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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3장 1-11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1. 요한복음 1-12장은, 예수님이 표적들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신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3-21장은, 예수님이 고별설교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내용입니다.
13-17장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다락방에서 고별설교하신 내용입니다.
18-21장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한 내용입니다.
2. 13장의 내용은,
1-20절,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21-35절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시고,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36-38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신 내용입니다.
3. 오늘은 1-11절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심>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New International Version: 유월절 바로 직전이었다.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시간이 온 것을 아셨다.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It was just before the Passover Festival. Jesus knew that the hour had come for him to leave this world and go to the Father. Having loved his own who were in the world, he loved them to the end.)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Πρὸ δὲ τῆς ἑορτῆς τοῦ πάσχα, εἰδὼς ὁ Ἰησοῦς ὅτι ἦλθεν αὐτοῦ ἡ ὥρα, ἵνα μεταβῇ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πρὸς τὸν Πατέρα,
before now the feast of the Passover, having known the Jesus that come the hour, that He would depart out of the world to the Father
직역하면 ‘이제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그가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떠나갈 그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란 뜻입니다.
‘아시고’(εἰδὼ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아신 것을 가리킵니다.
‘떠나’(μεταβῇ)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He would depart) 단호하게 떠나가는 것을 가정한 것입니다.
‘이른’(ἦλθεν)은 부정과거로서(come) 확실하게 그때가 이른 것을 가리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ἀγαπήσας τοὺς ἰδίους τοὺς ἐν τῷ κόσμῳ,
having loved the own who in the world
‘사랑하시되’(ἀγαπήσας)는 부정과거 분사로서(having loved) 과거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확실하게 사랑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εἰς τέλος ἠγάπησεν αὐτούς.
to end He loved them
‘사랑하시니라’(ἠγάπησεν)도 부정과거로서(He loved) 예수님이 과거에 제자들을 사랑하셨던 확실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유월절 전>이란 유월절이 시작되는 밤 양을 잡아서 구워 먹는 때를 가리킵니다.
이 날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니산월) 14일이고, 목요일이며 오늘날로는 3월 말이나 4월 초에 해당합니다.
(오늘날은 태양력을 쓰지만, 유대인들은 달을 중심한 달력을 썼습니다)
이 날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아서 먹는 저녁이었습니다.( 출 12:5-8)
그러므로, 이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드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에 가룟 유다가 이끈 병사들에게 잡혀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빌라도의 사형 판결을 받으신 후,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이날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니산월(1월) 15일 금요일이고, 오늘날로는 3월 말에서 4월 초에 해당합니다.
2.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가실 것을 아시고서도,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것도 제자들이 배신하고 모두 떠나갈 것을 아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자신을 원수들에게 팔 것을 아시면서도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베드로도 저주하면서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셨습니다.
3.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상대적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면, 나도 사랑하고, 상대방이 나를 배신하면 나도 원수 시 하는 것이 인간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으시고, 예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과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한 때 예수님을 배신했더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예수님께 언제라도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한결같은 사랑으로 품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생각을 조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저녁을 먹는 중에, 마귀가 이미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배반할 마음을 넣었다. (During supper, the devil having already put into the heart of Judas Iscariot, the son of Simon, to betray Him,)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καὶ δείπνου γινομένου, τοῦ διαβόλου ἤδη βεβληκότος εἰς τὴν καρδίαν, ἵνα παραδοῖ αὐτὸν, Ἰούδας Σίμωνος Ἰσκαριώτης,
and supper taking place, the evil already having put into the heart, that he should betray Him, Judas (son) of Simon Iscariot
직역하면 ‘저녁 식사를 들 때, 마귀가 이미 시몬 가룟 유다의 마음에 그를 배신할 것을 넣어주더니’란 뜻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저녁 식사를 들 때’란 구절을 생략하고 3절에 붙여서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본 절은 마귀가 예수님을 팔 생각을 마음에 가진 것은 저녁 식수 중이었다는 뜻입니다.
‘저녁 식사를 들 때’에서 동사(γινομένου)는 현재분사이고(taking place) 원형(γίνομαι)은 ‘일어나다, 된다’(come into being, happen, become)는 뜻입니다.
‘팔’(αραδοῖ)은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he should betray) 가룟 유다가 확고한 의지로 예수님을 팔려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παραδίδωμι)은 ‘넘겨주다, 배반하다’( hand over, deliver over, betray)는 뜻입니다.
‘넣었더니’(βεβληκότο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put) 이미 넣은 것을 가리키고, 원형(βάλλω)은 ‘던지다, 넣다’(cast, throw, put)는 뜻입니다.
1.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
이 유다는 출신지가 가룟 즉 남방 유다 지방의 가룟 헤브론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11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출신이었는데, 이 유다만 오직 남쪽 유다지방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그는 다른 제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은 유다 지파 출신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닫혀진 마음과 교만한 마음속에 마귀가 들어와서 예수님을 팔아먹을 악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는 돈을 최고로 생각하면서, 예수님조차도 팔아먹을 지독한 수전노가 되어 있었습니다.
2. 마귀가 벌써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는데(요 13:34), 마귀는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불어넣었습니다.
성경 잠언 23장 7절에는,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은 생각과 감정에 따라서, 모든 행동과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면, 사랑과 용서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지배하면, 살인적인 감정이 생기고, 말에 살기가 있고, 행동으로 사람을 해치게 됩니다.
3. 몇 년 전에 어린이 유괴 살인 사건으로 온 나라가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처럼 잔인한 살인을 하게 된 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잔인한 생각과 감정은 마귀가 넣어주는 것입니다.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인간의 심리상태를 <싸이코패쓰>(psychopath)라고 합니다.
어릴 때,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배신을 당한 사람들이 갖는 잔인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으므로, 악한 마귀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귀의 종노릇 하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이런 악한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4. 그러기 때문에 성경 잠언 4장 23절에는,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5. 가룟 유다는 예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헌금을 훔쳐 가는 도둑놈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2:6.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았으므로,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
이처럼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됩니다.
디모데전서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6. 예수님은 자기를 팔 가룟 유다까지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이미 대제사장에게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기로 한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고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원수를 사랑하신 모습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32-35.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는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서로 높은 벼슬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고 있는데, 예수님은 종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3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Jesus, knowing that the Father had given all things into His hands, and that He had come forth from God and was going back to God,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아시고
εἰδὼς ὅτι πάντα ἔδωκεν αὐτῷ ὁ Πατὴρ εἰς τὰς χεῖρας,
having known that all gave to Him the Father into the hands
직역하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주신 것을 아시고’란 뜻입니다.
원문에는 ‘저녁 먹는 중’이란 표현이 없는데 우리 성경은 어디에서 이 표현을 따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시고’(εἰδὼς)는 완료분사로서(having known) 이미 아신 상태를 가리킵니다.
‘맡기신’(ἔδωκεν)은 부정과거로서(gave) 단번에 확 모두 맡기신 모습을 가리킵니다.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καὶ ὅτι ἀπὸ Θεοῦ ἐξῆλθεν καὶ πρὸς τὸν Θεὸν ὑπάγει,
and that from God He came forth and to the Father He goes
직역하면 ‘아버지께로부터 그가 오셨다가 아버지께로 가고 계시는 것을’이란 뜻입니다.
‘오셨다가’(ἐξῆλθεν)는 부정과거로서(came forth) 과거에 확실히 오신 사실을 가리킵니다.
‘돌아가실’(ὑπάγει)는 현재형으로서(He goes) 현재 가고 계신 모습을 가리킵니다.
1. 여기서 ‘저녁 먹는 중’이라는 것은 성찬식을 하시고, 저녁 식사를 하시는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장면을 가리킵니다ㅣ.
요한복음에는 세족식(요 13:4-11)과 최후의 만찬(요 13:1-3)은 기록되어 있는데, 성찬식 장면(마 26:26-28. 막 14:22-24, 눅 22:19-20)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성찬식과 최후 만찬을 포괄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즉 떡과 포도주 잔을 나누어주신 구체적인 장면은 생략되어 있지만, 그 의미는 6:35-35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2. 본질적으로 모든 인간들은 부모에게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셔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단지 예수님이 최후에 재림하시면, 예수 믿은 사람들은 부활하고, 영생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할렐루야!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예수께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어놓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got up from supper, and laid aside His garments; and taking a towel, He girded Himself.)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ἐγείρεται ἐκ τοῦ δείπνου καὶ τίθησιν τὰ ἱμάτια,
He rises from the supper and lays aside the garments
‘일어나’(ἐγείρεται)와 ‘벗고’(τίθησιν)는 둘 다 현재형입니다(He rises, lays aside).
‘벗고’(τίθησιν)의 원형(τίθημι)은 ‘두다, 놓다’(place, lay, set)는 뜻이고, 여기서는 옷을 벗어 두신 것을 가리킵니다.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καὶ λαβὼν λέντιον, διέζωσεν ἑαυτόν·
and having taken towel, He girded Himself
‘가져다가’(λαβὼν)는 부정과거로서(having taken) 단호한 의지로 수건을 가져가신 것을 가리킵니다.
‘가져다가’(λαβὼν)의 원형(λαμβάνω)은 ‘취하다, 집어가다, 받다’(take, lay hold of, receive)는 뜻입니다.
‘두르시고’(διέζωσεν)도 부정과거로서(He girded) 단호한 의지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두르시고’(διέζωσεν)의 원형(διαζώννυμι)은 ‘두른다, 잡아매다’(gird around, tie around)는 뜻입니다.
1. 본 절에 <저녁>이라는 단어(τοῦ δείπνου)는 정관사(τοῦ)가 있어서 특별한 저녁을 가리킵니다.
이 저녁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양을 잡아서 먹는 저녁이었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발을 씻기시는 세족식을 거행하시고, 성찬식에 이어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특별한 저녁을 가리킵니다.
이 저녁 후에 예수님은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다가 체포되시고, 이튿날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게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 ‘저녁’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저녁이 되는 특별한 저녁이었습니다.
2. 예수님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찬식을 거행하여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3.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당시 예수님의 인기를 보면, 틀림없이 예수님이 왕이 되실 것이라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날 밤에 제자들은 서로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서로 시기 질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전에 같으면, 서로 도우며 사랑하던 분위기였으나, 장관직을 생각하면서 서로 시기 질투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는 “누가 크냐?” 하며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서로 다투고 있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써 스스로 종의 자세로 섬기는 모습을 실물 교훈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참으로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즉 예수님은 목숨을 바쳐서 제자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는데, 제자들은 어처구니없게도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4.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하면서 다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 서로 친구 관계이던 사람들도, 진급에 서로 경쟁 관계가 되면, 금방 원수가 되어버린 경우를 많이 봅니다.
교회에서도 선거가 있기 전에는 서로 친구이던 사람들이 선거를 앞두면, 서로 원수 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5. 어떤 경우는 돈 때문에, 형제의 의리가 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형제가 사이좋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로가 나면서 산소의 땅 일부를 시청으로부터 보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보상금 때문에, 형제간에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동서들끼리 사이가 안 좋아졌습니다.
그러자, 형제가 단둘이서 조용히 만났습니다.
<동생아, 우리가 평생 사이가 좋았는데, 돈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구나.>
<형님, 그렇네요. 평생 형님이 좋아서 희망 삼고 살아왔는데, 돈 때문에 사이가 안 좋게 되었네요.>
그리고, 둘이 기도하고 나서,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그동안 의좋은 형제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토지 보상금 때문에, 의가 상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러자, 그 가정의 사정을 잘 아시는 목사님이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일부는 감사 헌금으로 드리시고, 일부는 매년 부모님 추도예배 드리는 비용으로 떼어놓고, 일부는 병원에서 장기 치료를 받고있는 누이동생 병원비로 주고, 일부는 우수한 대학에 들어가는 당신 자녀들 장학금으로 쓰세요.>
그 후로 형제들은 다시 돈 욕심을 버리고, 이전처럼 서로 화목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형제의 의리조차도 끊어놓는 ‘돈의 악영향’을 벗어버려야 하겠습니다.
5절.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New American Standard Bible: 그 후에 예수께서 대야에 물을 부으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 (Then He poured water into the basin, and began to wash the disciples' feet and to wipe them with the towel with which He was girded.)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εἶτα βάλλει ὕδωρ εἰς τὸν νιπτῆρα,
then He pours water into the basin,
‘담아’(βάλλει)는 현재형으로서( He pours) 예수님이 대야에 물을 담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담아’(βάλλει)의 원형(βάλλω)은 ‘던지다, 넣다’(cast, throw, put)는 뜻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καὶ ἤρξατο νίπτειν τοὺς πόδας τῶν μαθητῶν, καὶ ἐκμάσσειν τῷ λεντίῳ ᾧ ἦν διεζωσμένος.
and He began to wash the feet of the disciples, and to wipe with towel with which He was being having been girded
‘씻기시고’(νίπτειν)는 부정사형 동사이고(to wash), ‘닦기를’(ἐκμάσσειν)도 부정사형 동사이고(to wipe), 둘 다 앞의 동사 ‘시작하여’(ἤρξατο)에 연결되고 있습니다.
‘시작하여’(ἤρξατο)는 부정과거로서(He began)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고 닦는 것을 단호한 의지로 시작한 과거의 확실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뒤의 ‘닦기를’(ἐκμάσσειν)의 원형(ἐκμάσσω)은 ‘닦다, 철저히 닦다, 닦아 말리다’(wipe, wipe off thoroughly, wipe dry)는 뜻입니다.
‘두르신’(ἦν διεζωσμένος)은 두 단어로 되어 있는데, 앞의 단어는 미완료과거로서(was being) 과거에 계속된 행동을 가리키고, 뒤의 단어는 완료분사 수동태로서(having been girded) 이미 두르신 상태를 가리켜서, 둘을 합하면 ‘이미 두르신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장면은 사실적으로 자세히 묘사되어서 틀림없는 역사적인 사실이고, 또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2. 우리는 세족식에서 주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서로 발을 씻기고(14절)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34절).
요한복음 14: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요한복음 14: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11)고 했고, 심지어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라고도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교회를 위해서 순교한 주의 종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3. 이처럼, 예수님이 수건을 두르고 발을 씻기신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도 감동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주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성도들끼리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바울 사도도 허영으로 서로 다투지 말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늘 충만히 함께 하시고,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220장 2절.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6절.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New American Standard Bible: So He came to Simon Peter. He said to Him, "Lord, do You wash my feet?"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ἔρχεται οὖν πρὸς Σίμωνα Πέτρον·
He comes therefore to Simon Peter
직역하면 ‘그러므로 그분이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이르시니’(ἔρχεται)는 현재형으로서(He comes) 예수님이 베드로를 씻기게 되신 차례가 되신 것을 가리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λέγει αὐτῷ
he says to Him
직역하면 ‘그가 그분에게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이르되’(λέγει)는 현재형으로서(he says)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Κύριε, σύ μου νίπτεις τοὺς πόδας;
Lord, you of me You wash the feet?
직역하면 ‘주여, 당신이 내 발들을 씻기시나이까’란 뜻입니다.
‘씻기시나이까’(νίπτεις)는 현재형으로서(You wash) 씻기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당신이’(σύ: You)가 강조되어 있고, ‘당신’(σύ: You)과 ‘내’(μου)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1.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는 말은 “왕이신 주님께서 종인 제 발을 씻기시나이까”라는 황송한 양심적인 고백입니다.
‘주’(Κύριε: Lord)란 말은 당시에 로화 황제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하나님이신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선생님’(랍비)라고 호칭했으나(막 11:21), ‘주님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고, 만왕의 왕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과 달리 왕이신 주님이 어떻게 천한 나의 발을 씻기시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2. 우리는 주님이 발을 씻어주신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음도 당하셨으므로, 언제나 주님 은혜에 감복하여,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찬송가 143장.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일인가 웬 은혠가 그 사랑 크셔라.
3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속은 종들이 발을 씻어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가죽끈으로 된 짚신 같은 샌들을 신고 다녀서, 발에 고린내가 심히 나고, 흙 먼지 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장관이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서로 발 씻어주는 일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즉, 상대방에게 “네가 먼저 내 발을 씻으라”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 되신 예수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차례로 씻어주셨습니다.
3 예수님은 내일이면 십자가에 달려서 자신의 목숨을 제자들 대신에 내놓으실 분이 철없는 제자들을 위해서 끝까지 사랑하시고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철없는 제자들을 꾸짖으실만한데, 끝까지 참으시고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이런 주님의 모습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7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Jesus answered and said to him, "What I do you do not realize now, but you will understand hereafter.“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καὶ εἶπεν αὐτῷ
was answered Jesus and said to him
‘대답하시되’(ἀπεκρίθη)는 부정과거 수동태로서(was answered) 확실하게 대답하신 것을 가리키고, ‘이르시되’(εἶπεν)도 부정과거로서(said)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Ὃ ἐγὼ ποιῶ σὺ οὐκ οἶδας ἄρτι,
what I I do you not you You have known presently
‘하는’(ποιῶ)은 현재형으로서(I do) 현재 하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알지’(οἶδας)는 완료형으로서(have known) 이미 알고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내가’(ἐγὼ: I)와 ‘네가’(σὺㅣyou)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 후에는 알리라.
γνώσῃ δὲ μετὰ ταῦτα.
you will know but after these
직역하면 ‘그러나 이후에는 네가 알리라’는 뜻입니다.
‘알리라’(γνώσῃ)는 미래형으로서(you will know) 장차 알게 될 것을 가리킵니다.
1. 이 밤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전날 밤에 예수님은 중요한 세족식을 거행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서로 발을 씻기고, 서로 섬기며 사랑하라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이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2. 이때 베드로는 왜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을까를 완전히 알지 못했으나, 후에는 성도들끼리 서로 섬기고 발을 씻기는 것이 중효함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그래서 서로 세족식을 거행하듯이 서로 허리를 동이라고 교훈했습니다.
베드로전서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3.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일과 주님의 말씀을 단번에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과거에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억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려고 하지 말고, 깨달아 알 때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베드로후서 3:15-16.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베드로가 황송한 마음에 “주님 절대로 제 발을 씻길 수 없습니다”고 말하자, 예수님이 “그러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러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8절.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기를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고 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기를 “만일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네가 나와 함께 분깃을 얻지 못하게 된다”고 하셨다. (Peter said to Him, "Never shall You wash my feet!" Jesus answered him, "If I do not wash you, you have no part with Me.")
베드로가 가로되
λέγει αὐτῷ Πέτρος
says to Him Peter
직역하면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가로되’(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ays).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Οὐ μὴ νίψῃς μου τοὺς πόδα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no not you shall wash of me the feet to the age
직역하면 ‘당신은 내 발을 결코 영원히 씻기지 못할 것입니다’란 뜻입니다.
‘씻기지’(νίψῃς)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you shall wash) 단호하게 확실히 씻기는 것을 가정한 말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ἀπεκρίθη Ἰησοῦς αὐτῷ
was answered Jesus him
직역하면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란 뜻입니다.
‘대답하시되’(ἀπεκρίθη)는 부정과거 수동래 동사로서(was answered) 예수님이 단호한 의지로 확고하게 말씀한 과거의 사실을 가리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Ἐὰν μὴ νίψω σε, οὐκ ἔχεις μέρος μετ’ ἐμοῦ.
if not I should wash you, not you have part with me
직역하면 ‘만일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몫을 갖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씻기지’(νίψ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I should wash), 주님이 확고한 의지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가정한 것을 가리킵니다.
‘몫’(μέρος)란 ‘부분, 몫, 배당’(part, portion, share)을 뜻합니다.
‘갖지’(ἔχεις)는 현재형으로서(you have)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베드로를 씻기지 않는다면, 베드로는 현재 주님과 몫을 나누어 갖지 못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얼른 발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1.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Οὐ μὴ νίψῃς μου τοὺς πόδας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no not you shall wash of me the feet to the age)란 말은 직역하면 ‘당신은 내 발을 결코 영원히 씻기지 못할 것입니다’란 뜻입니다.
(1) 베드로는 제자로서 선생님을 공경할 줄 아는 올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자녀들이 귀하다 보니까, 선생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수업 시간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여학생이 전기 드라이어로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선생님이 가서 전기 코드를 뽑아버렸습니다.
그러자, 학생이 “이X 놀고 있네”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울어버렸답니다.
(2) 어떤 학생이 교복을 입고 길가면서 담배를 피우더랍니다.
그래서, 어르신이 “학생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우면 되나?”고 나무랐답니다.
그랬더니, “아저씨가 나한테 담배 사줬어요? 왜 간섭이예요. X같네. ㅆㅍ” 하고 침을 탁 뱉더랍니다.
(3) 반면에, 연세가 높으신 분들은 나이가 어린 목사에게도 선생님이라고 심히 존경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궁 *> 권사님이라고 계셨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일본 유학까지 하신 분이십니다.
제가 젊었을 때, 교회에서 <성경 전문학교>를 만들어, 매주 성경 공부를 시킬 때입니다.
그런데, 연세가 80이 넘은 권사님이 어린 저를 꼬빡 선생님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책도 많이 읽으시고, 성경도 친필로 성경 전체를 두 번 필사를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스승의 날이면, 꼬박 선물을 해주셨습니다.
(4) 우리 주일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신 부모님들은 스승의 날에 학교 선생님에게만 선물을 보내시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인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전도사님에게도, 그리고 구역 예배 인도자님에게도, 주일공과를 가르쳐주시는 장로님들에게도, 선생님 대접을 해드리시기 바랍니다!
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1) 우리 성경에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οὐκ ἔχεις μέρος μετ’ ἐμοῦ)이 영어성경에는 <네가 나와 함께 나눌 부분이 없다>(you have not part with Me)고 했습니다.
그런데 영어에 <부분>(part)으로 번역된 헬라어(μέρος)는 <분깃, 몫>(share, portion)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시지 않는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나라(천국)에서 나누어 가질 분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서 각 지파와 각 가족별로 땅을 분깃으로 분배받았듯이, 성도들은 천국에서 땅을 분깃으로 받을 것인데, 예수님이 죄를 씻어주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서 차지할 분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7:13-14.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2:11-13.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그러므로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는 발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했습니다.
(2) ‘나와 상관이 없다’(οὐκ ἔχεις μέρος μετ’ ἐμοῦ:you have not part with Me)는 말씀의 시제가 현재인 것은 날마다 발을 씾지 않으면, 현재적으로 예수님과 관계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물론 처음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원히 끊을 수 없는(요 10:28)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또한 매일 매일 예수님의 피로 자범죄를 씻지 않으면, 예수님과와 교통이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은 살아가면서 죄성을 가진 우리가 매일 마음과 행동으로 짓는 죄드을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죄악과 영원한 사망에서 구원해주신 은혜를 믿고 감사해야 하지만, 우리가 마음과 행동으로 매일 짓는 우리의 죄악들을 날마다 회개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를 받고, 주님과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항상 성령 충만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시고, 복된 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9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시몬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기를 “주여, 그러면 내 발만이 아니라 내 손과 머리도 씻어주소서”라고 했다. (Simon Peter said to Him, "Lord, then wash not only my feet, but also my hands and my head.")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λέγει αὐτῷ Σίμων Πέτρος
says to Him Simon Peter
직역하면 ‘시몬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기를’이란 뜻입니다.
‘가로되’(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ays).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Κύριε, μὴ τοὺς πόδας μου μόνον, ἀλλὰ καὶ τὰς χεῖρας καὶ τὴν κεφαλήν.
Lord, not the feet of me only, but also the hands and the head
‘씻어주옵소서’란 동사는 없으나, 잘된 번역입니다.
1.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지 않으면, 베드로는 예수님과 관계가 없게 된다고 하시자, 베드로는 이 말씀에 놀라서 자기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과 관계가 깨지는 것을 가장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들도 세상 어떤 사람과 관계가 깨지는 것보다도 예수님과 관계가 깨지고, 성령님의 감화가 떠나는 일을 가장 두려워해야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에게 좋게 하려고 잠깐 거짓말을 함으로서, 그 사람과의 관계는 좋게 유지될지 몰라도, 거짓말을 할 때 성령님께서 내 마음을 책망하시고, 성령님의 감동과 은혜가 떠나는 것은 너무나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섭섭한 관계가 될지라도, 절대 성령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Polycarp, AD 69-156)은 예수님을 일시적으로 부인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는 총독에게 “주님께서는 86년 동안 저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어찌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베드로처럼 주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히 여기시고, 혹시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시적으로 소원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주님과의 관계를 깨뜨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고 성령 충만하시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기를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고, 완전히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셨다. (Jesus said to him, "He who has bathed needs only to wash his feet, but is completely clean; and you are clean, but not all of you.")
예수께서 가라사대
λέγει αὐτῷ Ἰησοῦς
says to him Jesus
직역하면 ‘예수께서 그이게 말씀하시기를’이란 뜻입니다.
‘가라사대’(λέγει)는 현재형입니다(says).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Ὁ λελουμένος οὐκ ἔχει χρείαν, εἰ μὴ τοὺς πόδας νίψασθαι,
the (one) having been bathed not has need, if not the feet to wash
직역하면 ‘만일 발을 씻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목욕한 사람은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만일 아니라면’(εἰ μὴ)이라는 단어 때문에 번역하기가 난해한 문장이지만, 우리 번역은 좋은 번역입니다.
‘목욕한’(λελουμένος)은 완료 분사로서(having been bathed) 이미 목욕한 것을 가리킵니다.
‘필요 없다’(οὐκ ἔχει χρείαν)는 직역하면 ‘필요를 가지고 있지 않다’(not has need)는 뜻이고, 여기 동사(ἔχει)는 현재형입니다(has).
‘씻을’(νίψασθαι)은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 to wash)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씻는 것을 가리킵니다.
온몸이 깨끗하니라
ἀλλ’ ἔστιν καθαρὸς ὅλος·
but is clean wholly
직역하면 ‘온전히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여기 동사(ἔστιν)는 현재형입니다(is).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καὶ ὑμεῖς καθαροί ἐστε, ἀλλ’ οὐχὶ πάντες.
and you clean are, but not all
여기 동사(ἐστε)는 현재형이고(are), 이 문장에서 ‘너희’(ὑμεῖς)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1. ‘목욕’한 것(λελουμένος)은 처음 예수님 믿고 중생한 것을 가리키고, ‘씻는’ 것(νίψασθαι)은 일상 생활 중에서 범죄한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상근 240쪽)
2. ‘다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는 말씀은 가룟 유다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지적하면서, 여러 번 회개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요 6:71, 마 26:24-25)
11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He knew the one who was betraying Him; for this reason He said, "Not all of you are clean.“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ᾔδει γὰρ τὸν παραδιδόντα αὐτόν·
He had known for the (one) betraying Him
직역하면 ‘왜냐하면 그분을 배신하고 있는 자를 그분이 알았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아심이라’(ᾔδει)는 대과거(pluperfect)로서 그 이전에 이미 아신 것을 가리킵니다.
‘팔’(παραδιδόντα)은 현재분사로서(betraying) 현재 파는 행동을 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하시니라.
διὰ τοῦτο εἶπεν
because of this He said
직역하면 ‘이 때문에 그가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하시니라’(εἶπεν)는 부정과거로서(He said) 확실히 말씀하신 것을 가리킵니다.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ὅτι Οὐχὶ πάντες καθαροί ἐστε.
that not all clean you are
동사(ἐστε)는 현재형입니다(you are).
1. 우리 성경에 <이미 목욕한>으로 번역된 단어(λελουμένος: having been bathed)에서 <목욕한다>는 단어(λούω)는 ‘목욕한다, 씻는다’(bathe, wash)는 뜻인데, 은유적으로는 <죄로부터 깨끗케 한다>(cleanse from sin)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는다>고 할 때 <씻는다>는 단어(νίψασθαι, νίπτω)는 본 절에서는 발을 씻는 데 사용되었고, 요한복음 9장에서는 소경이 실로암 못에 가서 <눈을 씻는> 데 쓰였으며, 마태복음 15장 2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욕한 것과 발을 씻는 것을 설명하자면, <목욕>이란 이미 중생한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고(요한복음 3:5, 에베소서 5:26, 히브리서 10:22), 발을 <씻는 것>은 생활 중에 지은 죄를 씻으면서 성화되어 가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발을 씻어준 사건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육체>를 깨끗이 씻어주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더러운 <죄악>을 씻어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전문적인 해결사들이 많습니다.
질병을 해결해주는 의사와 약사들이 있습니다.
편리한 기계들을 만들어주는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있습니다.
경제 문제를 해결해주려고 노력하는 기업가들이 있습니다.
싸움 문제를 해결해주는 판사들이 있습니다.
범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검사와 경찰들이 있습니다.
나라를 지켜주는 군인 장병들이 있습니다.
문화와 향락 문제를 해결해주는 예술가와 연예인들이 있습니다.
국가 공무를 해결해주는 대통령과 공직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전문가십니다.
(1) 예수님은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에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떡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예수님은 병을 낫게 하는 전문가도 아니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면서, 그 병이 죄 때문인 줄 아시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병 나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관가에 고발하였습니다.
(3) 예수님은 싸움을 해결해주는 재판관도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14절에는, 형제간에 유산 분배 문제로 예수님께 재판을 청구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죄의 문제가 해결되면, 보편적으로 건강이나 경제적인 면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복을 받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대한 올바른 신앙 가운데서, 죄 용서와 영생 천국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보통 사람은 의로운 사람과 가족과 친구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도 원수도 사랑하셨습니다.
1. 우리들은 이번 어린아이 유괴 사건을 통해서 분노하고, 정죄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죄인에게 대해서 정죄하고, 원수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도 원수도 용서하고 사랑하십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2.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자신을 팔 것을 미리 아시면서도, 끝까지 그를 사랑하시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자꾸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11절에서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1. 우리 성경에 단순히 <팔 자>라고 되어 있는 단어(παραδιδόντα)는 사로서 <팔고 있는>(is betraying)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가 이미 대제사장에게 가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고 이제 넘겨주려는 계획을 하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셨고, 가룟 유다의 발도 씻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서, 그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지옥 멸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4. 오늘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사랑하며 서로 도와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일뿐만 아니라, 또한 내가 사는 길입니다.
5. 예화 - 두 머슴 이야기
(1) 어느 주인이 두 머슴을 데리고 장사하러 갔습니다.
두 머슴을 짐을 잔뜩 짊어지고, 먼 도시로 장사하러 가고 있었습니다.
한 머슴은 젊고 건강한데, 다른 머슴은 늙고 쇠약했습니다.
(2) 그런데, 며칠을 짐을 지고 가다가, 늙은 머슴이 젊은 머슴에게 사정을 했습니다.
<어이 내가 너무 힘들어서 더 이상은 짐을 지고 가지 못하겠네, 자네가 내 짐을 조금만 더 지고 가주게나. 내가 다시 힘을 얻으면, 자네의 짐을 더 져주겠네>
그런데, 젊은 머슴이 늙은 머슴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짐만 지고 갔습니다.
그러자, 이튿날 늙은 머슴이 병이 나서 앓아눕고 말았습니다.
(3) 그러자, 주인은 늙은 머슴을 어느 마을에 떼어놓고, 젊은 머슴에게 두 배의 짐을 지고 가게 했습니다.
그 때, 젊은 머슴이 스스로 뉘우쳤습니다.
<내가 늙은 머슴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6. 예화 - 물고기 두 마리
(1) 산속 우물에 두 마리의 물고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한 마리는 붕어이고, 한 마리는 힘이 센 잉어였습니다.
이 두 마리가 서로 사이좋게 살 때는 참 행복했습니다.
(2) 그런데, 이 두 마리의 물고기가 서로 시기하고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힘센 잉어가 붕어를 물어뜯어서 결국 죽이고 말았습니다.
(3) 그래서 붕어가 물 위에 떠서 썩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옹달샘 물도 더러워져서 마침내 썩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잉어도 죽고 말았습니다.
7.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6:2.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마태복음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요한복음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누가복음 6:27-28.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허물 많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발을 씻겨주신 것을 믿고, 언제나 죄책감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라도 사랑의 주님께 나아가 용서를 비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과 관계를 회복하시고, 날마다 주님의 인도 따라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