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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섭리(1)
20221106 / 다니엘 4:33-37
단 4:33-35 / 이 말씀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느부갓네살에게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난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사람 사는 곳에서 쫓겨나 소처럼 들녘에서 풀을 뜯어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을 맞으며 살아야 하였고 그의 머리칼은 독수리 깃털처럼 더부룩하게 자라났으며 그의 손톱과 발톱도 새 발톱처럼 자라났다. 34) [하나님을 찬양하는 왕] 왕이 말하였다. `일곱 해가 지났을 때 내가 하늘을 쳐다보았더니 그제야 제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원토록 살아 계시는 그분에게 영광을 돌렸다. 주께서는 이 세상을 영영토록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35) 주께서는 땅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내려다보시지요. 하늘에 날아다니는 독수리도 땅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도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시는 분. 그 누가 감히 주님의 뜻을 거스르랴! 주께서 하시는 일 그 누가 감히 이러실 수 있느냐고 입을 뗄 수 있으랴! 36) 비로소 내가 제정신이 들었을 때 내가 다스리던 이 제국의 영광과 위엄과 영예가 회복되었다. 나를 돕던 관료들과 귀족들도 모두 나를 환영하였고 내 왕권도 되찾았다. 나는 전에 누렸던 영예보다 더한 영예를 누릴 수 있었다. 37) 그래서 나 느부갓네살은 이제 하늘에 계신 임금님께 찬양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노라. 그분을 드높이 기리노라.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올바르시다. 그분은 젠체하며 거만하게 목을 곧추세우며 살아가는 자들도 내리 꺾으실 수 있는 분이다.'
1. 하나님의 통치
다니엘 4:35은 ‘하늘의 군대와 땅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신다’는 멋진 고백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고백을 한 사람이 다니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라는 사실이다. 느부갓네살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다니엘 외에는 아무도 해석할 수 없는 신상에 대한 꿈을 꾸게 하셨고, 다니엘은 그 꿈을 해석하여 세상 나라들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교만하여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이 하나님인 그것처럼 행동했다. 그러자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알 수 없는 꿈을 주셨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그를 특정 기간 벌하시겠다는 꿈이었고, 다니엘의 꿈 해석은 그 일에 대한 예언이 되고 말았다.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에게 들었던 꿈의 해석의 내용은 그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졌다.
꿈의 해석이 있은 후 12개월이 지나 느부갓네살 왕은 왕궁의 지붕을 거닐며 큰 성 바벨론을 자신의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고 자신의 도성으로 삼으며 위엄과 영광을 나타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스스로 그 말을 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부르며 이르기를 그의 나라의 왕위가 떠났음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느부갓네살이 사람에게서 쫓겨나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고 7년을 지나서 하나님이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고 자기 뜻대로 그것을 주심을 알게 될 것을 선포하셨다. 이 선포 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사람에게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먹고 왕궁이 아닌 들에서 지내서 이슬을 맞으며 머리털은 독수리의 털과 같이 무성하게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같이 되었다.
이는 느부갓네살 왕이 미친 자가 되어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음을 의미하며 신하들은 이런 상황에 있는 느부갓네살 왕을 왕궁으로부터 쫓아내기로 결의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정하신 기간이 다 되었을 때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보자 그의 총명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높이며 감사하고 찬양하며 경배하였다. 하나님의 권세가 영원한 권세이며 그 나라도 영원함을 고백하며 하늘과 땅의 주관자로서 자기 뜻대로 행하시고 모든 것을 행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찬양하였다.
느부갓네살 왕이 다시 정신이 돌아오자 그는 자신의 나라와 영광을 회복하고 다시 왕위에 복귀하여 모사와 관원들 위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되었다. 결국,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 하나님을 찬양하며 칭송하고 경배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진실하고 의로우시며 교만한 자를 낮추시는 분이심을 고백하였다.
2. 자연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다스리신다. 출애굽 직전에 애굽에 내렸던 10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물, 개구리, 이, 파리, 병원체, 우박, 메뚜기, 흑암 등은 모두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징계였다. 그런데 징계의 대상은 애굽사람들은 물론 그들이 믿는 신들을 향한 것이었다. 애굽사람들은 각각의 자연물들을 관장하는 신들을 만들어 놓고 섬겼지만, 하나님께서 자연물을 마음대로 다스려 애굽을 징벌하는 동안 그들의 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은 모두 가짜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신이시며, 그분은 창조주이시므로 자연을 마음대로 통치하셨다.
그런 하나님을 모시고도 엘리야 시대 때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를 신으로 모셨다. 바알은 비를 관장하는 신이었다. 비가 없으면 농사도 목축도 불가능했던 이스라엘의 지형적 특성상 비의 신이라 여겨진 바알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알과 바알숭배자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하늘의 문을 닫고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를 잠가 버리셨다.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을 예언했던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과 1:850의 대결을 하였다. 기도를 해서 먼저 불을 내리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대결이었다. 850명의 우상숭배자들은 춤을 추고 자신들의 몸을 칼로 자해하며 피투성이가 된 채 라이브쇼를 했지만,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불을 내리셨다. 그리고 잠시 후, 3년 반이나 닫혔던 하늘을 여시고 비를 내리셨다. 하늘도, 비도, 불도 모두 하나님의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 애굽의 10재앙에서도 보았듯이 하나님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무생물에 제한되지 않는다. 동물들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1:850의 싸움 직후 극도의 외로움과 우울감 속에 지쳐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까마귀 떼를 보내셔서 아침과 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제공하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의 신성은 바로 자연을 다스리는 것을 통해 드러나곤 했다. 풍랑을 잠재우시기도 하시고,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던 물고기를 두 척의 배에 가득 채울 만큼 잡히게 해주시기도 하셨다.
3.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국가들의 운명까지도 통치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며, 폐하기도 하신다(단 2:21). 본문에서 보았듯 이방 왕 느부갓네살을 맘대로 세웠다 던졌다 다시 세우기를 식은 죽 먹듯 하신다. 다니엘을 통해 앗수르,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제국들에 대해 미리 예언을 해주셨고, 수백 년을 흐르며 그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신다.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라고 강설한다(행 17:26). 각 족속과 나라가 어떤 경계 안에서 살게 될지, 각 나라가 얼마나 지속할지 등의 모든 흥망성쇠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유럽까지 정복하여 자신만만하게 살던 때, 그의 집에 원숭이 한 마리가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침마다 그 원숭이의 재롱을 보며 즐겼는데, 어느 날 갑자기 원숭이가 알렉산더 대왕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 사건 때문에 그는 24시간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나중에 어느 역사사가 말하기를 ‘원숭이 한 마리가 한 사람의 손을 깨물어 그로 인해 인류의 역사가 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느냐?’고 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대포를 중요한 위치에 배치해 놓은 후 승리를 장담했다. 그런데 작전 개시 바로 전날 밤에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결국 이 비로 말미암아 대표 바퀴가 진흙 구덩이에 빠져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나폴레옹은 그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소나기로써도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으신 것을 알 수가 있다.
역사의 처음과 끝을 정하시고 순간순간 역사 속에서 섭리하시는 진실한 역사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4. 개인의 삶의 환경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자연과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께서 각 개인의 삶을 다스리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한나의 찬양처럼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시기도 하시고 높이시기도 하시는 분이다(삼상 2:6-7).
엘가나에게는 두 아내가 있었다. 한 사람의 이름은 한나이고, 한 사람의 이름은 브닌나이다. 그런데 브닌나는 자식이 있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사무엘상 1:6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하나님이 그녀의 태의 문을 닫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아이를 낳고 못 낳는 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있다.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지만 엘가나는 한나를 사랑했다. 하지만 브닌나는 더 사랑을 받지 못해서 그랬는지 한나를 격분하게 했다. 브닌나가 격분시키므로 말미암아 한나가 먹지도 않고 울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남편 엘가나가 위로해 주었다.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냐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삼상 1:8) 그러나 한나는 마음이 괴로웠다. 축복인가? 저주인가? 이 괴로움이 한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했다.
삼상 1:11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이 비천한 계집종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제발 제게 아들 하나만 허락하셔서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그 아들을 주께 바치겠습니다. 그 아들을 일평생 주님의 사람으로 삼겠습니다. 그 아들의 머리에 칼을 대어 깍지도 않겠습니다.'
한나가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지 오래 기도를 드렸다. 제사장이 보니 입술만 움직이고 음성은 들리지 않자 취한 줄로 알았다. 엘리 제사장은 포도주를 끊으라고 책망을 하였다. 그러나 한나는 기도를 멈추고 사정 이야기를 했다. ‘아닙니다. 저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저 불쌍한 여자로서, 제 슬픈 마음을 여호와 앞에 그대로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제가 이토록 오랫동안 기도드리게 된 것은 제 슬픔의 고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를 그토록 나쁜 여자로만 보지 말아주십시오.’ 이와 같은 간절한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하나님이 아들 사무엘을 주셨다.
한나는 서원대로 아이를 하나님 앞에 바치며, 하나님 앞에서 찬양의 기도를 올렸다.
삼상 2:1-10 / 여호와여, 주께서 제 마음을 기뻐 뛰게 하시고 주께서 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셨으며 주께서 제게 힘을 주셨습니다. 주여, 이제야말로 저도 원수들 앞에서 활짝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도와주셨으므로 이제는 제 마음도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2) 거룩하신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밖에는 어디에도 거룩하신 이가 없습니다. 약한 자를 반석처럼 보호해 주시는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3) 원수들아, 너희는 그토록 떠들며 자랑하지 말아라. 너희들 생각대로 뻐기며 건방지게 굴지 말아라. 너희가 무슨 짓을 하든지 주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주께서는 사람의 모든 행동을 달아 보고 더러운 것마다 심판하신다. 4) 강한 사람들에게서는 지닌 무기도 빼앗아 부러뜨리지만 약하고 기죽은 사람들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 5) 부자들은 밥먹기 위하여 품을 팔아야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울며 탄식하지 않아도 영영 굶주림을 잊고 잔치하게 되었다. 자식이 없던 여인은 일곱 아들을 낳지만 자식이 많던 여인은 한 자식도 남기지 못하고 신음하다가 죽는다. 6) 주께서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어 사람을 지하로 내쫓기도 하고 다시 끌어 올리기도 하신다. 7) 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고 부유하게도 하시며 사람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신다. 8) 주께서는 억울한 사람을 불쌍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도 하신다. 주께서는 천대받는 자들을 일으켜 존귀한 무리가 되게 하시고 멸시받던 자들에게 영예로운 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하신다. 온 세상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지어 흔들리지 않는 터전 위에 올려놓으신 분도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9) 주께서는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보호하고 인도해주신다. 그러나 주께 대항하는 자들은 캄캄한 인생에서 헤매다가 죽게 하신다. 자기 자신의 힘만을 의지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승리할 수 없으며 10) 여호와께 맞서는 사람은, 누구든지 깨어지고 만다. 그런 원수에게는 지극히 높으신 주께서 하늘 우레로 벼락을 치실 것이다. 주께서는 땅끝까지 심판하시고 당신의 마음에 드는 왕을 뽑아 앉혀 그에게만 큰 권세와 승리의 영광을 안겨 주신다.'
간단히 말하면 때때로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생각은 … .
다윗의 일생은 한 개인의 삶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는 좋은 표본이 된다. 그는 작은 촌 동네 베들레헴에서 8형제의 막내로 태어났다. 사무엘이 새로운 왕을 찾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형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였지만 이복동생인 막내 다윗은 양을 치고 있었다. 다윗은 집안에서마저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던 목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왕으로 기름부으셨다. 그는 불과 십 대 소년의 몸으로 민족의 대적 골리앗을 죽이는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정치 무대에 당당히 입문하였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던 그의 인생은 그를 시기한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을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면서 꼬이고 만다. 이후 30세에 왕이 될 때까지 그의 삶은 그저 도망자의 삶이었다. 곳곳에 원수들과 죽음의 그림자들이 그를 옥죄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고,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믿었다. 모든 비방과 두려움 속에서 드리는 그의 고백을 보라.
시 31:14-15 /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나의 앞날이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들과 나를 핍박하는 자들의 손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골리앗을 향해 달려갔던 그의 믿음과 승리는 다윗의 위대함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그보다 더욱 위대한 모습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는 것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우리는 다윗의 낮아지고 높아지는 모든 발자국들에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은 어두움의 터널 속에서 바로 그것을 발견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결코 교만하거나 높아져서는 안 된다. 각 개인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고 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에게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갈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다윗으로 하여금 적어도 10년이 넘는 시간을 생사를 넘나드는 위협과 비방과 치욕 속에 살게 하셨을까? 그것은 승리만 있으면 교만해지기 때문이다. 사실 다윗이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골리앗과 싸울 때도, 사울에게 쫓길 때도, 아비멜렉 왕 앞에서 미친 척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했던 때도 아닌, 왕이 되어 한가로이 궁전의 옥상에서 거닐던 때였다. 그는 왕위에 올라 평온할 때에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았고, 결국 그의 일생 전체를 뒤흔드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래서 바울은 무엇을 가졌든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가르쳤다. 그는 영적으로 교만해진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라고 경고한다(고전 4:7). 물질을 가졌건 재능을 가졌건 믿음을 가졌건 지식을 가졌건 영적 은사들을 가졌건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시오. 우리 스스로 갖게 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가질 수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존재들일 뿐이다.
5.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결정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자유로워 보이고 철저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활동들까지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는 없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굴로 도망갔다. 사울은 그 굴속에 다윗이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굴로 들어갔다. 다윗은 그곳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사울의 옷자락만 벤다. 다윗이 굴로 피한 것도 사울이 굴로 들어간 것도 모두 자유로운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자유로운 것이었을까? 사무엘상 24:10은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다윗은 사울에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의 목숨을 다윗의 손에 넘겨주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주신 결정권(자유의지)을 사울을 살리는 쪽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결국 사울은 후에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활에 맞아 중상을 입고, 이방인의 손에 죽기 싫어 자살한다. 인간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하나님의 심판은 적당한 때에 적당한 대상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지시대로 애굽 사람들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였으며, 애굽사람들은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하는대로 물질을 내어주었다.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출 12:36)하신 것으로 명시하고 있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다스리시는 장면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을 점령한 페르샤왕 고레스 칙령에 의해 돌아오는 장면에서 명백해진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페르샤 제국의 왕이었지만,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본토로 돌아가게 하는 칙령을 내린다. 심지어 예루살렘을 중건하기 위해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재건에 필요한 물질까지 주어서 돌려보낸다. 사람의 마음까지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히 서는 것이다(잠 19:21).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뜻과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우리의 뜻과 계획은 신뢰할 수가 없다. 뜻과 계획을 아예 세우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뜻도 세우고, 계획도 세우고, 마음의 소원도 두되 하나님 안에서 그것들을 세우고, 하나님 안에서 경로를 바꾸기도 하며, 하나님만을 신뢰하라는 것이다.
6. 사람들과 마귀의 악한 행위들조차도 다스리시는 하나님
다윗의 몇 안 되는 실수 중 하나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힘이심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교만하여져서 자신의 군사적 힘을 과시하고 싶었다. 결국, 다윗의 범죄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동안 창궐한 전염병으로 인해 7만 명이 죽는 참극을 맞아야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동기가 사무엘하 24:1에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시킨 것으로 나오고, 역대상 21:1에서는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킨 것으로 나온다. 도대체 다윗이 범죄하게 한 것은 하나님일까, 사탄일까? 만약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범죄하게 하고 벌을 내리신 것일까? 답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원하셨다는 것이다. 죄목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큰 범죄를 자행했고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을 심판하시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매사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다윗이 왕으로 버티고 있으니 국가적인 징계를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 한쪽에 존재하고 있는 교만의 씨앗을 격동하여 다윗이 범죄케 했던 것이다. 그때 다윗의 마음을 격동하게 사용된 자는 사탄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고자 하는 뜻을 위해 다윗의 범죄, 사탄도 모두 주장하시고 활용하신 것이다. 그를 통해 다윗의 심령에 존재하는 교만의 씨앗을 제거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진노케 한 이스라엘의 범죄도 다루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더욱 명확히 나타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인해 인류를 구원하실 뜻을 세우셨다. 이 일을 위해 수많은 악역이 등장하였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거짓말로 예수님께 죄를 뒤집어씌웠으며,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매달았다. 물론 이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다. 사탄과 악을 행하는 자들이 없었다면 십자가 대속이라는 하나님의 계획과 성경의 예언들은 성취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악인들과 사탄까지도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다.
글을 묵상하는 동안 아마도 수많은 질문이 생겼을 것이다. 악인과 사탄까지 주장하신다면 죄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아닌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있는가? 등의 의문이 일어났을 줄로 안다. 다음에 그러한 내용을 다루어 드리도록 하겠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집중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자연 만물, 코로나, 우리 주변의 환경, 우리 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심지어는 악한 영들과 천사들마저도 모두 다스리시는 분이다. 어떤 분은 좋은 교제권과 좋은 환경을 누리고 있겠지만, 또 어떤 분은 악한 사람과 악한 환경 가운데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건 오늘 소개된 다윗을 묵상해보시길 권해드린다. 모든 것이 주님의 뜻임을 믿고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께 맡기라. 그분께서 믿고 따르는 성도의 길을 인도해주실 것이며, 결국 성도를 높이실 것이다.
결론으로 다시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
‘우연히’가 아닌 ‘반드시’(에스더 2:12-23) / 세상을 살아나가는 사람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우연히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일이 이루어진다고 주장을 한다. ‘우연히’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부인하고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은 세상은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어떻게 진화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들이 꼭 하는 말은 우연히 발생해서 우연히 어떤 사건으로 말미암아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작정하신 대로 계획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셨고, 반드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예언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들을 성취해가심을 고백해야 하고 믿어야 한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의 대화에서 말 표현 가운데 ‘재수가 있다’라거나 ‘운이 있다’라는 표현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우연히 이루어진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기에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안다면 이런 말은 해서는 안 된다.
에스더서를 읽다 보면 우연히처럼 보이는 상황들이 있지만, 우연이라는 것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에스더 전체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다. 에스더가 왕후가 선택되기까지 모르드개의 말에 순종한 것,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자기 자신을 사치스럽게 인위적으로 치장하지 않은 모습이나, 모르드개가 충성되게 문지기 역할을 감당하다가 암살자들의 계획을 알고 에스더를 통해 왕에게 고한 것,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려 궁중일지에 기록된 것들이 다 우연히 일어난 일처럼 보이지만, 아하수에로 왕이 와스디 왕후를 폐하고 4년 동안 독수공방 지내다가 에스더를 왕후를 취하게 되는 일에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섭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아하수에로왕이 통치하는 그 넓은 땅, 왕국 속에서 수많은 처녀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유대 처녀인 동시에 고아인 에스더가 왕후로 선택되어 이스라엘의 대학살의 위기 앞에서 구원역사를 베푸시는 일에는 반드시 이루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수많은 메대와 바사 가운데 수많은 처녀 중에서 에스더 한 명을 왕의 아내로, 왕후로 세우시는 역사를 통해 우리는 어떤 일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각지에서 이미 어느 정도의 평가를 거쳐 선택되어 왕후로 왕에게 선택되는 자리에 나아가는 처녀들은 12개월 동안 준비해야 했다. 6개월 동안은 몰약 기름으로 몸을 담그고, 나머지 6개월 동안에는 향품과 향수 등으로 몸을 정결케 하는 절차는 왕궁 내시의 지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런 준비가 다 끝나고 선택의 날이 되어 왕 앞에 나아갈 때, 처녀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든지 갖고 나갈 수가 있었다. 그것은 조금이라도 자신을 왕 앞에서 돋보이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에스더는 왕 앞에 나아갈 때 내시 헤개가 정해준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았다. 에스더는 인위적인 꾸밈이나 장식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했을까? 그것은 에스더가 이 자리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이끌리심에 의해 온 것이지 자원해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 속에 이끌림을 받는 사람은 인위적인 꾸밈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왕후가 되기 위하여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고만 하는 어떤 영웅이나 위인의 이야기로 성경을 보면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특별히 역사서를 읽을 때 유의해야 하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위인전이나 영웅집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에 대하여 그들의 삶을 본받자고 하거나 그들의 신앙을 본받자는 결론을 내리면 안 된다. 성경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고, 주님 되심을 고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초점이 이 부분에서 혼동되면 성경을 잘못 보는 시각이 형성되어 신앙에 유익이 되지 않는다.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알게 됨으로써 모르드개가 왕에 대한 충성이 궁중 일기에 기록되어 있고, 이 기록으로 인해 모르드개를 높여주시는 그 모든 일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었다. 우리는 전체적인 그림을 못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학살에서부터 구원하시려는 섭리로서 구체적인 계획은 이미 여러 단계를 통해 진행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후에 모르드개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더 좋은 나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우연히’가 아니라 ‘반드시’ 하신 것이다. 왕을 해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미고 왕을 죽이고자 하는 반역행위를 모르드개가 눈치채고 에스더를 통해서 왕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렇게 함으로 에스더는 왕의 신임을 더욱 두텁게 받게 되었으며, 모르드개의 공로가 왕의 궁중 일지에 기록된 것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연히’와 ‘반드시’의 대한 표현의 차이는 일상생활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이냐 아니냐를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지금 주어진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도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에게 와야만 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러기에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힘쓰자.
하나님께서 우연히가 아닌 반드시 특별한 은혜를 주실 때에는 언제나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먼저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간 요셉이 바로에 의해 권력자로 세움을 받게 하신 것은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바로 그곳에서 언약의 민족으로 세우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모세가 애굽의 궁전에서 나일강에 흘러가던 가운데 건짐을 받아 공주의 아들로 자라나게 하신 것은 히브리 민족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 되게 하신 것은 예루살렘 성벽과 유다 민족의 재건에 그 목적이 있었고, 에스더가 왕후가 되도록 하신 것에는 떼죽음의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던 유다 민족을 대학살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우연히 뜻 없이 하시는 일이 하나도 없는 반드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세우고 일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환경에 대해 ‘우연히’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들도 있음을 믿고 매사에 감사하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더욱더 가까이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말씀대로 항상 선을 좇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 288장 찬송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❶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후렴 /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아멘
❷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❸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