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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종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규진
고르반을 악용하지 말라(막7:8-14)-2016.5.8.(어버이주일)
요즘 TV에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광고 하나가 있습니다. 한국방송광고 진흥공사(코바코)와 중국CCTV가 합작하여 만든 광고입니다. 모델출신 연기자 이광수 씨가 등장하며 스토리가 이렇게 전개됩니다. (Na)밥 한번 사준 선배에겐, (이광수)형 고마워~ (Na)매일 밥해주신 엄마에겐, (이광수)물이나 줘~ (Na)여자친구 생일엔, (이광수)축하해~ (Na)부모님 생신엔, (이광수)엄마 생일이었어? (Na)오분 기다려준 동료에겐, (이광수)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Na)평생을 기다려준 부모에겐, (이광수)왜 나왔어? (Na)부모님께 이런 말 해본 적이 있나요? (이광수)고마워요 엄마 (Na)말 한마디가 효도입니다. 이런 광고입니다.
아마도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광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자식들이 선배에게 식사 대접을 받으면 고맙다고 인사하면서도, 몇 십년간 매일 밥상을 차려주시는 어머니에게는 ‘고맙습니다’라는 한마디가 금방 나오지 않습니다.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 생일에는 꽃이나 선물을 정성들여 준비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부모님의 생신은 자꾸 잊어버리게 됩니다. 일터나 직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미안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어떤 일이든지 묵묵히 기다려주시는 부모님께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합니다.
늘 가까이에서 누구보다 자식을 걱정하시고 위하시는 부모님께는 이런 말들이 잘 나오지 않는지 모릅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혹은 내일도 있으니까하며 미뤄오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효도는 내일이 없습니다. 지금 하지 않으면 내일은 어찌 될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지금 효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마디 말이라도 지금 표현해야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우리가 알기에 유교가 효를 강조하는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기독교보다 효를 강조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성경보다 효를 더 강조하는 경전도 없습니다. 그만큼 부모공경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 효는 믿음의 원리요 기본입니다
효의 원리는 믿음의 원리와 같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32). 다시 말해 하나님공경과 부모공경을 같은 위치에 올려놓고 있습니다. 영적 효도와 육적 효도를 같은 맥락으로 말입니다. 기독교는 그만큼 효를 강조하는 종교인 것입니다. 간혹 기독교를 오해하는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불효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것은 정말 무지한 소치입니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 합니다.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고 효도하려고 하는 것은 간사한 자기 합리화에 불과할 뿐입니다. 모두 사단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막12:27). 때문에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 효도한답시고 호들갑을 떨지 마십시오. 살아계실 때 효도하는 것이 성경의 원칙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믿음이 있다면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효를 엄격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장수와 축복의 비결이지만(출20:12),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신27:16). 또한 “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였은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9)고 말씀합니다.
심지어 잠언30장17절은 “아비를 조롱하고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합니다. 불효가 얼마나 무서운 범죄인지 아시겠지요? 그토록 무서운 형벌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명령이요, 적극적 명령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행할 의무입니다. 에베소서 6장 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공경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입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는 말은 굳이 순서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의미가 더욱 강합니다. 다시 말해 첫 계명이라는 말은 중요한 계명이라는 말과 같은 개념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축복과 저주가 뚜렷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은 무엇일까요? 축복과 저주입니다. 부모공경은 축복과 저주의 칼라가 무척 선명합니다. 한마디로 축복과 저주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부모공경하면 모든 범사가 형통하고 장수합니다.
저주에 대한 경고도 분명합니다(출20:12, 신5:16). 부모를 저주하면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경고합니다(출21:17, 레20:9). 출애굽기 21:17절은 불효에 대한 저주문과 같습니다. 본문 10절도 부모공경을 하지 않는 자를 훼방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훼방은 욕하고 저주하는 정도의 수준입니다. 말과 행동으로 부모를 모욕하고 공경치 않는 정도입니다. 그런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사실 죽음은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10절에 나타난 죽으리라는 의미는 ‘죽음이 이르게 하라’는 뜻입니다. 수명을 다하지 않고 죽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는 율법주의자들의 잘못된 율법 해석을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부모공경의 효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대가족시대에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효를 일부러 가르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조상들은 윗분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배우고 그대로 실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핵가족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효를 일부러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쳐도 못합니다. 정직하게 표현하면 안합니다. 오직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목숨을 다하면서도 부모 공경은 그냥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고 맙니다.
흔히들 우리는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을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내리사랑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부모의 자식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치사랑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대표적으로는 자식의 부모사랑입니다. 그러면 왜 내리사랑은 있으나 치사랑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모님의 사랑은 본능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이나 제한이 없습니다. 이른바 아낌없이 주는 무조건적 사랑입니다. 하지만 자식들의 부모 사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식들에게 부모를 공경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할지언정 부모에게 자식을 사랑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의 자식사랑은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식의 부모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아버지가 누더기를 걸치면 자식은 불효자가 되고, 아버지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으면 모든 자식이 효자가 된다’는 말을 하겠습니까! 요즘 현대인들은 마치 자기 자식을 떠받들어 모시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그런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습니다. 그 자식이 나중에 부모가 되면 또 다시 자기 자식에게 그렇게 대물림을 당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수상과 수하를 잘 모릅니다. 위아래가 없다는 말입니다. 효는 인간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예절입니다. 효에 예의가 있고 사랑이 있으며, 규칙이 있고 질서가 있으며, 섬김이 있고 충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예의범절이 효에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효가 무너지면 가정이 붕괴됩니다. 가정이 붕괴되면 국가가 흔들립니다. 미안하지만 효가 무너지면 교회도 위험합니다. 믿음 있는 곳에 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 효가 가장 중요하고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효는 믿음의 기본 원리입니다. 믿음의 원리와 효도의 원리가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가진 자식은 자기 부모를 공경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함은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는 이유와 목적입니다. 골로새서 3: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자의 믿음은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는 자의 믿음이 좋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주안에서 공경해야 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되 주안에서 해야 합니다(엡6:1). 주안에서 공경하라함은 부모공경을 빌미로 우리가 충분히 범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부모 공경을 빌미로 또 하나의 우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은 울타리가 없으면 방종하고 오버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각자의 마음대로 부모 공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지 아니하고 육신이 주는 마음과 생각으로 부모를 공경한다면 믿음의 모든 질서와 체계가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공경을 핑계로 부모를 우상시하여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부모공경으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쌓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제사드리던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다가 죽임 당한 사례를 기억하십니까? 순수한 목적으로 하나님의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하다가 떨어지는 법궤에 손을 대어 현장에서 즉사한 웃사를 기억하십니까? 목적은 좋으나 과정이 좋지 않아 진노를 당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부모공경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지라도 주안에서 공경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공경의 축복은 주안에서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부모공경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에도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던 믿음 좋은 자식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노아의 아들 셈과 야벳도 효심이 지극한 아들들이었습니다. 이삭도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효자였습니다. 이방 여인 룻도 효심이 극진한 며느리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효도하던 자녀들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부모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가장 효심이 극진하신 분은 당연히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최고의 효자이셨습니다. 주님은 한번도 자의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성부 하나님께 묻고 또 묻고 말씀대로 행하셨습니다(요14:31). 물론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효심이 가득한 최고의 효자이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까지 마리아를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습니다(요19:27). 한마디로 믿음의 자녀는 효도하는 자식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성경에는 불효자들도 많았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도 불효자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소돔성이 멸망당할 때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기던 롯의 사위들도 역시 불효자식들입니다. 제사장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불효막심한 자식들입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패역무도한 자식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자들은 믿음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공경의 흔적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던 불효자식들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효도하는 자식과 불효자식의 운명은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축복과 저주의 칼라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3) 고르반을 악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율법입니다. 물론 율법은 거룩하며 의롭고 선한 하나님의 법입니다(롬7:12). 그러나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인간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문제요,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면서 지킨 것처럼 착각하며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대표적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범했다고 따지듯이 논쟁을 벌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고 먹느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유치한 논쟁을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모세 오경에 기록된 율법 외에 말씀으로 전해주신 구전율법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실 때 일부는 문자로 주시고, 일부는 말로 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기록된 율법은 원리만을 가르치기 때문에 현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상세한 규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생활이후부터 랍비들이 고대의 전승 자료를 근거하여 생활규칙을 집대성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을 문서화한 것이 탈무드입니다. 그것을 보통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잘못된 믿음을 통렬히 반박하십니다. 이사야서 29장 13절을 인용하여 말입니다. 한번 같이 읽어보십시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들의 형식주의 신앙을 통렬히 반박하신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자기들의 생각으로 배우고 가르쳐서 지키려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당연히 지키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이라는 칼을 들고 그들은 뭇사람들을 판단하고 공격하며 설쳐댔던 것입니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듯이 말입니다. 때문에 장로들의 유전에 대한 순종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든 원인이 된 것입니다. 무식한 율법주의자들이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님께 나아와 한 수 가르치듯이 따지며 덤벼듭니다. 한마디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종교적인 위선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그들의 수없이 많은 율법주의의 폐단가운데 가장 먼저 제5계명인 효에 대한 말씀으로 말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아주 교묘하게 율법을 악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고르반 제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종종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기로 서약을 합니다. 이 서약을 그들은 고르반이라고 했습니다. 고르반은 ‘봉헌제물’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림을 뜻하는 단어로서 어떤 물건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그 물건의 세속화를 방지하는 의도로 만든 것입니다. 고르반을 선언하면 절대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만일 자식이 그의 부모를 봉양하는데 필요한 제물을 고르반이라고 선언하면 더 이상 부모를 돌볼 수 있는 의무로부터 면제된다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이 그렇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참으로 나쁜 악습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자기 부모를 공경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굳이 성전에 바쳐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의무를 면피하기 위한 꼼수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더욱 이들의 악한 꼼수는 고르반제도가 강제규정이 없었기 때문에 일부만 성전에 헌납하고 나머지는 자기유익을 위해 전횡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 못된 자식들이 부모공경을 피하기 위하여 고르반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가 심심찮게 많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13절에서 ‘이같은 일을 너희가 많이 행하느니라’고 말씀하심을 볼 때 악용되는 사례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관행적으로 많이 악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른바 당시 종교 지도자층에 속한 자들이 하나님 공경이 부모공경보다 앞선다는 논리로 이런 서약을 남발했던 셈이지요. 제5계명을 지키지 않기 위해 고르반 제도를 악용한 것입니다. 이른바 불효자의 꼼수를 부린 것입니다.
주님이 수없이 많은 율법적인 폐단들 가운데 가장 먼저 제5계명을 들어서 반박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부모공경이 중요했다는 증거요, 부모공경의 폐단이 심각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경고처럼 고르반을 악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판 고르반 제도를 악용하는 사례들이 충분히 많습니다. 물론 목사인 저도 목회에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고르반 제도의 악용입니다. 하다못해 헌금을 핑계로 부모님의 용돈을 드리지 않으면서 양심으로 스스로 자위를 얻는 것도 일종의 현대판 고르반 제도의 악용입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고르반이라는 제도를 부모공경을 피하는 도구로 악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공경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명령이요, 우리의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며, 축복과 저주가 분명히 약속되어 있는 엄격한 하나님의 언약임을 잊지 말고 주안에서 효도하시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