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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강 창세기 3:1~10 네가 어디 있느냐 50.25
26.09.01(화)
우리 지난 시간부터 창세기 3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1절 다시 한번 보실까요?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요한계시록 20장 1절 2절에 의하면 바로 창세기 3장 1절에 있는 뱀은 사탄이고 마귀라고 그랬습니다.
이 사탄이 남자와 여자를 공략을 했는데 제 1차 공략 대상을 여자를 삼았죠
그 이유는 남자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 받았지만 여자는 남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받았단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책임감이 남자보다 훨씬 덜하겠죠. 그죠 항상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신뢰도가 떨어지는 사람을 공략한다는 것이죠.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는 한 사탄은 우리를 공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탄이 여자를 공략한 방법이 칼이나 폭력을 쓴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말로 공략했다고 그랬죠
그래서 우리가 평소에 누구와 대화를 하는가
우리가 누구를 평소 우리 대화의 파트너로 삼고 있는가 그건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랬습니다.
사탄이 여자에게 말하면서 하나님 호칭을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호칭 엘로힘은 지고의 하나님 강하시고 능력이 크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호칭이라고 그랬죠
그래서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실 때는 전부 호칭이 하나님 엘로힘이에요.
그런데 창세기 2장 7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기 시작하시면서부터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할 때 하나님 앞에 여호화를 같이 붙였습니다.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 보잘것 없는 인간에게 당신의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강조할 때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여호와단 말이죠.
그래서 사람을 만드시면서부터는 그 사람과 당신의 언약 속에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기 위해서 계속 여호와 하나님인데 사탄은 여자에게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제외하고 모든 종교에서 인간들은 그 종교가 지향하는 신을 두려워한다고 그랬어요.
왜냐하면 모든 종교의 신은 그 신의 크고 강함만을 강조하거든요. 인간에게 언약을 주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이루어가는 신은 없단 말이죠.
따라서 하나님이 신이 인간에게 언약을 주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지 않을 때 인간에게 신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신이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하구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너무너무 많아요.
때로는 폭군처럼 여겨지기도 해요.
아주 사탄이 교묘하게 하나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므로 피조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원망 불평 이런 것을 슬쩍 고조시킨단 말이죠.
하나님이 너희더러 지금 여자를 공략하면서 너더러 이렇게 말하지 않고 너희더러 복수로 이야기 했지요
사탄은 단수를 공략하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목적은 모두여요 지금 여자를 징검다리 삼아서 남자까지 공략하려는 것이죠.
그리고 말하기를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가장 평소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실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반어법으로 공략을 했습니다.
모든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거 전혀 아니죠.
모든 실과를 다 먹어도 돼요. 그죠 먹어도 돼요. 못 먹는 것은 딱 하나 선악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완전히 부정하고 모든 것을 먹지 말라 하더냐고 반어법으로 물으면서 여자로 하여금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거죠.
나머지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감사의 조건이 아니고 그래 그건 왜 못 먹어 그 못 먹게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 먹지 말라 하신 것만이 가장 큰 문제인 것처럼 사탄이 여자를 뒤흔들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2절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뭐 무슨 단어가 빠졌다고 그랬죠 예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으나 모든이 빠져버렸습니다.
모든 열매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여자에게 감사의 조건이 못 돼요. 하나 못 먹는 것이 이제 불평거리가 이미 되어 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동산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여자도 여호와라는 호칭을 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따위는 이미 안중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나님께서는 먹지 말라고만 명령하셨지 만지지 말라고는 안 하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따서 먹지 않으니까 만질 이유도 없었죠. 그죠 그런데 마치 그동안 만지지 못한 것도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그것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원망거리가 되었단 말이죠.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반드시 죽는다가 죽을까 하노라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 신뢰심을 상실해버렸습니다.
마음이 지금 휘청거린 거죠.
사탄이 그걸 놓칠 리가 없지요
4절 보시겠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래되 너희가 너희가
또 다시 뱀은 여자에게 너희가 라고 복수로 이야기합니다. 이 뒤에도 또 너희가 그래요. 세뇌를 시킵니다
여자에게 누가 범죄하면 반드시 남편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을 은연 중에 지금 세뇌시키고 있는 거예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2장 17절 보십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반드시 공표하십시다.
3절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 까 까에다 공표하십시다. 까
4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결코에다가 공표를 해서 반드시 까 결코 이걸 연결을 하십시다.
08:27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거여요.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지 반드시와 관련이 돼요. 그런데 사탄은 언제든지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인간의 입장은 항상 어떤가 까여요. 까 이럴까 저럴까 믿을까 말까
예수 안에서 의인이라는데 내가 의인일까 아닐까 반드시 결코 까 이것이 하나님과 사탄과 인간의 관계를 우리에게 참 잘 보여줍니다.
반드시라고 말씀하신 것을 사탄은 결코라고 부정을 했는데 인간은 까라고 하면서 50%는 긍정이고 50%는 부정이에요.
여러분 중요한 사실은 내가 50%를 긍정하면 믿는 겁니까? 아닙니다.
믿음은 시장에서 파는 물건 값이 아닙니다.
시장에서 파는 물건값은 100원을 50원에 깎을 수도 있고요. 뭐 바겐세일 하면 뭐 더 많이 깎을수도 있잖아요. 그죠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1%만 부정해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반드시 100% 믿을 때만 믿으면 거기에서 1%만 떨어져도 100% 안 믿는 것과 사실은 똑같은 거예요.
10:16
여자가 까 까 하는 믿음을 갖다가 결국 스스로 파멸했는데 이와 같은 여자의 자세는 우리로 하여금 요셉이 신앙인으로서 얼마나 우리의 모범이 되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가나안에 부잣집 열한 번째 아들로 아버지 총애를 받고 살다가 형들에게 팔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집트에 가서 이집트 친위대장 경호대장 보디발 집의 종으로 팔려갔죠
그런데 요셉이 얼마나 신실하게 열심을 다해서 충성을 했던지 보디발 장군이 그 요셉을 신임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 총무로 삼았습니다.
그 집은 단순한 개인 집이 아니라 왕의 국사범들을 가두어 두는 옥까지 딸려져 있는 대 저택이죠.
거기에 모든 살림을 다 맡겼습니다.
그러면서 보디발 장군이 이렇게 이야기했죠.
뭐든지 네가 알아서 해라 너한테 다 맡긴다 너한테 금하는 건 딱 한 가지인데 내 아내한테 손대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여자에게 너희들 뭐든지 다 먹어라 그러나 선악과를 먹으면 안 돼 그 선악과야말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의 차이를 보여주는 구별점이라 그랬죠
보디발집에서 요셉은 뭐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보디발과 요셉의 차이가 있어요.
그 차이가 드러나는 구별점이 뭔가 보디발의 아내여요 그 아내에게 만약에 요셉이 흑심을 품는다면 보디발이 자기 아내를 금했다고 하는 것은 너 반드시 죽어 너 반드시 대가를 치를 거야 이 이야기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기 39장 1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여러분
그 여자가 보디발 아내가 요셉을 한 번 유혹한 게 아닙니다.
날마다 유혹했습니다
날마다 유혹했다는 건 뭘 의미해요.
너하고 나하고 관계를 가져도 내 남편이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요셉이 처음에 1~2번은 깨끗하게 거절할 수 있겠죠.
그런데 날마다 결코 아니다. 결코 아니다. 하고 여자가 유혹하면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 까 이렇게 돌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요셉이 일을 하다가 여자가 나타나면 피했다는 거예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단어 하나하나를 눈여겨서 보면 여인이 얼마나 집요했고 요셉이 얼마나 그 중심이 분명했는지를 알게 되죠.
그죠 창세기 39장 12절입니다.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어느 날 요셉이 일을 하는데 마침 아무도 없었습니다. 대낮에 그랬더니 그 여자가 들어와서 요셉을 붙잡았단 말이죠.
그랬더니 요셉이 뿌리지는데 여자가 놓지를 않으니까 옷을 벗어서 옷만 주고 자기는 나갔습니다. 요셉은 주인이 이야기한 반드시 거기에 1%도 바게인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남의 여자에게 음심을 품으면 안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보디발의 명령이 아니라 자신이 경외하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만약에 거기에서 요셉이 1%만 바게인 했더라도 결국 넘어갔을 거예요.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반드시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반드시로 지키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안 쓰시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안 쓰시면 하나님 말씀은 죽은 말씀이에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 아니시죠.
우리 자신들을 깊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쪽인가 결코 쪽인가 아니면 까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우리가 꽤 괜찮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가?
우리가 요셉과 같은 중심을 가질 때에만 말씀이 우리를 통해서 능력으로 역사하게 되는 것이죠.
5절말씀 보시겠습니다.
너희가 또 사탄은 복수로 이야기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그것을 먹는 날에는 이제 결코 안 죽는다고 지금 또 한 번 흔들었죠.
그리고 너희가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여기에 날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용은 날도 되지만 때 순간이라는 말도 돼요.
그래서 이 본문의 원어를 그대로 그 뉘앙스를 직역하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바로 그때에 이 말이에요. 먹자마자 이 말이에요.
먹자마자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너희들이 먹고 나서 1년 2년 있다가 이런 현상이 난다 그러면 여자가 솔깃 안 하겠죠.
네가 먹자마자 이런 현상이 나타나 항상 사탄은 우리에게 조급증을 줍니다.
지금 당장 안 하면 큰일 날 것처럼 해요.
그 사탄이 여자에게 조급증을 주는 겁니다.
네가 먹자마자 너희 눈이 밝아 또 너희죠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주시고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너희들이 인정하라는 거잖아요. 그게 믿음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사탄은 네가 그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된다.
네가 하나님처럼 되니까 하나님과 네 사이의 차이를 없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이 되라고 유혹합니다. 네가 하나님처럼 되라는 거예요.
여러분 세상에도 부모하고 자식 간의 차이가 있어야 되잖아요. 부모하고 자식이 구별 안 되는 집이 있으면 그건 콩가루집입니다. 그죠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차이가 없다.
그 말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언제든지 사탄은 그 차이를 부정해버려요
그리고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네가 이것만 먹으면 먹자마자 네가 하나님과 똑같이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하나님이 아심으로 넌 못 먹게 한다는 거요
하나님에 대한 원망에 불을 질러 놓은 것이죠.
하나님 참 치사하구나 째째하구나 결국 이렇게 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 이 사탄의 말의 내용을 한번 보십시오.
이 사탄의 말이 진실입니까? 네가 이 열매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질 것이다.
그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졌습니까? 아니에요.
어둠에는 밝아지고 진리에는 어두워졌습니다.
오히려 눈이 먼 사람이 되죠.
그 열매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그 열매를 먹고 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되었습니까? 천만에요. 그 열매를 먹은 뒤에 악에는 한없이 밝아졌는데 선에 대해서는 둔감해졌습니다.
선악을 구별할 줄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지금 사탄은 새빨간 거짓말로 인간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거짓말인 사탄의 말을 더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스스로 경계해야 될 점이 있는 거예요.
이 이후로 인간은 언제든지 진리는 잘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거짓 사슬에 대해서는 너무너무 귀를 잘 기울입니다.
20:30
오직하면 사도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했겠습니까?
자신이 가서 함께 살면서 세웠던 고린도 교회가 자신이 떠난 뒤에 거짓 선지자가 침투해서 거짓 복음을 퍼뜨렸는데 고린도교의 교인들이 사도바울의 말이 다 틀렸고 그 거짓 선지자들 말이 다 맞다고 부화뇌동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고린도 후서 11장 4절을 통해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진리를 전하고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면 안 믿는데 복음과 다른 거짓 복음 거짓 예수 거짓 영을 전하면 어떻게 너희들 그렇게 잘 믿느냐 이 말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정말 진리 위에서 굳건하게 우리 스스로를 세우지 아니하면 인간 자체의 유한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진리를 듣기보다는 세상의 거짓 사슬에 현혹되기가 쉬운 존재들인 것이죠.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자 이제 사탄이 여자에게 결코 안 죽는다
너희들 그 열매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된다 라고 강하게 메세지를 던졌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히브리말 그대로 번역하면 그러자 여자가 그 나무를 보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나무를 예전에는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봤죠 왜 그 나무가 동산 한 중간에 있습니다. 오며 가며 늘 보던 나무예요. 그죠 그런데 사탄의 꾀임에 빠져서 그의 말을 듣고 여자가 그러자 그 나무를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됐는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러분 나무 자체가 변했습니까? 아닙니다. 나무는 변함없이 그대로 서 있습니다. 그런데 나무가 달라져 보여요.
예전까지는 한 번도 그 나무를 보면서 먹기에 좋고 보기에 눈에 좋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욕의 대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는 그 순간에 나무가 달라져 보인단 말이죠.
왜 그렇죠. 그 나무를 보는 이 여자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늘 그대로 있어요.
그런데 세상을 보는 내 마음에 따라서 세상은 지옥도 되고 천국도 됩니다. 똑같은 새를 놓고요. 내 마음이 한없이 기쁠 때는 새가 노래한다 그러고 내 마음이 우울하고 기분 나쁘면 새가 공연한 새 보고 운다 그래요.
여러분 원효대사 이야기 잘 알지 않습니까?
당나라에 수련하러 가기 위해서 실라를 떠나서 길을 가지 않습니까?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자야 되는데 민가가 안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그저 이 으슴푸레한 달빛에 그저 지형이 올망졸망한 그런 곳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올망졸망한 그 파인 골 사이에서 잠을 잤는데 마침 보니까 옆에 또 바가지에 물도 있단 말이죠.
그래서 야 이거 참 운이 좋구나 그리고 그 바가지 물을 맛있게 먹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까 거기가 어디라고요. 공동묘지다 말이죠. 올망쫄망한 게 다 무덤이에요. 그 사이에서 지금 잔 겁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 한 바가지 물 먹고 바가지 베고 베개 삼아 잤는데 일어나 보니까 해골 바가지 그 해골 바가지에 고인 물을 그렇게 맛있게 먹은거여요.
그 해골 바가지라는 사실을 알고 원효대사가 구토질을 하죠. 그러다가 깨닫습니다. 아 이게 모든 게 다 마음가짐이구나
내 마음이 이게 맛있는 물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달고 시원했는데 내 마음이 이걸 해골이라고 딱 인식하는 순간에 어제 자기 전에 먹은 물이 구토로 올라온단 말이죠.
한 번도 그 나무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적이 없었는데 사탄에게 마음을 뺏기고 나니까 지금 이 여자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먹는 것 보는 것 탐욕 본능과 탐욕의 노예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여러분 이 일이 어디에서 일어났습니까?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에덴 동산에서도 마음을 빼앗기니까 한 인간이 본능과 탐욕의 대상으로 아주 추한 인간으로 전락합니다. 하물며 이 세상을 사는 우리가 우리 마음을 확고하게 진리 위에 세우지 않고 이와 다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위를 보십시오.
온통 먹자판에 온통 보이는 것은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겁니다.
온 세상이 탐욕대로 살라고 지금 우리를 인도해요. 미혹시켜요 온 세상이 마음을 상실한 사람들 천지라는 거죠.
그렇다면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내 마음을 지키지 않고서는 절대로 신앙인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잠언서 4장 23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요
뭐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이유는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 세상에서 지켜야 할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야 한다. 왜 생명의 근원이 여기에서 난다 이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요
그 짧은 잠언서 속에 마음이라는 단어가 무려 91번 나옵니다. 네 마음을 명철해 두라 네 마음을 다스리라 네 마음을 정결하게 하라
왜 마음이 생명의 근원이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시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고 사탄이 역사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내 마음을 말씀으로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사탄더러 내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내어놓는 것과 같단 말이죠.
요한복음 13장 2절입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그럼 마귀가 가룟 유다로 하여금 너 예수님 팔아먹어라 은 30량 받아라 귀에다 대고 속삭인 게 아니에요. 마음에 그 생각을 넣었다는 거예요.
아나니아가 하나님을 속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속여도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 5장 3절이에요.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2장 37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뭘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그 다음에 마음 다음에 뜻인가요?
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상하죠.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목숨 같아요.
그럼 목숨이 제일 먼저 나와야죠 네 목숨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해라 이렇게 말씀하셔야 될 것 같은데 마음을 다하고 마음이 먼저 나와요.
30:12
여러분 내 마음을 하나님께 안 드리면 절대로 생명을 못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마음을 먼저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 참수형 당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일 먼저 네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해라 우리가 말씀 위에서 우리의 마음을 지키고 말씀으로 우리의 심정을 채워 넣어야 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6절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따먹고 우리말로는 따먹고 한 동사로 되어 있죠.
그런데 따먹는다. 따먹는다.
이게 한 동작으로 되는 거예요.
히브리말은 여자가 그 나무를 열매를 땄다 그리고 여자가 그 열매를 먹었다. 두 동작으로 되어 있어요.
자 땄다 먹었다. 왜 이렇게 표현했을까요?
그냥 여자가 그거 딱 그냥 먹었다. 이렇게 해도 되잖아요. 그리고 그 여자는 그 열매를 땄다 그리고 그 여자가 그 열매를 먹었다.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지만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는 경우가 많잖아요. 잘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한번 그 상황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한 발만 뒤로 물러서면 충분히 생각하고 안 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얼마든지 있었는데 생각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짓고 범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어떤 순간에서든 한 템포를 늦추고 한 번 호흡하고 주님 앞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죠.
6절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자 사탄이 너희가 너희가 아주 집요하게 세뇌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여자가 그 열매를 먹고 남편에게도 주었더니 남편도 먹었다는 거예요.
여러분 여자로서는 이건 당연한 일이죠. 왜 그렇습니까?
여자는 역할이 뭐예요? 돕는 배필이여요. 내가 먹고 좋으니까 남편도 줘야죠 그죠
그러니까 창세기 2장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자가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지 않으면 세상에 좋은 것만을 남편에게 권하면 자신과 남편을 동시에 파멸시킬 수 있단 말이죠.
그러면 이것이 여자만의 잘못으로 끝납니까?
그렇지 않죠
고린도 후서 15장 22절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성경은 그 최초의 범죄를 아담 남자의 범죄로 단정합니다. 왜그렇죠. 가장은 아담이잖아요. 하나님으로부터 그 말씀을 직접 받은 사람은 아담이여요. 여자는 돕는 배필이어요.
그러면 그 여자가 잘 돕도록 그 여자를 지키고 보호하고 가장으로서 역할을 할 의무와 책임은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 책임을 남자가 다 잘 못한 것이죠.
이건 우리에게 참 중요한 것을 시사합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 믿음이 훨씬 더 빨리 시작되고 더 깊어지잖아요. 그런데 가장이 신앙 위에 바로 서기 전까지 여자 혼자서 믿음 좋은 것은 한계가 있다는 거예요.
남자가 바로 서야합니다. 남자가 바로 설 때에만 여자의 깊은 신앙심은 아름답게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최초의 남편과 여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파멸시키는 불행을 주고받았다.
이건 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되죠.
어느 부부와 두드러지게 비교가 됩니까?
신약 최초의 부부 마리아와 요셉의 부부와는 대단히 대조적이죠.
여러분 만약에 요셉이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 안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자기 약혼자가 아이를 베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조용히 파혼할라고 그랬죠 정말 위대한 남자죠 그죠
그런 경우에 대개 어떻게 해요.
시끄럽게 끝내야 돼 왜냐하면 이 여자를 나쁜 여자를 만들어야 헤어지는데 내가 정당성이 생길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요셉은 조용히 끝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자기가 깨어 있을 때 직접 나타난 것도 아니고 꿈에 나타났지 않습니까? 네 처가 가진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 처 데려오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만약에 아침에 일어나서 요셉이 개꿈이다. 이랬으면 끝나는 거잖아요. 만약에 요셉이 그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마리아는 돌에 맞아 죽어야죠
율법에 의해서 간음한 여자가 되니까
그런데 자기 아이를 베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자기 아내로 받아들이잖아요.
그리고 그 아이가 태어난 뒤에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잖아요. 여러분 이게 말이 쉬워서 그렇지 얼마나 대단한 일이에요.
제가 제 책에도 썼습니다마는 바로 그 요셉과 마리아와 관련해서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지금 세검정에 있는 예능 교회가 옛날에 연예인 교회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처음에는 연예인들끼리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연예인들 몇 명이 모여서 마태복음 1장 성경 공부를 하는데 이게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어떻게 처녀가 아이를 낳냐 어떻게 자기 약혼자가 아이를 배어왔는데 남자가 그 여자를 받아주냐 계속해서 그걸로 설왕설래하니까 입을 딱 다물고 있던 구봉서 장로님이 그때는 구봉서 성도님이겠죠.
하시는 말씀이 아니 제 서방이 괜찮다는데 왜 너희들이 난리야 여러분 남의 서방이 난리를 치는데 그 서방은 더 난리쳐야죠 그죠
남의 서방마저도 난리치는 일을 그 서방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믿음의 가장이죠. 그 믿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여성도님들의 신앙도 출중해야 하지만 우리 모든 남자들은 신앙의 가장으로서 정말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가정이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아니라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처럼 그리스도를 잉태하고 이 세상에 새로운 빛을 비추는 가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7절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여기에 밝아졌다 하는 히브리말은 파카흐인데요. 밝아졌는데 눈이 어떻게 밝아졌어요.
예 전혀 수치스럽지 않던 것이 수치스러워지는 쪽으로 이상하게 눈이 밝아졌어요.
진리에 대해서 눈이 밝아진 게 아니에요.
부끄럽지 않던 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영혼의 순결을 잃으면 영혼이 죄로 물들면 이처럼 인간은 자기 스스로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려요
내가 죄로 물들어 있으면 나 자신에 대해서 당당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부끄럽지 않던 것이 부끄러워져서 무화과 나뭇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여기에서도 우리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죠.
질문과 의문은 다르죠 그죠 의문은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이고. 질문은 더 잘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죠.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 수없이 많은 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자와 여자가 수치심을 느꼈을 때 범죄하고 죄를 짓고 난 뒤에 왜 하필이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리려고 했느냐 하는 거예요.
히스기야 왕이 아팠을 때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38장 21절을 통해서 이렇게 얘기해요.
한 뭉치 무화과를 가져다가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낳으리라
왕의 사신이 와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어떻게 하면 왕이 낫겠습니까? 그랬더니 무화과 뭉치를 환부에 바르시오. 그러면 낫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여리고에 예수님께서 가셨을 때 세리장 삭게오가 예수님이 보고 싶잖아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이 안 보이거든요. 그래서 어디에 올라갔다고요. 뽕나무에 올라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뽕나무라고 번역된 헬라의 원문은 뽕나무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개정 개역 성경은 돌 무화과 나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삭게오가 올라간 나무는 뽕나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야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어디서 보셨다고요. 무화과나무 아래 성경에서 무화과는 늘 생명의 의미로 나와요.
죽을 뻔한 히스기야가 무화과를 종처에 바르고 생명을 얻었죠. 삭게오는 무화과나무 돌 무화과 나무에 올라갔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생명을 얻지요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밑에 있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생명을 얻지요 성경에서 무화과는 생명입니다.
자 이건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우리에게 줘요 인간은요 죄를 짓고 나면 자기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간에 참 생명에 대해서 절로 목말라 합니다.
지금 아담과 여자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들이 수치스러워졌습니다.
그때 자기들도 모르게 생명이 목마른 거여요.
그래서 무화과 나무로 가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적인 치유책이 될 수 없었죠. 그 무화과는 잠시 가려지지만 해만 뜨면 시들어 버리잖아요.
그 생명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결된단 말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 주위에 살인 강도하고 흉측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분들의 범죄가 흉측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우리가 포기하면 안 돼요.
그런 사람에게 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놓으면 그 말씀이 생명인 줄 알 때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더 크게 회개하잖아요.
왜냐하면 죄를 지은 만큼 자기도 모르게 생명이 더 갈증 나기 때문인 거여요.
8절
그들이 그날 그날 그날 굉장히 중요하죠.
그들이 범죄한 그 다음 날 일주일 후 열흘 후가 아니라 그들이 범죄한 바로 그 날입니다.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의 거니시는 누가 사탄은 뭐라고요. 여자는 뭐라 그랬죠 그런데 지금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셔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났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에게 언약의 하나님이 약속의 하나님이 당신의 말씀을 통해 인간을 구원해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동산의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지라
죄는 자신을 자꾸 숨겨요 그래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남자와 여자는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 너희들 그런 존재구나 그리고 그냥 돌아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한심한 인간들을 외면하시지도 않았습니다.
9절 무슨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 죄를 짓고 하나님마저 피해서 숨어버린 인간을 예수님께서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어디 있는지 모르셔서가 아니죠.
네가 왜 거기 있느냐는 겁니다. 네가 있을 곳은 그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과 너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거야.
바로 이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사탄의 유혹을 받고 금단의 나무를 먹고 그리고 그들이 스스로 수치스러워져서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기네들을 가리고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때 이 에덴 동산은 흑암이요. 절망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어주심으로 이 에덴 동산에 지금 빛이 임하는 겁니다. 소망이 임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 되세요. 우리의 하나님이세요. 여러분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아무개야 너희가 어디 있느냐 하고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불러내셨잖아요.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심정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늘 이 세상에 우리의 마음을 뺏기고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아니하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각자를 찾아오셔서 우리 각자를 부르시면서 너 어디 있니 너 왜 거기 있니 왜 나 앞으로 나오지 않니 말씀하십니다.
다음 시간에 보시겠습니다마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그 음성에 아담과 여자가 응답함으로부터 그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잖아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기의 하나님 창조주의 하나님이시잖아요.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이 음성에 응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가 아무리 절망 속에 지금 처해 있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아무리 곤고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새롭게 그분과 함께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밤이 그 출발점이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매일 보던 나무가 전혀 다른 나무로 그에게 각인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자기 수치심에 숨어 있었습니다.
자신만 범죄한 것이 아니라 남편까지도 범죄하게 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외면하시지 아니하시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찾아와 주심으로 범죄한 그들의 삶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여호와 하나님 되어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 가운데 있을 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우리를 찾아오시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드리기보다 세상에 더 많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오늘도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창세기 3장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너희들 왜 거기 있니 하고 다시 우리를 불러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주님 하나님의 이 음성에 우리 모두 인격적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낮이나 밤이나 하나님의 이 음성에 응답하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이루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들이 날마다 이루어지게 하시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 속에서 날로 새롭게 빚어져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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