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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0장 1-6절. 육적으로는 약하나 영적으로는 강함. 요약설교
10장 1-11절은 대적자들이 바울을 비난하는 말에 대한 해명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바울이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해명합니다.
1-6절. 비겁하다는 말에 대한 해명
7-11절. 외모와 말이 시원치 않다는 말에 대한 해명
오늘은 “바울이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말에 대한 해명의 말씀입니다.
1절.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1. 원문에 ‘이제는’(δὲ: now)이라고 시작한 것은 앞에서와는 달리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에게 엄한 권위로써 말하고, 그들이 즉시 회개하지 않으면 영적인 권능으로 처벌하겠다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새로운 장면을 시작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Benson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로서의 바울의 권위와 주장을 멸시해온 사람들이 있었었습니다.
즉 앞부분(1-9장)에서는 고린도 교회에서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고 바울의 지시에 순종했던 성도들에게 교훈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10장부터 13장까지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the false teachers)에 대한 엄중한 말씀입니다.
2.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1) 원문에는 <나 바울>이란 표현이 문장 맨 앞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나 바울>이란 말이 강조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신의 이름을 언급하여 말을 시작하는 경우는 두 군데뿐인데, 이곳에서는 바울의 강하고 확신에 찬 말을 하면서 표현한 것입니다.
즉 갈라디아서 5장 2절에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을 시작하면서, 바울 자신을 공격하는 말들에 대해서 변론하려는 강력하고 결의에 찬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도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말(고후 10:10)을 듣고, 마음이 불편해서 10장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2) ‘대면하면 유순하다’란 말씀은 바울이 직접 몸으로 대할 때는 겸손하고, 온화하고, 신사적인(humble, mild, gentle) 모습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소심하고, 두려워서 훈계를 못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진 것을 가리킵니다.
즉, 고린도 교회 안의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은 바울을 ‘두려워서 처벌을 못하고 소심한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바울은 겸손하고 주제 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은 이것을 소심하고, 정신이 좀 모자란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유순함’(ταπεινὸς)이란 단어는 보통 ‘낮고, 초라하고, 가난한’( low, humble, poor) 모습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담대함의 반대인 ‘소심하고, 얌전한’(timid, modest, the opposite of boldness )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적절한 영어는 ‘비천함’(base)에 해당하고. 이것은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It was applied to those of low degree or rank)
‘떠나 있으면 담대하다’는 말은 10장 10절에서 말한 대로 바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대면해서 만날 때는 아주 유순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Barnes
(3) 본 절에서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있으면 담대하다>는 말은 바울이 자신을 직접 표현한 말이 아니라,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에 대해서 비난하는 말을 비꼬는 투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바울은 멀리 떨어져 있어 편지를 쓸 때는 담대하고 강한 어조로 말하지만, 막상 얼굴을 대하고 있을 때는 비굴하고 우유부단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 대적자들의 말을 인용하기를 “그들의 말이 바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바울이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치 않다”고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이전에 고린도전서 2장 3절에서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고 했습니다.
(4) 그렇습니다. 바울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는 사자같이 담대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을 직접 몸으로 방문하고 심방할 때는 인자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같은 바울의 모습을 보고, 바울을 비난하는 대적자들은 바울이 이중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바울의 모습은 올바른 목회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때는 사자같이 담대하게 전하고, 약하고 시험 든 신자들을 심방할 때는 불쌍히 여기고 복 주시기를 기도하는 유순한 모습이 올바른 목회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부드러운 말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병들고 시험 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성도를 심방하면서 강력하고 무서운 말씀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강하고 담대하게 말씀을 전했고, 직접 만나서 심방할 때는 유순하고 부드럽게 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적자들은 이러한 올바른 바울 사도의 모습을 비난하면서, 바울이 이중인격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이 비난에 대해서 답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 사도는 2절에서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구하라”고 했고, 11절에서는 “떠나 있어서 담대한 바울이나 대할 때 유순한 바울이 같은 사람임을 알라”고 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얼마든지 강하고 담대하게 야단하고 처벌할 수 있으나,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고 배려하느라고 유순하게 대하는 것을 알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로 지냈던 사람도 화가 나면 무서운 폭군이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좋을 때 좋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무서운 사람도 없고 특별히 온유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질이 나면 똑같이 무섭고, 기분이 좋으면 똑같이 부드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상시 좋을 때 서로 조심하고 대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이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남이야 얼마나 유별(有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서로 좋은 성도들끼리 한 발자국 때놓고 친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혹시 친한 사람끼리 싸우면 더욱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 5절에서 “사랑을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3.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1)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닮기를 원했고(desiring to imitate his gentleness and kindness), 고린도 교인들을 대할 때 혹독하게 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Barnes
그래서 바울이 사람들과 마주 대할 때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비굴한 사람이라고 평가한 것은 바울의 온유와 관용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본받았기 때문에, 온유하고 관용한 것입니다.
이 온유와 관용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한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그리고,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원래 바울은 온유하지 않고, 스데반을 죽일 만큼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한 후로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즉 바울이 온유하게 된 것은 마음속에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온유함은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에서 생겨나는 품성이었습니다.
(2) 그래서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신 성도들은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온유함>은 그리스도인의 표지와 같은 덕목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골로새서 3:11-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아무튼, 이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한 태도>로 나타납니다.
(3) 바울의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었는데, 그는 예수님을 본받아 <온유함>과 <관용>의 삶을 살고자 했고, <인내>와 <용서>의 삶을 살고자 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그의 적대자들(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에 의해 비굴함으로 오해되었던 것입니다.
(4) 그러나 어떤 목사님은 성도들이 목사님을 무서워해서 어떤 자리에 가도 아무도 목사님 옆에 앉으려고 하지 않고, 도무지 교인들이 목사님을 어려워해서 상대를 안 해준다고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인들이 목사를 너무 어려워해도 안 되고, 교인들이 너무 함부로 대해도 안 좋습니다.
그러므로 교인들과 친하게 지내지만, 서로 적절한 예의를 지켜주는 가운데 친밀한 것이 좋습니다.
그러지 않고, 예의만 지키면 협조적으로 일하기가 힘들고, 너무 친하기만 하면, 서로 싸우고 일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서로 친밀하게 지내면서도 서로 예의를 지켜서 사랑하는 관계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잘해나가시기를 축원합니다!
2절.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1. 또한 우리를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1) 여기서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와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즉 대적자들이 바울에게 가한 또 하나의 악한 모함은 바울이 세상적인 가치 기준과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이기적인 육체적 욕망에 따라 행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대한 심방 일정도 육체적인 편의에 따라서 어느 때는 ‘예, 예’ 하고, 어느 때는 ‘아니, 아니라’고 했다는 비난입니다.
고린도후서 1:17. 이렇게 경영할 때에 어찌 경홀히 하였으리요? 혹 경영하기를 육체를 좇아 경영하여 ‘예, 예’ 하고 ‘아니, 아니라’ 하는 일이 내게 있었겠느냐?
그러나 바울은 육체적 욕망에 따라 심방 일정을 변경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려고 심방 일정을 변경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아끼려고 심방 일정을 변경했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즉 바울이 지금 화가 너무 나서, 원래 심방 일정대로 고린도 교회에 가면 범죄자들을 책벌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불상사를 피하려고 심방 일정을 변경했다고 했습니다.
(2) 그리고 대적자들은 바울이 이기적인 이익을 따라서 이때는 이 말을 하고, 저 때는 저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자기 이익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전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했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3) 또 대적자들은 바울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이랬다저랬다 지조 없이 말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오직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려고 했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4) 그리고 대적자들은 바울이 육신적인 이해타산을 따라서 거짓말로 전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의 말씀을 전파하여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해서 호소했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5) 또한 대적자들은 바울이 세상적인 이해타산을 추구하여, 교묘하게 물질을 속여서 빼앗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아무에게도 속여서 재물을 빼앗거나 손해를 끼친 일이 없다고 답변했습니다.
고린도후서 7: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이처럼 대적자들은 바울에게 대해서 ① 심방 약속도 안 지킨 믿지 못할 사람이라, ② 순수한 의도로 말씀을 전파하지 않는 사람이라, ③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사람의 비위만 맞추려는 사람이라, ④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지 않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말을 하는 사람이라, ⑤ 물질을 착취한 사람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육신을 따라 행한다는 이런 비난들에 대해서, 일일이 그렇지 않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①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라, ② 순수하게 하나님 말씀을 전파한다, ③ 사람의 비위만 맞추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라, ④ 인간적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한다, ⑤ 물질을 착취하지 않았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2.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1)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온유하고 관대하게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대적자들이 바울에 대해서 터무니없는 악선전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이처럼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에 대해서는 담대하게 대하여 책벌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갈라디아 교회들에 침투한 율법주의 이단자들에 대해서는 아주 담대하고, 단호하게 책망했습니다.
심지어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의 이방인 성도들과 식사하다가, 율법주의자들을 보고 자리에서 떠나 물러가는 보고, 여지없이 책망을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11-14.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2) 그러나,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에게만큼은 그렇게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하여 적대적인 감정을 억제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강경한 태도로 대하는 일이 없도록, 고린도 교인들이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속에는 고린도 교인들이 뭔가 잘못한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에 4파 중에 3파는 바울에게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에게 미혹된 ‘그리스도파’(야고보파)만은 바울을 비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사람들이 어서 회개하여, 바울이 도착했을 때 담대하고 무서운 태도로 책벌하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3) 이와같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 스스로가 바울이 도착하기 전에, 율법주의자들에게 미혹된 사람들을 회개시켜서, 바울이 가서 책벌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화가 나서 당장 쫓아가서 책벌하지 않고, 화를 내고 책벌하기 전에 어떻게든지 설득하고 가르쳐서 책벌까지는 않도록 애를 쓰고 있습니다.
(4) 전에 건축업을 하시는 장로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건축업과 통신사업도 해서 직원들이 수백 명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직원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직원들을 부리다 보면, 화가 나서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를 참고 하나하나 가르쳐서, 일꾼을 만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업하는 것보다도 직원들 가르치는 것이 더 중노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5) 그렇습니다.
내가 혼자 일하는 것보다도 일꾼들을 부리는 것이 더 힘듭니다.
그러나 일꾼을 잘 가르치면, 큰 도움이 되고, 사업체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자신을 비난하는 대적자들을 당장 가서 처벌하지 않고,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교육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악의적으로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당장 싸우지 말고,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잘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가정과 교회와 사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1.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1) 이 말은 ‘비록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가고 있지만’(though we walk in the flesh)이란 뜻입니다.
‘비록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죽을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이란 뜻입니다.
즉 ‘우리가 다른 사람들처럼 불완전하고 깨어지기 쉬운 몸을 가지고 살고 있지만’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의식주를 위한 것들이 필요하고, 잘못하기 쉬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Barnes
‘우리가 비록 육체 안에서 살아가지만’이란 말은 우리가 육체 즉 신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우리가 불완전하고, 많은 약점과 연약함들을 가지고 있고, 여러 가지 고난들과 슬픔에 휩싸여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Gill
(2) 한편 여기서 <육신으로(육체 안에서) 행한다>는 말은 ‘속된 세상 안에 있다’, 또는 ‘인간의 일반적 삶대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Ἐν σαρκὶ, 엔 싸르키: in flesh)라는 표현은, 바울이 육체에 종속되어 있다거나, 육의 지배를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사람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7-9.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음행하고 탐욕을 부리고, 우상숭배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사람들을 완전히 떠나서 살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9-10.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바울이나 우리나 모두 육신을 가지고, 육신을 따라 살아가게 되어 있으나, 믿는 성도들은 성령님이 함께 하시므로, 육체의 욕심대로 살지 않고, 성령님의 소욕에 따라 살아갑니다.
물론 속에서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웁니다.
그러나 결국 성도들은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3.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아니 하노니
(1)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싸우지 않고, 육체적인 방법이나 이기적인 생각으로 싸우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Gill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는다’란 말씀은 ‘인간의 약하고 부패한 본성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란 뜻입니다.
즉 ‘육체를 따라’란 거룩한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세속적이고 개인적인 이익과 야망을 추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울이 불신자들 혹은 거짓된 신앙인들과 다른 점은, 그가 육체의 제한성 속에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결코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싸움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중심적인 동기나, 자신의 육체적 능력으로 싸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간혹 사람들이 무척 화가 나서 자제하기 어려울 때면, 믿는 사람끼리도 주먹 다짐을 하고, 법적인 투쟁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 것은 육체적인 무기가 아니요, 악령과 싸우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고린도후서 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2) 바울의 비난자들은 육체를 따라 바울을 마구 비난하고 싸움을 걸어오지만, 바울은 이런 옛사람의 방식으로(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13-15,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3)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웃과 싸우고 물고 먹는 삶은 옛사람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 즉 새사람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새사람의 삶은 사랑의 삶이고, 옛사람의 삶은 물고 찢고 먹는 삶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사람 된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이 넘치게 부어주시는 사랑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5:16-17.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 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래서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님을 따라서 사랑을 퍼주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5:18-21.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4) 우리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죄와 우상숭배와 여러 가지 악들과(sin, idolatry, and all forms of evil)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남아 있는 부패한 욕망과 마음의 더러운 성품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우리를 파괴하려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엡 6:11-17)
셋째로 우상숭배와 음행과, 부패와, 성급함과 불경스러움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죄악들과의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Barnes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딤전 1:18, 6:12. 딤후 2:3)
(5)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음행이고, 우상 섬기는 것은 예전에 절에 다닐 때처럼 우상에게 비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육체적 향락을 추구하고 방탕한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 맺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남을 해치는 행위입니다.
이런 형태의 삶이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6) 바울의 비난자들은 이런 세상적인 방식대로 살아갔지만, 바울은 이런 세속적인 방식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오직 바울은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관용하는 태도로 대했습니다.
(7) 이처럼 우리가 육체로 싸우지 않고, 성령으로 영적인 싸움을 싸우려면, 날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흔들어서 단번에 육체로 싸우든지, 음행의 죄에 빠지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늘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여, 영적 싸움을 할지언정, 육체대로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늘 영적으로 승리하시고, 행복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4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1.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1) 우리의 무기가 육신의 것이 아니란 말씀은 영적인 것이란 뜻입니다(are not carnal-- but spiritual.)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라는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것이고,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지고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고, 그래서 믿는 사람이 회심하는 것이고, 거룩하고, 은혜를 베푸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전도에 주님이 따르는 표적들로써 말씀을 확증하심으로써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고, 세상을 구원하고, 개혁하고, 개몽하는 것을 가리킵니다(막 16:20).
(2) 앞 절에서 말한 <육체를 따라 싸우지 않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는, 바울이 싸우기 위해 지닌 무기가 육체에 속한 무기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울을 비난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에게서 파송된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the legalistic false teachers)의 지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반대파 율법주의자들은 예수 믿어도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참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만 믿으면 할례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대적하는 율법주의자들은 바울을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도둑놈이라고 비방하고, 앞 절에서 말씀한 대로 다섯 가지로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 교회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해서 바울을 거짓 사도로 몰아내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주의 대적자들은 육신적인 악한 방법으로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예수 믿기 전에 유대교인으로 있을 때는 이런 육체적인 방법으로 스데반을 죽이고 기독교인들을 폭행하고, 감옥에 가두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육체로 싸우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일단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새사람이 된 후로는 이런 육체적인 방법으로 싸우지 않고, 영적인 싸움을 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여 마귀의 손아귀에서 사람들을 구원해내고, 귀신을 쫓아내서 귀신들린 여종을 해방시켰습니다.
그리고 각종 병든 자를 고치고(행 19:11-12),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했습니다(행 20:9-12).
이처럼 바울은 이제 육체로 싸우지 않고, 영적인 싸움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3) 바울 사도가 싸우는 무기는 육체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단을 대적하는 영적인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 12절에는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한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가진 하나님의 능력이란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3장 3-4절에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저가 너희를 향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부활의 능력으로써, 거짓된 복음과 거짓된 사도들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었습니다.
2.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이 능력’에서 ‘견고한 진’이란 무지와 편견과 불신과 육체적 향락과 세상 욕심과 물욕과 명예와 쾌락과 여러 종류의 악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항하는 사람들이나 악마들의 악과 잔인함이나 능력을 가리킵니다. Benson
(2) 그 무기는 아무리 견고한 성이라도 파괴하는 강력한 무기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0-19.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
(3) 바울을 대적하는 자들은 육체에 속한 병기를 가지고 바울을 대적합니다.
<육체적 병기>란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적 추천서(3:1), 사람을 현혹시키는 웅변술(고전 2:1), 국가적인 압력, 무력 등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병기를 가지고 대응합니다.
즉, 바울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과, 마귀를 대적하는 성령의 능력과, 원수를 사랑하여 구제 헌금을 주는 희생적 봉사로써 대응합니다.
(4)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바울의 무기는 약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성령님의 능력은 마귀를 쫓아내고, 하나님의 능력은 병자들을 고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구제 헌금으로 원수를 친구로 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의 지혜로 전도하지 않고,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그래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돌을 집어 던지고, 심지어 루스드라에게서는 돌로 때려서 바울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에서는 귀신을 따르는 자들이 바울을 고발하여 매로 때리고 깊은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옥문을 열어줌으로써, 오히려 간수의 가정을 전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대적자들이 여러분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할 때, 육신적 무기로 싸우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대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 승리자로 살아가시고,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5절.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1. 모든 이론을 다 무너뜨리며
한글 번역에는 앞 절인 4절 뒷부분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론>에 해당하는 헬라어(λογισμοὺς, 로기스무스)는 하나님과 분리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도모와 사고 등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이 말은 <허황된 이론>이나 <궤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모든 이론이라고 하는 것은 복음을 대적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이론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을 공격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이론을 복음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파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주의로 성도들을 유혹하지만, 바울은 복음으로 불신자를 예수 믿게 하여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고,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치면서 능력있게 전도함을 가리킵니다.
2.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1) 본 구절은 <하나님을 아는 데 장애가 되는 모든 교만>을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으로 다 무너뜨린다는 말입니다.
이 교만은 율법주의자들이 스스로를 다른 교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교만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을 대적하는 율법주의 자들의 교만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16절에서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으로 변화 받고,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들은 자신이 죄인일 줄 알고 겸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변화 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난 줄 착각하여 교만하고, 섬기기보다는 자기가 주인 노릇 하고 섬김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만한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1:18-19.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이 사람들은 로마서 1장 20-23절에서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만물에 보여 알게 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교만하고 자기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교만의 가장 치명적인 불행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 줄 모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 죄인이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10-14.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육으로 나서 한 번도 변화를 겪지 못해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하나 실상은 불신자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율법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3:5-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그러므로 참으로 겸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주서택 목사님>이 운영하는 내적 치유센터에서 회개하고 변화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어떤 원로 장로님과 집사님들도 여태까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고백하고 회개하는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자들처럼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되지 말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겸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1) 여기서 <생각>에 해당하는 헬라어(νόημα, 노에마)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빌 4:7),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됩니다(2:11; 3:14; 11:3).
그런데, 여기서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2장 11절에서는 <속임수>라고 번역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11. 이는 우리로 사단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속임수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그리고 <완고한 마음>이라고도 번역했습니다.
고린도후서 3:14.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그리고 <간계>라고도 번역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래서 어떤 성경(공동 번역)에서는 이 말을 더 구체적으로 <계략>으로 번역하여, 본 절을 “어떠한 계략이든지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라고 해석했습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생각과 계략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복음과 성령의 능력이 율법주의자들의 궤계와 나쁜 말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위압적인 권능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즉 <사로잡아>는 ‘전쟁 포로’를 사로잡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로잡아 복종케 한다>는 말은 ‘전쟁 포로로 삼아 강제적으로 복종시킨다’는 뜻입니다.
(3) 한편, 본 절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무기를 가지고 임하는 싸움의 최종적 목적은, 자신의 유익이나 자신의 사도적 권위 앞에 적대자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을 따르려는 바울의 태도가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킨다’ 함은, 육체의 병기를 가지고(4절) 육체의 방식으로(3절) 싸우는 자들처럼 상대를 완전히 파탄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굴복시켜 구원으로 이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15장 28절의 집 밖의 탕자를 변화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집 안의 탕자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복음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싸움을 안 할 수 없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대적자를 파멸에 이르게 할 것이 아니라, 대적자들이 회개하고 예수님께 복종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 밖에서도 전도하고, 교회 안에서도 변화시켜 복음과 구원의 역사를 힘차게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1.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1)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 중에 대부분의 건전한 성도들이 질서를 되찾고 복종하게 될 때를 가리킵니다. Doddridge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너희의 복종’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미리 처벌을 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연합한 성도들의 숫자가 찰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Jamieson-Fausset-Brown
여기서 바울은 교회가 범죄자를 처벌할 때, 교회들이 지켜야 할 규칙으로서, 너무 급하게 출교 처분을 하지 말고, 먼저 좋은 수단을 사용하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순차적으로 진행해갈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Matthew Poole
여기서 <너희>는 바울의 사도권을 반대하지 않는 일반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건전한 성도들이 불법적인 율법주의자들과 확연히 구별될 때, 건전한 성도들은 함께 처벌받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아끼고, 범죄자들의 처벌을 연기하려는 바울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이처럼 바울은 바울의 사도권을 반대하는 율법주의자들의 악영향이 온 교회에 가득 차면 어떠한 치료법도 소용없기 때문에, 건전한 성도들을 악한 율법주의자들과 분리하기 위함입니다.
즉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란 몇 사람의 범죄자들이 철저히 회개하고 개혁되고, 교회가 질서가 잡히고, 바울이 지시한 대로 모든 순종이 이루어질 때까지를 가리킵니다. Gill
모세도 고라당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모든 회중에게 고라당에게서 떨어져 물러나도록 경고했습니다(민 16:26).
(2) 고린도 교회의 일부 율법주의 지도자들이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게 사도로서 위임장을 받지 않았고, 그의 말이 시원치 않고, 자신들의 율법주의와 맞지 않는 거짓 사도라고 비난하고 공격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칭 ‘그리스도파’라고 하면서, 자신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대표적 지도자인 야고보를 추종하는 자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야고보가 파송한 것이 아님).
(3) 이 말에 해당되는 자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과 이들에게 끝까지 동조하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복종치 않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것일까요?
이것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맺어진 선교 영역에 대한 약속(야고보 베드로 요한은 유대인에게로, 바울은 이방인에게로)에 불복종하고, 예루살렘의 율법주의 거짓 사도들이 침범해서는 안 될 사도 바울의 선교 영역 즉 고린도 교회에 침입한 것을 가리킵니다.
즉 갈라디아서 2장 8-9절에서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임명을 받았고,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8-9.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런 선교 영역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예루살렘 교회 율법주의자들에게서 파송 받아서, 바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 침투해서, 바울을 거짓 사도요 도둑놈이라고 비난하면서, 바울을 고린도 교회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베드로와 바울 사이에 약속한 ‘선교 협정’을 어기고, 고린도 교회에 침투한 율법주의자들을 처벌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4) 다시 말해서 일단의 율법주의자들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 합의된 선교 영역(갈 2:9)을 무시하고 바울의 선교지인 고린도에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갈라디아서 2:7-9.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바울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언동을 하였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시키는 율법주의적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5절).
그리고, 어느 정도는 일부 고린도 교인들이 그들에게 동조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인 바울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4) 이것을 볼 때 초대교회나 지금도 참 야비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고는 하지만, 교회 안에서도 이권 다툼을 하고, 평안히 잘 있는 교회에 침투해서 목회자를 비방하고, 목회자를 쫓아내려고 하는 못된 사람들이 있는 것을 봅니다.
지금도 광주의 한 대형 교회는 평안히 잘 있는 교회를, 어느 신학교 목사가 탐을 내서 담임목사를 쫓아내고, 자기가 담임 목사가 되겠다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교회를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평안한 교회를 수라장으로 만든 죄악은 자손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큰 죄악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평안한 교회를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특히 어떤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목사 쫓아내는 교회>라는 모욕적인 별명이 붙어 있었기 때문에, 평안함을 잘 유지해야 하겠습니다.
2.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1) 사도 시대에 교회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내린 신적인 형벌은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교회의 순수성을 대적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렸고(행 5:1-11), 바울은 복음 전파를 방해하는 엘루마에게 장님이 되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행 13:11) Gill
아마도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는, 이런 종류의 무서운 기적들과 형벌들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서 행한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Benson
그러나 어떤 학자(Matthew Poole)는 이 때의 형벌이 출교 처분이라고 했습니다.
(2) 한편, 본 절에서 바울 사도가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말한 것을 보면, 고린도 교회의 사정이, 디도가 다녀간 이후에 좀 더 나빠진 상황임을 말해줍니다.
즉 디도 목사가 고린도 교회에 가서, 4개 파 중에 3파가 바울편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한 개 남은 ‘그리스파 사람들’이 코너로 몰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 편을 드는 성도들이 4분의 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디도 목사가 바울에게 돌아간 후에, 다시 그리스도파 사람들이 선동을 하고, 바울을 비난해서, 상당한 교인들이 다시 그리스도파에 동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이번에 가면, 복종치 않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한번 뿌리를 내린 쓴 뿌리는 잘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15절에는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여기서 쓴 뿌리란 모세를 대적한 고라당처럼 반역하는 무리와 교회에 침투한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도행전 20장 28절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님들에게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에 흉악한 이리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잘 감독하라고 부탁했습니다.
(3)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이 일반적으로 바울 사도에게 온전히 복종하게 될 때는,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복종할 때 소수의 대적자들을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인들이 대적하면, 대적자 하나라도 처벌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이 득세하면, 의인들이 숨고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8장 12절에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처벌받고 정의가 득세를 하면, 의인들이 나서서 악인들을 제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씨가 광주 사람들에게는 씻지 못할 죄를 지었지만, 전두환 시절에는 국가가 깡패들을 처벌하자, 평범한 의인들이 생활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국가 경제가 활성화되고, 잘살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이 교회에서도 악인들이 득세하면, 의인들이 잠잠하고 숨습니다.
그러나 공의가 시행되고, 악인들이 쫓겨 나가고, 의인들이 득세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고, 성령님이 역사하는 은혜로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교회를 이간질시키려고, 잘못된 말을 하는 침투자들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가장 안전하게 신앙 선배들의 신앙을 본받아 주님을 잘 섬겨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