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시간 / 최미숙
친구인 교장과 전남교육연수원에서 개설한 ‘전남 의(義)’ 직무 연수를 신청했다. 처음에는 의(義)라는 말 때문에 고리타분할 것 같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동안 원 없이 했으니 이제 머리 무거운 공부는 그만하고 싶었다. 그런데 공문을 자세히 읽어 보니 지역 문화 유적을 탐방하는 비교적 가벼운 1박 2일 연수였고, 날도 선선해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기도 했다. 이번 과정은 순천(낙안)과 구례 지역 의병 활동을 알아보고, 여순 사건 국군 부대 주둔지, 순천 부읍성 견학 등 순천에서 60년 넘게 살았으면서 한 번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고 지나쳤던 곳을 견학하는 과정이라 내게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았다.
10월 20일 금요일 오후 두 시, 순천 팔마체육관 앞에서 모여 먼저 구례 지리산역사문화관으로 향했다. 가까이 살면서도 처음 가 보는 곳이다. 전시관에는 호남 지역의 의병과 독립운동, 이순신 장군의 활약이 자료와 함께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다음으로 석주관성을 들렀다. 영남에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임진왜란 당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했던 곳이어서, 왜군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세웠다고 했다. 지금은 다 무너지고 높은 산으로 길게 이어진 돌담만이 옛 성터였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었다. 한쪽 구석에 자리하고 안내판도 눈에 띄지 않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위치였다. 바람까지 불어 더 황량했다. 다섯 시가 넘으니 금방 어두워진다. 다시 순천으로 돌아와 팔마체육관 부근 호텔에서 잤다. 집이 코앞으로 5분도 걸리지 않는데 다른 곳에서 자려니 웃음이 나왔다.
둘째 날은 숙소 건너에 있는 호남호국기념관을 찾았다. 6.25 전쟁사를 주제로 한 박물관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목숨을 바친 호국영웅들의 희생과 공훈을 기리는 호남의 유일한 기념관이라고 한다. 그동안 연수 때문에 여러 번 왔던 곳인데도 전시물을 눈여겨본 적도 없었고, 어떤 곳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에 가기 바빴다. 실은 세워진 지 2년이 넘었다는데 나는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들어가기 전 팔마체육관 한쪽에 있는 추모비에서 묵념을 했다. 탑 앞에 흰 국화꽃 바구니가 덩그렇게 놓여 있어 궁금해 물었더니 마침 이틀 전인 10월 19일 여순사건 75주기 행사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고장에서 많은 사람이 아픔을 당했는데 지금껏 무관심했다.
실내로 들어서자 ‘호국보훈의 빛’이라는 철재로 된 큼지막한 상징물이 정면에 있다. 전쟁 영웅들을 추모하려고 세웠다고 한다. 왼 무릎을 꿇고 총을 세운 군인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옆에서 보면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고민하는 군인 같았다.
2층 전시실로 갔다. 제1 전시실에는 6.25 전쟁의 발발부터 정전협정을 체결하기까지 급박했던 모든 과정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여 줬다. 특히 군인들이 가족에게 보낸 실제 편지는 읽는 내내 가슴 저몄다.
제2 전시실은 전쟁에 참여했던 호남의 영웅들 이야기로 입구에 학도병, 군인, 경찰의 모자가 걸려 있고 특히 학도병 사진이 많았다. 그중 어리디어린 열여섯 학생들이 군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눈에 띈다. 지금 나이로 치면 중학교 3학년인데, 이런 아이까지 전쟁터로 나가야 했던 현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화도 났다. 어린 자식을 전쟁터로 보낸 부모 마음은 어땠을지를 생각하니 먹먹하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당시 학생들이 다녔을 교실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칠판에 적힌‘떠든 사람’이라는 단어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평상시였다면 그 또래의 아이들답게 이름이 적힌 누군가는 항의하며 큰소리가 나기도 했겠지만, 전쟁은 교실도 아이들 미래도 모두 망쳐 버렸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도 누리지 못하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던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낸 학생들이 참 안됐다. 그리고 출구에 다시 걸린 더럽고 낡았고 깨진 학도병 군인 경찰의 모자, 아마 그만큼 치열하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제3 전시실에는 이름도 없이 죽어간 많은 병사 중 아직 돌아오지 못한 영웅들 영상이 계속 나왔다. 그 수가 무려 12만 명이 넘는다고 해 놀랐다. 국방부 유해 발굴감식단이 현재도 노력한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을 것이다. 집단으로 묻혀 엉망진창이 돼 버린 뼈를 들어내 흙을 털고 하나하나 맞추는 영상을 보고는 마음이 아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참여한 선생님 모두 가슴 먹먹한 채로 호남호국기념관을 나왔다.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편안하다는 사실을 새기며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다음으로 모교인 순천남초등학교와 어린 시절 엄마 시장갈 때 자주 따라다녔던 순천 부읍성 남문터를 보고 마지막으로 낙안 읍성에 갔다. 관광객이 많았다. 성곽을 도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예정했던 시간보다 30분 쯤 일찍 돌아가기로 했다. 다른 때보다 훨씬 피곤했다.
지금껏 순천 토박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이제부터는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정작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보다 모르는 게 많아 사실 부끄러웠다. 그리고 내가 살던 동네였던 ‘문화의 거리’에서 유명한 식당도 젊은 선생님이 훨씬 더 잘 알았다. 결혼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살았던 동네가 바뀌고는 가 보질 않았는데, 그래도 이번 기회에 구석구석 제대로 살피고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길도 걸었다. 그때 사진이 없어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잠깐이나마 돌아가신 엄마도 만났고,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 행복했다.
짧은 1박 2일이었지만 고향 순천의 속살을 조금이나마 알게 돼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