를 내며 무한히 반복되는 닮은꼴들의 미적 유희다. 여기서 푸코의 '상사'의 개념이 들뢰즈가『차이와 반복』에서 말한 '시뮬라크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시뮬라크르'란 본디 원본이 없는 복제 (벤야민), 원본과의 일치가 중요하지 않은 복제(들뢰즈), 혹은 원본보다 더 실제적인 복제(보드리야르)를 가리킨다.
삽화적 정확성을 가지고 사물을 그대로 베끼는 마그리트의 작품은 '유사성을 통한 재현'이라는 전통적 구상회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푸코가 보기에 마그리트의 작품세계는 '유사'가 아니라 '상사'를, 즉 원본을 전제하지 않는 복제들 사이에 서로 닮음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편지 속에 마그리트는 『말과 사물』의 저자에게 "굳이 회화의 원작성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그렸던 그림들의 사본"을 몇 장 첨부해 보냈다. 유명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연작의 사본들로, 유화로 그려진 원작을 펜화로 거칠게 본뜬 복제들이다. 마그리트에 대한 푸코의 논의는 화가가 "회화의 원작성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그렸다는 이 원작의 거친 복제들, 즉 시뮬라크르들에 대한 기술로부터 시작한다.
「미셸 푸코: 위계 없는 차이의 향연」,『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아트북스 2003/ 2006), 153-158면
파괴된 칼리그램
마그리트의 작품은 일종의 칼리그램이다. 푸코에 따르면 "천 년의 전통 속에서 칼리그램은 3중의 역할을 한다. 알파벳을 보완하고, 수사학의 도움 없이 되풀이하고, 사물을 이중적 서기書記의 덫으로 사로잡기." 칼리그램은 알파벳 기호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그려서 보여주고, 수사학처럼 같은 것을 다르게 말하는 것 (알레고리)이 아니라 말하기를 그림으로써 반복하고, 평면에 배열된 선을 이용해 (시간적으로 읽어야 할) 기호를 쓰는 동시에 (공간적으로 보여야 할)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한번은 말하기로써, 또 한 번은 보여주기로써 칼리그램은 말과 사물 사이의 연결을, 그들 사이의 지시관계를 이중적으로 확보하려 한다.
칼리그램은 전설로 내려오는 '아담의 언어'의 기억이다(. . .)그림과 텍스트가 서로 대립하는 이 바벨의 시대에 유일하게 아담의 언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칼리그램이다.
칼리그램은 '말하기'와 '보여주기'를 통해 이중으로 의미를 고정시킨다. 그런데 마그리트의 칼리그램은 어떤가?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그와 정반대의 기능을 발휘한다. 마그리트는 칼리그램을 파괴하기 위해 칼리그램을 사용한다. 그의 그림과 텍스트는 서로 호응하지 않는다. 그림을 실물을 방불케 하는 정교한 묘사로서 파이프의 모습을 재현하나, 그 밑에 붙은 텍스트는 그림이 재현하는 바를 단호하게 부인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여기서 칼리그램은 결국 실패하고 만다.
푸코는 여기서 물론 어떤 철학적 함의를 본다. 칼리그램은 소위 현전의 형이상학의 미적 엠블렘이다. 근대 철학자들의 인식이상理想은 텍스트를 칼리그램으로 만드는 것, 말하자면 세계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를 얻는 것이었다. 마치 화가가 사물을 화폭에 옮겨놓듯이 텍스트는 세계를 우리 의식의 스크린에 현전présence시켜야 했고, 또 그럴 때에 그 텍스트는 '진리'일 수 있었다. 하지만 칼리그램은 파괴되었다. 현전은 불가능해졌다. 그런 의미에서 파괴된 마그리트의 칼리그램 속에서 종언을 고하는 것은 전통적 회화의 원리만이 아니다. 그것을 사유의 이마주로 삼았던 어떤 사유모델, 근대의 재현적 인식론도 그와 함께 종언을 구하는 것이다.
「미셸 푸코: 위계 없는 차이의 향연」,『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아트북스 2003/ 2006), 158-16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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