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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신앙(로마서 2:28~29)
2024년 9월 29일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설교: 김성현 감독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로마서 2:28~29)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을 갖도록 지지해 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훌륭한 환경 속에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아’ 해봐, ‘아!’” 해서 음식을 우리 입에 떠주는 식으로, 우리는 아무 수고도 하지 않고 그저 씹기만 하는 그런 상황인데도, 우리는 이 믿음의 새 길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엄청난 영광이고 혜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역사하시는 은혜가 쏟아지는 이 시대에도 그 은혜를 거부하고 타락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나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어쨌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신앙의 기회를 저버리거나 변형시키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온전히 그를 영접하고 순종하여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또 영광을 드리는 그런 뜻에서 우리 교회 모두가 신앙생활에 성공하기 위해 힘쓸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계획하고 또 실행해 나갈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습관이 있는데, 자연적으로 놔두면 변한다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공기가 있는 곳에는 수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물질들, 먹다 남은 과일이라든지 음식은 그대로 놓으면 썩습니다. 썩으면 어떻게 됩니까? 곰팡이가 쓸고 냄새가 납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그냥 놔두었는데도 썩습니다. 공기가 있는 곳에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인간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말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 땅은 영적 전쟁 중에 있습니다. 더러운 원수들이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그들의 수가 어느 정도 될까요? 원수가 어쩌다 하나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에 보면 엄청 숫자가 많은 것으로 나옵니다. 그 수가 억단위일 같습니다. 지구 위에 있는 하늘 층을 그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구에서 우리가 사는 모든 것을 그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사람들의 삶도 다 영향을 주고, 와서 역사하고 합니다.
보통 세상에 물질들이 그냥 놔두면 썩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문제점도 썩는 것에 있습니다. 인간이 썩으면 다 잘못되고 또 그 영혼이 완전히 버려지게 됩니다. 인간이 이 땅에 왔을 때는 이 땅에 있는 몇 년의 시간, 혹은 몇 십 년의 시간 동안 완전히 자기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완전히 바꾸고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히 변화하여서 그 나라에 가야 합니다. 썩은 자를 버리고 썩지 않는 자로 영원히 덧입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그 마지막 날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받을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셔서 그들로 그 길을 밟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그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길인데,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기반으로 해서 지어진 하나님을 믿는 방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를 이 땅에 뿌려주셔서,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토대가 되어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영원한 연관이 되게 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직 모두가 연결돼 있지는 않습니다. 소수가 연결돼 있습니다. 그나마 그 소수된 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신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에서 일하고, 또 영원한 나라에 결국 가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이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을 위해 일을 많이 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지만 교회도 다니고 봉사한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마음이 없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도 신앙의 모양은 다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시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신앙은 마음의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교회의 종교적인, 의식적인 제도는 다 우리를 양육하고 보호하기 위한 목장의 울타리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문으로 통해 들어와야 합니다. 그 문에는 예수라는 문지기가 있습니다. 예수 말고 다른 것, 예수에게서 살짝 변형시킨 것 말고, 오직 예수를 통해서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문 앞에는 지키고 서 있는 자가 있습니다. 피곤한데도 양들을 지키고 관리하는 자가 있는데, 이 제도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제도는 돕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 중심은 우리를 사하시고, 우리 마음을 살리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그 마음을 만들어지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이 우리의 성질을 훈련시키시고, 우리 생각을 훈련하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작업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될 것은 마음이 깨끗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전에는 대략 10년 안쪽으로 전에는 지금보다 세 배는 컸었습니다. 교회를 중상하는 사람들의 얘기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때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 자체의 부끄러움을 드러내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은 다 못 하지만, 답답합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서 힘이 빠집니다. 나는 힘들게 달려가고 있는데 찬물을 끼얹는 그런 격인 것 같습니다. 아주 힘이 빠집니다. ‘뭘 하느냐, 왜 안 하느냐’ 하는데 힘이 빠집니다.
많은 사람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다니면, 예배 참석하면, 거기다 직분까지 맡고 있으면, 혹시 간부 같은 직분을 맡고 있으면, 하늘에 좋은 자리를 맡아 놓았다고, 구원의 가능성을 더 확실하게 했다는 식으로 해서 세상의 아이디어를 자꾸 가져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세상의 아이디어와 하늘의 아이디어가 짬뽕이 돼 있습니다. 좋은 울이 있는데 나일론을 섞어서 만든 옷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십 년 신앙생활해도 전혀 구원받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믿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정말 높은 퍼센테이지로, 95프로, 96프로가 그대로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구원하기로 작정한 그 사람들이기를. 그래서 세상의 우여곡절로 각자가 세상에서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지만, 결국 전부 구원될 자들로 가득한, 우리 가운데 95% 이상 그런 자들로 채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변화기이도 과도기이기 때문에 잘 모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신앙의 어떤 어떤 카테고리 안에 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예수 믿으면 그걸로 다 끝인데 뭐!”라고 생각했습니다. 믿으면 일단 다 끝나는 걸로 생각해서 더 이상 고민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뭔가 해결되지 않은 마음은 듭니다. ‘된 건가, 안 된 건가?’ 하는 불안정을 인식하고 느끼면서 계속 갑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서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보면 외형적인 것만 있고 마음이 너무 많이 타락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인물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다른 계층들은 말할 것도 없고, 목자들 중에서도 있었습니다. 목사라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핸드픽(handpick)한 자로 봐야 되는데, 세상말로 엄청 훈련돼서 흠이 없는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은 꼭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부탁하신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자가 되어야 하는데 마음이 타락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태 났을 때 그런 자들이 고스란히 다 드러났습니다. 교회를 상대로 사기를 쳤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우니 그런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봐왔기 때문에 그들을 일일이 다 기억합니다. 마음이 대단히 사나웠습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람과 똑같은 사람인데 종교적 형태만 입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뭐가 문제가 있는데? 교회 다니지, 헌금하지, 뭐는 안 하지…’ 하면서 자기가 신앙의 어떤 범위 안에 들어있다며 안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도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교인이라 그러고, 교인 권리가 있다고 그러고, 교회랑 싸우고 하는 이런 일들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이런 오해를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위쪽에 위치하고 있어야 되는 것이 다른 데 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뭐가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 대단히 혼란이 돼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렇게 옮겨져 있습니다. 자기들 의를 세우느라고, 그렇게 신앙에서 자기 높이는 일만 경쟁적으로 해서 진짜 하나님의 의는 다 버려버리고, 하나님 의는 다 박살을 내버립니다(롬 10).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 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던 것들의 반대입니다. “하나님, 난 죄인입니다. 하나님, 나는 부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힘으로 오늘을 살 것입니다. 힘주시면 오늘 힘내서 일어나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 하나님, 나 오늘 힘주십시오. 오늘을 하나님의 힘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그 하루를 마칠 때는 “하나님, 나 감사합니다. 오늘 나를 보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주님의 장중에 있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죄인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듯 겸손해야 합니다. ‘나같은 괴수도 그가 오늘 보호해 주셨다. 감사하다.’ 하고 나가서는 하나님께서 하셨을 일을, 했을 만한 일들을, 성도를 사랑하고 도와줍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죠. 십자가의 체험입니다. ‘난 십자가 본 사람이야. 난 십자가를 봤어요.’ 하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과거 한 동안에는 그게 아니라, 그 기준이 전부 다른 데 가 있었습니다. 악인들이 판을 치고.
가장 큰 문제는 중상하는 것, 거짓말로 남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거짓말도 여러 가지이고, 어떤 사회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들도 있는데, 그 중에 제일 나쁜 거짓말은 없는 말로 남을 사회에서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이간시키는 것입니다. 공식적으로 중상하는 것, 거짓인 줄 알면서도 하는 것, 거짓을 만들어서 하는 것.
이에 대해서는 십계명에도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행위 열 가지를 골자로 뽑아놓은 것이 십계명이거든요? 큼직하게 그 열개로 인간의 악한 행동을 다 걸러낼 수 있는데, 그 계명을 보면 ‘이거 진짜 중죄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상을 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악인이 돼 버리고, 사회관계가 끊겨집니다. 버려지고 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중상해서 사회에서 끊어버리고 죽여버리려고 했던 것과 똑같습니다. 너무 나쁘지 않습니까? 비방을 해서 강도 아닌 사람을 강도로 몰아가고, 살인자도 아닌데 살인자로 몰립니다. 그로 인해 그 사람은 행복을 다 빼앗깁니다. 사실상 사회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십계명에 살짝 관련돼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딱 그 자체입니다. 율법의 한 가운데에 딱 찍혀서 경고하고 있는 그것이 우리 교회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짓말로 중상을 합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을 보내서 “자, 보시오!” 하고 칼로 그를 찔러서 살해하는 것과 그 중죄성이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는 데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고 같이 박수치고 호응해 주는 사람들이 계속 양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타락한 것입니다.
감히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으십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 마음처럼 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보면,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했습니다[1]. 우리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쳐야 합니다. 누구의 행위가 좋고 나쁘고를 보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마귀는 계속 우리를 헷갈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원수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계속 혼란스럽게 해서 판단을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옛 것을 자꾸 찾게 하고[2]. 이걸 인간의 자연현상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성경에는 명확하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어떻게 우리를 이끌 것인지를 나와 있습니다. 우수한 자를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고, 훌륭한 자를 구원한다고 하지 않았고, 열심있는 자를 구원한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 앞에 순종하고, 겸손하게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 겸손하게 주 앞에 무릎 꿇는 자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한 의는 그리스도의 의로 채워진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훌륭하게 하는 일도 많고 세상에서 지위도 높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세상에서 지위가 없어도,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 너무 부족합니다. 제 마음과 행실에 죄가 많습니다.” 하고 아는 자가 하나님 앞에 높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숙일 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는 하나님 앞에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근본입니다! 망가진 사람입니다!” 하는 것을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쳐준 것입니다. 그나 그것이 인간의 할 수 있는 의에 가장 근접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구원의 가능성이 있게 하는 일. 그 일에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주어서 우리를 채워 주시려고 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가 되어서 한 작품인 것입니다. 한 덩어리가 된 것이죠. 하나님과 나는 한 개의 작품입니다. 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 ‘나 완전히 부질없습니다’를 내놨고, 하나님은 ‘나는 너를 살리리라!’ 해서 자신을 내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나는 합쳐서 한 작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살전 2:3~5)[3]. 이에 대해 저는 자주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다.’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아, 이런 일을 하고, 저런 일을 하고 나서 ‘하나님, 저 훌륭한 일을 했죠? 흐흐흐흐.’ 이제 상이 준비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은 감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공개되어 감시당한다면 그 사람이 훌륭하건 훌륭하지 않건 간에,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순종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그 자체로 하나님은 그를 구원하시고 천국에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디도서에 보면 나왔습니다[4]. 마음이 더러워지면, 양심이 더러워지면 신앙생활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심을 묻지 말자. 기독교회는 양심이 필요 없다.”라고 그 동안 주장해 왔는데, 이것은 심해도 너무 심한 것입니다. 양심이 더러운 것의 세 배는 더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십니다. 우리의 골수도, 생각도 마음까지도 버리지 않고 보십니다(히 4:12~13)[5]. “아, 저 성도 때문에 너무 억울하다. 이렇게 나는 성실히 하려고 그랬는데, 억울해.” 이런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아휴…교회 일이 소용없나 보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뜻도 다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셨다고 했습니다[6]. 로마서 10장에 나오는 말씀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고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종교적인 제도를 지키고 말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아, 율법 필요 없다!’ 이렇게 주장 하면서 사도 바울이 진리를 가르친 내용을 과대하게 내놓고 자기는 인간의 의를 내놓곤 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유행처럼 돼서 너도 나도 그런 모습을 배우고 있는데, 그런 거 배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부시고, 교회를 고소하고 할 수 있는 자라면, 하나님을 떠난 자입니다.
저는 그런 자들이 우리 교회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성락교회가 일어나야 합니다. 사회에서 우리 교회의 입장은 너무나 슬픕니다. 자부심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사태 때는 그야말로 바닥에서 기어가고 있는 우리를 구정물 속에 더 집어넣었습니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썩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교회 안에서 그런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고, 계속 그런 일이 되어가고, 또 어떤 자들은 그걸 연구하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라면서 방송에, 신문에, 법정에 고발합니다. 그래서 전국에 우리 교회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지난 십 몇 년간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영원하신, 딱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성령의 일치가 되어 한 분이신 그 하나님에 대한 복음의 그 중심만을 정확하게 말하고 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 교회가 낙인이 찍혀 있어서 인정을 안 해줍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철없이, 교회는 자기 교인에 의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만큼 된 것도 어쩌면 다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빴기 때문에. 물론 살짝 그런 위기 단계를 지나갔으니까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만, 저는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함께 된 형제들이여! 그러지 맙시다! 옛날 것을 본받지 마세요. 중상하는 것, 나쁜 욕을 전해서 가정을 파탄을 내놓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지금도 힘을 내고 다니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감찰하십니다. 그는 우리 마음이 회개하고, 마음이 그에게로 돌아선 것을 받으시고 기뻐하십니다. 마음이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일을 저질러 놓고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어우, 교회가 뭐 이래?” 아무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교회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합니다. 교회가 누구를 서비스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자기의 무덤입니다. 주일은 내가 교회에 깔려서, 거름이 되어서 그곳에 풀이나도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차라리 내 죽음으로 내 살이, 내 뼈가, 내 피가 거름이 돼서, 꾸적꾸적하게 썩어서 거름이 돼서 그곳에 아름다운 화목들이 잘 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강단의 말씀을 흐틀어 버립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배워야 합니다. 지금 에베소서로 설교하는 것이 힘들지만 하는 것입니다. 엄청 힘듭니다. 그래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 교회가 지금 아니면 못 한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지금부터 해서 한 20~30년 동안에 이것이 지켜져야 합니다. 그리고 한 20년 안쪽으로 우리를 세워줄 말씀을 다시 바짝 허리를 졸라매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모르면 안됩니다, 배워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지금 배워야 되는데, 관심없는 사람도 있을까 봐 겁이 납니다. 그런데 말씀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내 생명을, 내 심장을 담보로 하고 말씀 전하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걸 알았다면 그날의 설교를 한번으로 지나가지 않고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오늘을 위한 내 마지막 하나님의 음성이구나.’ 하고 공부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잘되도록 기도합시다!” 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부목사가 감독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고, 어떻게든 교회를 쑤시고, 괴롭히려고 하는데. 자기가 조금만 기분 나쁘면 그대로 나타내는데. 나쁜 사람이라도 교회는 괴롭히지 말고 차라리 놔 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을 받들고, 하나님의 몸을 섬기고, 하나님 몸을 수종 들고 있습니다! 이 몸은 생명을 가져오는! 영생을 가져오는! 용서를 가져오는! 행복을 가져오는! 회복을 가져오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오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타락해서 교회 와서 어슬렁대다가 마귀에게 유혹당하는 그 마음으로 마귀 생각을 ‘싹’ 자기 안에 담아서 ‘어느 카드 쓸까? 이 카드 쓸까, 저 카드쓸까?’ 하고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귀에게 사용되지 마시고, 성령 충만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성령충만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힘줘!’ 아닙니다, 힘을 빼야 합니다. ‘성령충만!’ 하고 힘주지 마십시오. 많은 이들의 ‘성령충만’은 마치 ‘성령아, 도와줘!’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굉장히 고약스럽습니다. 성령으로 한다면, 힘을 빼야 합니다. 성령으로 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성령으로 하자’ 하고서는 자기 고집대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합니다. ‘성령충만!’ 하면서 그 다음에는 자기가 진짜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말합니다. 성령은 우리 교회에서 “이거 성령이 하라고 그러셨는데요?” 하는 것으로 인해 얼마나 힘들셨을까 싶습니다. 성령이 ‘이 교회, 난 싫다.’라고 돌이키시지 않길 원합니다. 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영감이 없는데 “와! 와!” 소리만 지르는 것입니다.
신앙을 무슨 돈 버는 그런 기회로 삼는 자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아부하면서 자기 위치를 확보해 놓고는 그 다음 교회를 뜯어먹고 하는 이런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없을 수는 없는데, 교회가 이렇게 힘들고, 8년 동안 갈라지고, 온 세상의 욕을 먹고 있고 멸시당하고 있는데, 왜 이때 또 그렇게 교회를 어렵게 하는지.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 마음이 회개하고, 마음이 타락하지 않고, 마음의 양심을 꼭 붙들고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는 우리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여러분들의 훌륭한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하나님을 기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일이 잘 되기를 소원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충만히 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 가정 도와주세요. 우리 첫째, 직장 잘 다니게 해주세요, 결혼 잘 되게 해주세요, 병 낫게 해주세요. 우리 둘째가 학교 잘 다니게…’ 이것도 해야 되겠지만, 내 하나님을 위해서, ‘내 하나님 교회, 내 하나님 교회의 목사를, 감독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교회가 회복되게 해주세요. 교회를 회복되게 해주세요.’를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신앙에 마치 인간의 것들을 집어넣어도 되는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영생을 주셨습니다. 보증돼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도장을 찍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내 거다! 나는 너를 구하러 온다!’ 하고 주셨는데, 받았으면 이제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위해 사시는 여러분 되길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성령께 순종하고 마음이 타락하지 않는 신실한 성도 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옵소서. 신실하게 만들어 주옵소서. 내 마음을 보시는 그 너그러우신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닮아 가기 원합니다. 내 부끄러운 모습은 하나님이 아시지만, 난 순수하게, 깨끗하게 주님 앞에 나를 포기하렵니다. 하나님, 날 인도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날 역사해 주시고 날 받아주시옵소서! 여전히 나를 받아주시옵소서! 다 같이 합심하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함께 모여서 연합예배를 드리며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생명의 방법을, 생명의 그 길을 보여주시기를 간절히 원하여 함께 있습니다. 종이 선포하였건대, 하나님 앞에 마음이 타락하지 않을 것을 경고하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말씀들은 심령들 다 도와주셔서 그 심령이 내 의를 위해서 더 거룩한 의의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 입술에 있고 가까이 있는 것을 알고 마음으로 믿고 하나님을 시인하고 순종하는 겸손한 우리들 다 되게 도와주시고, 그러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도록 도와주시옵시고, 우리 교회, 성락교회 100프로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하는 회개하는 신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녹취: 성락교회 성락선교센터
[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4~16)
[2]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후 4:1~6)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살전 2:3~5)
[4]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5]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6]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 8:10)
[출처] 20240929 마음의 신앙(로마서 2:28~29) 성락교회 주일연합예배 김성현 감독|작성자 이기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