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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너더리통신 86]‘스승의 날’에 스승님께 드리는 편지
선생님,
너무 오랜만에 인사를 올려 면구스럽습니다.
어제는 ‘스승의 날’이었습니다.
어제만큼은 꼭 문안인사를 여쭤야겠다고 결심했는데,
그것도 하루가 꼬박 지나, 글로 인사를 드립니다.
미욱한 제자의 하는 짓거리가 늘 이와 같습니다.
그동안 사모님과 함께 평강하시었는지요?
그러리라고 항상 믿고 있습니다.
전주역 근처 한 식당에서 막걸리 한잔 사드린 게
벌써 두어 해가 넘은 듯합니다.
미욱하고 게으른 제자를 용서하소서.
광화문광장을 버스로 지나치는데,
세종대왕 동상 밑부분에 “고맙습니다”라는 커다란 문구를
꽃으로 만들어 붙여놓았더군요.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날을 기념하여 정했다지요.
마침, 올해는 탄신 621돌이며 즉위한 지 600년이 된답니다.
위대한 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은
참으로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사표(師表)라 하겠습니다.
애민(愛民)사상이 가장 투철한 명군(名君)이었구요.
대왕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종종 생각해 봅니다.
가장 아름답고 과학적인 세계 유일의 소리문자,
더구나 배우기는 또 얼마나 쉬운지요.
하지만, 훈민정음을 반포한 이후에도
모든 사대부와 학자(선비)들은
어찌된 일이지, 오랜 학문적 관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훈민정음을 애용하지 않고
(한글은 일반 백성들과 궁궐의 여성들이 주로 사용했지요),
모든 글을 한자와 한문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유네스코)가 인정한 ‘세계기록유산’
(선생님 아시는지요? 우리나라는 13건으로 아시아에서 1위이며,
세계적으로는 공동 4위랍니다)의 기록물들이
99% 한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한자와 한문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들이 남긴 수많은 고전적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한자와 한문 문맹자’(文盲者)인 셈이지요.
비극 중에도 큰 비극이라 하겠습니다.
다행히 제가 근무하는 ‘한국고전번역원’(민족문화추진회 후신)이
1965년부터 그 한적(漢籍)들을 번역하여
53년 동안 책으로 펴낸 게 2천여책이 훨씬 넘습니다.
이 기관은 2007년부터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이 되었지만,
그전까지 42년 동안은 재단법인 민간단체였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지,
저는 몇 년 전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분개하고 개탄했습니다.
선생님도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일 것입니다.
‘문화의 저력(底力)’만큼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탄탄하고 풍부한데도
선조들이 남긴 사상(思想)과 역사문헌이 남긴 교훈(敎訓)을
우리가 향유(享有)하지 못하는 게 항상 마음에 아픕니다.
게다가 한글을 사랑하는 분들은(저도 역시 한글을 사랑합니다),
한자는 중국글자이므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한자와 한문을 즐기면 매국노나 되는 듯 치부),
오로지 한글전용(專用)을 고집하는 단견(短見) 때문에
우리의 어문정책은 엉망진창이 돼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문화를 고양시키는데 힘을 쏟았어야 하는데,
그동안 먹기 살기에 급급했고, 천민자본주의의 급속한 유입에다
군사독재의 군홧발이 30여년을 판치는 바람에
우리는 ‘문화 후진국’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제가 올해 3월부터 어린이신문인 ‘소년조선일보’에
‘기록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표제로 연재를 시작한 것도
우리 어린이들이 민족과 조상들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그동안 연재된 11회분을 복사해 보내드립니다.
한번씩 읽어봐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세계가 인정하는 ‘기록의 나라’답게,
우리는 선조들이 물려준 위대한 기록유산들에 대해
우리의 미래 ‘꿈나무’들이 가장 먼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드디어” “역사적으로”
우리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났습니다.
‘판문점선언’ 그 장면과 내용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일어나 빙긋이 웃을만큼 흐뭇하고 행복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대통령 한 명 잘 뽑으니 이런 기똥찬 일이 생긴다’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우리 남북한은 그렇게 되고 말 것입니다.
비록 우리 생전에 통일(統一)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같은 민족” “같은 역사” “같은 문화”를 공유하며
“같은 언어”를 쓰는데,
대체 무슨 걸림돌이 이렇게 오래
우리 조선반도의 상공에 머물러 숨을 막히게 했을까요?
생각하면 억장이 몇 번이고 무너질 일이고,
멀쩡한 허리가 아파 일어설 수도 없는 일이 아니고 무엇인지요?
선생님이 고등학교 시절 전주에 내려온 백범 김구선생님의
연설을 직접 들으셨다고 하셨지요?
그 이후 민족과 역사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셔서
대학시절 끝내 군(軍) 입대도 기피하셨다지요?
한민족끼리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눌 수 있느냐면요.
그런 민족의식을 갖고 나라를 사랑한 분이
어찌 선생님 한 분뿐이었겠습니까?
어쩌면 우리 민중 전체가 그런 비원(悲願)을 가졌기에
오늘날 그런 ‘판문점의 꿈’이 탄생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되었습니다.
꼭 통일의 그날까지 강녕하시기만을 빕니다.
선생님도, 우리 구순이 넘으신 부모님도 “그날”을 보셔야지요?
지금 병상에 계신 백기완선생님도,
아무 잘못없이 고향(故鄕)과 부모형제를 뺏기고
이제 곧 저승갈 날만 앞둔 수십 만의 이산가족들도
“그날”을 꼭 보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될 것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단지, 하나, 언제나 그렇듯,
‘진보(進步)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기에
연로하신 분들의 안위(安位)가 걱정일 뿐이지요.
얼마 전, 저와 저녁을 같이 드신 후 약봉지를 꺼내며
“이봐, 영록이. 이게 치매 초기약이라네. 요새는 자꾸 정신이
까막까막해지는 것같다”는 말씀을 듣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전화를 자주 못드린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그 진도(進度)가 빨리 나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초등학교-중고등학교-대학교 등 제도교육 16년 동안,
제가 존경하는 유일한 선생님,
고등학교를 아무렇게나 다니다 말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자꾸 격려하고 칭찬해주시는 바람에
그나마 대학도 진학했고, 신문사 기자도 되었지요.
그게 그렇게 고마워서 졸업 20주년기념 행사때
선생님을 업고 체육관을 한 바퀴 돌며 좋아했었습니다.
기억나시나요?
선생님이 고교 3학년때 제 담임선생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지금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생각하면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할 따름입니다.
아니, 어쩌면 천하 제일의 농사꾼인 아버지 밑에서
농사(農事)를 배우긴 했을 것입니다.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머릿속이 텅빈 농사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지요.
제가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님은
“남자가 태어나서 가장 해볼 만한 직업은 농사”라고
평소 말씀하셨지만,
저같은 반거들충이는 그런 농사꾼을 어찌 꿈이나 꾸었겠습니까?
사는 것, 살아가는 것은 ‘철학(哲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그런 철학을 해박한 지식이 아닌
그 작은 몸으로,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철학은 ‘자기 주체성’이겠지요.
쉽게 말하면 ‘줏대’라고 하겠구요.
선생님이 그래서 고마운 것이고,
‘선생님의 존재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저는 내년 6월이면 직장생활 37년을 마감합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전북 임실 오수면)에 갑니다.
부모님을 얼마 동안이나 모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저로선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때는 선생님도 가끔 뵙고 모실 수 있겠지요.
저는 이제 곧 직업인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꿈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직업’과 ‘꿈’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꿈’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의사와 변호사는 직업이지만,
아픈 사람과 억울한 사람을 돕는 일은 꿈이어야 합니다.
저는 재밌고 교훈적인 고전, 역사, 문화재 이야기들을
요청만 있다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몇 시간이든
상관없이 강의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꿈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꾼’ 스토리텔러(Story teller)가 되는 것이지요.
선생님,
멋지지 않은가요?
제 강의도 한번 들으시려면 오래도록 건강(健康)하셔야 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때 야간자습시간을 땡땡이를 쳐도
“너 나랑 비슷하게 생겼다. 언제 나랑 막걸리 한잔 하자”며
유난히 저에게 관대하셨던 선생님,
다른 친구들은 쇠잣대로 목덜미를 수도 없이 맞았건만,
저는 한번도 때리지 않았던 선생님,
담당인 지리과목시간에 어떤 교재도 없이
‘세계지리부도’ 한 권만 달랑달랑 들고오셔서
칠판에 세계 각국의 지도와 제원(諸元)를 판서하던 선생님,
그 완벽한 기억력으로 우리를 몇 번이고 놀라게 하셨던 선생님,
매일 종례시간때 ‘반가(班歌)’라며 ‘나그네 설움’을
60명이 합창하게 만들어 다른 여섯 반의 아이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부러움을 사게 한 선생님,
졸업 35년만에 전주 시내 한정식집에서 저녁을 먹고
10여명이 선생님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그때 그 노래(나그네설움)’를 맘껏 불러제켜
지나가던 행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돈지 십년넘어 반평생/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 들면 고향도 그리워져/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도 보네//
낯익은 거리다만 이국보다 차거워라/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어/
새벽별 찬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어디로 흘러 가랴 흘러 갈소냐>
선생님, 이상진 선생님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늘 지금처럼만 평강(平康)하소서.
못난 제자 엎드려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