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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4월 11일 토요일]
《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
34세 단군 오루문 ~ 47세 단군 고열가 》 (29)
三十四世 檀君 奧婁門 在位二十三年
丙午元年 是歲五穀豊熟 萬姓歡康 作兜里之歌 其歌曰 天有朝暾明光熙耀 國有聖人德敎廣被 大邑國我倍達聖朝 多多人不見苛政 熙皞歌之長太平
乙卯十年 兩日竝出 仍黃霧四塞
戊辰二十三年 帝崩太子 沙伐立
34세 단군 오루문 재위 23년
병오년 원년(B.C.795)에 이 해는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도리가(兜里歌)를 지어 불렀다.
하늘에 아침 해 맑은 빛 비추고
나라에 성인이 있어 덕의 가르침 널리 미치니
큰 고을 큰 나라 우리 배달 성스러운 나라
사람 사람마다 가혹한 정치를 모르니
밝고 밝은 노래 부르며 오래도록 태평하리
을묘년 10년(B.C.786)에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뜨더니 이에 곧 누런 안개가 사방에 그득했다.
무진년 23년(B.C.773)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사벌(沙伐)이 즉위했다.
三十五世 檀君 沙伐 在位六十八年
己巳元年
甲戌六年 是歲有蝗蟲大水
壬午十四年 虎入宮殿
壬辰二十四年 有大水山崩壞谷充塡
戊午五十年 帝遣將彦波弗哈 平海上熊襲
甲戌六十六年 帝遣祖乙 直穿燕都 與齊兵戰于臨淄之南郊 告捷
丙子六十八年 帝崩 太子賣勒立
35세 단군 사벌 재위 68년
기사년 원년(B.C.772).
갑술년 6년(B.C.767)에 이해는 황충(蝗蟲)의 피해와 홍수가 있었다.
임오년 14년(B.C.759)에 범이 궁전에 들어왔다.
임진 24년(B.C.748)에 큰비가 내리니 산이 무너져서 골짜기를 메웠다.
무오년 50년(B.C.723)에 단제께서 장군 언파불합(彦波弗哈 <일본서기>에는 ‘언파렴무노초즙불합존’으로 되어있다(임승국 각주))을 보내 해상(海上)의 웅습(熊襲 고대에 구주(九州) 웅본(熊本)에 있던 나라(임승국 각주))을 평정하였다.
갑술년 66년(B.C.707)에 단제께서 조을(租乙)을 파견하여 똑바로 연(燕)나라 도읍을 돌파하고 제(齊)나라 군사와 임치(臨淄)의 남쪽 교외에서 싸워 승리하였음을 알려왔다.
병자년 68년(B.C.705)에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매륵(買勒)이 즉위했다.
[논주] 무오년 50년(B.C.723)에 장군 언파불합을 보내 구주의 나라 웅습을 평정했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에 있으므로 [단군세기]는 단군조선의 정사이다.
三十六世 檀君 賣勒 在位五十八年
丁丑元年
甲辰二十八年 有地震海溢
戊申三十二年 西村民家牛 生八足犢
辛亥三十五年 龍馬出於天河 背有星文
甲寅三十八年 遣陜野侯裵幋命 往討海上 十二月 三道悉平
戊辰五十二年 帝遣兵 與須臾兵 伐燕 燕人告急於齊 齊人大擧入孤竹 遇我伏兵 戰不利 乞和而去
甲戌五十八年 帝崩 太子麻勿立
36세 단군 매륵 재위 58년
정축년 원년(B.C.704)
갑진년 28년(B.C.677)에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무진년 32년(B.C.673)에 서촌(西村)의 한 백성의 집에서 소가 다리 여덟 개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신해년 35년(B.C.670)에 용마(龍馬)가 천하(天河)에서 나왔는데 등에는 별무늬가 있었다.
갑인년 38년(B.C.667),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을 보내어 바다의 도적을 토벌케 하였다. 12월엔 삼도(三島)가 모두 평정되었다.
무진년 52년(B.C.653)에 단제께서 병력을 보내 수유(須臾)의 군대와 함께 연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연나라가 제나라에 위급함을 알리자 제나라가 대거 일어나 고죽(孤竹)에 쳐들어 왔으나, 우리의 복병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구걸하고는 물러갔다.
갑술년 58년(B.C.647)에 단제 붕어하시니 태자 마물(麻勿)이 즉위했다.
[논주] 임승국의 『한단고기』의 각주는 다음과 같다.
(1) 협야후(陜野侯) 배반명(裴幋命) : <일본서기> 신무천황기에는 협야존(狹野尊) 일면 신무천황이라 적혀있다.
(2) 삼도(三島) 평정 : <마한세가 상>에는「갑인년에 협야후에게 명하여 전선 500척을 이끌고 가서 해도(海島)를 쳐서 왜인의 반란을 평정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협야후 배반명을 보내 해도, 왜 열도 구주를 친 까닭은 왜인
들이 해적질을 하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왜구가 이미
이때부터 날뛴 것을 알 수 있다. 이때의 왜구는 대륙에서 동이
족이 도해하기 전이므로 선주민인 죠몬인들이다.
三十七世 檀君 麻勿 在位五十六年
乙亥元年
庚午五十六年 帝南巡至淇水崩 太子多勿立
37세 단군 마물 재위 56년
을해년 원년(B.C.646).
경오년 56년(B.C.591)에 단제께서 남쪽을 돌아보시다가 기수(淇水 중국 허난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를 서남으로 흐르는 강)에 이르러 붕어하시니 태자 다물(多勿)이 즉위하였다.
[논주] 이 당시 단군조선의 경계가 하남성까지 이르렀다. 중국 동북부 지역 산동성-하남성-하북성 전체가 동이족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
三十八世 檀君 多勿 在位四十五年
辛未元年
乙卯四十五年 帝崩 太子豆忽立
38세 단군 다물 재위 45년
신미년 원년(B.C.590).
을묘년 45년(B.C.546)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두홀(豆忽)이 즉위하였다.
三十九世 檀君 豆忽 在位三十六年
丙辰元年
辛卯三十六年 帝崩 太子達音立
39세 단군 두흘 재위 36년
병진년 원년(B.C.545).
신묘년 36년(B.C.510)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달음(達音)이 즉위하였다.
四十世 檀君 達音 在位十八年
壬辰元年
己酉十八年 帝崩 太子音次立
40세 단군 달음 재위 18년
임진년 원년(B.C.509).
기유년 18년(B.C.492)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음차(音次)가 즉위하였다
四十一世 檀君 音次 在位二十年
庚戌元年
己巳二十年 帝崩 太子乙于支立
41세 단군 재위 25년
경술년 원년(B.C.491).
기사년 20년(B.C.472)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을우지(乙于支)가 즉위하였다
四十二世 檀君 乙于支 在位十年
庚午元年
己卯十年 帝崩 太子勿理立
42세 단군 을우지 재위 10년
경오년 원년(B.C.471).
기묘년 10년(B.C.462)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물리(勿里)가 즉위하였다.
四十三世 檀君 勿理 在位三十六年
庚辰元年
乙卯三十六年 隆安獵戶于和沖 自稱將軍 聚衆數萬 陷西北三十六郡 帝遣兵不克 冬 賊圍都城急攻 帝與左右宮人 奉廟社主 浮舟而下 之海頭 尋崩 是歲 白民城褥薩丘勿 以命起兵 先據藏唐京 九地師從之 東西鴨綠十八城 皆遣兵來援
43세 단군 물리 재위 36년
경진년 원년(B.C.461).
을묘년 36년(B.C.426)에 융안의 사냥족 우두머리 우화충이 장군을 자칭하며, 무리 수만 명을 모아 서북쪽 36군을 함락시켰다. 단제는 병력을 파견했으나 물리치지 못했으며, 겨울이 되자 도적들이 도성을 에워싸고 급하게 공격했다. 단제께서는 좌우의 궁인과 함께 종묘사직의 신주들을 받들어 모시고는 배를 타고 피난하여 해두(海頭)로 가시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이 해에 백민성의 욕살 구물(丘勿)이 어명을 받아 병사를 일으
켜 먼저 장당경(藏唐京)을 점령하였다. 이에 구지(九地)의 군사
들이 그를 따르니 압록강의 동과 서의 18성이 모두 병력을 보
내와서 도왔다.
[논주] 경오년 56년(B.C.591) 37세 단군 마물부터 기묘년 10년(B.C.462) 42세 을우지 단군까지 6대 139년 동안 영 기사가 없더니 기어코 을묘년 36년(B.C.426) 43세 단군 물리 때 결국 우화충의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기사가 없다는 것은 그만큼 쇠약해졌기 때문이다. 사냥꾼의 우두머리로 지도력과 전투력을 겸비한 새로운 인물 우화충이 승리하여 단군이 되었다면 단군조선이 새롭게 출발했을 것이다. 색불루 단군 후손들의 치세는 187년으로 매우 짧았다. 왕조의 운명은 대를 잇는 왕들의 자질에 달렸다. 씨가 좋아야 후손들이 좋듯이 왕의 씨가 건실해야 왕조의 운명이 길다. 우화충이 단군이 됐으면 더 오래갔을 지도 모른다. 난세를 맞아 쟁투한 여러 영웅들 중에서 구물이 승리하여 단군 자리에 올랐다.
22세 색불루 단군부터 43세 물리 단군까지(B.C.1285~B.C.426) 860년간을 백악산 아사달(農安, 長春)시대라 한다. 초대 단군왕검부터 21세 소태 단군까지 1048년 동안 지나면서 쇠미해진 단군조선이 새로운 인물 색불루가 22세 단군이 되면서 다시 활력을 되찾아 860년간 유지됐다. 합해서 1908년간이 된다.
일연의 『삼국유사』 [고조선]은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해 산신이 된 단군의 수가 1908년이라고 한다. 즉 단군조선이 B.C. 425년에 끝났다고 보고 단군조선의 기간을 1908년으로 한다. 일연은 구물 단군과 이후 187년은 앞의 단군들과는 계통이 다르기 때문에 단군조선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연은 B.C. 425년 해모수 단군부터 B.C. 108년 위만조선이 망할 때까지의 317년 동안의 역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생긴다. 일연은 이 기간에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을 유독 강조한다. 북부여와 동명국, 동부여, 졸본부여, 고구려가 대를 이으며 살아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누락시켰다. 수많은 단군조선의 유민들이 여러 갈래로 한반도로 남하하여 곳곳에 나라를 세운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때 어떤 작심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사관들은 이 기간을 단군조선에 포함시켜서 사서를 썼다. 그것을 홍행촌수 이암이 정리, 정서하여 찬한 책이 [단군세기]이다. 후세학자들도 그렇게 보고 47세 단군 고열가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단군조선은 2095년이다.
해모수는 단군조선을 잇지 않고 나라 이름을 북부여로 바꾸고 1세 단군이 되었다. 또한 군사를 일으켜 동명국을 세웠다가 북부여를 접수한 고두막은 북부여의 5세 단군이 됨으로써 북부여를 승계했음을 천하에 공표했다. 북부여 6세 단군 고무서가 후사 없이 죽으며 사위인 고주몽에게 단군 자리를 잇도록 했다. 고주몽이 북부여 단군 승계를 인정했다면 7세 단군이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주몽은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워 시조왕이 되었다. 그러므로 해모수와 고주몽은 단군조선 계통이 아니다.
그러므로 단군조선과 북부여, 고구려는 나라 이름이 다르므로 다른 나라이다. 오히려 단군조선-북부여의 정통성을 잇은 왕조는 동부여-가섭원부여이다. 이 부여국의 귀족들과 유민들은 북부와 동부로 흩어졌지만 나라를 재건하여 이후에도 오래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동남만주의 동부여는 410년에, 만주 북부의 북부여는 494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또한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의 외손이지만 박혁거세가 단군조선 유민들과 함께 세운 진국-사로-신라가 단군조선-북부여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
四十四世 檀君 丘勿 在位二十九年
丙辰元年三月 大水浸都城 賊大亂 丘勿率兵一萬 往討之賊不戰自潰 遂斬于和沖 於是丘勿爲諸將所推 乃於三月十六日 築壇祭天 遂卽位于藏唐京 改國號爲大夫餘 改三韓爲三朝鮮 自是 三朝鮮雖奉檀君 爲一尊臨理之制 而惟和戰之權 不在一尊也 七月 命改築海城 爲平壤 作離宮
丁巳二年 禮官請行三神迎鼓祭 乃三月十六日也 帝親幸敬拜 初拜三叩 再拜六叩 三拜九叩 禮也 從衆特爲十叩 是爲三六大禮也
壬申十七年 遣監察官于州郡 糾察吏民 擧孝廉
戊寅二十三年 燕遣使賀正
甲申二十九年 帝崩 太子余婁立
44세 단군 구물 재위 29년
병진년 원년(B.C.425) 3월에 큰물이 도성을 휩쓸어 버리니 역적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구물이 1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이들을 토벌하니 역적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괴멸하였다. 드디어 우화충을 잡아 참수하였다. 이리하여 구물이 모든 장수들의 추대를 받게 되었고, 이에 3월 16일에 단을 쌓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장당경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이름을 바꾸어 대부여라 부르고 삼한(三韓)을 바꾸어 삼조선(三朝鮮)으로 하였다. 이때부터 삼조선은 비록 단군 한 분을 받들어 모시고 정치를 하는 제도이기는 하지만 평화와 전쟁의 권한에 있어서는 오로지 단군 한 분에게만 맡겨두지는 않게 되었다. 7월에는 해성(海城)을 개축하여 평양(平壤)이라 부르도록 하시고, 이궁을 짓도록 하였다.
정사년 2년(B.C.424)에 예관이 청하여 삼신영고(三神迎鼓)의
제사를 지냈다. 곧 3월 16일이었는데 단제께서 친히 행차하시
어 경배하시니 첫 번째 절에 세 번 머리 조아리고, 두 번째
절에 여섯 번 머리를 조아리고, 세 번째 절에 아홉 번 머리
를 숙여 예를 올리는데, 무리를 거느리고는 특별히 열 번 머
리를 조아렸다. 이를 삼육(三六)의 대례(大禮)라고 한다.
임신년 17년(B.C.409)에 감찰관을 각 주와 군에 파견하여 백성들을 살펴보아 효도를 잘하는 자와 청렴결백한 관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무인년 23년(B.C.403)에 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새해 문안 인사를 올렸다.
갑신년 29년(B.C.397)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여루(余婁)가 즉위하였다.
[논주] ‘改國號爲大夫餘 改三韓爲三朝鮮 自是 三朝鮮雖奉檀君 爲一尊臨理之制 而惟和戰之權 不在一尊也’은 이전의 단군조선과 확연히 다른 나라 이름과 체제이다. 이전은 단군이 삼한을 간접 통치하는 형태였으나, 여러 장수의 추대를 받아 단군이 된 구물은 이전의 단군들처럼 강력한 권한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시대와 인구가 변화하면서 동북아 전체가 한 단군의 능력으로 통치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복잡해졌다. 특히 서쪽으로부터 가해지는 정치적, 군사적 압력이 꾸준히 작용했다. 이에 따라 인물과 지역을 중심으로 독립하려는 흐름이 발생했다. 북부여 구물 단군 때부터 동이족 영역 전체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충격에 따른 변화가 크게 한바탕 요동을 치고 난 후인 기원 전후에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세워져서 수세기 동안 병립한다.
四十五世 檀君 余婁 在位五十五年
乙酉元年 築城長嶺狼山
辛丑十七年 燕人侵邊郡 守將苗長春擊敗之
丙辰三十二年 燕人倍道入寇 陷遼西逼雲障番朝鮮 命上將于文言 禦之 眞莫二朝鮮 赤派兵來救 設伏來攻 破燕齊之兵於五道河 遼西諸城悉復
丁巳三十三年 燕人敗 屯連雲島造船將來襲 于文言追擊大破 射殺其將
辛未四十七年 北漠酋長厄尼車吉 來朝獻馬二百匹 請共伐燕 乃以番朝鮮少將申不私 率兵一萬 合攻燕上谷拔之置城邑
戊寅五十四年 自上谷役後 燕連年來侵 至是遣使請和 許之復以造陽以西爲界
己卯五十五年 夏大旱 慮有冤獄大赦 親幸祈雨 九月 帝崩 太子普乙立
45세 단군 여루 재위 55년
을유년 원년(B.C.396)에 장령의 낭산에 성을 쌓았다.
신축년 17년(B.C.380)에 연나라 사람이 변두리 군을 침범하니 수비 장수 묘장춘이 이를 쳐부수었다.
병진년 32년(B.C.365)에 연나라 사람 배도가 쳐들어와서 요서를 함
락시키고 운장에 육박해 왔다. 이에 번(番)조선이 대장군 우문언에
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하고 진(眞)조선. 막(莫)조선도 역시 군대를
보내어 이를 구원하여 오더니, 복병을 숨겨 고 공격하여 연나라. 제나
라의 군사를 오도하에서 쳐부수고는 요서의 여러 성을 모두 되
찾았다.
정사년 33년(B.C.364)에 연나라 사람이 싸움에 지고는 연운도에 주둔하여 배를 만들고 장차 쳐들어올 기세였으므로 우문언이 추격하여 쳐부수고 그 장수를 쏘아 죽였다.
신미년 47년(B.C.350)에 북막의 추장 액니거길이 조정에 찾아와서 말 200필을 바치고 함께 연나라를 칠 것을 청했다. 마침내 번조선의 젊은 장수 신불사로 하여금 병력 만 명을 이끌고 합세하여 연나라의 상곡을 공격하여 빼앗고, 성읍을 쌓게 하였다.
무인년 54년(B.C.343)에 상곡의 싸움 이후 연나라가 해마다 침범해오더니 이때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이에 조양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
기묘년 55년(B.C.342) 여름에 크게 가물었다. 죄없이 옥에 갇힌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여 크게 사면하고 몸소 나아가서 기우제를 올렸다. 9월에 단제께서 붕어하시고 태자 보을(普乙)이 즉위하였다.
四十六世 檀君 普乙 在位四十六年
庚辰元年十二月 番朝鮮王解仁 爲燕所遣刺客所害 五加爭立
戊戌十九年正月 邑借箕詡 以兵入宮 自以番朝鮮王 遣人請允 帝許之使堅備燕
丁巳三十八年 都城大火盡燒 避御于海城離宮
癸亥四十四年 北漠酋長尼舍 獻樂乃受而厚賞
乙丑四十六年 韓介率須臾兵 犯闕自立 上將高列加起義擊破之 帝還都大赦 自此國勢甚微 國用不敷 尋帝崩無嗣 高列加以檀君勿理之玄孫 爲衆愛戴 且有功遂卽位
46세 단군 보을 재위 46년
경진년 원년(B.C.341) 12월에 번조선 왕 해인(解仁)이 연나라가 보낸 자객에게 시해당하니 오가(五加)가 다투어 일어났다.
무술년 19년(B.C.323) 정월에 읍차 기후(箕詡)가 병력을 이
끌고 입궁하여 자칭하여 번조선 왕이라 하고 사람을 보내 윤
허를 구하니 이를 허락하시고 굳게 연나라에 대비토록 하였
다.
정사년 38년(B.C.304)에 도성에 큰불이 일어나 모두 타버리니 단제께서는 해성의 이궁으로 피난하였다.
계해년 44년(B.C.298)에 북막의 추장 이사가 음악을 바치니 이를 받으시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
을축년 46년(B.C.296)에 한개가 수유의 군대를 이끌고 궁궐을 침범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하니 대장군 고열가(高列加)가 의병을 일으켜 이를 쳐부수었다. 단제께서는 대사령을 내리셨는데 이때부터 나라의 힘이 매우 약해져서 나라의 비용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단제께서 붕어하셨는데 후사가 없어, 고열가가 43세 단군 물리(勿里)의 현손으로써 무리의 믿음으로 추대받기도 하였고 또 공도 있었던지라 마침내 즉위하였다.
四十七世 檀君 古列加 在位五十八年
丙寅元年
己卯十四年 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 令有司四時祭之 帝歲一親祭
己酉四十四年 燕遣使賀正
癸丑四十八年十月朔 日蝕 是歲冬北漠酋長阿里當夫 請出師伐燕 帝不從 自是怨不朝貢
壬戌五十七年四月八日 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 其先槀離國人也
癸亥五十八年 帝仁柔不斷 令多不行 諸將恃勇 禍亂頻起 國用不敷 民氣益哀 三月祭天之夕 乃與五加議曰 昔 我列聖 肇極垂統 種德宏遠 永世爲法 今 王道哀微 諸汗爭强 惟朕涼德 懦不能理 無策招撫 百姓離散 惟爾五加 擇賢以薦 大開獄門 放還死囚以下諸俘虜 翌日遂棄位入山 修道登仙 於是 五加共治國事六年
先是 宗室大解慕漱 密與須臾約 襲據故都白岳山 稱爲天王郞 四境之內 皆爲聽命 於是 封諸將 陞須臾侯箕丕 爲番朝鮮王 往守上下雲障 蓋北夫餘之興 始此 而高句麗 乃解慕漱之生鄕也 故亦稱高句麗也
47세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
병인년 원년(B.C.295).
기묘년 14년(B.C.282)에 단군왕검의 묘(廟)를 백악산(白岳山 장춘)에 세우고 유사에게 명을 내려 사철 이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단제께서는 1년에 한 번 친히 제사를 지냈다.
기유년 44년(B.C.252)에 연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새해 인사를 올려왔다.
계축년 48년(B.C.248) 시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이해 겨울 북막의 추장 아리당부가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정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단제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이때부터 원망하여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임술년 57년(B.C.239) 4월 8일에 해모수(解慕漱)가 웅심산(熊心山)을 내려와 군대를 일으켰는데, 그의 선조는 고리국(藁離國) 사람이었다.
계해년 58년(B.C.238)에 단제께서는 어질고 순하기만 하고 결
단력이 없으니, 명령을 내려도 시행되지 않는 일이 많았고 여러
장수들은 용맹만을 믿고 쉽사리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나라의 살림
은 시행되지 않고 백성의 사기는 날로 떨어졌다. 3월, 천제를 지내던
날 저녁에 마침내 오가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옛 우리 선조 열
성(列聖)들께서는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 가실 때에는 그 덕
이 넓고 멀리까지 미쳤으며, 오랜 세월 동안 잘 다스려졌거늘
이제 왕도는 쇠미하고 여러 왕들이 힘을 다투고 있도다. 짐은
덕이 없고 겁이 많아 능히 다스리지 못하니 어진 이를 불러서
무마시킬 방책도 없고 백성들도 흩어지니, 생각건대 그대들 오가는
어질고 좋은 사람을 찾아 추대하도록 하라”고 하시고 크게 옥문
을 열어 사형수 이하의 모든 죄수를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이튿날
마침내 왕위를 버리시고 입산수도하시어 신선이 되시니, 이에 오가
(五加)들이 나라 일을 함께 다스리기를 6년이나 계속하였다.
이보다 앞서 종실의 대해모수(大解慕漱)는 몰래 수유와 약속
하고 옛 서울 백악산을 습격하여 점령하고는 천왕랑이라 칭했
다. 수유후(須臾侯) 기비(箕丕)를 권하여 번조선왕으로 삼고
, 나아가 상하 운장을 지키게 하였다.
대저 북부여의 일어남이 이렇게 시작되어 이어서 고구려인데, 해모수가 태어난 고향이기 때문이고 고구려라 불렀다.
[논주] ‘蓋北夫餘之興 始此 而高句麗 乃解慕漱之生鄕也 故亦
稱高句麗也’를 잘 읽어야 한다. 이 말은 북부여가 이렇게 일어
났고, 고주몽이 북부여를 이어서 고구려를 세웠다는 말이다. 즉
고구려는 해모수의 고향으로 북부여가 곧 고구려란 말이다. 그
런데 [단군세기]는 이렇게 말하고 있으나 후세의 『삼국사기』는
북부여 왕조와 고구려 왕조를 별개로 취급하여 고주몽을 고구
려 시조왕으로 정리해 놓았다. 그러나 400년대 초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에는 고주몽이 북부여 7세로 새겨져 있다. 또한
고구려가 북부여에서 나왔다고 분명히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고주몽은 북부여-고구려 7세 단군이다. 그런데 고주몽은 실제
로는 북부여 단군을 찬탈한 동명국 고두막의 손녀사위이다. 그
러므로 해모수와 무관하다. 그런데도 해모수의 북부여를 이어
7세라 하고, 해모수의 고향을 이름으로 한 고구려를 세운 것은
정통이 아니다. 고구려라는 국명은 초기의 국명이 아니라 후세
에 만들었을 것이다.
정리하면, 고구려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동부여로 내쫓고
단군 자리를 이어받은 동명국왕 고두막 단군의 후손인 북부여
6세 단군 고무서의 공주인 소서노의 남편인 고주몽이 만주에
세운 나라이고, 진한-신라는 고두막에게 쫓긴 북부여 4세 단군
고우루의 공주 파소의 아들 박혁거세가 진한의 유민들과 함께
한반도 동남부에 세운 나라이다. 해모수와 고두막으로 양국은
서로 계통이 다르다.
김부식이 단군조선과 북부여를 없애면서 고주몽을 고구려 시
조왕으로 조작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배워서 알고 있는
삼국사는 김부식과 일연이 사대주의 사관을 갖고 의도적으로
조작한 역사인 것이다. 참으로 무서운 역사 조작질이다.
自 檀君紀元 元年戊辰
至 今上踐祚後十二年癸卯 凡三千六百十六年也
是歲十月三日 紅杏村臾 書 于江都之海雲堂
단군기원 원년 무진부터 금상폐하(今上陛下)의 천조(踐祚) 후 12년 계묘(B.C.1363)에 이르기까지 약 3,696년이라. 이해 10월 3일 흥행촌의 늙은이가 강화도의 해운당에서 쓰다.
[논주] 이로써 [단군세기] 논주를 마친다. 한편의 생명력 넘치는 거대한 서사시와 같은 단군조선의 역사이다. 이 역사에 누가 무슨 말을 어떻게 보탤 것인가. 지금까지 읽은 『환단고기』의 여러 편 글 중에서 안함로 찬 [삼성기전 상편]과 이암 찬 [단군세기] 두 편은 역사에서 이름이 확실한 인물이 썼기 때문에 사실성과 합리성이 여실하다. 그러나 [삼성기전 하편]을 쓴 원동중은 역사에서 불명확한 인물이기 때문에 수록된 내용 역시 사실성과 합리성이 불명확하다. 앞으로 『환단고기』의 읽을 글 중에서도 옥석이 섞여 있을 것이다.
이암과 원동중에 대비되는 인물이 김부식과 일연 김견명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사로국 시조왕 박혁거세 이전의 고대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부식 그도 단군왕검과 단군조선의 역사가 적힌 고사서를 읽었다. 『삼국사기』에 “平壤者, 夲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이란 한 줄 기록은 본서 중에서 단군왕검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예이다.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서기 247년 02월 )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평양성을 쌓고 종묘와 사직을 옮기다
동천왕 21년(247) 봄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어 다시 도읍으로 삼을 수 없다고 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옮겼다.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王儉)의 땅이다. 다른 기록에는 “왕이 되어 왕험(王險)에 도읍하였다”라고 하였다.」
“夲 仙人王儉之宅也”는 “본래 선인인 단군왕검의 땅이었다”이고, “或云, 王之都王險.”는 “혹자가 말하는 위만이 왕이 되어 도읍한 왕검성”이다. 김부식은 같은 왕검성에 도읍을 한 단군왕검과 위만을 구분하고 있다. 단군조선사를 알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김부식이 왜 삼국사 이전의 고대사를 의도적으로 제외했을까 하는 의문이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 어명이 『삼국사기』 편찬이기 때문에 역사 서술의 시간과 공간을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로 한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사에 대한 뜻만 있다면 『삼국유사』처럼 앞부분에 간략하게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부식은 이 기사에서 ‘평양성(平壤城)’에 관한 결정적인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동천왕의 이 기사는 서기 247년이다. 단군왕검은 기원전 2334년이고, 위만조선은 기원전 194년이다. 김부식의 기사는 단군왕검과 위만, 동천왕 등 세 왕이 모두 평양성에 도읍했다고 한다. 『삼국유사』와 똑같은 구조의 서술로서 김부식과 일연은 단군조선-위만조선-낙랑군의 도읍지가 왕검성-평양성이라는 등식을 조리 있게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서기 247년 고구려 동천왕 21년 때에는 평양성에 낙랑군이 실재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낙랑군은 기원전 28년부터 서기 32년 낙랑국 정벌을 거쳐 낙랑군 시대인 313년까지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247년은 고구려-낙랑 전쟁의 극성기였다. 그런데 어떻게 단군왕검과 위만, 낙랑의 도읍지인 평양성에 도읍지를 옮길 수 있는가. 전혀 이치와 사실에 맞지 않는다.
또한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조선을 개국하여 도읍지로 삼은 곳은 아사달이다. 일연이 환웅이 강림한 곳인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처음으로 찍어 말하고, 아사달을 평양이라고 하며 단군왕검이 산신이 된 산을 황해도 구월산으로 만들었다. 단군왕검이 평양에 도읍했다고 만들었으므로 기자조선도 평양에 있었고, 기자조선을 훔친 위만조선도 평양에 있게 된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무제가 설치한 한사군 중 낙랑군은 당연히 평양에 있게 된다.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했다면 고구려와 부여, 대진국 발해 등 북쪽 나라들이 만주에 세워질 수 없다. 또한 백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남한에 세워질 수 없다. 위만이 망명해와 세력을 키운 곳이 상하운장이란 곳이다. 그 상하운장이 요동 동쪽 압록강 하류 지역이란 것인가? 그러나 [북부여사]와 중국의 고사서들은 ‘상하운장’의 서쪽 경계에는 진나라 당시 변방 초소인 요동외요가 있었는데 이후 물러나 요동고새 (遼東故塞 산해관)까지였다고 한다. ‘왕검성’은 패수의 동쪽에 있었는데 이 패수는 대동강이 아니라 대능하(大凌河) 이며, 왕검성은 대청일통지(大靑一統志)에 광녕현(廣寧縣) 동남에 있다고 한다.
‘왕검성’은 오늘날의 ‘서울’처럼 도읍지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이다. 그러므로 단군왕검, 위만, 동천왕 시대에 따라 왕검성이 다른 곳이다. 마찬가지로 ‘평양(平壤)’이란 지명도 ‘넓고 평평한 땅’이라는 뜻 그대로 여러 곳일 수 있다. ‘왕검성’과 ‘평양’이란 말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이다. 그런데도 김부식은 동천왕 기사를 이용하고, 일연 김견명은 [고조선기]를 이용하여 ‘왕검성’=‘평양’이라 하며 한반도 서북부 한 곳의 고유지명으로 찍는 조작질을 범했다. 어떻게 하든지 고대사를 비틀고 잘라 우리 민족을 왜소하고 비천하게 만들어 버리려는 간계를 부렸다.
그러나 동천왕 21년 기사에 “平壤者, 夲 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를 넣은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을 대못 박으려 하다가 손등을 찍고 말았다.
반드시 써야 할 글이라면, 올바른 선비는 자기 이름을 감추거나 비틀지 않는다. 올바른 선비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은 왕 앞에서도 감추거나 비틀지 않는다. 그러한 올바른 선비의 기상을 안함로와 이암이라는 이름으로 쓰여진 두 편의 글에서 보고 느낄 수 있다. [삼성기전 상편]과 [단군세기]로서 우리 민족은 잃어버린 고대사 환인-환웅-단군조선 시대의 모습을 환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삼성기전 상편]과 [단군세기]에 쓸데없이 가필하여 허탄한 소설로 만들어 본래의 글들을 훼방하는 자들이 있다. 옥석을 가려내는 후인들의 안목에 의하여 그런 자들은 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단군조선사를 개관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써서 남겨준 홍행촌수 이암 선생께 고개숙여 감사드린다.
2026년 4월 11일 안동 열락연재에서
개산팔경 박 희 용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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