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웃음소리]
지난밤은 꽤나 흥겨웠다. K는 친한 동기들과 찾은 작은 클럽에서 꽤나 맘에 드는 남자들과 합석을 했고 아침 첫 차가 올 때까지 잔을 끊임없이 부딪쳤다. 그들은 외모, 옷차림, 말투 모두 훌륭했고 K와 친구들은 오랜만에 즐거운 밤을 보냈다. K는 마지막잔을 부딪히고 가게를 나서며 건네받은 몇 장의 명함을 가방 가장 구석에 잘 넣어둔 채 강남에서 출발하는 신분당선 첫차에 올랐다. 첫차에 오르는 이들 대부분 술과 담배냄새를 진한 향수냄새로 가리려 애를 썼지만 그다지 소용없었다.
K가 탄 열차 안에는 5명이 있었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저마다의 거리를 띄워 앉았다. K의 눈은 자연스레 열차안의 사람들을 하나 둘 살펴보기 시작했다. K를 포함한 여자 셋과 남자 두명. 그중 한명의 남자는 K의 오른쪽 사선 끝 좌석에 앉았는데, 열차가 출발하자마자 쓰러지듯 기대앉아 연신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분명 지난밤의 합석의 실패로 쓴 술잔을 수도 없이 넘겼으리라.
K의 사선으로 열차 왼쪽의 가장 끝 안전 바에 기대어 앉은 남자는 무채색 양복을 입고 머리가 이리 저리 뻗쳐있었다. 아마도 밤샘 야근을 한 채 사우나에 들리지도 못하고 퇴근을 하는 모양이었다. 삐뚤어진 넥타이와 앞코가 닳은 그의 구두가 여느 힘든 회사원을 대변해 주고 있는 듯해 보였다. 그는 집에 돌아가 가방과 양복 자켓을 벗은 채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들고 말 것이다. 안쓰러움을 가득담은 눈으로 그를 보던 K는 움찔거리는 그의 어깨에 놀라 시선을 재빠르게 돌렸다.
열차중앙의 자리에 앉은 두명의 여자는 끊임없이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고 화장을 수정했다. 그녀들의 향수냄새는 몇 정거장을 채 지나기도 전에 이미 열차 가득히 퍼져있었는데 간밤의 술과 담배냄새를 지우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도 꽤나 앳된 얼굴로 서울에서 학교 다니는 대학생인 듯 했다. 그녀들은 아마도 집으로 돌아가 출근하는 아버지의 눈총과 북엇국을 끓여주시는 어머니의 엄청난 잔소리를 마주해야겠지. K는 독립하기전의 자신의 모습이 눈에 선한 듯 그녀들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었다.
양재역에서 K의 오른쪽으로 몇 칸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꽤나 멋을 부린 남자가 한명 앉았다. 그가 앞을 지나갈 때 살짝 코끝을 스친 버버리향수 냄새로 K는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꽤나 밝은 색의 슈트에 화려한 양말과 하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머리는 꽤나 공들여 가르마를 나눈듯해 보였고 귓가엔 반짝이는 이어폰을 낀 채 흥얼거리고 있었다. K는 그의 백팩 앞쪽에 달린 사원증을 얼핏 볼 수 있었는데 판교의 꽤나 이름 있는 IT기업의 회사원인 듯 했다. 속으로 역시나 생각을 하면서도 이렇게 이른시간에 완벽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의 멋짐에 대한 욕구가 아침잠과 게으름을 완벽하게 KO시킨것에 K는 감탄 할 수 밖에 없었다.
옆자리 앉은 남자를 살펴보는 동안 한정거장을 더 지나쳤는지 K의 맞은편에는 남자 한명이 앉아 있었다. 꽤나 어려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한때 유행했던 흰색 세줄이 들어간 검정색 운동복바지에 사람한명은 더 들어갈 여유가 있어 보이는 커다란 후드티를 입고 까치집을 한 머리위로 헤드셋을 쓰고 있었다. 그 헤드셋도 보통물건은 아닌 것이 K의 주먹만한 크기로 귀 양쪽을 덮고 있었다. 그는 이어폰을 꽤나 큰 사이즈의 먹다가 만 사과가 그려진 탭에 꽂고 있었는데, 시선이 탭 밖으로 벗어나질 않았다. K는 지난밤의 잔을 부딪혔던 남자보다 그에게 더 많은 궁금증이 느껴졌다. 그의 표정은 계속 바뀌었는데, 미간을 찡그린 채 눈썹을 움찔거리기도 하고 입술을 갑자기 앙하고 깨물더니 코를 찡긋찡긋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입고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결국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은편 남자의 웃음소리에 선잠을 자던 이가 깨어나 웃음소리의 근원지를 찾다가 이내 다시 잠들기를 몇 번을 반복했다. 판교역에 멈춰선 열차에서 오른쪽 남자가 내리고 괘나 많은 사람이 열차에 올라타면서 많은 좌석을 채우고 다시 열차는 조용해 졌다. K의 맞은편 남자는 웃음을 참다가도 결국 조그마하게 킥킥 소리를 내며 연신 웃었는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저 남자를 웃게 하는지 K는 너무도 궁금했다. 몇 정거장을 지나면 내릴 때가 되어서 더 궁금하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K는 그가 제발 자신과 같은 역에서 내리기를 조그맣게 기도했다. 오랜만의 강남 나들이가 이리도 흥미진진 해질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K의 기분은 너무도 들떠 있었다. 미금역을 지나자 남자가 일어섰고 K는 따라 일어섰다. K는 다음역이 아닌 다다음 역에 내리지만 그를 따라 내릴 문 옆으로가 살짝 그의 뒤에 섰다. 열차문에 비치는 그의 시선이 탭에 꽂힌 것을 보고 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탭으로 시선을 돌렸다.
K는 그의 탭 화면에서 흔한 인터넷 뉴스들을 마주쳤다. 뉴스가 그렇게 웃긴 걸까 생각하던 찰나에 희미하게 그의 헤드셋 사이로 새어나오던 소리가 끊겼다. 그는 이리저리 화면을 만지더니 팟캐스트 어플의 목록을 옮기기 시작했다. 리스트의 대부분이 [사소한 이야기_카페너머] 였는데 K는 폰을 꺼내들고선 자신의 팟캐스트 목록에 추가했다. 어느새 동천역에서 문이 열리자 그는 내렸고 K는 그제서야 자신의 이어폰을 꺼내들어 팟캐스트를 들었다. K는 한정거장을 더 가서 지하철을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웃음을 참을수 없었고 K의 웃음소리는 K가 잠들기 전까지 끊이지 않았다.
3주차글쓰기) 20대 청년이 이어폰을 낀 채 크게 웃고 있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